“허어…. 집합에 늦었으면 사과 정도는 하는 게 어떻소?”
“어? 딱 정각 아닌가? 미안해.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네.”
에스트는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파라곤은 뭐라고 더 떠들어대려 했지만, 프란체스카가 제지했다.
“딱 정각에 오셨으니까 지각은 아니잖아요. 파라곤 씨도 제 얼굴을 봐서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알겠소이다. 미안하오. 확실히 내가 좀 과민했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적절한 중재였다. 솔직히 저 사제가 설교하는 것을 방치했더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걸렸을지 몰랐다.
“여기서 유적까지는 대충 1시간 안팎으로 걸린다고 해요. 몬스터는 그다지 없는 곳이니까 위험하지는 않을 거에요.”
프란체스카는 지도를 꺼내 펼치면서 말했다.
“그럼 출발하죠. 제가 앞장설게요.”
그렇게 우리는 도시를 벗어나 유적으로 향했다.
한참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숲 안쪽에 있는 어느 동굴 앞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가는 길에 몬스터라고는 단 한 마리도 마주치지 않았다. 여기 경비대 일 개 잘하네. 사르가디스 치안 존나 확실하구만.
“여기에요.”
동굴은 과연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좁은 입구와 수풀로 가려져 있어서 보통은 알아차리기도 힘들었을 거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동굴로 진입했다.
천장의 종유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전에 들었던 것처럼 동굴 안은 입구에서부터 상형문자로 가득했다. 그 광증마저 느껴지는 광경에 에스트가 소름이 돋은 것처럼 팔을 비벼댔다.
“으허, 시발. 미친 놈들 아니야? 뭐 동굴 안에다가 이딴 으스스한 짓을 해 놨냐?”
“조, 좀 무섭긴 하네요. 저희 저주받지는 않겠죠?”
프란체스카는 불안한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로는 안 했지만 나도 솔직히 존나게 무서웠다. 아마 내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서울 것이다.
“씨이바아아알…….”
왜냐하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오직 나만은 저 벽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그림 같은 문자를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문자들의 뜻은 대충 이랬다.
[기록한다. 기억한다. 남긴다. 속죄한다. 기록한다. 기억한다. 남긴다. 속죄한다. 기록한다. 기억한다. 남긴다. 속죄한다. 기록한다. 기억한다. 남긴다. 속죄한다. 기록한다. 기억한다. 남긴다. 속죄한다. 기록한──]
“존나 정신 나갈 것 같애!!”
“다들 진정하시오. 사악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소이다.”
파라곤이 스태프로 바닥을 통통 치면서 말했다.
“골드 클래스 모험가 팀이 이미 탐색을 왔다 갔다지 않소. 마음을 굳게 먹고 가슴에 굳은 심지를 가지면 이까짓 문구 따윈 한낱 낙서로 보일 따름이외다.”
“댁 다리 존나 떨리고 있는데.”
“닥치시오.”
아무튼 우리는 아까까지와 비교해서 0.5배속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개쫄보 아딱이들 같으니. 고고학자인 나는 유적 탐사 경험도 있어서 슬슬 적응해 가는 중인데 말이다.
“악! 거 에스트 씨 밀지 좀 마십쇼! 당신만 무섭습니까!”
“안 밀었거든? 아니 그것보다, 이거 괜찮은 거 맞겠지?”
내 등 뒤를 굳건하게 지키면서 에스트가 물었다. 나는 동굴 안의 섬뜩한 분위기에 쫀 것도 있어서 에스트의 말에 호응을 해 줬다.
“그럴 겁니다. 동굴 안에 방치된 유적은 보통 별 거 없기 마련이거든요.”
“그래? 왜?”
내 말에 에스트는 지옥에서 동앗줄이라도 내려온 것처럼 얼굴이 밝아졌다. 다른 두 사람도 나를 쳐다봤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한테나 유적이지, 처음 그걸 세운 사람들한테는 그냥 일감 받아서 세우는 건축물입니다.”
“아, 그것도 그런가?”
“예. 2천 년 전의 사람에게 2천 년 전의 유적은 ‘앞으로 지어야 할’ 건물입니다. 뭣하러 사람들 안 오는 곳에다 건축물을 세우겠습니까? 대단한 건물이라면 도시처럼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에 만들고 자랑하겠죠.”
“유적을 숨기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 않소?”
“글쎄요? 일부러 은닉까지 할 정도의 유적이긴 할까요?”
나는 카르미네 대학에서 조사했던 사르가디스 인근 지역의 역사를 떠올렸다.
“사르가디스는 역사가 길어서 유적은 많지만, 고대문명의 옛 영토는 아닙니다. 번성한 문명은 역사에 그 기록이 남기 마련인데 사르가디스에는 알려진 기록이 전혀 없어요. 여기가 대단한 유적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또라이 흑마법사나 이교도들의 신전일 가능성은?”
“에이. 저희 선배 모험가들도 그렇고, 옆에 계신 사제님도 그렇고, 여기서 사악한 마력은 못 느끼셨는데요 뭘.”
“미안하오. 사실 나는 반쯤 허세였소.”
“그건 시발 평생 비밀로 해 주시길 바랬는데요.”
좆 같은 사제 새끼.
“오, 다행이다. 동굴 끝에서 빛이 보이잖아?”
에스트가 어느새 내 뒤로 도망와서 말했다. 빛?
‘왜 동굴 안쪽에서 빛이 나냐?’
나는 이상해 하면서도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안 가서 그 이유를 알았다. 동굴의 안쪽은 천장이 뻥 뚫려 있었다. 거기서부터 햇빛이 비춰서 내부를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아, 천장이 무너져서 유적이 발견됐나 봐요.”
프란체스카가 유적 안쪽을 가리켰다. 확실히 안쪽에 있는 유적은 전체적으로 모래투성이였다. 싱싱한 풀떼기까지 덮혀 있는 것이, 아예 위쪽이 지반이 무너져 내린 듯 했다.
“진짜야? 우리가 안에 있을 때 또 무너지면 어쩌지?”
“음… 지반 구조는 튼튼하니까 괜찮을 거에요.”
“드워프인 파티장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믿음직스럽구려.”
“헤헤. 저는 혼혈이지만요.”
나는 파티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내부를 관찰했다.
유적 안쪽의 구조는 특이했다. 가운데 커다란 석비가 몇 개 있고, 그 주변에 조잡하게 사각형 돌기둥을 세워놨다. 돌기둥은 반수 가까이 쓰러져 있다.
‘꼭 무슨 무너진 고인돌 같네.’
아니, 고인돌 말고도 어딘가에서 이거랑 비슷한 유적을 본 듯한 기억이 났다. 이세계의 외국이 아니라 내가 살던 지구에서 말이다.
“내가 돗자리 깔게. 흐흐. 차라리 저기 유적 한가운데에다가 모닥불도 피울까?”
“관두시오. 끽 하면 나중에 책임지고 물어내느라 알거지가 될 것이외다.”
“책임 이전에 함부로 훼손시키면 안 되지 않을까요….”
다른 파티원들은 대화를 나누며 유적 한구석에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이 돗자리를 까는 위치에서도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다.
“누가 동굴 안으로 들어올지도 몰라. 입구를 경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자고. 아, 하지만 천장은 떨어지면 뒤질 높이니까 무시해도 되려나?”
“좋은 의견입니다만, 정면에 앉았다가는 입구 안쪽에서 화살이라도 쏘면 누구 하나는 거기에 맞아 죽을 겁니다.”
“나는 죽기 싫소이다.”
“젠장. 셋이서 내 의견 뭉개버리기 있어?”
우리 파티는 한쪽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아예 짐을 풀어버렸다. 가방을 메고 있다고 전투력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무기만 손에서 놓지 않으면 될 것이다.
“좋아, 이제 됐다. 난 유적이나 구경하러 갈래.”
평평한 땅에 돗자리를 펼친 그녀가 바닥을 탁 치고는 유적 쪽으로 다가갔다.
고고학자인 나보다 빠르다니. 학구열이 엄청난 사람이다. 대학원생 하지 않을래? 하고 권해보고 싶어졌다.
“저도 구경 갔다 올 건데, 두 분은 어쩌실래요?”
“사양하겠소. 나이가 나이라 그런지 걷느라 피곤하군.”
“저는 모닥불을 피울 준비만 해 놓을게요. 땔감은 있다가 같이 구하러 가 주실래요?”
“그러죠 뭐. 다녀올게요.”
줄줄이 차인 나는 에스트를 따라서 유적을 구경하러 갔다.
에스트는 진지한 눈으로 유적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열심히여서 좀 놀랐다.
“역사에 관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어? 그럴 리가 없잖아. 돈 될 게 있는지 찾아보는 거야.”
“과연.”
모험가들이 그럼 그렇지. 나도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서 이해가 갔다. 난 필요해서 고고학 석사위를 딴 거지, 이세계의 역사에는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스윽.
나는 존나게 커다란 석비를 올려다봤다. 석비에는 3개의 문자가 그려져 있었다.
뜻은 각각 사람. 짐승. 변화.
‘…사람이 짐승으로 변한다? 뭐 그런 뜻인가?’
여기가 사르가디스가 아니라 야남이었나. 무슨 뜻으로 적은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애초에 왜 상형문자인지도 모르겠고.’
이곳 브리타니아는 예로부터 이세계 버전 알파벳을 쓰는 국가다. 이 주변 국가 중에서 상형문자를 쓰는 나라라고는 나르메르-나일이 전부다.
상형문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글자다.
사용하는 국가도 자연히 역사가 깊은 국가가 된다. 지구를 예로 들면 대표적으로는 중국이나 이집트가 그렇다. 하지만 브리타니아에 그 정도 역사는 없다.
역시 여기는 엄청 오래된 원시부족의 유적 같았다.
인류가 우가우가 거리던 시절의 유적. 이세계 원시인들이 역사의 기록에 남지 않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사용한, 그들만의 독자적인 언어일 것이다.
나는 혀를 찼다. 이 정도로 옛날 문명의 유적은 논문거리로 별로 좋지 않았다.
지구와는 달리 이쪽 고고학의 중점은 한때 번성했던 몇몇 고대문명에 치우쳐져 있었다.
이 유적이 정말 원시인의 흔적이어도 학계에서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지구에서였으면 ‘우리 나라에서 뗀석기 문명의 흔적이 나오다니!’ 하고 나름 화제였겠지만, 여기서는 돈이 안 되는 유물은 그다지 취급해주지 않았다.
‘분석하려 해도 장비도 없고… 문자만 기록해 갈까.’
석비는 여러 개가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모험가 길드에 걸려 있던 문자열의 석비를 찾아내 노트에 베껴적었다. 나중에 도서관이나 대학에서 조사해 보자.
‘새, 먹이, 의식을 벌이다, 즐겁다, 겨울, 사냥….’
느낌 상 이건 별로 쓸모없는 기록 같았다. 이 문자를 쓴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해 둔 것만 같은 느낌이다. 피라미드를 짓던 시절 찾아낸 기록이 사실은 ‘작업부가 출근을 펑크낸 사유서’였던 것처럼.
“뭐야. 그건 왜 베껴 써?”
별 소득을 얻지 못했는지 에스트가 내쪽으로 와서 물었다.
“그냥 적어두는 겁니다. 나중에 모험가 일 하다가 이거랑 비슷한 글자를 보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이 노트를 보고 대조해 보게요.”
“오, 똑똑한데? 나도 적어 갈까.”
“노트는 있으십니까?”
“한 장만 주라.”
“감사합니다 손님. 10장에 1쿠퍼입니다.”
“1쿠퍼?! 순 사기꾼이네! 됐어. 안 할련다.”
에스트가 빼액대길래 나는 킥킥 웃었다.
“농담이었습니다. 펜도 빌려드릴까요?”
“됐다니까. 나도 농담이었어. 나는 글씨도 쓸 줄 몰라.”
에스트는 머리 뒤에서 깍지를 끼고 자리로 돌아갔다. 빨리 달아오르는 만큼이나 빨리 식는 성격이었다.
─사각사각.
나는 혼자 돌무더기 사이에 남아서 중앙의 석비까지 전부 베껴 썼다. 그림 형태다 보니까 베끼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모든 석비의 내용을 전부 복붙한 뒤에야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돌아가려 했다.
─반짝!
“…뭐지?”
중앙의 석비 아래에서 뭔가가 빛났다. 모래에 파묻힌 뿌리 부분이었다.
‘…파 볼까?’
─힐끔.
나는 석비 쪽을 올려다봤다. 깔리면 뒤지게 생긴 석비는 뒤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내가 밑동을 좀 판다고 내쪽으로 넘어져서 나를 노랭이 돈까스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걸 확인한 뒤에 석비 앞에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았다.
사악─ 사악─.
석비 아래의 모래 부분을 파냈다. 뭔가 돈 될 거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밑동에 있던 것은 놀랍게도 문자열이었다.
[에린의 계보를 잇는 후예에게 이 글을 남긴다.]
“…시발?”
눈에 익은 문자였다.
오감 문자(Ogham script).
작금의 시대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얼스터의 문자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석비에 새겨놓은 글은 마치 평범한 칼자국으로도 보이는 지극히 원시적인 문자였다.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 날짜를 세기 위해 나무에 긋는 칼집이라고 하면 상상하기 쉬울까.
어째서 이 문자를 골드 클래스 모험가 팀이 방치했는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특이한 상형문자가 새겨진 바위 아래에 이런 칼자국이 나 있는 거다. 그것도 세월로 흐릿해진데다 반쯤 파묻힌 상태로.
아마 그들은 이걸 발견했더라도 대충 흠집인 줄 알고 넘어갔겠지. 나도 오감 문자를 몰랐다면 이게 문자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위쪽에 적힌 상형문자랑은 생긴 게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이거… 월척 아닌가?’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얼스터의 옛 문명 ‘에린’은 돈 안 되는 고대문명의 대표 사례지만, 그래도 석사 정도의 논문으로 쓰기에는 과분한 소재였다.
브리타니아의 옛 유적에 에린의 문자가 남아 있다니!
‘시발 3편짜리 뿌슝빠슝 논문 씹가능!’
21세기 식 유튜브 전개법을 차용한다면 이 소재로 장편 대하소설도 쓸 수 있다!
논문거리 넌 내 꺼야! 환희에 찬 내가 땅 파고 노는 개처럼 석비의 밑동을 파헤치려 했을 때였다.
“뭐하세요?”
“으악 깜짝아!!!!!”
“꺄악?!”
뒤에서 기척도 없이 다가온 목소리에 나는 죽도록 놀랐다. 내 옆에 있던 것은 프란체스카였다. 내가 땅굴 파는 개새끼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이 동한 그녀가 석비 근처로 온 것이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말 걸어서 놀라셨죠?”
후드가 벗겨진 프란체스카가 내게 사과를 했다. 프란체스카의 머리카락은 내게도 익숙한 검은 머리였지만, 파란 눈 때문에 신비로운 인상이었다.
나는 가슴을 추스르며 머리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잠깐 놀랐을 뿐입니다. 여기 석비 아래에 이상한 흠집이 있어서 한 번 파보던 차였거든요.”
“이상한 흠집이요…? 어? 신기하게 생긴 자국이네요?”
일부나마 문자열의 형태를 드러냈더니 프란체스카도 이것이 평범한 흠집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 했다. 나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눈에 띄길래 그냥 관심이 좀 가서요. 신기하기도 하고.”
“후후. 그렇네요. 저도 이런 옛날 이야기는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