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009)

그녀가 내 옆으로 와서 쪼그려 앉았다. 키가 작아서 그러고 있으니 더 쬐끄매 보였다.

“파는 거 도와드릴게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나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도 혼자 흙 파고 노는 것보다는 여자애랑 노는 편이 더 인생의 승리자 같은 법이었다.

그때는 여자애랑 놀면 질투하는 애들이 얼레리 꼴레리 하고는 했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도 딱히 없으니까.

─파삭파삭.

우리는 둘이서 힘을 합쳐 모래를 한참 파헤쳤다. 그로써 석비의 문자열이 전부 드러났다.

“앗, 이걸로 끝인가 봐요.”

“네. 그런가 보군요.”

나는 다 파헤친 문자열을 눈으로 해독했다. 그런 나를 프란체스카가 신기해 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쪽 문자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못했다. 얼스터의 옛 말로 적힌 글귀는 그만큼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짧은 문자열은 그런 글귀로 시작되었다.

[나의 이름은 브란웬 베르흐 리르.

에린의 사람에게 흐른 비술, ‘야수회귀’의 기원을 찾아 길을 떠난 나는 이곳에 도달했다.

오랜 여행, 오랜 고됨 끝에 나는 갈구하던 답을 얻었다. 의문은 해소되었고 슬픔만이 남았다. 고대의 주술, 원시의 신비, 인간에게 짐승의 힘을 부여하는 드루이드의 비의는 결단코 저주 따위가 아니었다.

우리는 오랜 벗을 의심하여 배신했으나 우리의 벗은 그리 하지 아니하였다.

리르의 피가 흐르는 자는 이를 원죄로서 기억하라. 과오를 속죄할 의무를 황혼의 초원에 맹세하라.

잊혀진 ■■■■의 비술을 이곳에 기록한다.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ēus).]

그걸로 끝이었다. 옛날 사람이 쓴 글답게 상당히 단락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중간의 일부 글자는 훼손되어서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행의 글자만이 기이하게 생긴 쐐기문자였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얼스터의 오감문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 글을 브리타니아어로 해석하며 무심코 발음했다.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ēus)》?”

그 순간이었다.

─쿠화아아악!!!!!

나는 내 몸속에서 무언가가 굉장한 속도로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른손으로 이어지는 심장의 혈관이 평소의 5배로 부풀어오른 듯 한 감각! 책에서 글로만 읽은 ‘마나를 다루는 감각’과 몹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몬가… 몬가 일어나고 있음!”

“노, 노르드 씨?”

프란체스카가 당황한 것처럼 내 어깨를 가리켰다. 그녀가 알 정도였으니 당연히 나도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깨달았다.

슈왁─ 슈왁─ 슈왁─.

내 오른손이 형광물감 같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점성을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생긴 마나가 내 팔을 감쌌던 것이었다. 나는 이게 대체 뭐지 하는 심정으로 팔 위를 덮은 녹색 마나를 주물러봤다.

─말랑말랑.

내 팔을 뒤덮은 풀잎색의 마나는 만질 수도 있었다.

존나 동물 가죽을 만지는 거랑 비슷한 말랑말랑함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황홀한 그 감촉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내 팔이 고양이 육구로 포장돼 버렸어!!”

“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나와 프란체스카는 벌떡 일어나서 난리를 피웠다!

“주문을 외웠더니 제 오른팔이 육구가 됐어요! 노르드는 이제 트윙클 동물 인간이에요!”

“마, 마법이에요?! 노르드 씨 마법사셨어요?!”

“몰라요! 나는 마법사였나요? 상상도 못 했네요!”

이게 뭐지?

아니, 진짜 농담 빼고 무슨 일이지? 나는 의문을 풀지 못하고 참피색이 되어버린 팔을 붕붕 휘저었다. 시발 이거 뭔데 팔에 감각이 그대로 있냐!

그렇게 내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정신이 나갔을 때였다.

─누군가가 말했다. 불행이란 곂쳐서 오는 법이라고.

“어어억!! 시발! 고블린이오!”

내가 혼란스러워 하던 말던, 사태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 자리에서 프란체스카 다음으로 욕을 안 하고 살 듯 했던 파라곤이 육두문자를 발사했다.

그것도 존나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돗자리를 펼치고 딴짓을 하던 파라곤과 에스트 옆에 느닷없이 녹색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캬악!! (먹이!!)”

“캬슥!! (둥지!!)”

내 귀로 해석이 가능한 언어였다. 언어를 다룰 지능과 그것을 통해 의사소통을 해 온 생물이라는 뜻이었다.

동굴 안에 나타난 것은 고블린들이었다!

“야! 파티장이랑 외국인!!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도와!!”

에스트가 조급하게 외쳤다. 나타난 고블린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고블린은 그다지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덩치도 작아서 약한 몬스터에 속한다.

하지만 그 놈들은 말을 다룰 줄 아는 지능을 풀로 활용해서 각자 손에 간석기 하나씩은 들고 다녔다. 기본 신체능력도 어드밴스드 쥐새끼인 코볼트보다는 뛰어났다.

거의 초등학생 수준의 신체능력!

그건 결코 얕볼 수 없는 파워였다. 명절 때 조카들을 상대로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어린애의 파워를 깔볼 수 없을 것이었다.

고블린은 그만한 파워에 더불어 무기까지 장비한 놈들이다. 지들이 약한 걸 아니까 여럿이서 뭉쳐 다니기까지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숫자에서 밀렸다. 이건 존나게 위험하다!

“식칼로 무장한 20마리의 잼민이!”

그게 얼마나 두려울지 상상이 가는가?

잼민이는 진실로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생물이었다. 이세계 그린 잼민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고작 두 사람이서는 순식간에 씹창이 나서 죽어버릴 것이다!

그것을 아는 에스트와 파라곤은 돗자리와 짐도 버리고 무기만 챙겨서 뒤로 후퇴했다!

“물러서지 말고 입구에서 버텨요!”

“말이 쉽지!! 숫자 차이가 몇인데!!”

그렇다고 넓은 데로 튀면 포위당해서 뒤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더러 식칼에 찔려 뒤질 때까지 입구에서 버티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고블린들은 떼창을 하며 이리로 몰려왔다. 나와 프란체스카는 급하게 파티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프란체스카도 무기를 들었고 나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시발! 오른손 느낌이 이상해!”

검을 뽑은 팔이 하필 오른손이었다. 형광 마나로 감싸여진 팔을 보고 에스트가 기함을 했다.

“네 팔은 또 왜 그래! 너도 고블린이야?!”

“끔찍한 소리 마십시다! 저주는 아니라고 했다고요!”

비석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린 몽키 노르드라니 너무 끔찍했다.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서 진형을 갖추었다.

“이,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기다란 한손망치를 든 프란체스카가 떨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긴장하면서 그녀를 따라 암송했다.

“전능하신 아카라트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전능하신 아카라트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전능하신 아카라트여 영원한 빛으로 날”

“캬르캬악!! (포기해라!!)”

“씨발!! 나는 왜 의뢰를 받을 때마다 이 지랄이냐고!!”

흥분한 그린 잼민이들이 달려들었다!!

진형이고 뭐고 없는 개막장 질주 서스펜스! 나는 그 지릴멸렬함으로부터 승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너그들보다 여치벌레 쪽이 더 무서워 새끼들아!!”

오른손의 상태를 알지 못해서 왼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부웅!!

브람마톤 교수님의 PT로 단련된 완력은 이세계 그린 잼민이를 죽이기에 충분한 위력의 참격을 뿜어냈다.

그러나 잼민이는 영악한 지혜를 뽐내며 내 검을 피했다. 무려 나려타곤의 초식을 펼치며 바닥을 굴러 내 공격 궤도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아니 뭔 씹?!”

“캬칵!! (쥬긴다!!)”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공격! 내 발을 노리고 간석기 도끼가 날아들었다! 저것에 당하면 기동력이 격감한다!

“조, 조용히 하세요!!”

당황한 나는 검을 회수하지도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은 자세 탓에 허리의 힘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팔 힘만으로 갈긴 꿀밤이었다. 도저히 살상력이나 저지력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단 하나, ‘오른팔’로 날렸다는 변수를 제외하면.

투쾅!!!

─그것은 엄청난 타격감과 파열음이었다.

“갹.”

풀썩.

내 오른팔에 얻어맞은 고블린은 비명다운 비명도 흘리지 못하고 절명했다.

대갈통은 개박살이 났으며 엄청난 파괴력에 의해 멜론처럼 머리의 내용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철퍽.

주르륵….

주변이 조용해졌다. 달려들던 고블린들은 소울 프렌드가 멜론 과즙이 되는 것을 보고 경악했고, 내 파티원들도 그랬다. 시발 나도 그랬고 말이다.

“아니 이게 뭔…?”

나는 화들짝 놀라서 녹색으로 빛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실로 놀랍기 짝이 없는 힘이었다. 마구 휘두른 병신 같은 펀치 한 방에 흥분한 잼민이가 영원한 꿀잠에 빠져 버리다니! 거의 무슨 곰에 가까운 힘이었다.

“…곰?”

콰광!!

그 한 글자의 단어를 읊조렸을 때, 내 머리 안을 커다란 전류가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분명 ‘진리의 발견’이나 ‘유레카’라 불려야 할 종류의 제 6감이었다.

심장에서부터 퍼지는 거대한 마나의 혈관이 나의 전신을 타통하는 듯한 감각!

나는 전율과 함께 이 힘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아, 그런가. 나는──”

사람된 몸으로써 곰의 힘을 휘두르는 전사.

그런 전사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벡터맨 베어였던 것인가.”

지구용사 벡터맨.

나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행성 가이아에 선택받은 전사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나처럼 이기적이고 못난 녀석이 그 영웅의 진정한 후예일 수는 없다. 내가 벡터맨을 자칭하는 것은 위대한 영웅들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마법만은.

이 주술만은 그 위대한 용사들과 궤를 같이하는 힘이리라.

이제 나는 벽화에 그려져 있던 문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 짐승. 변화. 세 가지의 뜻을 담은 커다란 상형문자는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는 텍스트였다.

──짐승의 힘을 몸에 내린 인간.

석비에 기록된 글귀는 바로 이 힘을 기리는 문구였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뿐.”

내가 스스로의 참된 힘을 각성했어도 나와 동료들은 아직 위험에 처해 있었다.

비록 그들은 지구의 인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싸우고, 평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눈을 부릅뜨고 팔다리를 비틀며 외쳤다.

“──변신.”

내가 웅혼(熊渾)한 각오를 품고 속삭이자.

내 전신은 녹색의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무렵,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히어로는 벡터맨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것이 재방송이었는지, 혹은 2기였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내 어린 시절을 장식한 꿈 속의 히어로는 분명 그 3사람의 지구용사들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유치원생들이 다 그렇듯이 TV 속 영웅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우리들이 그들의 흉내를 내는 역할극에 빠져버린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진리는 잔혹했다.

어린아이들은 누구나가 벡터맨 타이거가 되고 싶어했으나 타이거의 자리는 단 하나 뿐이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벡터맨 이글이어야 했으며, 또한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벡터맨 베어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벡터맨 타이거가 되기 위해, 변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부터 주먹다짐을 하고는 했다.

─얘들아. 싸우지 말고 가위바위보로 하렴.

그리고, 어릴 적 순수한 아이들의 분쟁에 답을 내려준 것은 유치원 보육교사 누나였다.

그녀는 작은 주먹으로 서로에게 원기옥을 날려대며 내가 먼저 날렸다며 투닥거리던 아이들을 부드럽게 중재해 주었고, 우리는 머지 않아 서로의 피를 흘리지 않는 결투의 방식을 몸에 익혔다.

─가위 바위 보!

그리하여 늘 가위바위보를 나와 나의 라이벌은 서부극의 카우보이들이 결투를 하듯이 늘 호랑이의 권좌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겨루었다.

─으아앙! 또 졌어!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했던 어느 친구는 차선책으로 늘 평타는 치는 이글을 골랐지만, 나는 언제나 타이거였던 라이벌에게 이기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마 늘 첫빠따로 가위만 냈던 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어렴풋한 짐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당시 4살이었던 나는 언제나 벡터맨 베어였다.

나는 자신이 그 까맣고 무섭게 생긴 벡터맨이라는 사실을 슬프게 느꼈다. 어릴 적의 원론적인 색분법에 있어 블랙이란 악당의 컬러였으니까.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 나는 알았다.

어릴 적 악당 같았던 소드마스터 고길동이 어른이 된 후로는 참된 호걸로 보이는 것처럼, 나는 그 당시 벡터맨 베어가 어떤 마음으로 싸워왔는가를 알 수 있었다.

베어는 분명 자신이 아이들에게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불평하거나 슬퍼하는 일 없이 아이들의 미소를 위해 싸웠다.

─진정한 용사는 벡터맨 베어였다.

타이거가 리더 역할을 하며 아이들의 사람을 독차지하고, 이글은 독수리 간지로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하는데도.

베어는 아무런 보답조차 받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용사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을 용사라고 부르겠는가.

또 무엇보다도─ 우리는 모두가 웅녀의 후손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