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009)

나는 주먹을 털며 동료들에게로 걸어갔다. 마나로 된 가죽 위로 고블린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덕분에 쉽게 이겼소. 힘이 장사셨군.”

“햐, 그러게나. 노르드 당신 무지막지하게 쎄더라? 내가 몰라봤어.”

에스트가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말하는 짬짬이 쓰러진 고블린들 목에 단창을 꽂아댄다. 철저한 확인사살이었다.

“제가 쎄다기보다는 이 마법 덕분이 큽니다.”

원래였으면 칼전을 시도하는 모친리스(母親less) 잼민이 20마리를 상대로 이렇게 쉽게 이기지는 못 했을 것이었다. 아까 전에도 방심하느라 한 놈한테 도끼질을 당했었으니까.

“그런 거요? 그 마법은 대체 무엇이오? 아니, 마법이 맞기는 하오?”

파라곤이 석장을 닦으면서 감탄을 했다.

아아─ 모르는건가. 이곳저곳 전부 되다만 인간들 뿐이다.

“한때… 저주로 불렸던 주술입니다.”

“저주요? 위험한 건 아니죠? 저희 때문에 무리해서 힘을 쓰셨다거나….”

프란체스카가 내 마나 코팅을 쓰다듬으며 걱정을 했다. 마나 위로 만져지는데도 실제로 피부에 맞닿은 것만 같은 감촉이 있어서 좀 놀라웠다.

“아마 문제 없을 걸요? 그보다 이거 프란체스카 씨랑 같이 파헤친 석비에서 발견한 마법인데요.”

“네?”

“석비? 여기 유적에서 얻은 거라고?! 어디?! 어디어디?!”

확인사살을 끝낸 에스트가 내 말에 다급하게 달려왔다.

열렬한 반응에 출처를 숨길 걸 그랬나 고민하기도 했는데,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얼마 안 가서 고고학계에서 사람이 조사하러 올 유적이다.

이게 나 밖에 모르는 마법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미 마법사 길드에서는 파악이 끝난 마법일 가능성도 있었다. 얼스터의 주술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냥 말해버렸다.

“이쪽입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아니 근데 이 마법 어떻게 푸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것도 마법의 일종 아니오? 마법에 공급하는 마나를 차단하면 풀릴 것이오.”

“어케 하는지 몰라요.”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데 마법은 어떻게 쓴 거요?”

“글자를 읽으니까 막 지가 알아서 휘릭휘릭 거리던데요.”

그 뭐시냐, 천공신께 어쩌구 하는 문구가 이번 변신의 원인이었다. 문구를 읽은 순간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더니 지구용사의 힘이 내 몸에 깃들었다.

“아, 혹시 저기 적힌 글이 마법의 주문이었나?”

“간략한 주문만으로 발동하는 것은 저위의 마법이오. 단문으로 발동하는 마법이 그런 엄청난 효과를 낼 순 없소.”

술법을 다루는 사제답게 파라곤은 단언을 했다. 아니 근데 지금은 마법의 출처보다 어떻게 이걸 푸는지가 중요한데.

“마나를 차단한다… 차단한다….”

나는 중얼거리면서 마나의 감지에 집중했다. 사이비 버전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氣)를 느껴보도록 하자.

눈을 감자 바로 뭔가가 느껴졌다. 아니, 느껴진다 어쩐다 하기도 뭣할 정도로 확연한 기세였다. 나는 내 몸속에 피와는 다른 뭔가가 흐르는 것을 간단하게 알았다.

아니 그냥 눈을 떠도 대놓고 느껴졌다. 외과수술에 쓰는 얇은 카테터(catheter)를 몸 속에 둘둘 둘러놓고 거기서부터 영양제를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발! 기분이 이상해!”

비명을 지르면서 전신을 도는 카테터가 멈추도록 외쳤다.

“꺼져라, 웅녀의 망령!!!”

슈우우우욱─.

치이익. 착!

나의 일갈에 몸 속에서 카테터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한 발 뺀 쥬지처럼 크기만 쪼그라든 것이다. 온 몸의 신경계가 어디 있는지 하나하나 느껴지는 듯한, 매우 이상한 감각이었다.

호달달달!

그것만이 아니라 다리도 떨렸다. 하체를 조진 날의 근육통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시발 내 다리에서 근육이 휘발되서 휘발발발 하고 날아간 것만 같다. 나의 단련된 말벅지로부터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르드! 당신, 다리가 마구 떨리고 있어!”

“그렇습니까? 중계실황 감사합니다. 제 몸인데 아무렴 제가 모를까요.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께꼬닥.”

“노르드 씨!”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나를 프란체스카가 부축했다. 그런 나를 파라곤이 쯧쯧 소리를 내며 쳐다봤다.

“뭘 그리 과민반응을 하시오? 그건 그냥 마나 탈진이오.”

“마나 탈진요?”

이게 MP가 오링나서 이러는 거라고? 내가 존나 고중량 스쿼트를 조질 때도 잘 따라와주던 다리 근육이 에베벱 니 엄마 거리고 있는데?

“내가 보건대, 당신은 마법사가 아닌 듯 하오만?”

“당연히 아니죠. 갑옷도 입었고 무기는 검을 쓰는걸요.”

“그렇겠지. 마법사도 아니고 평소에 마나를 다루지도 못했을 테니 마나의 총량이 적었을 것이오. 그래서 과도한 마법의 사용에 마나가 바닥난 것이지.”

파라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이런 꼴이 된 건 마나가 쬐끔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뜻이었다.

내가 마나 조루라니! 존나 슬퍼서 눈물이 다 나온다.

“마나가 바닥나면 보통 이렇습니까?”

“나도 경험해 봐서 안다오. 의식은 멀쩡하고 말도 잘 나오는데 몸에 기운이 없지 않소? 매우 일반적인 증상이외다.”

“아… 마법이 부작용이 좀 있군요.”

“부작용? 고작 마나 탈진이?”

내가 심란해하자 파라곤은 오히려 터무니 없다는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반대요, 반대. 당신이 원래 얼만큼 강했는지는 모르지만, 생전 마법도 안 써 본 사람이 장시간 사용하고도 고작 마나가 좀 모자란 것이 전부 아니오? 오히려 굉장한 마법이지.”

그는 석장을 쥔 손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 마법의 정체가 굉장히 궁금하군. 어서 가 보지.”

나는 그야말로 바람 빠진 호객 풍선처럼 돼 버렸다. 격렬한 댄스 끝에 죽어버린 비닐인형처럼 말이다.

“앗! 그럼 제가 들어드릴게요!”

옆에서 부축해주던 프란체스카가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휙 안아들었다. 나보다 20cm 넘게 작은 사람한테 들리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프란체스카 씨도 위치를 아시니까 그냥 갔다 오셔도 되지 않습니까?”

“저는 석비에 적힌 글자를 모르는걸요?”

“아 젠장, 그랬죠.”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얌전히 안겨 있을 각오를 했다.

절대로 팔에 닿는 거유에 혹한 것이 아니다. 가죽갑옷이 두꺼웠기 때문에 별로 감촉도 안 났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란체스카에게 업혀서 석비 앞으로 갔다. 파헤쳐진 석비의 밑둥에는 아까와 똑같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엥? 이게 문자라고? 아, 이거 말하는 거야?”

에스트가 손가락으로 쐐기문자로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나는 문자 취급도 못 받는 오감문자에게 조의를 표했다.

“예. 그건 옛날 고대문명의 글자입니다.”

“황금시대의 문자열이로군. 우리 교회의 성유물 중에도 저런 글자가 적힌 물건이 있었소.”

“성유물에요? 정말요?”

프란체스카가 기대감에 가득 차서는 나를 바닥에 내려줬다. 그녀는 내 옆얼굴을 훔쳐보며 눈을 반짝였다.

“노르드 씨, 노르드 씨. 이건 어떻게 읽는 거에요?”

“《yáǵeswō deiwōm dyeus》입니다. 천공신께 기도하라는 뜻이죠.”

“야, 야우게스… 뭐, 뭐?”

에스트가 발음을 어려워 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다시 읽어주었다.

“《천공신께(deiwōm dyeus), 기도하라(yáǵeswō)》”

“《초, 촌븅신께 귀두 하나!》”

미스터 촌븅신. 저쪽 레이디가 보내주신 귀두입니다.

못 들은 걸로 하고 싶다.

“프란체스카 씨? 조만간 에스트 씨한테 천벌이 내릴 것 같으니까 저 분이랑은 조금 떨어져 있읍시다.”

“내, 내가 뭘 어쨌는데?! 맞잖아! 발음!”

“그런 걸로 합시다. 아, 제 옆에 오지는 마시고요.”

─엉금엉금.

나는 바닥을 기어서 에스트와 거리를 두었다. 천공신이란 놈이 뭐하는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뚫린 천장으로부터 번개 정도는 쏴 제낄지도 몰랐다.

“야우. 야으게스. 야게? 데? 데이옴? 웜? 아긋!”

프란체스카는 내 발음을 흉내내다가 혀를 깨물었다. 드워프 도적이지만 혓바닥은 DEX에 의존하지 않나 보다.

“아퍄아아…. 져는 뱌름 모태요…. 너므 어려어여….”

“그렇게 어렵습니까?”

뭐, 언어 간의 발음 차이는 원래 극복하기 어렵다. 나도 지구에 있을 무렵에는 영어 발음에 고생 깨나 했었으니까.

휘이익─!

그때 한참 입안에서 웅얼거리던 파라곤이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eus)》.”

꽤 정확한 발음이었다. 역시 사제. 같은 아딱이여도 글 좀 읽어본 짬이 여기서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그가 발음을 성공하자 우리는 결과물을 기다렸다. 존나 내 벡터맨 동료가 이렇게 한 명 더 생기는 것인가?

….

“………아무 일도 없소만?”

존나 이게 먼일이지? 나는 아무런 변화도 발생하지 않는 파라곤의 모습에 머리를 갸우뚱했다.

“파라곤 씨, 뭔가 반응은 없습니까? 잘 익힌 파스타 면이 전신에 퍼져서 거기서부터 시금치 소스가 콸콸 뿜어져나오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요.”

“아주 인상적인 비유였소. 내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면 더 기뻤겠군.”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나는 내가 사기꾼 구라쟁이 양치기 석사로 여겨질 거라는 공포에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효과가 있었는데요.”

“음…. 무슨 이유인지는 짐작이 간다오. 이건 분명 단순한 주문이 아니오. 오히려 우리들 사제들이 외우는 축성기도문(Prayer of Consecration)에 가깝소이다.”

“축… 뭐시기? 젠장.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네.”

조용하던 에스트가 고블린의 피를 털어내며 투덜댔다. 석비의 문구를 발음하는 것은 포기한 걸로 보였다.

“축성기도문이오. 축복을 내리는 기도문이라는 뜻이지.”

“이게 신성마법이라는 뜻이십니까?”

사제가 신의 힘을 빌려 일으키는 기적이 ‘마법(魔法)’으로 불리우는 것은 썩 우스운 일이었으나, 번역이 거기에 가깝운 탓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자권에서 ‘주술’이나 ‘마법’이 가지는 불길한 이미지는 이쪽 이세계의 신비한 힘에는 적용되지 않으니까.

“아니, 일반적인 신성마법과는 다른 듯 하오.”

파라곤은 석장을 바닥에 찍으며 말했다.

“이게 신성마법이라면 내가 가진 풍요의 마나가 반응해야 마땅하오. 신성력을 사용하는 마법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반응은 전혀 없었소.”

“그럼 대체 뭡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만?”

아니 씹 땡중 새끼야 좀. 존나 폼 잡아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고.

“내가 뭐 마법사는 아니잖소? 제대로 알고 싶으면 학식 있는 마법사를 찾아 보시오. 정 뭣하면 마법사 길드에 의뢰를 넣어도 좋고.”

“젠장, 원리고 뭐고 나는 발음이나 제대로 해 보고 싶네.”

에스트는 벌러덩 드러누워버렸고 프란체스카는 턱을 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려 팔꿈치를 가슴으로 받치고 거기 위에다가 턱을 괴고 있다. 개쩐다. 저게 어케 가능하지?

“으음─ 이 석비에 특별한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문구를 처음 읽는 사람한테만 아까 그 마법을 내려준다거나?”

“그런 원리는 아닐 듯 하오. 만일 그랬다면 골드 클래스 모험가들이 짐작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소이다. 우리보다 더 마나를 느끼는 감각이 예민할 것이니.”

나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석비의 문구를 읊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촉은 나 자신의 몸 속에서부터 마나가 끓어오르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축성기도문이 어쩌고 하셨던 이유는 뭡니까?”

“주문 때문이오. 이 석비의 문구는 신께 기도드리는 뜻이라고 하지 않았소?”

“천공신께 기도하라.”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고대문자의 발음은 아니었다.

“그렇소이다. 노르드 씨의 그 해석이 정확하다면, 신을 경배함으로써 힘을 얻는 마법은 원시적인 축성기도문이오.”

“원시적인…?”

나는 석비 밑둥에 적힌 글을 다시 읽었다.

[─고대의 주술, 원시의 신비, 인간에게 짐승의 힘을 부여하는 드루이드의 비의는─]

원시(元始)의 신비(神秘).

석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 글을 적은 사람은 아마 고대문명의 에린인(人)이다. 즉, ‘야수회귀’라는 마법은 그─혹은 그녀─조차도 ‘원시의 신비’라고 표현할 정도로 역사가 깊은 주술이라는 소리다.

시발 당연히 존나게 오래 됐겠지. 어쩌면 수천 년 이상 된 마법일 수도 있겠다.

“인류에게 신앙이 정착되기 전. 황금시대의 고대문명보다 더욱 과거에는 마도(magika)와 신앙(faith)의 구분이 없었다고 하오이다.”

파라곤이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원시시대란 이세계인들이 호모 이세계투스이던 시절 얘기였다.

“원시시대의 신앙이면…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이군요?”

“그게 뭐요?”

“당신 내가 몸만 움직였어도 턱주가리 갈겼어.”

시발 대화가 이어지질 않잖아. 랠리가 안 되고 서로 스매시만 때려박는 대화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 새끼 이거 말하는 꼬라지가 이세계인 종특이었다.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자기 지식 자랑을 하는 것 말이다.

여기서 한층 더 심화된 씹새끼들은 도움 되는 지식은 돈 받고 바가지 씌워서 파는 지경까지 간다.

“그러니까! 인간이 신들만이 아니라 몬스터나 그 외의 강력한 존재들을 닥치는대로 신봉했던 거요!”

“아, 그걸 얘기하는 게 맞소.”

애1미. 의학 토론을 전문용어 안 쓰고 하는 기분이다. 왜 용어를 일일히 설명해 가면서 말을 해야 하는데.

“이 마법은 그때의 흔적으로 보이는군. 그때의 그릇된 신앙 중 일부는 지금의 악신숭배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말이오.”

“아니 씹, 예?! 이게 악신숭배의 주술이라고요?!”

“히익! 노르드 씨, 이단심판관한테 끌려가는 거에요?!”

나는 충격적인 진실에 까무라치도록 놀랐다.

시발, 좆 됐다! 이교도들의 주술이라니! 미개한 이세계에서 한층 더 미개한 로마니아 꼴통 종교쟁이 새끼들이 날 죽이러 온다는 소리였다!

“노, 노르드 씨?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에라도 혀를 깨물고 돌아가시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그럴까요? 역시 고문보다는 자살이 덜 아프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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