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는 착한 마음씨로 내 걱정을 해 주었다. 그 미친 또라이 새끼들의 고문실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여기서 자살하는 편 나을 것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아, 오해 마시오. 말했잖소? 이건 신께 기도하여 힘을 내려받는 것이 아니라오. 신을 흉내내어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주술이니만큼,마법이나 매한가지요.”
“…그 말씀인즉?”
“이교도의 악신숭배 마법은 아니외다.”
“야 이 시발 놈아!! 그럼 이교도 얘기는 왜 꺼냈냐고!! 너 그냥 니가 아는 거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지!!”
“지, 진정하세요! 노르드 씨! 진정하세요!”
나는 빡쳐서 마나 탈진도 잊어버리고 일어나 날뛰었다.
이 염병할 땡중 새끼가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이젠 시발 뭔 미녀도 아니고 사내 새끼 때문에 심장이 멎을 뻔 하는 거냐. 개빡친다.
“쯧쯧. 아무튼 간에 참으로 불경한 일이지.”
“뭐가요 시발. 니가 하는 짓이?”
“그거 말고. 신을 흉내내려 한 원시인들 말이오.”
파라곤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혀를 찼다.
“무지몽매한 원시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숭배하는 생물의 힘을 가지고 싶어 했다오. 그러한 취지로 만들어진 주술들 중에서도 이 주술은, 우연찮게 진짜 신이신 천공신 우라누스 님께 경배 드리는 주술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소이다.”
“처, 천공신이면 오딘 님 아니에요?”
“우라누스님이오.”
“오….”
“우라누스님.”
“히잉….”
나는 이세계인들의 논쟁─한쪽의 일반적으로 공세지만─을 주댕이를 닥치고 지켜보았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참견했다가는 욕만 얻어먹기 좋은 신념 문제니까 말이다.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 이세계에서, 신이란 독재적이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왕이나 정치인 같은 인상을 줬다.
요컨대 이세계 푸틴이자 판타스틱 마오쩌둥이다.
같은 선상에서 드워프와 풍요신 사제의 말싸움은 마오쩌둥 VS 푸틴 같은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뭐야. 지루한 얘기들은 이제 다 끝났어?”
중간부터 유적 석비에 기대고 누웠던 에스트가 말했다. 그녀는 일어나면서 바닥을 퍽퍽 차댔다.
“자, 그러면 일들 하자고. 저것들 치워야지.”
‘저것’이란 고블린들의 시체를 말하는 지시대명사였다. 아 망할. 딴 짓을 하느라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돈 되는 부위는 갈무리하고 시체는 바깥에 버리자고. 동굴 안에 시체를 냅둘 생각은 아니지? 썩는 냄새도 풀풀 나고 벌레랑 몬스터도 꼬일 걸?”
“히이이이익…. 냄새… 하수도… 벌레… 싫어어어어….”
비위생적인 키워드에 프란체스카가 PTSD ON 해 버렸다. 나도 트라우마 스위치가 딸칵 했다.
아아! 온다! 그들이 온다! 떼를 지어서! 벽을 기면서 온다!
그 파사삭 거리는 소리! 부취 가득한 하수도! 모독적인 겹눈과 병적인 다리를 반짝이는 외골격! 히이이익!! 전능하신 아카라트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아,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저 오빠는 쉬게 놔두자고.”
에스트가 내면에서 발광하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솔직히 저 오빠가 없었으면 우리 모두 몸 성하게는 못 넘어갔을 거 아냐. 싸울 때는 반쯤 얹혀간 몸이니까 뒷처리 정도는 우리끼리 해야지.”
“그건 매우 바람직한 마음가짐이네요!”
상상도 못 한 제안에 나는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다!
아주 멋진 의견이었다. 정작 나 스스로는 하드캐리를 했으니까 쉬자는 발상은 하지도 못 했지만. 시발 이게 다 노예 근성이 몸에 배어 가지고 그렇다.
“손이 줄어버려 애석하오만, 어쩔 수 없군.”
“쉬, 쉬고 계세요… 저희끼리 치울게요오….”
PTSD에 시달리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에서는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지체 않고 돗자리에 곱게 누웠다. 꿀은 빨아둘 수 있을 때 빨아두는 것이 삶의 비결이니까.
하지만 이 망할 이세계는 역시나 나라는 이물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툭. 투둑.
내가 돗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내 얼굴 위로 물방울이 몇 방울 떨어졌던 것은 말이다.
투두둑. 후두두둑!
쏴아아아아아─!
뻥 뚫린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방울! 어떻게 할 시간도 안 주고 퍼붓는 물줄기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와 씨, 조졌는데?”
지구에서고 이세계에서고 한결 같이 역겨운 망할 물줄기.
소나기였다.
내가 이세계에 와서 체험한 일들 중에 가장 놀랐던 것은, 자연이 시발 존나게 위험한 장소라는 것이었다.
자연의 정기 운운하는 말은 죄다 염병 맞을 개소리다.
밤과 낮의 일교차는 사람 하나 죽이기 딱 좋다. 비 오는 날에 파전에 막걸리 한 잔 생각나는 것이 얼마나 배 부른 소리였는지!
맨몸으로 비를 맞아도 추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가 문명을 구축하고 나서야 생긴 사치였다.
쏴아아아아아─.
“내리네요. 비.”
프란체스카가 무릎을 끌어안고 말했다. 에스트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노려봤다.
“살다살다 내가 이제는 동굴 안에서 비를 다 맞아본다. 이럴 때마다 모험가 때려치고 싶다니까.”
“야영이 아닌 게 어딥니까. 빗물도 일로 흐르지는 않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내가 말했다. 천장에서 내리는 비는 동굴 입구를 통해 빠져나갔다. 높낮이 차이 덕분이었다. 파라곤이 우리 눈치를 보면서 헛기침을 했다.
“비를 그리 싫어하지는 마시길 바라오. 예로부터 비는 하늘의 은총이라고 하였소이다. 십몇 년 전에는 가뭄이 들어 말라죽는 시절도 있었소. 이것도 다 경험이지.”
“댁이 자는 사이에 저 은총 가득한 구멍 아래에다가 갖다 놓을 테니까 그렇게 아쇼.”
“때로는 과도한 은총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소이다.”
비는 우리가 시체를 치우는 동안 갑자기 쏟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안 치웠지만, 그대로 뜬금포 소나기에 간접적 피해를 입었다.
“장작… 안 마르겠죠?”
푹 젖은 장작을 보며 프란체스카가 울상을 지었다. 급하게 팀을 나눠서─나도 일어나서 도왔다─ 장작을 구해왔지만 빗물에 꼴아버린 장작은 전혀 불 붙을 기미가 없었다.
“랜턴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 바보들은 안 가져 왔지만.”
“미안하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우리는 에스트와 프란체스카의 랜턴을 2인 일조로 붙잡고 몸을 녹였다. 얇게 핀 가죽으로 된 통 안에 촛불을 넣은 싸구려 랜턴이다. 화재 위험도 오지게 높고 불빛도 약하다.
“랜턴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네요.”
“랜턴으로 목숨값은 조금 갚았네요.”
프란체스카가 약간 기뻐하면서 말했다. 나도 큭큭 웃었다.
“이거 고블린한테 감사해야겠군요.”
이거랑 모포라도 있으니 얼어 뒤지지 않고 배겼다. 온도는 핫팩만도 못하지만 손바닥을 갖다대니까 꽤 뜨끈뜨끈 했다.
단점은 파라곤도 반대편에서 그러고 있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사내 새끼랑 붙어 있기 싫은데.
“파라곤 씨. <화염구(fire ball)> 못 씁니까?”
“그렇소만.”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못 할 거 알았으면 왜 물어보는 거요?”
추워서요 시발아.
아직 가을인데도 순식간에 체감 온도는 바닥을 쳤다. 유적에 쏟아지는 빗방울에는 일체 관심이 가지 않았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체력이 쭉 빠졌다.
그때 나처럼 모포를 덮은 에스트가 묘안을 떠올린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저기 있지, 우리 서로 끌어안고 있지 않을래? 마침 딱 남자 둘 여자 둘이네! 남남 녀녀로 같은 성별끼리 붙어 있으면 되잖아!”
“남자 둘 여자 둘이라는 곳까지는 꽤 희망적으로 들렸소.”
“개소리나 읊는 땡중이랑 붙어 있을 마음은 안 드네요. 아, 두 분께서는 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할래요.”
에스트는 프란체스카에게 물었다. 후드를 덮어 최소한의 온기 유출조차 경계하던 프란체스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좋았쓰. 그럼 잠깐 몸만 뎁히고 올게.”
단창을 들고 일어난 에스트는 빗물이 튀지 않는 곳으로 가서 창을 휘둘러댔다. 몸을 움직여서 체온을 높일 속셈이다.
“흠. 저거라면 따라해도 되겠군.”
입김을 불어대던 파라곤도 석장을 들고 일어섰다.
“당신도 같이 안 하시겠소? 내가 풍요신의 사제로서 짐작하기로는 이 비는 당분간 계속 내릴 거요.”
“그걸 비가 내리기 전에 말해줬으면 했어요.”
“미안하외다. 나는 치료마법 밖에 쓸 줄 모르오. 그것 말고도 다른 능력이 있었더라면 모험가는 안 했겠지.”
“비극적이네요.”
치료마법은 풍요신의 사제들의 특기다. 하지만 다른 신의 사제라고 못 쓰는 건 아니었다.
사제에게 치료마법이란 영어 스펙 같은 거였다. 수준 높은 공부를 하려면 필수로 할 줄 알아야 하는 스킬 말이다.
치료마법만 쓸 줄 알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 근데 정작 그게 스펙의 전부면 본격적으로 뭘 해보기에는 좀 애매했다. 보통 사제들은 다 치료마법을 쓸 줄 아니까.
아마 그런 사제들 중에서 생활이 궁핍하거나 한 사제들은 모험가로 빠지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 교회에 허락은 받고 나온 거겠지?’
부디 교회에서 배급받는 식량에 불만을 품고 자유경제시장으로 탈영한 반공(反共) 사이비 사제는 아니기를.
“아무튼 노르드 씨, 당신은 앉아만 있을 거요? 이 추위에 가만히만 있었다가는 진짜로 얼어죽소. 뚜거운 짐승 모피라도 뒤집어 쓴다면 모를까.”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eus)》.”
“어 시발.”
베리머치 땡큐합니다. 깜빡하고 있었네.
나는 파라곤의 조언을 살려 ‘야수회귀’를 발동했다. 짐승의 힘을 사람의 몸에 내리는 원시의 주술은 효과 직빵이었다. 녹색 마나가 몸을 감싸자 추위가 거의 차단됐다.
“이거 존나 만능이군요. 원시인들도 꽤 유능했나 봅니다.”
“몹시 빡이 치는군. 교회로 돌아가면 반드시 <보온(keeping warm)>을 배워오겠소.”
“와 너무 부럽다.”
“젠장.”
고시랑거리면서 파라곤은 몸을 뎁히러 갔다.
나는 되도록 마나가 닳지 않게 신경을 썼다. 몸에 퍼진 마나 카데터의 굵기를 조절하려고 시도해 봤다. 혈관이 쪼그라드는 느낌으로다가 간단히 성공했다.
“크, 한 방에 성공. 역시 나는 천재야.”
흐뭇하게 중얼거리고서 에스트의 운동을 구경한다. 그녀는 창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창술을 펼치는 중이었다.
“고블린하고 싸우실 때랑은 움직임이 다르시네요?”
“어? 당연하지. 방패가 있는데 뭐하러 창만 써. 내 무기는 단창이라서 방패가 없으면 칼만도 못하다고.”
단창이랑 방패는 두 개가 한 세트인 장비인가? 나는 하수도에서 멋진 활약을 뽐낸 겐트릭 할배를 떠올렸다.
“단창과 방패는 좋은 조합입니까? 제가 저번에 본 모험가 분도 단창이랑 방패를 쓰시던데요.”
마침 에스트도 운동을 끝내고 돌아왔길래 질문해 봤다. 땀을 닦은 에스트는 피식 웃었다.
“좋은 조합이라기엔 거창하고, 실력에 자신이 없는 모험가 전사가 쓰기 좋은 무기야. 단창이랑 나무 방패는 다루기 쉽고 가격도 싸거든.”
“나무로 된 방패인데 쉽게 부숴지지는 않습니까?”
“이거 생각보다 튼튼해. 막 실버 클래스 위의 몬스터 쯤 되는 괴물이 아니면 쉽게는 못 부술 걸. 아, 프란체스카. 이제 냄새 안 나지?”
“네. 별로 신경 안 쓰셔도 됐는데.”
에스트는 땀을 다 닦고 프란체스카를 끌어안았다. 키 차이 탓에 인형을 끌어안은 것만 같았다.
“나무 방패는 보통 무기가 박혀도 괜찮도록 설계해요. 잘 빠지지 않아서 허우적대는 틈을 타서 공격할 수 있도록요.”
에스트의 품 안에 쏙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오. 그럼 나무 방패는 사실 뚫려도 괜찮은 거네요?”
“뭐래, 괜찮은 건 아니지. 수리비가 왕창 나간다고. 박살이 나면 새로 사야된다니까? 이거 분명 상술이야.”
돈 걱정이 많은 아딱이 모험가인 터라 에스트는 불만스레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한 단창은 꽤 쓰기 편한 무기였다.
원래 현실에서 창이라는 무기는 만병지왕(萬兵之王)이다. 그런데도 모험가들한테는 별로 선호받지 못한다. 좁은 곳에서 휘두르기 어려운 것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당장 여기 같은 동굴부터가 그랬다.
유적이 있는 안쪽은 넓지만 입구로 이어지는 통로는 매우 좁다. 저렇게 좁으면 창을 휘두를 공간이 안 나온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서 창술을 펼쳐봤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느라 사물패 노름으로 전락할 것이다.
“단창은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야. 휘두르지 않을 거면 굳이 길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잖아? 오히려 실력이 모자라는 놈은 적에게 창대를 잡혀서 큰일만 나.”
“백 번 맞는 말씀이십니다.”
창의 주 위력은 휘두르기에서 나온다. 괜히 관우의 종결템이 블루 드래곤 글레이브(靑龍偃月刀)인 것이 아니다. 언월도와 방천화극은 창의 궁극체 진화니까.
그런 의미에서 단창이란 창에서 딜량을 깎은 대신 공속을 높히고 장비제한을 낮춘 무기라고 보면 될까.
“방패로 막고, 단창으로 찌른다. 참 쉽지 않아? 나 같은 깡촌구석 상인의 셋째 딸이 모험가 일을 해 먹을 수 있는 것도 전부 이 단창이랑 방패 덕분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써도 된다니 부럽군요. 전투 중에 머리 굴리려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던데.”
검술은 공격반경도 면밀하게 재야 하고, 발놀림도 신경써야 된다. 반격과 방어도 중요하다.
그래서 나 같은 발컨 뉴비는 전투 중에 대가리를 굴리느라 시야가 좁아져서 통수 당해 뒤지고 그러는 법이었다.
‘이번에도 검이 고블린 몸에 박혀서 한 대 맞았으니까.’
이건 딱히 투구 같은 걸 쓴다고 나아지는 문제도 아니다. 이쪽 세상에는 투구를 부수는 놈들도 많고, 싸우다 자빠져서 무기를 놓치면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어도 뒤진다.
시야가 좁은 게 문제인데 오히려 더 시야를 좁히는 짓은 본말전도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단창과 방패는 개쩌는 장비였다.
마치 TCG 게임의 씹덱 같다. 상대 필드가 뭐든 간에 자기 패랑 오른손만 보고 플레이해도 이길 수 있는 개초딩 씹덱. 시발 너무 멋있다!
“저도 요즘에는 무기를 바꿀까 고민 중입니다. 검을 쥔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에스트가 재밌다는 듯 큭큭거렸다.
“나도 단창을 쓰는 몸이지만 별로 권하고 싶진 않네. 요령이 필요 없는 무기는 실력이 늘기가 어렵다더라.”
“그렇습니까? 저한테는 안전이 제일 중요한데요.”
“안전제일도 방식 나름이지. 나처럼 오늘 하루만 근근히 먹고 살려는 년도 아니고, 너는 힘도 무지 쎄더만. 평생 아이언 클래스로 살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