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가 나랑 같이 나무 뒤에 숨어서 작게 말했다. 나도 최대한 볼륨을 줄여서 대답했다.
“갈 때까지 기다립시다. 차라리 동굴 안에 경보기 역할을 할 덫을 설치하고 후번초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의견을 타진하던 내 말은 중간에 뚝 끊겼다. 고블린들이 있는 장소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사락.
빗물로 젖은 바닥에 샌들이 착지했다. 진창을 돌아다니는 고블린들의 요란스러운 발소리와는 완전히 상반된 사뿐한 발놀림이었다.
웬 여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났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은 내 시야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섰단 부분에 있었다. 그녀는 주변의 나무 위에서 내려서면서도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은 것이었다.
“…적어.”
하늘색 곱슬머리의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짧은 머리카락을 좌우로 마구 털었다. 빗물이 이리저리 튀고 머리카락의 일부가 입가에 붙었다.
고인물 특징) 커마 빡세게 함에 따라 복장은 옆가슴을 훤히 드러냈고, 비에 젖어서 속옷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나르메르-나일 식의 민소매 원피스였다. 꼭 무희들이 입는 옷 같다.
‘나르메르 인?’
나는 누군지 모를 여자의 등장에 빡긴장을 했다.
저 여자로부터는 존나 개씹쌉 고수인 썩은물 모험가 삘이 물씬 났다. 이쪽 세상에서 복장의 간소함은 맨몸 방어력의 높음을 시사했다.
저 얇고 하늘하늘한 옷차림은 좆밥들의 공격은 맞으나 마나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표정도 밋밋해서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서는 일퀘를 깨러 나온 고인물의 지루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린 잼민이들에게 고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을 리도 만무. 놈들은 지들은 떨어지면 뒤질 높이에서 무음으로 내려온 고인물녀에게 간석기를 들고 개겼다.
결과는 시발 말할 것도 없었다.
─촤악!
짜아아아악!!!!
여자의 무기는 채찍이었다. 승마용 채찍처럼 짧은 길이의 무기는 그녀가 한 번 휘두르니까 여의봉처럼 쭉쭉 늘어나서는 일대를 휩쓸어버렸다. 존나 캐시템인가 보다.
거기까지면 현질충이라고 정신승리해도 됐을 텐데, 저 미친 채찍의 위력은 파괴 에1미친 영역에 있었다.
투콰콰콰쾅!!
저게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였다.
채찍의 끄트머리는 피크에 도달하면 음속을 넘는다는데, 이건 시발 음속이고 염병이고 그냥 제트기였다. 조종수가 메이데이 때리고 탈출한 초음속 제트기가 내 머리 맡에 꼴박한 줄로만 알았다.
“…!!”
프란체스카가 입가를 붙들고 떨었다. 나도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호랑이랑 마주치면 오금이 저린다는데 우리가 존나 딱 그 짝이었다.
후두두둑.
오체분시 능지처참을 속성체험한 고블린들이 육회가 되어 하늘에서 쏟아졌다. 팔과 머리만 남은 그린 잼민이가 나무에 걸려서 흔들거렸다. 꼭 내게 너도 꼭 뒤져서 이쪽으로 오렴 하고 말을 거는 듯 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
고인물 여자가 내가 있는쪽을 정확하게 쳐다봤다.
수풀 뒤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도 수풀 사이로 약간 난 틈새에서 시선이 딱 맞았다. 나는 누가 레이저 포인트로 나를 겨누고 비비탄을 쏴도 저렇게 정확한 위치를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 시발, 존나 무서워!!’
도망은 포기했다. 내가 여기서 튄다? 저 4차 전직 스킬 같은 게 내 등을 노리고 날아들 판이었다.
스윽─.
억지로라도 일어나서 투항하려고 했을 때였다. 프란체스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헤실.
나랑 떨어져 있었는데도 눈이 마주치자 억지로 웃었다.
프란체스카는 나를 대신해서 앞으로 나가 볼 생각인 것이었다. 저 여자가 뉴비를 죽이는데 희열을 느끼는 싸이코패스였다간 쩨트 채찍에 맞아 폭발사산 할 텐데도!
텁.
내가 프란체스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보다 먼저 일어섰다. 프란체스카의 눈이 찢어지게 커졌다.
“죄송합니다. 훔쳐 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벅저벅.
말이 없는 여자의 앞에 나와서 걸었다.
내가 뭐 성인군자라서 프란체스카 대신 희생하려 든 것은 아니었다. 저 여자는 존나 쎈 고인물이지만 위험인물이라는 증거는 아직 어디에도 없었다.
튀든지 숨어 있든지 저 여자가 기분이 꼬우면 노/르/드가 될 판이니 남의 등에 숨어봤자 좆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주둥이를 터는 실력은 내가 프란체스카보다 나았다.
“아우둠라 길드의 노르드라고 합니다. 어제부터 이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을 경비하는 의뢰 중이었고, 지금은 동료랑 같이 땔깜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나와 봤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고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에서 보니아까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 보였다.
하늘색 머리 여자는 두 귀에 귀걸이를 했다. 왼쪽은 평범한 귀걸이었지만 반대쪽 귀걸이는 은색의 플레이트였다.
실버 클래스가 아니다. 시발 저런 스펙으로 실버 클래스일 리가. 실버가 저 지랄이면 골드인 브람마톤 교수님은 뭐 승룡권으로 성층권에 구멍이라도 뚫게?
저 플레이트는 보통 은과는 달랐다.
저것은 마나가 깃든 특수한 금속.
‘미스릴’이라는 이름의 신은(神銀)이었다.
“네페르티티.”
하늘색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세크메트 길드의 네페르티티.”
그 여자는 이름을 밝히고서 허리춤에 채찍을 맸다. 내가 대화를 시도하자 무기를 회수한 것이었다. 나를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여서 안심이 됐다.
근데 시발 일 다 보셨으면 갈 길 가시지, 왜 저를 조용히 쳐다 보시는 걸까요.
“저,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아, 예. 그러시군요. 뭐든지 물어보십쇼.”
나는 째트 채찍의 흔적을 눈에 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네페르티티는 흰 피부에 흐르는 물을 닦지도 않고서 물었다.
“유적. 뭐 있었어?”
“원시시대의 문자가 적힌 석비가 있었습니다.”
예상출제범위 안의 질문이었다. 미스릴 클래스 씩이나 되시는 분이 아딱이 노르드를 붙잡아놓고 물어볼 것이라고는 저것 밖에는 없었으니까.
물론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한 소릴 했다가 보러 오겠다는 소리라도 하면 안 된다. 그랬다간 내 동료들에게 투스타를 생활관에 데려오는 새끼로 여겨질 것이었다.
침묵은 금이고 달변은 은이라고 한다. 미스릴을 상대로 비벼볼 거면 은보다는 더 값어치가 나가는 금을 내세우는 편이 이치에 맞았다.
“어느 문명?”
“거기까지는 잘….”
그건 진짜로 몰랐다. 석비나 동굴 벽면에 적힌 것은 원시적인 상형문자였다. 그 유래까지는 알지 못했다.
보다 뛰어난 고고학 연구자라면 알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공부한 범위에는 없었다.
“그래.”
이번에도 네페르티티는 단답형으로 말했다. 채팅을 치는 것도 귀찮아 하는 고인물 같았다. 현타가 왔지만 게임을 접기는 아까운 아재들은 종종 저런 말투를 하곤 했다.
고인물은 사냥보다 채팅이 더 즐겁기 마련이라던데, 네페르티티는 안 그런 모양이었다.
“…응. 알겠어.”
네페르티티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가 뜬금포로 말했다. 목소리 톤에 변화가 없어서 이제부터 뉴비는 죽어라! 하고 채찍을 휘둘러도 놀랍지 않을 목소리였다.
“그럼 안녕.”
휙!
다행히 그녀가 사정청취를 끝낸 아딱이를 갈아버리는 일은 없었다. 고인물 여자는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무음보법으로 점프를 해가며 그대로 내 앞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네페르티티가 떠난 후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찌르르르─.
주변이 조용해지자 어디선가 벌레들이 다시 울어댔다.
나는 뒤늦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무릎을 짚었다.
“시이발… 죽는 줄 알았네….”
존나 무서웠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개씹 무서웠다.
외모 원툴로도 먹고 살 얼굴을 한 사람이었고, 겨드랑이와 이어진 옆가슴도 개쩔었는데 채찍에만 눈길이 갔다. 뿔에다가 골드바를 꽂은 코뿔소랑 1대1로 대치한 기분이었다.
프란체스카가 울면서 뛰쳐나왔다. 세상에는 울어도 추하지 않은 미인이 있는데, 프란체스카는 우는 얼굴이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빛나는 타입이었다.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없으세요?!”
호다다닥!
늘씬한데 길이는 짧다는, 어떤 의미로는 기적적인 다리를 마구 움직이며 프란체스카가 달려왔다.
하지만 남들보다 짧은 다리는 그 주체 못 할 속도를 버티지 못했다. 프란체스카는 바닥에 박힌 돌뿌리에 걸려서 흙밭을 굴렀다.
“끄아아앙!”
데굴데굴─.
“아이고. 프란체스카 씨야말로 괜찮아요?”
나는 자빠진 프란체스카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판초에 젖은 낙엽에 붙어 있길래 그것도 떼 줬다. 프란체스카는 코를 훌쩍이면서 눈물을 닦았다.
“왜 그러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파티장이니까 앞에 나가서 설명하는 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아니 뭐, 잘 풀렸으니 됐지 않습니까. 첫인상은 무서워도 꽤 말이 통하는 분이셨어요.”
말 할 때마다 사족에 사족을 붙여서 바질리스크를 만드는 이세계인 치고는 매우 간략한 대화였다. 파라곤 그 땡중 새끼랑 대화하고 난 직후여서 더 인상 깊었다.
그런데 프란체스카가 지적하는 내용은 그쪽이 아니었다.
“아까 그 사람, 세크메트 길드라구요!”
혹시라도 네페르티티가 숨어서 듣고 있을까 무서운 건지, 프란체스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길드 가입비도 없고, 받는 의뢰는 몬스터 퇴치랑 현상금 수배 투성이에, 추종하는 신은 학살의 여신인 사람들이에요! 나르메르-나일의 세크메트 교단에서 전세계에 신도를 퍼트리려고 만든 길드라는 소문까지 있다구요!”
뭔가 이세계 프리메이슨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나도 사르가디스에 오기 전에 세크메트 길드에 대한 정보는 모았었다.
세크메트 길드. 추종하는 신은 길드의 이름처럼 나르메르-나일의 여신인 세크메트이며, 전세계를 배경으로 몬스터 헌터 업종에 종사하는 길드다.
하지만 프란체스카의 얘기로는 거의 뭐, 몬스터와 범죄자를 대상으로 삼은 암살 길드였다.
그것도 정치적 종교집단인 세크메트 교단과 커넥션까지 있다니. 이거 완전 사이비 종교가 구린 일을 벌일 때 굴리는 조폭 집단 아니냐?
─섬칫.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뒷덜미가 섬뜩했다. 알바하면서 쫓아냈던 취객이 형기를 채우고 나온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듯 한 소름끼침이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나는 뒷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단 유적으로 돌아가죠. 저 사람 덕분에 한참을 덜덜 떨었더니 고블린이고 뭐고 모닥불이 쬐고 싶어졌어요.”
“크흥. 네엣….”
콧물을 훌쩍인 프란체스카가 대답했다. 모닥불을 피우자는 말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고블린? 오게 두어라. 그깟 고블린들 백 마리가 몰려와도 네페르티티와 대치했을 때에 비하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네페르티티는 왜 고블린을 잡으러 다닌 거지?’
그 점은 좀 이상했다. 네페르티티는 처음부터 몸이 흠뻑 젖었었다. 비가 그치기 전부터 고블린을 찾아다니면서 사냥했다는 뜻이다.
고블린 소굴을 제대로 처리 못 한 것이 세크메트 길드의 모험가고, 네페르티티는 그 뒷처리를 하는 중인 건가?
나는 사건의 전말을 추리해 봤지만 이것은 부질 없는 짓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잔혹한 범죄자라면 우리들과는 사고방식부터가 다를 테니 말이다.
악인을 이해하려는 것만큼 시간 낭비인 짓도 없다.
사람은 좋은 것만 생각하고 살기에도 바쁜 법이니까.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모닥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장작을 갈무리용 나이프로 벗기고 안에 있는 마른 목재만 남겨서 불을 붙인다. 그리고 그 불이 커지기 시작하면 불을 꺼트리지 않게 조심하며 젖은 장작도 넣어 보는 식이다.
─화르륵!
“시발! 모닥불 붙었다!”
그렇게 몇 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나는 모닥불을 피워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후번초도 왔어.”
“애1미.”
불을 피워서 물을 끓이려는 차에 후번초가 도착했다.
오늘부터 교대 시간이 조금 당겨졌다는 모양이다. 고고학자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서 조정한 것이겠지.
아무튼 개지랄 끝에 만든 모닥불을 그대로 후번초한테 노룩 토스 당하고 말았다. 인생 시1발아.
“유적 경비 의뢰 후번초를 맡은 후레데릭이오.”
존나 닉값하는 드워프가 나타나 임무 교대를 알렸다. 나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쬐면서 엉엉 울었고, 그 드워프는 개 씹창이 나 버린 고인돌 유적의 꼬라지에 식겁했다.
“아니, 유적 꼴이 왜 이렇소? 이거 괜찮은 것 맞소이까?”
“괜찮소. 여기 유적은 원래 이랬소.”
“허? 그게 무슨 농담이시오. 밤새 비가 와서 이렇게 된 것 아니오?”
“오해시오. 우리 잘못은 없소이다.”
아 이 씨발 하오충 새끼들. 둘이서 쌍으로 하오하오 띵하오 거리고 있으니까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다.
“걱정하지 마십쇼. 어차피 비바람에 유적이 훼손되는 일은 흔히 있는 법입니다.”
나는 개소리를 했다. 고고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그냥 해버렸다.
안 그래도 기껏 피운 모닥불이랑 사귄지 하루만에 헤어져야 해서 빡치는데 이 새끼들 띵호와오 거리는 거 보고 있다가는 조커 되게 생겼다.
“씁. 그럼 그냥 내버려 두겠소.”
“예. 저것도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존나 개소리였지만 원래 모험가들은 유적 탐사 때마다 일처리를 이따구로 한다. 이 새끼들은 존나 유적 탐사를 보내 놔도 가라가 기본 패시브니까.
커다란 석비를 옮기기 힘들다면서 박살내고 가져오질 않나, 존나 귀찮기만 하고 돈 안 돼 보이는 유물은 박살내서 어디 묻어버리는 것도 예삿일이다.
씹창난 유물을 복원하고 연구하는 일은 우리 연구원생 노예들에게 짬처리 당하기 십상이어서, 씨발 노예(대학원생) 시절에는 모험가 새끼들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근데 난 이제 그딴 거 안 하잖아?
그러니까 나도 편하게 살련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뭐 인수인계 할 건 없소?”
“아, 그게요. 저희도 방금 전에야 안 건데….”
드워프 아재가 묻자 프란체스카가 뭔가를 설명했다. 네페르티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 나는 모닥불이나 쐬면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같은 드워프목 드워프속의 드워프족인데 키는 프란체스카 쪽이 더 컸다. 하프가 더 크다니, 드워프 DNA는 열성 유전자인가? 스펙만 놓고 보면 능력치 개쩔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