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참 거지 같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게 현실인 거에요 새끼야.
다나의 말에 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 이세계에서 일부다처제는 그 사람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했다. 브리타니아에서도 다중혼은 위법이 아니다.
여기는 청교도나 유교적 사상조차 발족한 적이 없는 세상이었다. 남자가 감당할 능력만 된다면 아내를 몇 명 두더라도 괜찮았다. 귀족 쯤 되면 처첩을 따로 분류하여 아내들 사이에서도 급을 두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결혼 못 한 남자는 무능력하다는 경향도 생길 지경이었다.
사실 지구에서조차 8, 9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을 하지 못한 남녀는 병신 취급을 했다.
명절 때마다 욕과 잔소리에 두들겨 맞는 것은 일상이요, 내 큰아빠 중 한 분은 아예 결혼하기 전까지는 명절 때 큰집에 내려오지도 못했다.
이런 풍토가 이세계에서는 더욱 심했다. 그 왜, 예전에 인터넷에서는 이런 농담도 있지 않았던가.
─일부다처제는 절대 실행하지 말아야 됨.
─왜?
─시발 일부다처제가 합법이 되면 여자들은 강동원의 9번째 아내가 되고 싶어하지, 나랑 사귀고 싶어하진 않을 거 아냐.
─니 아내 지원자는 지금도 없잖음.
─어디 사냐 시발련아.
이렇듯 일부다처제라는 제도는 되려 남자들의 적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약한 수컷 원숭이는 평생 솔로로 살며 구석에서 벌레나 주워먹듯이, 이 티어충 새끼들의 세상에서 개인의 능력은 그 사람의 가치를 대변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단, 귀족들한테 노려지지 않으려면 아내는 여럿 들여야 돼.
다나는 말했다.
─네가 홀몸이거나 한두 명 정도밖에 없으면 얼굴도 모르는 귀족의 데릴사위로 잡혀갈 걸?
─제가 제안을 거부하기는 힘들겠군요. 후원이 끊기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보복을 하려 들 수도 있겠어요.
─잘 아네. 맞아. 결혼 생각이 없다고 주장해도 안 믿겠지. 너희 나라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브리타니아나 주변 국가에서는 카르미네 대학 석박사 정도의 능력자가 결혼을 안 한다는 말에는 절대 납득 안 할 거야.
내가 귀족의 혼담을 거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 했다. 운이 나빴다간 내가 그 귀족이 눈에 안 차서 거절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고작 니네 가문 수준으로는 내가 만족을 못 한다!! 좀 더 잘난 귀족이 혼담을 제안할 때까지 존버할 거다!!”
내 거절이 귀족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아내가 한 명 뿐이어서는 안 되는 겁니까?
─크흠. 음. 글쎄? 나는 잘모르겠네? 그래도 아내가 한 명이라는 건 네 능력을 썩히는 셈이잖아. 아내가 어디 가서 그쪽 남편은 능력도 있다면서 왜 그러고 사는지 몰라요~ 소리라도 들었다간 화 나지 않겠어?
다나는 술을 마구 마셔대면서 첨언했다.
─그리고 이건 괴담 수준의 낭설이기는 하지만, 로마니아에서는 아내가 한 명 뿐이던 애처가 관료를 사위로 들이려고 그 아내를 죽여버렸다는 얘기도 돌더라. 로마니아는 원래 정치 싸움이 과격한 곳이니까 예외로 치더라도, 브리타니아라고 안심하긴 이르지.
─…그쯤 되면 차라리 귀족 아가씨 중에서 멀쩡한 사람이 저를 데려가 주길 바라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요?
감당 못 할 절망적 현실에 나는 그쪽으로 도피했다.
존나 도도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금발 롤빵 머리)가 내 목줄을 당기면서 나만의 유일한 노예가 되세요! 하는 미래. 나름 괜찮을 것 같지 않은가?
─멀쩡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는 다른 귀족들과의 정략결혼에 이용되기 마련이거든? 너한테 가는 혼담은… 아마 살이 뒤룩뒤룩 찌고 성격이 괴팍한 30살 아줌마의 4번째 남편 정도 아냐?
─저는 사실 예전부터 일부다처를 꿈꾸고 있었어요.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냐고.
후일 조사해 보니 다나의 말은 개 씨발 팩트였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처다부제는 일부다처제보다 훨씬 보기 드물고, 또 시선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일부다처제의 주된 핑계가 ‘후사를 많이 낳기 위해’인데, 여자는 어차피 한 번에 한 명밖에 임신하지 못하는데 남편을 여럿 둬서 뭐하냐는 기적의 논리였다.
그런 이유로 소위 ‘이미지가 씹창인’ 여성 외에는 남편을 여럿 두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결혼점수 80인 여성은 150짜리 남자의 N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댄다.
하긴 21세기 결혼중매문화도 이거랑 똑같았지. 나였어도 고졸 편의점 알바 셋을 아내로 둘 바에야 석유부자 딸 기둥서방 하고 만다.
즉.
귀족 가문의 가주가 답이 없을 정도로 막장 인생을 사는 딸내미한테, 능력 있는 서민들을 남편으로 붙여서 가문의 합법 노예로 삼는 것.
그것이 일처다부제의 실체였다.
상대가 노예가 아니더라도 능력이 탐이 난다면, 결혼이라는 목줄을 채워서 노예처럼 부려먹으면 되니까!!
─이 시발. 하렘 보고 역겨워하는 여자들 기분을 이해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렇게 무기한 노예로서 성 착취를 당하고 있을 남자들을 생각하고 눈앞이 노래졌었다.
그건 마치 개 씨발 해처리에 붙은 가여운 라바들과 같은 인생이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지옥!!
조선 초기까지도 남아 있던 보쌈의 사악한 스핀 오프!!
애 낳는 기계가 아닌 애 만드는 기계(그밖의 잡무 다수)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란 대체 무슨 기분으로 이어나가야 하는 것인가!!!
거기다 이세계 여자들은 이쪽에 인근한 성적 판타지라도 있는지, 출판업계에서도 온갖 남자들을 부려먹는 귀족 아가씨 얘기가 대 유행 중이더라!! 염병할!!
─와 진짜 인생 조질 뻔 했자너.
나는 이 사실을 알려준 다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내가 존나 멍청하게 노르는 결혼 안 하는레후 거리고 있었다간 내 이세계 라이프의 노예 엔딩이 멀지 않았을 것이었다.
시발 생각해 보라고. 하렘충 꼴마초 VS 페미니스트 역하렘 멤버 중에 택 1인데 어떻게 나더러 마초이즘에 잠식되지 않고 배기라는 것이지?
─갈!! 포기해라!! 니가 이세계에 왔다고 야설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여자의 존엄을 무시하는 하렘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가끔씩 내 안의 노 근본 유교 탈레반 드래곤이 개소리 말라며 날뛰었지만, 이세계에 적응한 마초 노르드는 눈도 깜짝 안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꼴마초 노르드의 편을 들어 주었다.
─아 좀 좆까고 있어 봐 씹새야!! 가만히 있었다가는 150kg 쿰척쿰척 히스테릭 아줌마의 넷째 남편이 돼 가지고 나 같은 호구 병신 새끼들이랑 구멍 동서 노릇을 하게 생겼다고!!!!
내가 뒤지는 한이 있어도 저딴 환경에서 살 수는 없었다.
고문서 번역부터 외국 손님의 통역사, 애새끼들 구몬 교육까지 온갖 잡무로 휘둘리며 코 꿰인 남편 노예로서 사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게다가 40대 파오후 아줌마와의 의무방어전이라니?
존나 씨발 행주대첩에 나서는 병졸 못지 않은 비장함으로 매일 밤마다 결사항전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언젠가는 나보다 허리가 굵은 아내님한테 깔려서 응기잇하고 말겠지.
나의 이런 상황을 아신다면 우리 부모님들조차 내가 하렘을 차리는 것을 반대하지 못하실 것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시발, 나도 결국 남자다. 예쁜 아내를 여러 명 들이는 게 싫을 리는 없지 않은가!!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연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으면 사르가디스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가정은 반드시 꾸려야 한다.
하지만 그 가정을 버리고 지구로 런 하는 것은 논외다.
─그러면 걍 지구와 이세계를 왕복 가능한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딱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주선이 개발되기 전엔 누구도 우주여행이 가능할 거라고 전망하지 못했던 것처럼, 기술의 발전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니까
같은 관점에서 쌍방형 차원이동도 분명 가능할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세계 버전으로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끝내 성공하지 못하거나 한 번 지구로 돌아갔다가는 이쪽 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구조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도 별로 상관없었다.
이세계에서 만든 가족들과 같이 돌아가든가, 지구 귀환을 포기하고 여기 남아 살면서 지구에 있을 가족들에게 편지라도 보내면 된다.
편지에는 가족들만 아는 추억이나 비밀을 적어두자. 그럼 우리 가족도 내가 행방불명이 되서 죽은 게 아니라 살아서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주겠지.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이 이세계에서 아내를 여럿 들일 각오를 했다.
혹시라도 내 연구성과나 능력을 노리는 상대에게 혼인을 빌미로 위협당하지 않게, 그에 걸맞은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이게 내가 이세계 마초로서 살게 된 이유였다.
“일부다처요?”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마초이즘에 각성했던 비참한 과거로부터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아… 하지만 여성분한테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쪽 세상 여성들은 자기 취향의 남편들로 역하렘을 차리는 것 만큼이나,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 그건 나도 지식으로 들어서 안다.
하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자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은 아직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것이다.
이세계에서 살아간지가 벌써 3년 반이 넘었는데도 아직 이렇다. 이세계 마초의 길은 이토록 멀고 험하다.
“아니에요. 남자들이 자주 가지는 꿈이잖아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셨는걸요.”
프란체스카의 목소리는 평소랑 똑같았다. 그게 내 면전에다 대고 극혐이라는 소리를 못해서인지, 혹은 정말로 이세계인들한테는 이게 보통 일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둘째 부인이라니, 설마하니 귀족 출신이십니까? 제가 무례하게 대했다고 나중에 찾아와서 저 놈의 목을 쳐라~ 하신다든가?”
나는 하수도에서 그녀를 투척했던 기억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렇게 물었다.
이런 부류의 판타지에서 고향을 뛰쳐나온 사람이 실은 어느 귀족의 사생아나 몇째 아들딸~ 이라는 얘기는 쎄고 쎘지 않은가.
“헤헤. 아니에요. 저희 아버지는 연금술사셨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연세가 60을 넘으셨었구요.”
다행히 그런 일은 없는 듯 했다. 나는 안심하고 웃음기를 띈 목소리로 농담을 했다.
“60세요? 하하하!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금실이 좋으셨나 봅니다.”
“그렇지는… 않았지만요. 아버지는 제가 철이 들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사실은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이번에는 약간 우울해진 목소리였다. 아니 시발 나 왜 아까부터 계속 괜한 소리만 하는 것 같지? 오늘 따라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흐흐. 아무튼 프란체스카 씨의 현실적인 목표를 들으니 제 꿈은 꽤나 허황된 목표이지 않나 싶습니다.”
급하게 화제를 돌리고자 꺼낸 말에 프란체스카는 순순히 응해주었다.
“허황되면 어때요. 전 어릴 적에는 훨씬 더 말도 안 되고 바보 같은 꿈을 꿨었어요.”
“어릴 적 꿈 얘기까지 갔다가는 제가 압승입니다. 저는 한창 꼬맹이일 때는 공룡이 되고 싶었거든요.”
“푸흐흐. 공룡이요? 농담도 잘하신다니까.”
진짠데.
아, 맞다. 이세계인 기준으로 공룡은 몬스터의 일종이었다. 여기 어린애들은 야 티라노사우르스 존나 개쩔지 않냐? 같은 소리는 안 할지도 모르겠다.
농담 취급하고 넘어가 줘서 다행이군. 나는 이제 냄새가 거의 사라진 빨래를 새 물로 헹구면서 물었다.
“그럼 프란체스카 씨의 꿈은 뭐였나요?”
프란체스카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내 목소리가 안 들렸던 건지, 아니면 대답하기 싫어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트라우마 스위치를 계속 이래저래 건드리고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이상하기는 했다. 꿈 이야기는 프란체스카가 먼저 꺼낸 것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과거 얘기 같은, 민감해지기 딱 좋은 화제를 꺼낸 걸까.
여관 주인 아줌마의 말이 되살아났다.
─프랑은 이제 고작 21살이야. 나이야 성인이지만 혼자서 낯선 땅에서 살아가기에는 버거운 나이지.
─기댈 곳도 없이 늘 외롭고 힘들 텐데도 저렇게 열심히 열심히 살고 있는 거라고. 알겠어?
쏴아아아.
─드르륵.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나면서 욕실의 창문이 살짝 열렸다.
간신히 밖을 들여다볼 정도로 작은 틈새였는데, 프란체스카는 거기로부터 창밖을 들여다 보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달이 아름답네요.”
문과들이 좋아할 법한 표현이었다. 어디 교양 수업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어제 유적 경비 의뢰에서 돌아오는 길에 봤던 뚱뚱한 반달은 이제 완연한 보름달이 되어 있었다.
“예. 달이 예쁜 밤이군요. 그러고보면 제 고향에서 가을은 달의 계절이라고도 했었죠.”
“후후.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민족의 명절이 가을에 있었거든요.”
추석은 설날에서 이어지는 정월 대보름과 함께 보름달의 날이었다. 팔월대보름이라고도 한다. 추석과 관련된 이미지도 하늘에 뜬 주황색 달과 나무에 매달린 감이 대표적이고 말이다.
이렇듯 사람이 센티멘탈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감성적이 되기 좋은 시기라서 달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난 이과라서 잘 모르겟소요.
아무튼 이세계에서도 보름달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밝은 달밤에는 불빛 없이도 걷기 좋았다. 정해진 도로변 밖에서는 민가나 술집의 불빛도 닿지 않아서 걷기가 꺼려질 정도로 무서우니까.
그런 의미에서 잘 모르는 무서운 길을 걸을 때 휘영청 뜬 보름달의 밝은 빛은 아주 믿음직스럽기 마련이다. 이세계에서 보름달은 용기를 주는 달이었다.
그때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저는요. 탐험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나는 더 이상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프란체스카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유적이나 새로운 세상을 탐험해서 아무도 모르는 옛날 옛적의 보물을 찾고 싶었죠. 분명 책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 속 멋진 모험기나 보물에 반했었던 거에요. 그리고 찾아낸 보물을 어머니께 자랑하고, 그런 어수룩한 꿈이었죠.”
유적에서 일어났던 일이 떠오른다. 프란체스카가 석비의 문구에 관심을 보이던 것은 그래서였나 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어떤 기분으로 그런 꿈을 꾸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첨벙.
발로 물을 튀기는 소리였다.
“후후. 자물쇠 따는 법, 덫 만드는 법, 남이 버린 장작을 주워서 다시 쓰는 법. 그런 걸을 기억하느라 잊어버렸나 봐요.”
“…어른이 되면 살기 벅차서 꿈을 잊고는 하는 법이죠.”
사람은 타성에 젖어서 산다.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가슴 한 켠이 쓰라리고 좆 같은 것은, 지구인들한테도 이세계인들한테도 산다는 것은 다 좆 같아서 그렇다.
‘인생이 좆 같은 것은, 인생이 좆 같기 때문이다.’
개씨발 명언이다. 나중에 교수가 돼서 자서전 뒷표지에 큼지막하게 적어놔야지. 그리고 내 대학원생 노예들한테 읽게 시키고 독후감을 10장씩 써 오게 하는 것이다. 일감도 계속 던져주면서 말이다.
존나 칼에 백 번도 더 찔릴 것 같지만 그때 쯤에는 그랜드 마스터 노르드가 되어서 칼이 안 박히는 무적의 교수가 되지 않을까. 아님 말고.
“하지만 저는 그런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꿈이랑 목표는 다르니까요.”
나는 빨래를 좌우로 비틀어 짜면서 말했다.
“인생은 뒷일만 생각해며 살아도 의미가 없어요. 해야 할 일이랑 하고 싶은 일을 둘 다 하면서 적당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편이 훨씬 속 편고 좋던데요.”
“하고 싶은 일이요?”
“네. 좋을 대로만 살 수는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하기 싫은 것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무작정 열심히 살아봤자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인데. 말마따나 저희 둘 다 하수도나 유적에서 죽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나의 욜로이즘이다.
10년 동안 매달 100만원씩 저축해도 전셋집 하나 못 하는 21세기에서 살면 이렇게 된다. 장래 걱정보다 오늘 편의점 김밥 신상이 더 신경이 쓰이게 되는 것이지.
지금도 그렇다. 존나 한국인 수의대생 강북호가 이세계에서 하프 드워프 여자애가 입던 판초를 세탁해주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지구에 있을 때는 첫사랑한테도 고백해 보고, 키스도 못 하고 깨졌던 전 여친한테도 적극적으로 대쉬해 보고 했을 거다.
부모님들한테도 이 부카니스탄식 이름 개명해도 되냐고 물어 봤을 것이며 좆 같은 군대도 안 갔을 것이다. 시발 수의대 졸업하고 군의관 대체 복무로 갔겠지.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 안 간 새끼 취급을 받는 걸 왜 그리 싫어했는지 모르겠다. 존나 입대하고 3일만에 후회하고 멸치 선임 분대장이랑 전역할 때까지 후회했는데 말이다.
“헤헤헤. 그건 그래요. 그치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것도 분명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요?”
프란체스카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 이게 프란체스카의 첫 억지웃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능히 짐작했기에 가능한 대수롭지 않게 들리도록 물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후회 안 하고 계십니까?”
물장구 소리가 멈췄다. 이 여관에서는 엿 같은 벌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발 나도 여기에서 묵을 걸 그랬다.
“사람들은 자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들 하는데, 살면서 후회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딴 좆 같은 이세계 생존기를 찍고 있는데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