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009)

만약 그랬다간 나도 살 맛이 안 나서 집에 혼자 방치된 토끼처럼 훼까닥 죽어버릴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아 보이더라도, 본인이 즐겁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된 거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나도 아직 이세계에서 인생을 즐길 방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드르르륵─.

그때였다. 말이 없던 프란체스카가 창문을 완전히 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저기요. 노르드 씨.”

프란체스카는 머리에서 김을 뿜으며 헤헤 웃었다.

“우리 말 놓을래?”

그날 하수도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웃음에 나는 벡터-빨래 말리기를 끝내고 대답했다.

“오빠라고 부르면.”

──그렇게 해서.

이세계의 척척석사 노르드는 시골도시 사르가디스에서 새로운 인연을 한 명 더 만들었다.

몸도 마음도 아직 언밸런스한─ 21살의 하프 드워프를.

…아, 참고로 오빠라고 부르게 하지는 않았다.

“브라더!”

“내가 미안하다. 제발 노르라고 불러.”

이 시발 좆 같은 브리타니아 어.

부라더가 뭐야 부라더가.

“손 봐 달라고 했던 옷은 어떤 거야?”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프란체스카가 물었다.

우리는 빨래와 목욕을 마치고 프랑이 묵는 방으로 왔다. 세탁이 끝난 판초는 방 구석의 빨래대에 널었다. 밖에서 말리다가는 도둑맞을 것이 뻔하니까.

목욕을 끝마친 프랑이 입은 옷은 잠옷 같은 옷이었다. 옷의 노출은 전무한데, 모든 구속에서 해방된 두 가슴은 동물원을 탈출한 사자 같은 위용을 뽐냈다.

나는 가슴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참아내며 가방에서 로브와 가면을 꺼냈다.

“이거인데… 까놓고 말해서 수선이라고 하기에는 좀 난이도가 높을지도 모르겠다.”

새삼 로브를 꺼내고 보니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옷을 어디서 산 건지 모를 정도로 수선해 달라니?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까 차라리 천을 사와서 새 옷을 만들어 달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어디에 쓸 건데?”

“잠깐 마법사 길드에 갔다 오려고. 이번에 얻은 마법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는데, 정체를 숨기는 편이 뒤탈이 없을 거 아냐.”

“아~ 맞다. 파라곤 씨도 그랬었지? 마법사한테 물어보는 편이 빠르다구.”

“알았어. 한 번 볼게.”

수건을 내려놓은 프랑은 내 로브를 만져보고 말했다.

“로브는 거의 원단 수준이라 조금만 손 봐도 될 것 같아. 그치만 가면은 처음부터 깎는 편이 빠르겠다.”

“아, 역시 그래?”

“응. 전체적인 디자인은 어떻게 할래?”

나는 그 말에 품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런 건 말로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보여주는 편이 더 편할 것 같아서였다.

스윽─ 스윽─.

심혈을 기울여서 그린 그림은 몇 분만에 완성되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본 프랑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후후후. 노르 너, 그림에는 소질이 없구나?”

“냅둬.”

시발. 그 정도인가?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을 보았다.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은데.

그러자 프랑도 내 펜을 들고 내 그림 뒷면에 새로 한 장을 그렸다.

슥슥슥─.

“이런 느낌으로 괜찮아?”

나는 1분도 안 돼서 만들어진 스케치를 보고 변명을 나불대던 아가리를 싸물어버렸다. 내 낙서가 잼민이들 방학숙제로 보이는 퀄리티였다.

“난 사실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 모자랐던 거 아닐까.”

이게 시발 나랑 같은 사람의 손으로 그린 게 맞나. 나는 금손을 보고 자살충동을 느끼는 범용한 그림쟁이들의 기분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노르의 그림에 특징이 잘 잡혀 있어서 그리기 편했어. 그림은 약간 이상했지만 디자인은 멋지더라.”

그렇게 말하며 샐쭉 웃는 프랑. 진심이 느껴지는 위로에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 하루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내가 뭘 잘 그렸다고. 프랑 네가 멋지게 리터치해 준 거지. …근데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어? 힘들지 않을까?”

“아냐. 이거 별로 안 어려워. 로브는 원단을 접어서 실로 박음질만 해도 끝나는걸? 자, 이렇게.”

프랑이 로브의 어깨 부분을 접고 쭉 당기자 그림 그대로의 모습이 디자인이 재현됐다. 그녀 말대로 약간 손보기만 했는데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다.

와, 이런 걸 내 개판인 그림을 보고 연상했다고? 드워프 진짜 사기 종족이네. 어차피 이세계에 올 거 나도 드워프로 환생이나 빙의시켜 줄 것이지.

아무튼 나는 형태가 잡힌 로브의 모습에 몹시 만족했다.

“대단하네. 그럼 이대로 부탁할게. 보수는 얼마면 돼?”

“공짜로 해 줄게. 노르한테는 신세진 게 많으니까.”

와! 공짜!

“아 진짜, 와. 너무 고맙다 야.”

나는 기쁨을 눈물을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시발 세상에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것도 그냥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와준 사람한테 보답을 받는 것이었다.

이게 한국인의 정, 품앗이지. 이세계에서 우리 전통의 문화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아, 하지만 프랑 너 일은 괜찮아? 의뢰하고 쉬는데 내가 방해하는 걸까봐 걱정되네.”

“피, 걱정도 많다. 걱정 마. 이 정도는 일 축에도 못 껴.”

프랑이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의욕이 가득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 술은 내가 살게. 자, 마시러 가자.”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났더니 프랑은 어째선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로브 수선 급한 일 아니었어? 나는 오늘부터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살짝 급하긴 해. 그래도 일 갔다 온 사람한테 또 일을 시키기는 뭣하니까. 대신 며칠 안으로만 완성해 줘.”

까짓거 내가 쥬지 붙잡고 떠는 날이 며칠 더 늘어날 뿐인 일이다.

프랑!! 내 쥬지가 증발해 버릴까봐 무서워!! 얼른 부탁해!!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없고.

“으음. 그러면 틀만 잡아 놓을게. 이렇게 좀, 핑! 하는 느낌이 왔을 때 틀을 세워 둬야 나중에 어떻게 할려 했더라? 하는 생각이 안 들어서.”

프랑은 바디 랭귀지까지 동원해가며 감각적인 설명을 했다. 다행히 나는 논문을 쓸 때 비슷한 감각을 느껴봤기에 쉽게 이해가 갔다.

“아, 그 기분 나도 잘 알지. 일을 나중으로 미뤄뒀다간 어? 이렇게 하려던 게 맞았나? 하는 생각이 들잖아. 처음에 막 떠올랐을 때의 느낌은 안 들고.”

“그치? 그치? 알아주는구나!”

내 말에 프랑은 밝은 얼굴로 방방 뛰었다. 뭐야 얘 귀여워. 사이가 가까워 지니까 원래의 3배는 더 귀여워졌다.

하지만 가슴은 귀엽지 않았다. 오히려 흉악하다.

알고 있는가? 커다란 가슴은 사람의 행동거지는 물론 사고방식까지 바꿔버린다.

사람이 팔짱도 끼지 못하게 만들고, 달릴 때마다 고통을 수반하는 그 거대한 부피와 질량! 그것은 언제나 거유 여성을 귀찮게 괴롭힌다.

그런데 프랑은 아니다. 얘는 자기 가슴 크기를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튼튼해서 그런가? 저 거유를 가지고도 잘만 움직여댄다.

“반짇고리는 있어? 아, 그 뭐냐. 바늘이랑 실 말이야.”

나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프랑은 내 빠른 화제전환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번에 마스크를 만드느라 구해 뒀어.”

“아, 맞다. 그랬지 참.”

의뢰 때 빌려쓴 마스크도 그녀가 만들었다고 했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금방 틀만 잡고 끝낼게.”

그렇게 말한 프랑은 반짇고리 세트를 가지고 와서 로브의 수선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직 이런 침묵 속에서 어색하지 않을만큼 친하지 않았던 우리는 서로 상대방이 약간 불편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말 걸면 일하는데 방해될까?”

“아니, 오히려 걸어줬음 좋겠는데… 좀 어색하다. 헤헤.”

역시 마음이 맞는다. 나는 조금 안심하고서 말했다.

“그러고보니까 너 술은 괜찮아? 여기 주인 아줌마가 그러시더라. 너 술 한 잔만 마셔도 뻗는다며.”

“뭐, 뭐?!”

움찔!

프랑이 내 말에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 격한 반응에 나도 놀랐다.

“앗! 윽…!”

그때 놀라느라 바늘에 찔렸는지 프랑이 움찔했다. 그녀의 검지 손가락에서 피가 꽤 많이 흘러나왔다.

“아, 이런… 미안하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아, 아냐. 내가 말 걸어 달라고 했던 건데 뭐.”

그때 손가락을 붙잡은 프랑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아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술을 못 마신다구?”

아니 다친 것보다 그쪽이 더 신경 쓰이는 거냐고. 하지만 나는 프랑이 인상을 쓰는 것을 거의 처음 본 것 같아서 움찔하고 말았다.

“나 술 잘 마셔! 드워프랑 인간의 혼혈인데 술을 못 마실 리가 없잖아!”

“알겠으니까 일단 지혈부터 해. 너 피 엄청 나.”

그녀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상처가 꽤 깊던가, 그게 아니면 흥분하고 있어서 저러는 것이었다.

“이쯤이야 그냥 내버려 둬도 멈춰. 그것보다─”

“잠깐, 그러지 말고.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큰일 나. 소독약 혹시 없지?”

“…응. 없어.”

불만이 남은 얼굴로 뾰루퉁한 프랑의 모습에 나는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하며 말했다.

“기다려 봐. 물로 일단 헹구게. 깨끗한 천은 있어?”

“마스크 만들고 남은 거라면 있는데….”

“어디 있어? 줘 봐.”

그렇게 나는 프랑으로부터 깨끗한 천을 받아서 다친 손가락을 받치고 물을 끼얹었다.

─줄줄줄.

─주륵.

상처를 한 번 헹궜지만 피는 그칠 기미가 없다.

나는 그 모습에 걱정이 샘솟았다. 한국의 모 명작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부하가 다리에 녹슨 못이 박혔다가 파상풍으로 외다리가 되는 장면이 있지 않던가.

여긴 파상풍 주사도 없는 세상이다. 파상풍 외에도 어떤 합병증이 걸릴지 모르니 작은 상처도 얕볼 수 없었다. 포션이라도 들고 다닐 걸 그랬나.

“…기다려 봐. 밑에 가서 주인 아줌마한테 붕대랑 소독할 술을 받아 올게.”

“엄살 떠는 것 같은데.”

“부탁이니까 그냥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나는 프랑의 파란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랬더니 프랑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우물거리다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아래로 내려갔다. 소독용의 술은 되도록 불순물이 없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그냥 편의점 소주만 있어도 됐는데, 브리타니아에서는 증류주 종류를 보기가 힘들다.

“아주머니. 여기서 파는 술 중에 증류주도 있습니까?”

“…증류주?”

1층에서 한창 일을 하던 여관 아줌마는 내 말을 듣고는 어째서인지 흥미진진해 했다.

“후후. 좋아. 갖다 줄게. 마침 애물단지가 하나 있거든.”

그녀는 노골적으로 즐거워하면서 말했다.

“어느 착한 아가씨가 첫날에 한 잔 마시고 뻗은, 아주 독한 녀석이 말이야.”

내가 술을 배운 것은 이세계에서였다.

모친 실종 부친 사망의 아이콘이자 대학원생을 자기 발닦개 취급하는 교수들 밑에서 3년을 살았던 나다.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예르나 그 시발년도 주당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뒤늦게 술을 배운 나였지만 주량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주량이란 무엇인가?

보통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량은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기 전까지의 한계치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주량을 논할 때는 ‘저번에 마시고 뒤지기 직전까지 갔던 양’을 나의 주량이라고 주장하고는 했다. 마치 지구권의 전세계 남자들이 자기 주량을 가지고 부심을 부려대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세계의 2000cc 맥주잔 3개 반으로 인사불성이 되는 나는 주량이 7천 cc 가량이라고 할 수 있다. 반올림 해서 대충 1만 cc로 치고 맥주병이 대충 500에서 600ml 사이니까 무려 맥주 20병이다.

존나 쩔지 않은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간을 조질 수 있는 한계량은 좆도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나는 이것을 나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근데 시발 이 술은 딱 봐도 영 아니었다. 나는 프랑이 이 여관을 잡은 첫날 마시고 뻗었다는 증류주를 받고 식겁을 했다.

프랑은 사르가디스에 온 첫 날을 기념이라도 하려 했던 모양으로, 꽤 비싸 보이는 유리병이다. 창문에 가죽을 바르는 브리타니아 서민들의 관점에서는 술병을 유리로 만드는 경우가 적다.

유리의 투명도가 낮아서 현대인인 강북호의 기준에는 뿌얘 보였지만, 이세계 마초 노르드는 내심 깨질까 무서워서 꽤 쫄았다.

그리고 이세계에서 이런 유리병에 담긴 증류주라 함은 곧 존나게 도수가 높은 독주임을 의미했다.

“나랑 우리 여보야가 꽤 주당이거든? 그런데 그 ‘압카디’는 3잔을 못 버텨.”

그게 여관 주인 아줌마의 말이었다.

시발 술 이름 존나 무섭다. 압카디라니. 해석이 안 되는 걸로 보아 아마 고유명사겠지만 발음의 삘이 벌써부터 악마나 뱀파이어 같은 느낌이다.

분명 나는 이걸 반 병만 마셔도 개먹이처럼 바닥에 뻗어 그웨에에엑 하고 기어다니는 취객좀비가 될 것이었다.

‘아니 시발 이걸 술 한 잔으로 계산해도 되는 거냐?’

여관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약간 따서 냄새를 맡아봤는데, 이건 뭐 손소독제나 의료용 알코올에 가깝다.

시발 소독용으로 쓸 때 살균력은 확실하겠네. 억지로 멕이면 사람 하나 무지개 다리를 건너게 하기도 딱 좋으니 살인용으로도 충분하겠다.

끼이익─.

나는 프랑의 여관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내가 입을 로브를 손 보는 중이었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니 늘씬한 비율 때문에 무척 어른스러웠다. 부업으로 집에서 바느질 일을 하는 젊은 애엄마 같다.

근데 그렇게 치면 그 방에 비싼 술을 들고 돌아오는 나는 뭐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인간 쓰레기 가정폭력남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찝찝하기 짝이 없다.

프랑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 노르. 왔어?”

“그래. 그보다 너 손 다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바느질을 하고 있냐.”

“뭐 어때. 지혈했으니까 피 안 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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