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주장하면 돌려줄 말이 사라진다.
모험가가 꼼수를 부려본들 농장주한테는 양아치 놈들을 엿 멕일 방법이 얼마든지 존재했다. 우리 같은 모험가는 24시간 전국 팔방곳곳에서 을의 입장이니까.
‘그래도 농삿일을 도우라고 불러놓은 거니까 밥값만 하면 보수는 주겠지.’
농장주들도 일을 열심히 한 모험가한테까지 저런 수단을 쓰진 못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내년 이후로는 자기네 식구+노예들만으로 수확을 해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니까.
이렇듯 이번 의뢰의 실태는 윈윈 관계의 거래에 가깝다.
밥값 안 들고 한 시즌 동안에만 고용할 수 있는 튼튼한 알바생을 구하려는 농장주.
안전하게 실적을 쌓고 보수를 받아가려는 모험가.
두 진영의 사람들은 서로 일방적으로 통수를 칠 수 없는 관계였다. 우리 같은 아딱이는 농땡이 안 피우고 열심히 일해서 실적이랑 보수나 타 가면 될 일이었다.
‘농장주가 엘프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저 밀짚모자 좆프 새끼도 예르나처럼 내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내가 만나본 엘프는 모조리 씹새끼였다. 내가 아는 엘프라고는 예르나 그 씨발년이 전부였으므로, 1:1의 비율로 엘프=씹새끼의 공식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엘프는 100%의 확률로 좆프다.
표본이 적은 것은 감안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이런 가설을 주장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불만 있는 새끼들은 3년 동안 쓴 논문을 내 명의로 낸 다음에 말하길 바란다.
“우선 일을 맡기기 전에 너희들의 솜씨를 보고 싶다.”
내가 속으로 뭔 생각을 하든 엘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팔짱을 낀 밀짚모자 좆프가 우리를 슥 쳐다보았다.
“우리들 타타르니아의 엘프는 행동하지 않는 자의 말은 믿지 않으니 말이다.”
“타타르니아의 엘프는 행동하지 않는 자의 말은 믿지 않거든.”
타타르니아?
나는 처음 듣는 지명(地名)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엘프의 나라라도 되나? 존나 처음 듣는 촌동네를 자신감 있게 소개한 엘프는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로드리고, 낫을 가져와.”
“예. 주인님.”
그 말에 남자가 머리를 숙였다. 주인님이라는고 하는 걸 보니 노예인 모양이었다. 복장이 농부 옷이라서 못 알아봤다.
‘세상에 비서 노예까지 있네.’
존나 뭔 좆소기업 사장이냐.
그래도 노예의 겉모습은 꽤 멀쑥했다. 체격은 건장하고 혈색도 좋다. 힘 써야 하는 농노라서 밥은 잘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로드리고라는 이름의 농노는 어느 수레에서 커다란 낫을 들고 왔다. 창처럼 긴 장대에 날카롭게 벼려진 날이 붙은 농경용 낫이었다.
“이 낫으로 내가 보는 앞에서 밀을 수확해 봐라.”
호툴루실은 그 친구로부터 낫을 받아들고 말했다.
“솜씨가 뛰어난 자에게는 수확을 맡기겠다. 그렇지 못한 자는 수확한 밀의 회수와 탈곡으로 빠진다. 이상이다.”
딱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무는 밀짚모자 엘프의 모습에 우리 파티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연장자인 중년 모험가였다.
“어디, 그럼 나한테 줘 보쇼. 난 농가 출신이야.”
그가 허리춤의 벨트를 풀면서 말했다. 아니 시발 근데 이 미친 새끼는 갑자기 왜 바지를 벗으려 드는 것이지?
뜬금없는 노출증 커밍 아웃에 나랑 프랑은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는데, 모험가 아재는 바지 벨트가 아니라 검집 벨트를 푼 것이었다.
철컥.
휙─.
검집을 벗어던진 중년 아재는 로드리고한테로 가서 낫을 받아들었다. 시발, 다행이다. 노출증 변태 아재가 아니라 그냥 일할 때 방해되니까 검집을 벗었던 거였다.
“퉤!”
그런데 하필이면 저 못 배워 쳐먹은 아재는 제 손에 침을 뱉어 비벼댔다.
아니 이 시발럼아! 니가 그 지랄을 하면 다음 타자는 니 침 묻은 낫을 써야 되잖아! 깜짝 놀란 내가 내가 뭐라고 항의하려 했더니, 그것을 지켜보던 밀짚모자 좆프가 나보다 먼저 인상을 썼다.
“이봐. 낫에 침을 묻히지 마라. 더럽다.”
“엉? 허 참. 엘프 나리. 댁이 잘 모르나 본데, 이렇게 해야 농기구가 손에 착 달라붙는 거라고.”
“내 알 바가 아니다. 침을 뱉지 않고서는 일을 못 하겠다면 다른 일을 맡도록.”
“쳇. 알겠수다.”
침을 바지에 슥슥 닦은 아재가 다시 낫을 잡았다.
여전히 더럽기는 한데 그래도 아까보다는 낫다. 저 엘프한테도 위생관념이 있어서 다행이다. 내 안에서 호툴루실에 대한 호감도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모든 엘프가 개새끼는 아니겠지.’
나는 스스로의 편견적인 선입견을 약간 반성했다.
중국인한테 호되게 데인 적이 있답시고 모든 중국인을 씨불쟝새기 취급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야 인종차별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결과를 관측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이 따거인지 짱깨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짱깨 이론이다.
나는 이 이론을 이세계에 도입하기로 하였다.
이른바 슈뢰딩거의 좆프.
호툴루실은 내 관측에 따라서 좆프가 될 수도 있고, 좋프가 될 수도 있다. 겪어보기 전까지는 아직 모른다.
겐트릭 할배도 저 엘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가. 성인군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부디 제대로 된 엘프이기만을 바랄 따름이었다.
“으럇─!!”
그때 낫을 든 중년 아재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휘익!!
파사삭!!
거칠게 휘두른 낫은 밀들을 반갈죽 해 버렸다. 뿌리부터 위쪽을 한참 남기고 간신히 밀알만 잘라낸 수준이었다.
이 시발, 이걸 수확이라고 할 수 있나? 거의 뭐 참수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밀이 존나 잡초가 돼 부렀어야.
“탈락.”
개씹정색한 목소리로 호툴루실이 말했다.
“너는 수확한 밀이나 옮겨라. 탈곡도 하지 마. 절대로다.”
“젠장. 이게 다 손에 침을 안 발라서 그런 거요.”
중년 아재는 투덜대면서도 항의는 않았다. 자기가 봐도 이건 약간 아니었다 싶었던 거겠지. 위생관념은 없어도 양심은 있는 아저씨였다.
“다음은 제가 하죠.”
아무 말 않던 젊은 모험가가 다음 타자로 냉큼 나섰다. 거 더럽게 눈치 빠른 놈이었다. 이번에 평가받는 놈은 저 아재랑 비교받을 테니 좋게 보여지기 쉬울 것이었다.
낫을 받은 젊은 모험가가 낫질을 시작했다. 이 녀석도 농가 출신인지 폼이 제법 잡혀 있었다.
사아악─ 사아악─.
무난하게 잘려나가는 밀들. 호툴루실은 청년이 낫을 휘두르는 모습을 당분간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만. 충분하다. 네게는 수확을 맡기지. 그럼 다음은….”
청년한테서 낫을 회수한 밀짚모자 엘프는 내 쪽을 향하려다가 멈칫했다. 그 놈의 시선은 프랑한테서 멈춰 있었다
‘뭐지? 엘프라서 드워프를 싫어하나?’
같은 ‘프’자 돌림 사이인데도 엘프-드워프는 서로 으르렁 거리는 사이였다. 대충 한일 관계 같은 느낌. 친한 사람들은 잘 지내는데 심각한 놈들은 거의 부모의 원수 취급을 해댄다.
“…드워프. 너는 낫을 휘두를 수는 있겠나?”
호툴루실이 말했다. 나는 이 새끼가 인종차별을 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순수하게 의문 어린 시선이었다.
그러자 프랑은 자기 키의 2배 가까이 긴 낫을 올려다보다가 짜게 식은 눈으로 물었다.
“이걸 휘둘러요…? 제가요…?”
아, 그렇구나.
프랑은 힘은 나 못지않게 세지만 키는 160cm도 안 됐다. 그런 프랑에게 저 낫은 너무 컸다. 거의 뭐 조립식 옷걸이에가까운 느낌이겠지.
그런 프랑의 반응에 호툴루실도 알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실례했다. 작은 낫을 내 오지.”
“아뇨. 저는 그냥 수레를 나를게요. 그쪽 일은 해 봤거든요. 노르도 괜찮지?”
힐끗 쳐다보며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 하러 와서까지 연인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 땡깡을 부리는 것은 도가 지나쳤으니까 말이다.
“너만 좋다면 상관 없다. 그렇게 하도록.”
호툴루실은 아무래도 좋은 건지 무심하게 대답했다. 존나 무미건조하게 할 말만 하는 새끼로군.
그래도 사무적인 얘기만 하는 상사는 꽤 괜찮은 유형이다.
사적으로 귀찮게 안 굴고 일만 딱딱 해 놓으면 터치 안 하는 상사. 악덕상사에게 시달리는 일부 회사원들한테는 바래 마지않는 타입일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 눈에는 호툴루실이 은근히 괜찮은 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예르나 때문에 내가 엘프들한테 요구하는 인성의 기대치가 많이 낮아진 모양이었다.
만약 어떤 엘프가 비 맞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발로 까 버리는 모습을 목격해도 ‘너는 발차기를 잘 하는 프렌즈구나!’ 하고 좋게 넘어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자, 이제 네 차례다.”
호툴루실이 내게 낫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서 손에 꽉 말아쥐었다.
─턱.
꾸우욱….
미지근하니 단단한 나무의 느낌.
익숙한 감촉이었다.
그만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이래봬도 지구에서 농삿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친가가 농장이고 군부대도 후방이라서 대민지원을 곧잘 나가고는 했기 때문이다.
우리 연대는 후방부대답게 가라가 심했다. 중대장부터가 진급을 포기한 인간이어서 더 그랬다.
덕분에 물난리가 날 때마다 외출외박을 걸고 농가 지원을 나갈 병사들을 구했었다.
그렇게 대민지원을 나가다 보면 어쩌다 한 번씩 수확일을 도울 일이 생겼는데, 당시 아직 멸치 새끼였던 상병 강북호는 부족한 완력을 기술로 때우지 않으면 안 됐다.
그때 일하며 만난 농민 아저씨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벌써 사라져 버렸지만── 이 손은 아직 그 시절의 감각을 기억했다.
슈와아아악─.
무영창으로 발현한 야수회귀가 몸을 뒤덮었다. 부작용이 없을 거라는 확진은 받았다. 틈 날 때마다 써 줘야지 내 마나통도 성장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는 버프를 건 채로 낫을 가볍게 휘둘렀다.
─쏴악!
예리한 손맛과 함께 넓은 반경의 밀이 썩뚝 잘려나갔다.다른 놈들이랑은 효과음부터가 달랐다.
지당한 일이다. 나 강북호는 군대에서 예초를 할 때도 평지라면 낫으로 예초했던 남자.
이까짓 수확일 따위는 우습기까지 하다.
쏴아아아아─.
그때 바람이 불어와서 밀밭이 흔들렸다.
──아니, 아니다. 바람이 불어서가 아니라, 나의 낫질을 목도한 밀알들이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전율에 떤 것이었다. 반박 시 니 말이 맞음.
“두려운가?”
나는 밀들에게 물었다.
“나도 두렵다. 내 힘이.”
농사용 낫은 목숨을 거두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낫을 당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의 사신(Grim Reaper)이다.”
서양권에서 낫을 든 사신의 이미지는 목숨을 수확하는 죽음을 의인화하며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밀의 목숨을 수확하는 나는 밀밭의 사신이라 할 수 있었다.
“─만해(卍解).”
나는 국룰에 따라 사신의 필살기를 사용했다.
“천본농겸 엄복동(天本農鎌 嚴福童).”
─쏴악! 쏴악! 쏴악!
벤다.
베고, 또 베고, 몇 번이고 벤다.
나의 낫이 춤출 때마다 수많은 밀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뛰어난 완력과 기술을 십분 발휘하여 쉼없이 좌우 방향으로 연격을 발(發)했다.
그렇다── 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인간 트랙터!!
밀가루 도살자 노르드란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쏴아아아악!!
피니쉬로 크게 낫을 휘둘러 일대의 밀을 베어 넘기고서 연무를 멈추었다.
이로써 나의 앞에 서 있는 밀알은 그 누구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5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나는 앞선 두 사람보다 훨씬 초월적인 성과를 낸 것이었다.
이 시간부로는 이곳이 수확 업계의 장판파였다.
“훌륭하군.”
짝짝짝!
나의 만해를 본 호툴루실이 박수를 쳤다. 건조한 박수였지만 얼굴은 정말로 흡족스러워 보였다.
“네게도 수확 일을 맡기마. 하지만 그 마법은 계속 유지할 수 있겠나?”
“없어도 남들만큼은 할 걸요.”
마나의 강화 효과는 패시브다. 멸치 강북호가 해냈던 일을 근육빵빵 바디에 마나 버프까지 받는 이세계 꼴마초 노르드가 못 할 리 있나.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자신이 넘치는군. 그래도 자세를 보니 믿을 만 하겠어. …혹시 우리 농가에 취직할 생각은 없나? 가족처럼 대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싫은데여.”
가족이 필요하면 결혼을 하든가 애를 낳아 새끼야.
“안타깝군.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찾아와라.”
내가 단호박으로 거절하자 밀짚모자의 좆프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서는 우리 일행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 수고들 하도록. 열심히 일 해 주기를 바라겠다.”
호툴루실이 떠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확에 착수했다.
수확한 밀이나 쌀을 회수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해 준다. 나는 걍 마음 놓고 적당한 스피드로 밀들을 교수대에 보내기만 하면 된다.
쏴악! 쏴악!
나의 데스 농사-사이즈(Death 農事-scythe) 앞에 추풍낙엽으로 절명하는 밀밭의 생명들. 나는 동물의 숲에서 잡초를 뽑는 기분으로 낫을 휘둘렀다.
단순노동이란 그것을 쉽게 해낼 신체능력을 보유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빡센 일이 아니다.
야수회귀의 버프를 받은 나에게 한낱 밀 따위 실타래나 마찬가지. 밀을 수확하는 손끝에는 무슨 거미줄을 툭툭 끊는 느낌이 남을 뿐이다.
아마 낫부터가 꽤 좋은 물건인 모양이다. 나는 호기심이 들어서 손을 멈추고 낫의 제조사명을 보았다.
─Made by 「Clara」.
아니 시발 클라라였네.
낫의 제작자는 나한테 가죽갑옷 바지를 팔았던 유부녀 대장장이였다. 내 쥬지 사이즈에 놀라서는 자기 혼자서 고백받고 날 차버렸던 그 젊은 아줌마 말이다.
어째 철을 존나 좋아하다니만 농기구도 만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