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카한테는 은근히 신세진 것이 있어서 다른 여관으로 가자니 약간 미안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남자란 반한 여성한테는 간도 쓸개도 내 주는 생물인 것을.
그 놈도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응. 그게 좋겠다. 방은… 같은 방으로 할 거지?”
은근한 기대를 담은 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붕붕 소리가 나도록 헤드뱅잉하며 긍정했다.
“당연하지. 아, 절대 흑심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냥 돈을 절약하려는 거니까 오해 마.”
“헤헤. 나 잘못하면 밤에 잠 못 자겠다.”
“가슴 주무르는 선에서 참아 볼게요. 아, 우리 여관은 이쪽이야.”
거리를 당분간 걸어가서 익숙한 ‘샘의 쉼터’에 도착했다.
아침이라 사람이 많다. 야행성이라서 아침 시간대에 나와 있어본 적이 거의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느낌이었다.
‘행상인인가?’
잔뜩 늘어난 사람들의 행색은 그래 보였다. 수확이라서 곧 돈에 여유가 생길 시민들로부터 합법적 삥 뜯기를 시전하러 온 행상인들. 그런 이들이 여관에 바글대는 것이었다.
“오. 새끼 왔구만.”
밥을 나르던 도르카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바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한가한 듯 했다.
“뭐야. 행상인들이 앉아서 시간 떼우고 있는 거였나. 나는 또 내가 잠깐 못 본 사이에 여관 주인이 바뀌어서 장사가 잘 되기 시작했나~ 싶었네.”
모여 있는 사람들이 따로 주문을 안 해서 여유로운 모양이었다. 내 말을 들은 도르카가 서빙용 트레이로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면서 웃어댔다.
“크크. 원래 이 시즌에는 손님이 우리 여관을 많이 찾지. 아마 네가 며칠만 더 늦었어도 묵을 방이 안 남았을 거다.”
“단골손님을 돈에 눈이 멀어서 쫓아내기 있냐? 거 언제는 호구 취급하더니만 우리 우정이 이 정도였어?”
“너도 여기 오기 전에 여관 바꿀까 고민하다 왔을 거면서.”
“시발 어케 알았지? 내 머리에서 나가!”
“머리까지 갈 것도 없이 훑어만 봐도 알아, 임마. 그쪽에 있는 아가씨는 네가 말하던 새 동료냐?”
도르카가 프랑을 쳐다보았다. 프랑은 움찔하더니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다.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여기 묵으시려고? 잘 왔소. 나는 돈 잘 주고 사고를 안 치는 손님은 누구든지 환영이요.”
건성으로 대답하고 도르카는 바로 내쪽을 쳐다봤다.
왜 저런 반응인가 했는데, 내가 질투할까 싶어서 일부러 말을 적게 나누려는 모양이었다. 프랑을 믿는 내가 그럴 리는 없었지만 배려심은 고맙게 받기로 했다.
“네 말대로 하루 정도 묵어보려고. 근데 프랑이랑 이것저것 상의해 보는 중이라서 앞으로는 너희 여관에 안 묵게 될지도 몰라. 미안하다.”
욕 먹을 각오로 그리 말했다. 말 없이 튀는 것보다는 이러는 편이 내 속도 편하고 뒤탈도 없을 것이었다.
“알아. 처음부터 그럴 것 같았다고 말했잖냐.”
그런데 도르카는 능글맞은 표정마저 띄우며 답했다.
“여관에 평생 묵는 손님은 없어. 벌이에 따라서 옮기기도 하고 자기 집을 구하기도 하거든. 일류 여관은 그렇게 떠나는 손님보다 더 많은 손님을 받고, 떠난 손님이 다시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거다.”
“그거 힘들겠구만. 존경스럽네.”
“본인이 즐기지 않고서는 못 할 짓이긴 해.”
여관 주인으로서의 프로 의식일까? 프로페셔널한 발언을 한 뒤에 어깨를 으쓱이는 도르카.
“네 동료는 짐이 없어 뵈는데, 묵던 여관에 안 들리고 여기로 바로 온 거냐?”
“어. 아직이야. 하루 묵어 보고 결정할 거라.”
“그래. 니가 저번에 무타라트의 아이들을 물어봤던 것도 저 아가씨가 거기 묵어서 그랬던 거겠지?”
“정답이기는 하다만, 잘도 기억하고 있었구만.”
“멍청하던 내 머리도 계속 쓰다 보니까 나아지더라.”
도르카가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일 이것저것 암기하고 기록하는 일이 많은 여관일 덕분에 기억력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슬쩍 지나가듯이 물어봤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이 새끼 혹시 나보다 기억력이 좋은 건 아니겠지.
“뭐, 우리 여관에 계속 묵을지는 네 동료랑 상의해 보고 정해든지 해라. 억지로 붙들지는 않으마.”
“그럴 생각이야. 아, 그나저나 도르카. 너네 여관은 방 하나에 2명이 묵어도 되냐?”
일박 3쿠퍼짜리 방에 둘이서 묵을 수 있나? 그게 된다면 앵간한 아딱이들은 룸 셰어 여관 생활을 보낼 텐데.
내 말에 도르카는 트레이를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일박 5쿠퍼짜리 2인실이 있으니까 거기서 지내셔. 아침식사는 2인분 나오지만 그밖의 서비스는 똑같아.”
여기에 2인실이 있었나. 여러 일행으로 돌아다니는 손님도 많을 테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나저나 5쿠퍼라. 하루에 딱 1쿠퍼 절약되는 셈이다. 그냥 1쿠퍼 더 내고 각방 쓰는 것이 낫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격이 애매한데. 방은 넓냐?”
“넓은가 좁은가는 개인의 의견이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결정해.”
휘익─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서 던지는 도르카. 나는 그것을 쉽게 낚아채고는 씨익 웃었다.
“땡큐. 그리고 오늘은 아침밥 얻어먹을 거니까 미리 준비 좀 해 주라.”
“그래. 창고에 맡겨놨던 짐은 어쩔래?”
“아니. 말하기 미안한데 확실히 묵을지는 아직 몰라서.”
“크크크. 그렇게 말한 놈들의 절반은 여기로 돌아오지.”
새끼 자부심 넘치는 것 보게. 나는 낄낄대면서 도르카에게 손인사를 하고 프랑이랑 2층으로 올라갔다.
“여관 주인들은 다들 붙임성이 좋으신 것 같아.”
2층으로 올라온 프랑이 말했다. 나는 열쇠에 적힌 방 번호를 확인하며 말했다.
“반대 아니야? 붙임성 없는 사람들은 진작에 망해서 안 보이는 거지.”
“앗…. 슬픈 현실이구나.”
“흐흐. 사르가디스가 시골 마을도 아니잖아. 어느 여관이든 손님 쟁탈전에서 내밀 자랑거리 정도는 있겠지. 가격이든 서비스든.”
떠들면서 방을 찾아 들어갔다. 5쿠퍼 받는 2인실답게 전체적으로 크기나 내장(內粧)이 1인실보다 나았다. 침대는 하나 뿐이었지만 말이다.
“프랑. 어때? 마음에 들어?”
“잠깐만.”
방의 침대나 테이블, 커텐 상태까지 꼼꼼하게 체크한 프랑은 잠시 후에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좋은 방이네. 5쿠퍼가 아깝지는 않겠다.”
“네 마음에 든다면 더할 나위 없지. 하루 묵어 보고 마저 정하자. 밥도 먹어 보고.”
“응. 가방만 내려놓고 가자.”
우리는 다시 1층으로 와서 공짜 식사를 먹고 하룻밤을 같은 침대에서 잤다.
그리고 프랑이 만족스러워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기에 묵기로 결정을 내렸다.
“크크. 내가 마음에 들 거라고 했지?”
“할 말이 없군.”
나는 도르카의 말을 인정하며 여관비를 결제했다.
겐트릭의 조언을 따라서 매일 아침마다 여관비를 내는 식으로 말이다.
아침해가 뜨는 이른 시각. 우리는 여관 무타라트의 아이들로 향했다. 베이냐 씨에게 인사를 하고 여관에 맡겨둔 프랑의 짐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아, 프랑 왔구나?”
여관에 도착하니 베이냐 씨는 여관 침대 시트를 세탁해서 널고 있었다. 이때가 가장 여관 주인이 한가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네. 안녕하세요, 베이냐 씨.”
프랑은 긴장한 모습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는 길에 내가 대신 말씀드릴까 하는 얘기도 했었는데 프랑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숨을 고르며 긴장을 가라앉힌 프랑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베이냐 씨. 오늘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프랑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랑 같이 묵기 위해서 여관을 옮길 생각이라는 얘기와 이제까지 알게 모르게 신세진 것에 대한 감사를 말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베이냐 씨네 여관에 묵지 못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프랑은 허리를 깊이 숙여서 사과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베이냐 씨가 프랑한테 크게 도움을 줬던 적은 없었다. 나랑 프랑 사이를 중재해 주기는 했지만 그것 외에는 돈을 받은 만큼 대가를 치뤘을 뿐이니까.
하지만 베이냐 씨가 알게 모르게 프랑을 딸처럼 아껴준 것도 사실. 그래서 프랑은 이렇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후후. 그래?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베이냐 씨는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피식 웃었다.
“우리 집에는 창고나 2인실을 안 만들어 놨거든. 혼자서 일하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받는 여관이라서. 그래서 언젠가는 프랑 너도 떠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베이냐 씨….”
프랑의 목소리에는 약간 물기가 어렸다. 그 모습에 베이냐 씨는 프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프랑, 죄책감 가질 것 없단다. 여관 일이라는 건 사람이랑 헤어지는 일이기도 해. 이런 일에 하나하나 감정을 써서는 너도 나도 피곤해질 뿐이야.”
“네, 네….”
“에구구. 울기까지 해서 어쩌게. 프랑 너, 이러고 헤어졌다가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면 얼마나 어색한지 아니?”
“죄송해요….”
눈물샘이라는 것은 사람이 컨트롤하기 힘든 부위였다. 닭똥 같이 흐르던 눈물을 닦으며 프랑이 훌쩍거렸다.
“저, 가끔씩 베이냐 씨랑 아저씨를 뵈러 올게요.”
“아니, 그러지 말렴. 헤어질 때는 다시 만나길 바라는 마음만 남기고 깔끔하게 이별하는 편이 낫단다.”
베이냐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프랑 네가 그렇게 종종 찾아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얼굴을 비추지 않게 된다면, 내 기분이 어떻겠니?”
“아…….”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거야. 그러니 우리 처음부터 ‘그 사람도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하는 생각만 남겨두자꾸나. 헤어진 사람까지 신경쓰며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어.”
“……네. 명심할게요.”
훌쩍이는 프랑의 머리를 빗질하듯이 쓰다듬으면서 베이냐 씨는 나에게 말했다.
“너한테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을게. 내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하지?”
“그래. 그거면 됐어. 평생 어린아이로 있을 것 같던 아이도 언젠가는 다른 가정으로 떠나 버리고는 하지. 우리 아들딸들처럼 말이야.”
씨익 웃은 베이냐 씨는 프랑의 등을 스윽 밀었다.
“가렴, 프랑. 네가 머물 곳을 찾았다면 나는 만족한단다. 그래도 정말로 자랑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 정도는 찾아와도 된다?”
─훌쩍.
코를 훔친 프랑이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후련한 미소였다.
“──베이냐 씨, 잘 지내세요!”
“그래. 너희 둘 다 잘 지내렴.”
그렇게 우리는 무타라트의 아이들을 뒤로 했다. 샘의 쉼터 여관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1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 여관은 나와 프랑이 첫 경험을 겪은 곳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곳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아무튼 여기가 프랑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서 다행이다.
베이냐 씨는 저렇게 말씀하셨지만 가끔씩은 꼭 찾아뵙도록 하자.
그로부터 약 3일에 걸쳐서 나는 논문을 완성했다.
아예 각 잡고 논문 제작에만 집중했다면 더 빨리 완성됐겠지만 매일 의뢰를 받고 일을 했기에 조금 늦어졌다.
수행한 의뢰는 브론즈 승급 의뢰가 아니라 아이언 클래스 의뢰였다. 그냥 먹고 살려고 고른 일들이다. 약초 채취나 도로의 쓰레기 치우기 같은 거 말이다.
승급 시험도 안 치고 아이언 클래스 의뢰를 받았던 것은 내 사정을 아는 프랑이 나를 기다려줬기 때문이었다.
“노르가 논문 다 쓸 때까지 기다릴게.”
프랑은 그리 말하면서 밤마다 간식이나 차를 사와서 내 일을 내조해 주었다. 약간 밤새 공부하는 아들한테 과일을 깎아 주는 어머니 느낌.
“따흐흑.”
우리 여친님의 섬세한 배려에 나는 아예 하루에 4시간씩 자며 논문을 완성했다. 승급 기준을 채워놓고 마냥 저급 의뢰만 하는 것도 바보짓이니까.
사실은 그러는 틈틈이 프랑이랑 같이 섹스 중에 일어났던 해프닝을 상담 받으러 가려 했다.
─나, 나 혼자 가도 괜찮아!
그런데 웬일로 프랑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면서 혼자 다녀오겠다며 내 동반을 사양했다.
부끄러워 하는 이유가 짐작이 갔기에 나는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나랑 같이 가서 진료받았다가는 저는 이 사람이랑 섹스했어요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을 테니까.
결국 신전에는 프랑 혼자 다녀왔다.
“신전에서는 뭐래?”
“으, 응. 얘기는 들었는데 별 문제는 없대.”
내 물음에 프랑은 낯뜨거워하며 진료결과를 읊었다.
“치료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지만, 그… 아기방이 움직이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래. 그래도 병이 들 수도 있으니까 치료 마법을 받거나 주의해서 하라셨어.”
꼼지락거리면서 말하는 프랑은 어딘가 야해서 쥬지콘다의 흥분을 유발했다. 그래도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았다.
‘일단 논문 일부터 끝내고.’
급한 불은 다 껐으니까 본업에 충실할 때였다.
참고로 프랑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논문은 1층으로 내려가서 썼다. 이세계의 여관은 영업시간이 끝나도 테이블은 안 치우는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보쇼.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진 모르겠는데, 댁도 이리 와서 끼지 그러슈?”
촛불 하나만 켜 놓고 쓰고 있으려니 잠도 안 자고 카드게임을 하며 놀던 행상인들이 나를 부르기도 했다.
“흐흐. 며칠 뒤에 일 다 보고 나서 끼겠습니다.”
“에잉. 그맘때는 우리도 바빠서 이러고 못 놀아.”
“아깝네요. 또 연이 닿는 일이 있겠죠.”
아무튼 그렇게 악마의 권유를 거절해 가며─이세계의 놀이는 별 재미도 없어서 거절하기도 쉬웠다─ 글을 쓰기를 며칠.
“다 됐다!”
유적을 발견한 날부터 시작해서 장장 12일에 거쳐 완성한 논문이었다.
완성된 논문은 자화자찬을 빼고도 나름 괜찮은 내용이었다. 예전에 쓴 걸작만큼은 아니어도 정기 보고서로는 충분하다.
주된 내용은 야수회귀에 대한 내용과 에린-얼스터-브리타니아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었다. 증빙자료를 첨부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급조한 것 치고는 괜찮았다.
‘시발. 다나가 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쪽팔리네.’
내 첫 현장직 논문이라서 알게 모르게 애착이 더 갔다. 다 쓴 논문을 잘 포장한 나는 그날 예약했던 의뢰를 마치고 운송 길드로 갔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복장은 당연히 아서 웨인의 코스튬을 입고 나갔다.
“여기 이 서류를 아인히르의 카르미네 대학 고고학부 앞으로 보내 주시오.”
벡터-근엄하게 말하기로 부탁하자 행상인은 꿀꺽 침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아, 아인히르까지면 요금이 조금 많이 나옵니다만….”
“상관 없소. 부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