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높은 금액을 치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잠깐 돈을 내면 매달 2실버를 받을 수 있는데 안 하는 놈이 병신이지.
“알겠습니다. 마침 오늘 저녁에 출발하는 운송 마차가 있습니다만, 거기 부탁하면 될까요?”
“잘 됐군. 기왕이면 빨리 가는 게 낫지. 그걸로 부탁하오.”
“예. 접수되었습니다.”
드르륵─.
튼튼하게 잘 포장된 논문이 제대로 운송 마차에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 운송 길드를 나왔다.
“쓰으으읍… 파아아아….”
밀렸던 일을 마친 나는 드디어 해방됐다는 기분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시발거 드디어 끝났네. 뒤지게 길었구만.’
사르가디스에 온 것도 오늘로 대충 2주 째인가.
이런저런 일도 많았지만 드디어 목표를 향한 첫 스텝을 밟은 느낌이었다.
‘브론즈 승급도 눈앞이고. 당분간 논문 걱정도 없고.’
이번 시험을 통과해서 브론즈를 달면 마나통을 늘려가며 토벌 의뢰를 위주로 받아야겠다.
저번처럼 후미진 곳에서 코스튬을 갈아입고 잘 챙겨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프랑. 다녀왔어.”
“아, 고생했어.”
채취 도구를 손질하던 프랑이 나를 보고 일어나려고 했기에 손을 들어서 말렸다.
“그냥 앉아 있어. 매번 나 나갔다 올 때마다 일어나는 거 힘들잖아.”
“싫다, 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노르가 싫은 게 아니면 매번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내 가슴에 뺨을 비벼대는 프랑. 진짜로 얘는 가끔 강아지 같을 때가 있다. 쥬지에 닿는 노브라 가슴만 빼고 말이다.
“푸으으….”
내가 침대에 눕자 프랑이 그 위로 올라탔다. 가슴 위에 누운 프랑은 내 심장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뻣뻣하게 선 쥬지에 스치는 허벅지의 말랑말랑함이 황홀하다.
─스윽 스윽.
프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을 만지는 것은 프랑의 스위치가 들어가버리기 때문었이다. 프랑의 머리카락은 머리카락대로 쓰다듬는 맛이 있다. 실크로 된 실타래를 만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진정된다.
“프랑. 연말에 연구비 나오면 장비부터 살까 하는데, 필요한 거 있어?”
나는 베개에 머리를 뭍으면서 물었다.
매해 연말에는 개인 연구비가 지원된다. 월급 2실버랑은 달리 큰 돈이 들어오는데, 현장직은 이걸 ‘유적 탐사비’라는 명목으로 개인 장비에 돌릴 수 있다.
“얼마 나오는데?”
“받아봐야 알겠지만… 10실버 정도?”
“엄청 많네. 그렇게 큰 돈을 현장직 학자를 하는 사람들한테 전부 뿌리는 거야?”
프랑이 몽롱한 얼굴로 물었다. 현실감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내 품에 안겨 있느라 넋이 나간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천만 원 가량의 금액이니까 놀라는 것이 정상이다. 고고학계가 매해 벌어들이는 돈을 감안하면 큰 돈은 아니지만 말이다.
“흐흐. 고고학계는 돈이 많거든. 왜? 프랑 너도 학자 하고 싶어졌어?”
“학자 말고 학자 아내 시켜 주면 안 돼?”
“그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것처럼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고.”
“정말? 고마워, 노르. 사랑해.”
“나도 사랑해.”
목덜미에 키스한 프랑이 내 옆에 누웠다. 나도 자세를 돌려 프랑에게 팔 베개를 해 주었다. 마나를 각성한 나에게 프랑의 머리 정도는 하루 종일 얹혀 있어도 무방한 무게였다.
프랑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장비라니 어떤 거? 무기?”
“뭐든 간에. 랜턴을 바꾸는 것도 괜찮고, 겨울이니까 좋은 방한구를 사는 것도 좋지.”
“승급 시험 의뢰를 보고 나서 정하는 건 어떨까?”
“연구비가 연말에 나오니 승급을 한참 뒤로 미뤄 놔야 할 텐데?”
“그러면 노르가 사고 싶은 걸로 사자. 내일 길드에 가서 의뢰를 받아 보면 필요하겠다 싶은 게 떠오를 거야… 읏.”
내 손이 어쩌다 프랑의 가슴에 닿았다. 프랑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웃으면서 윗옷을 가슴 위로 걷었다.
뽀얀 거유가 랜턴 빛 아래에 드러났다. 변함없이 색소침착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핑크색 유륜이었다.
“우리 노르는 정말 가슴을 좋아하네.”
프랑은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아 가슴에 묻었다. 나는 아무 저항도 않고 풍만한 가슴에 묻혀서 숨을 골랐다.
하룻밤 푹 자고 길드로 갔다.
“브론즈 클래스 승급 시험을 치루고 싶은데요.”
접수처에 가서 그렇게 말하니 접수원은 서류철을 뽑아 몇 가지 종이를 접수처 테이블에 펼쳤다.
“에이트리넨 씨, 노르드 씨. 두 분이 지금 고를 수 있는 승급 시험 의뢰는 이하와 같습니다.”
의뢰는 딱 3개 있었다. 브론즈 클래스 의뢰 중에서도 난이도가 적절한 것을 선별했다는 의뢰다.
1. 아르알뷘 마을의 고블린 퇴치.
2. 헤이스벤트 행 마차 호위.
3. 토두스툴 퇴치 및 채집
의뢰서를 훑어본 나는 보수의 높음에 내심 탄식했다. 모두 기본 20쿠퍼는 넘었다.
이것은 모든 의뢰가 하루이틀만에 끝나지 않는 의뢰이기 때문이었다. 시골 마을에 가서 고블린을 찾아서 퇴치하는 의뢰는 무려 50쿠퍼였지만 여기서 걸어서 3일은 걸리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브람마톤 교수님의 책에 적힌 대로구만.’
교수님의 저서는 브론즈 이상의 의뢰부터 제대로 된 내용이 시작됐다. 이미 내가 아는 지식은 어지간한 브론즈 클래스 모험가들에게 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 책에 의하면 당일치기 의뢰가 기본인 아딱이들과 달리 브론즈 이상의 의뢰는 먼 거리를 왕복하는 일이 많댄다.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언 클래스를 쓰지만 본격적인 의뢰나 중요한 안건에는 최저 브론즈 클래스의 모험가를 고용하는 편이 낫다.
그게 이세계인들의 기본 상식이라는 모양이다.
나는 프랑을 쳐다보며 말없이 의견을 물었다. 브리타니아 어에 능숙한 프랑은 의뢰서를 읽다가 물었다.
“여기 이 ‘헤이스벤트 행 마차 호위’는 출발일이 내일인데 받을 수 있는 거 맞나요?”
“예. 지원자가 없어서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으음.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왜지…?”
의뢰서를 읽으면서 프랑은 의아해 했다. 나도 신경이 쓰여서 프랑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어디 봐.”
“자.”
어깨 너머로 의뢰서를 보여주는 프랑.
의뢰 보수는… 20쿠퍼인가. 왕복 2일 거리에, 도시에서 하루 묵고 돌아오는 길도 호위다.
일당은 약 6쿠퍼. 프랑 말마따나 브론즈 의뢰로는 꽤 적절한 보수다.
위험도도 낮다. 들판에서는 몬스터랑 싸우게 되는 경우가 적다. 있어봤자 코볼트고, 코볼트는 병을 옮기지 않는 어드밴스드 쥐새끼일 뿐이니까.
그런데 3일 전에 올라온 의뢰가 오늘까지 남아 있다니? 이 행상인이 무슨 소문이 존나 나쁜 새끼라도 되나?
그때 가만히 있던 접수원이 눈치껏 설명을 해줬다.
“최근 들어 행상인을 습격하는 도적단이 창궐 중이라 호위 의뢰가 자주 반려되고 있습니다.”
“도적단… 이요?”
접수원의 말에 프랑이 인상을 썼다.
모험가 길드의 분류상으로는 도적에 속하는 프랑이지만 도적(Thief)과 도적(bandit)은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
프랑이 속한 ‘시프’는 판타지 게임의 직업 같은 거라서 여러 방면에서 손재주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반면에, 다른 뜻의 ‘밴디트’는 인간형 몬스터 취급이다. 도적에 대한 이세계인들의 인식이 그렇다.
역사적으로 파고들면 여러 이유가 나오는데, 장황하고 노잼인 이야기라서 나는 대충 이세계 문화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퉁쳐버렸다.
‘그나저나 우리한테 이유를 말해줄 줄은 몰랐는데.’
길드 입장에서는 의뢰를 받아줬음 하는 거 아닌가? 뭣하러 호구들이 낚이지 않게 도와주는 거람. 내 의문 어린 시선에 접수원은 익숙한 것처럼 말했다.
“길드장님 지시입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모험가들에게 제대로 고지를 해 두라셨기에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아하. 위에서 까라니까 까고 있는 건가 보다.
그러려니 하는 나에게 접수원은 묵묵하게 말을 이었다.
“헤이스벤트 인근에서 활동하던 도적단이 사르가디스까지 흘러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첫날은 행상인, 둘째 날은 모험가, 그리고 어제는 운송 마차까지.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보고되지 않은 사항까지 포함하면 더 많겠군요.”
내 말에 접수원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은 아니다. 의뢰서 위에 적힌 죽음에 사적인 감상을 표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저것이 접수원으로서 롱런하는 비결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프랑은 접수원이 되었다면 마음고생이 많았겠지. 나는 한숨을 쉬면서 의뢰서를 내려놓았다.
“도적단 때문에 모험가들이 이 의뢰를 피하는 거군요. 들판에서 도적들과 조우했다가는 숫자에서 밀리는 만큼 많이 위험… 해……?”
말을 하던 나는 등허리에서 올라오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잠깐만. 시발 방금 뭐랬지?
내가 한 말 말고. 저 접수원이 한 말 말이다. 뭔가, 뭔가 절대로 덤덤하게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 있지 않았나?
“……잠시만요. 아까 말씀하셨던 피해자 리스트,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아, 그러죠.”
접수원은 안경을 밀어올리고는 종이를 낭독했다.
“첫째 날은 행상인, 둘째 날은 모험가, 그리고 어제는 운송 마차입니다. 보고되지 않은 사항이나 헤이스벤트에서 일으킨 피해자를 제외하고도 매일 1회씩은 행인을 덮치고 있군요.”
운송 마차.
=운송 길드.
나는 어제 아서 웨인의 신분으로 카르미네 대학에 보내는 논문을 맡겼다. 그때 행상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밤에 출발하는 마차에다 맡기겠느냐고.
밤에 출발해서 아침에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행상인은 꽤 많다. 가까운 거리라면 더욱 그렇다. 하루 거리인 헤이스벤트에 가서 다음 운송 당번에게 운송품을 넘기려 했겠지.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내 논문은 어제 출발해서 헤이스벤트로 갔다.
보다 정확하게는── ‘갈 예정’이었다.
나는 의문점 하나 남지 않은 상쾌한 머리로 깨달았다.
도적단 새끼들이 내 논문이 담긴 마차를 쌔벼간 것이었다.
액땜.
그것은 미래에 있을 재앙을 미리 가벼운 불행으로 땡치는 유구한 한국인의 문화였다.
길가다 개만도 못한 견주(犬主) 새끼가 안 치우고 튄 똥을 밟았을 때, 오늘 차에 치여 뒤질 불행을 개똥을 밟은 걸로 액땜한 거라며 정신승리할 수 있는 훌륭한 문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어썸-제로썸한 사고방식을 처음 배운 유치원생 강북호(10분 전까지 잠자리 날개 찢다 옴)께서는 커다란 의문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쌤. 액땜은 좋은 일에는 안 일어나요?
아아… 그 뭐랄 순수함! 그 뭐랄 잔혹함!
유치원생 강북호의 말은 순수하기에야말로 입에 담는 것이 허락된 포악한 의견이었다!
잔혹하게 어른의 정신승리론을 파훼하는 논리!
액땜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반대로 복권에 맞을 수준의 행운을 작은 일에 낭비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당시 미끄럼틀에서 자빠져 떨어진 벡터맨 이글(7살)을 저 액땜-정신승리론으로 달래던 보육교수 눈나는 내 말에 뭐라 말로 형용 못 할 표정을 지으며 그리 말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시발 하는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맨날 애새끼들 달래기도 힘든데 옆에서 잠자리 날개를 들고 애를 쫓아가서 자빠트린 새끼가 저 지랄을 해댄 것이다. 육두문자가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훌륭한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그렇다면.
전혀 훌륭하지 못한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지금 그때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일까?
요 며칠 간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이 역(逆) 액땜 현상에 의해 오늘의 불행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소한 행운에 자신의 운명력을 낭비함으로써 막대한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들 인류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깔려서 살아갈 뿐인 노예였던 것이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휘릭휘릭!
프랑에게 사정을 설명하고서 아서 웨인으로 변장한 나는 광란하는 분노에 사로잡혀 사르가디스의 건물 위를 달렸다! 유소년 시절 스파이더맨을 보며 갈고 닦은 파쿠르로 목적지인 운송 길드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 모든 것은 나의 논문을 닌자해 간 씹새들에게 천벌을 내리기 위해서!!
운송 길드도 가오가 있지, 이 사단이 난 이상에는 토벌대를 꾸려서 정의의 납화살을 도적 놈들의 대가리에 심어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휘리리리리릭─!!
─척!
“허어억!!”
천공에서부터 720도 회전하며 착지하자 운송 길드에서 나오던 행상인이 화들짝 놀랐다. 나는 넘어지려는 그의 소매를 붙잡아 멈췄다.
“이거 실례했군요. 지나갈 건데 비켜 주시겠습니까?”
“히이이이익!!!”
“쓰벌.”
젠틀하게 말했는데 왜 저렇게 도망을 가는지 모르겠다.
세상만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이러니까 존나 학자가 고달픈 것이다. 미지를 파헤치는 직업은 언제나 고통 투성이의 삶을 살아가게 되니까.
인간은 평생토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걸까?
적어도 나는 지 친구 빤스도 훔쳐 입을 도적놈들의 새끼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흐으, 흐으, 흐으──.”
머리를 터트려버릴 것만 같은 분노를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운송 길드는 선객들로 인하여 이미 혼파망이었다.
“물건을 다시 찾기 곤란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이 망할 작자가!! 그 마나 포션이 얼마인지나 알아?!”
“그 그릇은 저희 어머니가 남겨준 물건이었다고요!!”
남녀노소를 불문한 십수 명의 선객들!
그들은 놀이동산에서 인형옷 알바를 쫓아간 자기 자식을 찾는 부모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지금의 운송 길드는 그야말로 택배물의 미아보호소와 같은 시장통이었다.
“지, 진정들 하시고 저희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대표로 보이는 머리 까진 상인이 말했다. 입읏 옷이 꽤나 고급스러운 재질이었다. 이 사태의 책임자인가?
그 하프-대머리 상인은 주위의 이목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아 외쳤다.
“보상!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뭐?”
나는 상인이 지껄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 대갈통 속에 존재하는 분노라는 이름의 짐승에게 날고기를 먹이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