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009)

“프랑. 여기 네 거.”

가게를 나와서 프랑에게 시계를 선물했다.

로맨틱하게 분위기를 잡아볼까도 했는데, 튼튼함과 가성비를 따진 시계라서 폼 잡기도 쪽팔렸다. 군대 갈 때 사주는 카시오 시계 같은 느낌이었으니 원.

“노르가 쓸 거 하나만 있어도 될 텐데…….”

아까 여관에서 해뒀던 말이 있기 때문인지 프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얌전히 내가 구매한 시계를 받았다.

“그래도 일할 때는 각자 시계를 하나씩 가지고 다니는 게 낫겠더라.”

티르시랑 이번에 도적단을 소탕할 때도 그랬다.

내가 거기서 시계가 있었더라면 돌입 시간을 정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불가능하니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도적단 우두머리가 타뷸라 급의 강자였더라면 자칫 티르시 혼자 놈과 맞딱뜨려서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프랑이 그런 위험을 겪게 할 바에는 그냥 돈 좀 쓰고 말지.

“준비물은 대충 이걸로 됐고, 여관에 돌아가서 가방이랑 식량을 챙겨서 출발하자.”

나는 시곗줄을 옷에 연결해서 품에 넣었다.

드디어 고블린 퇴치 의뢰 시작이었다.

브론즈 클래스는 애매한 입장이다.

회사로 치자면 대리 이하이고, 군대로 치자면 일병 3호봉 정도의 짬이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주변에서는 이쯤 됐으면 다 알아서 잘 하려니 하면서 방치하는 신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대로 가르쳐주는 경우도 없다 보니까 어설프게 자기 실력을 과신하다가 죽어나가기 시작하는 등급이기도 하다.

‘근데 그건 이제 막 아딱이를 졸업한 뉴비들 얘기잖아?’

내가 지금까지 싸워온 적들의 수준이 있는데 이제 와서 고블린 몇 마리 가지고 쪼는 것도 우습다. 우리 방심한 거랑 쫄아서 움츠러드는 것은 구분하도록 하자.

그래서 나랑 프랑은 준비물만 철저히 챙겨서 페르포트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동물들한테 물어볼 거지?”

프랑이 페르포트 마을로 뻗은 길을 걸으며 물었다.

“응. 아마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아. 주변에 사는 동물한테 물어보고, 곧장 퇴치할지 아니면 여관을 잡아서 하룻밤 자고 도전할지 정해 보자.”

프랑에게는 어젯밤 도적단 소굴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하면서 내마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정확하게는 그 마법이랑 비슷하면서도 더 간편하고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마법이니까, 비밀로 해 달라고 말이다.

‘프랑한테라면 번역능력을 얘기해도 괜찮았겠지만…….’

아직 이야기를 전부 풀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느낌이 들었다.

번역능력 얘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그 능력은 어떻게 얻었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테니까.

거기서 지구 얘기를 하자니 너무 스케일이 크고 감당 못 할 내용이다. 그렇다고 대충 둘러대자니 그건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이 되어 버린다.

‘그래도 조만간 얘기를 해야겠지.’

내가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을 프랑이 알면 크게 상심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없도록 올해가 끝나기 전에 미리 얘기를 해 두자.

우리는 하급 모험가들답게 두 발로 열심히 걸었다.

나랑 프랑은 하루 종일을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 일반적인 여행객보다 빨리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히이이잉…….

길을 걷는데 옆의 목장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운 빠진 말 같은 소리였다. 침대에 누워서 골로 가기 직전인데 똥이 마려운 상황에서나 나올 법한 울음소리였다. 세상 비극적인 울음소리라서 그야말로 ‘울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뭐야, 지금 이 소리?”

“하말의 울음소리인가 봐.”

“하말?”

“응. 저기 있잖아.”

프랑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목축지의 마굿간에 존나 좆 같이 생긴 생물이 보였다. 하마랑 말을 섞어서 다리털을 3배로 늘린 것처럼 생긴 생물이었다.

그 생물을 쳐다보며 프랑이 말했다.

“이쪽 목축지에서 하말도 길렀구나. 몰랐어.”

“하말이라. 어디서 들어 봤는데. 혹시 ‘등에 남 태운 하말 같이 군다’는 속담의 그 하말이야?”

“맞을 걸? 나는 브리타니아 속담은 잘 모르지만.”

하말.

이세계의 게으른 생물 중에 대표격인 생물이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는 몰랐는데, 속담이나 관용구 중에서 가끔 들어본 적은 있었다.

“저 아이들은 등에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짊어지면 곧바로 일을 하기 싫어한대. 그래서 ‘남들 좋은 일은 안 시키는 이기적인 말’이라고 불려.”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당연한 것 아닌가.”

이세계인들도 좆간답게 가축을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으로 구분짓는구나. 참 슬픈 사실이라 하겠다.

‘게으름이라.’

등에 뭔가를 짊어졌을 때만 게으르게 군다니. 저 놈들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뭔가를 짊어지지 않았을 때는 발도 빠르다고 하니까 잠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목축지 농장은 가축을 대여해 주기도 하니까.

나는 흥미가 돋는 느낌에 프랑에게 말했다.

“프랑. 잠깐 가 보지 않을래?”

“응? 아, 노르가 가고 싶은 거면 같이 가 보자. 나도 오랜만에 보고 싶다. 고향에서는 자주 봤었거든.”

그렇게 우리는 하말을 기르는 농장으로 들어갔다.

“거기 뉘슈?”

농장 울타리를 넘자 딱 봐도 양치기처럼 가축을 잘 기르게 생긴 아재가 우리 앞에 나오면서 물었다. 허리춤에 가축 도둑이나 늑대를 죽이기 딱 좋아 보이는 막대기를 차고 있다.

“지나가던 모험가입니다. 이 농장에서는 하말을 대여해 주십니까?”

저번처럼 도둑놈 취급 받으면서 선빵 쳐맞기 전에 빠르게 자기소개를 했다. 내가 목적을 밝히자 그 아재도 어깨에서 힘을 뺐다.

“뭐야, 그런 거면 정문에서 들어오지 왜 이리 오셨대.”

“흐흐. 농장이 이렇게 크니 정문이 어디인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이 커다란 농장을 혼자 관리하시는 겁니까?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나 혼자 하겠어. 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지.”

짧게 아부를 떨어주자 아재는 기분이 좋아져서는 경계심을 완전히 뺐다. 근데 아재요. 솔직히 여기가 그렇게 큰 농장은 아닌데요.

“하말을 보러 오셨댔남? 이리들 오슈.”

우리는 농장의 목축지를 지나서 하말이 가득한 마굿간으로 갔다.

가까이서 보니 이 하말이라는 새끼들은 싹 다 안락사 약물을 투여받은 실험용 모르모트 같은 얼굴을 한 놈들이었다.

시벌 보고만 있어도 기운 빠지네. 프랑도 흠칫거렸다.

“기, 기운이 없어 보이네. 내가 어렸을 때 봤던 하말들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전에 하말을 본 적이 있다던 프랑까지 저러니 나는 주인 아재에게 눈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니가 개판으로 길러서 그러는 거 아녀? 하고 말이다.

“얘네는 날이 추우면 유독 기운이 없수다.”

당당하게 말하는 농장주 아재. 뭐, 저게 진짜든 구라든 나는 이 놈들한테 직접 물어보면 된다.

“히흥 히응히? (너희 뭐 불편해서 그러냐?)”

프랑이 주인 아재한테 요금이나 대여 방법을 물어보는 동안에 작은 소리로 그리 물었다.

하말들은 내가 지들 말을 써서 말을 걸자 잠시 신기해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히응 히이이잉. (겨울은 졸려.)”

“히히힝. 히이이잉. (맞아. 졸려.)”

이 씹새들 진짜 게으름쟁이 맞는 거 같은데.

아니면 겨울잠 자는 애들인가? 궁금한 것이 또 생기기는 했지만 그건 주인 아재한테 물어봐도 되는 부분이다. 그러니 신경 쓰이던 것을 곧장 물었다.

“히흥 힝 히잉힝히이? (너희 왜 사람 태우기 싫어해?)”

“히힝 히잉이히히힝힛!! (우린 사람 태워주고 싶어!!)”

“히익!”

깜빡이도 없이 동물 새끼들 종특인 떼창을 시전하는 하말 새끼들. 뒤에서 얘기하던 두 사람도 화들짝 놀랐다.

“뭐, 뭐요?! 무슨 짓을 하셨수?!”

“넹? 저요? 전 아무 것도 안 했는데용?”

벡터-시치미 떼기로 모르는 척을 했다. 난 질문을 했을 뿐인데 얘네가 뜬금포로 지랄을 해대는 거다. 나야 모르는 일이다, 이 말이야.

“워~ 워~!!”

다행히 하말들은 농장주가 진정시키자 다시 특유의 뒤질 것 같아 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농장주는 혀를 내두르면서 프랑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수? 얘들이 성격은 순한디, 사람이 올라타는 것을 싫어한다고.”

아마 둘이서 그런 얘기를 했었나 보다. 나는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사람을 태우는 걸 싫어하는데 왜 이동수단으로 씁니까?”

“성격이 순하니까 그렇지.”

시발 순환화법 실화냐. 결국 얌전하니까 억지로 올라타서 부려먹는다는 소리 아녀.

다시 농장주가 얘기하러 간 사이에 하말한테 물었다.

“힝 히잉 힁이히? (왜 사람을 못 태우는데?)”

“흐이히힝 히. (가려워서 그래.)”

“휘이잉 흐잉히힝. (몸이 가려워.)”

“몸?”

사람이나 짐을 태우면 몸이 가려워진다니? 피부가 약해서 그런 걸까?

아니, 피부 문제면 목축인들이 모를 것 같진 않은데. 얘네 털이 뒤지게 많기는 해도 여름철에는 밀거나 할 것이었다.

“타 보시겠수?”

상담을 마치고 온 농장 아재가 마굿간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놈 1마리를 끌고 나와서 안장을 채웠다.

나는 사양 안 하고 하말 위에 올라탔다.

─푸르르릉?

푸레질을 하면서 몇 걸음 걸어보던 하말은 이번에도 존나 뜬금없이 풀발기를 하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히이이이잉흐잉히힝!!!!!! (안 간지럽다!!!!!!)”

이 씨발 새끼 또 왜 이래!! 나는 떨어질까 무서워서 그만 하말의 목을 꽉 붙들었다.

“히흑!!”

초인적인 완력에 목이 조여지자 그 새끼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진정했다. 역시 미친 새끼한테는 매가 약이었던 것이다!

“세, 세상에!! 하말이 사람을 그리 쉽게 등에 태우다니!!”

농장주가 상식을 부정당한 수학과 대학원생처럼 외쳤다.

근데 이 미친 눈깔장애 비스트 테이머 새끼가? 니 눈에는 지금 내가 이 씹새 등에 쉽게 탄 걸로 보이냐? 여기서 똑 떨어져서 골로 갈 뻔 했는데?

“비법, 비법을 알려주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하말 한 마리 정도는 무료로 대여를 해드리겠소!! 아니지, 지금 타신 하말을 아예 가져가셔도 상관 없소!!”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타니까 되든디.”

골때리는 호소에 나는 성질을 냈다. 진짜로 왜 이 워킹 말똥 생성장치 새끼들이 저 지랄들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하면서 내가 탄 하말 주위를 뱅뱅 도는 농장주 아재.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프랑이 말했다.

“저도 한 번 타 봐도 될까요?”

농장주 아재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꿍얼거리다가 프랑의 그 말에 포기한 것처럼 머리를 긁었다.

“아휴, 스벌꺼. 그러쇼. 나는 대여증이랑 장부를 가지고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농장주 아재가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프랑은 참고 있던 것을 풀어헤친 듯이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노르. 하말들이 뭐래? 왜 노르는 등에 태워주고도 그렇게 힘이 넘치는 거야?”

“글쎄, 그걸 모르겠다. 일단 얘네가 남을 태우기 싫어하는 이유는 몸이 간지러워져서라는데.”

“간지러워진다구?”

“자기들이 말하는 거니까 맞겠지. 프랑 너도 타 봐.”

얘네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지랄을 떠는 거겠지. 프랑은 내 말을 따라서 하말의 위에 올라탔다.

“허미. 잘 타네.”

키 문제 때문에 도와주려고 했는데 혼자서 훌쩍 올라타버렸다. 우리 프랑 몸놀림 가벼운 것 보소.

그런데 그 가벼운 프랑이 등에 올라타자 하말 새끼는 밥그릇을 빼앗긴 개처럼 축 늘어졌다.

“히잉…….”

─부르르르.

아주 몸까지 떨어대면서 싫은 티를 낸다. 대체 어떤 뇌 구조를 한 새끼들이길래 저 가볍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프랑을 나 같은 덩치 큰 마초보다 더 태우기 싫어하는 것이지?

나는 여름철 부랄처럼 늘어진 하말의 몸을 긁어줬다.

“히으으잉 흐잉히힝? 히읭? (어디가 간지러워? 여기?)”

“히의이힝힝. (반대편.)”

“히읭? (여기?)”

“히헹헹힝힝! (좀만 더 아래!)”

농장주가 없는 틈을 타서 대화를 하면서 간지럽다는 곳을 계속 긁어주었다.

그렇게 5번째로 긁어주자 하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새끼가 오줌을 지리려고 이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걸로 더 이상 간지럽게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히이이이잉흐잉히힝!! (안 간지럽다!!)”

“조용히 하세욧!!”

“히흑!”

목에다가 빠르게 날린 잽으로 하말을 닥치게 했다. 존나게 유난을 떨어대요 아주. 이게 어딜 봐서 게으른 동물이야.

“잘들 타셨군. 1마리 빌려가시겠슈?”

나까지 올라타서 탑승감을 점검하고 있자 농장주 아재가 돌아왔다. 안장에서 내려와서 지갑을 꺼냈다.

“며칠 빌려가죠. 얼마입니까?”

“하말은 느리고 게으른 놈이라서 대여료는 일당 1쿠퍼요. 등에 뭘 실지를 못하니 농삿일에나 써먹는데, 그럴 때도 게으름을 피우니 원.”

하루 1쿠퍼라. 존나 싸네.

“보증금 포함해서 30쿠퍼요.”

시발 말하기가 무섭게 가격대 3000% 상승하기 있냐?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돈을 지불했다.

“돌아오면 댁들이 빌려간 날만큼 차감해서 돌려주겠수다. 갖고 튈 생각은 말고. 가축은 재산으로 분류되서 경비대에서 도적단으로 간주할 거요.”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십쇼.”

나는 돈을 지불하고 하말 위에 올라탔다. 대충 눈치를 보니까 하말이 왜 이렇게 의욕만만한 건지 묻고 싶은 모양인데,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방법을 알려줘서 뭐해.’

남들이 얘들 가려운 곳을 알아차릴 것 같지도 않고, 이 인간이 내가 알려준 걸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거나 하면 난 배가 아파서 뒤져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렇다고 논문으로 쓰기도 뭣했다. 이세계에서 생물학과는 21세기 지구의 국문과처럼 장래성이 없는 학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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