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009)

짐도 풀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적당한 여관을 잡았다.

무려 투사의 낙원이라는 이름의 여관이었다. 발할라도 아니고 이름이 뭐 저따구야. 들어가면 못 나올 같은 이름이군.

“일박 2쿠퍼입니다!”

상큼한 미소를 짓는 소녀 웨이트리스에게 돈을 지불하고 방을 빌렸다. 식사값까지 포함해서 4쿠퍼를 내고 짐부터 풀러 방으로 올라갔다.

“이제 돌아가서 보고하면 우리도 브론즈 클래스겠네?”

짐을 풀어놓은 프랑이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뻐하기에는 이번 의뢰가 조금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잖아? 위험한 일 보다는 낫지. 좋은 게 좋은 거야.”

내가 아서 웨인의 코스튬을 잘 감추며 말했다.

이번 의뢰는 호위 안 해도 되는 호위 의뢰일 거라는 생각으로 냉큼 붙잡은 거였다. 저번 고블린 퇴치 사태처럼 귀찮고 빡치는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낫다.

“으음. 마음 놓고 기뻐해도 되려나?”

“애들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텐데 이거면 됐지.”

“그렇겠지?”

프랑은 표정이 풀리더니 헤실거리면서 내 품에 달려왔다. 내가 갑옷을 입고 있어서 안기는 기분은 최악일 텐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이다.

“헤헤. 왠지 신기하다.”

“승급했다는 사실보다 노르랑 같이 해냈다는 기쁨이 더 큰 것 같아.”

“흐흐. 나도 그래. 돌아가면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자.”

나는 프랑의 머리를 살살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내일 아침에 가면 쓰고 논문을 내고 올게. 타뷸라의 가면은 들키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프랑 네 걸 빌려써야겠네.”

“푸흐흐. 노르한테는 사이즈가 작을걸.”

“이런. 그럼 천으로 얼굴을 빙빙 감고 가야겠군.”

우리는 애정행각을 나누다가 아래층으로 갔다.

이쪽 여관 저녁밥은 소세지 찜이나 닭다리 조림 중에 하나를 골라서 먹을 수 있었다. 난 소세지 찜을 시키고 1분만에 후회했다. 뒤지게 짜 시발.

소금 절임 같은 소세지를 물과 빵으로 욱여넣으며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이제 8시였다. 씻으러 가도 괜찮은 시간이다.

“아가씨? 이 동네는 목욕탕 위치가 어딥니까?”

“콜로세움 동문 쪽으로 쭉 가시면 나와요.”

웨이트리스는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는 느낌으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저녁 시간대여도 가게가 작아서 별로 안 바쁜 모양이었다.

“손님들, 목욕탕 가시게요?”

“예. 저희가 깔끔한 걸 좋아해서.”

“그러면 10시 이후에나 가시는 편이 나아요. 이 시간대는 엄청 붐벼요. 여탕은 빵 반죽처럼 사람끼리 살을 치대고, 남탕은 좁아가지고 알몸으로 탕 밖에서 기다려야 할 걸요.”

시발 그게 무슨 지옥도냐. 사내 새끼들끼리 알몸으로 좁아터진 곳에서 낑낑댄다니 무슨 장기 훈련 직후의 군대 목욕탕도 아니고.

“늘 그렇게 붐빕니까?”

“저희 집은 욕조가 있어서 매일 그런지는 잘 모르겠네요. 대중 목욕탕은 8시에서 12시까지 여는데, 그때는 제가 일하느라 목욕탕을 못 가서요.”

“고생이 많으시군요.”

“익숙하죠 뭐. 그래도 손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10시 넘어서 가면 꽤 한적하대요. 그것보다 더 늦게 가면 시간에 쫓기면서 씻어야 한다고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면 아침 4, 5시에 일어나는 이세계인들에게 목욕시간은 10시까지가 마지노선일 것이었다.

존나 10시에 목욕하러 갔다간 돌아와서 곧바로 드르렁 해도 12시 취침이다.

마나를 각성한 사람도 하루 4시간도 못 자는 생활은 오래 못 버틴다. 나도 아직 수마(睡魔)에는 못 당하지 않던가. 존나 개씹 철인이 되어도 수면부족은 집중력과 건강의 주적이다.

“쓰읍……. 프랑. 어쩔래? 나는 부대끼면서 씻기는 싫은데. 몸을 닦고 나오는 동안에 도로 땀 범벅이 될 것 같아.”

“나도 그래. 하는 수 없지. 얌전히 10시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인간 사우나를 기피한 우리는 여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앞치마에 손을 닦던 웨이트리스가 말했다.

“가만히 기다리기가 심심하시면 서커스라도 보러 가시면 어때요?”

“서커스요?”

꽤나 돌연한 단어에 프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저희 도시에 로마니아에서 왔다는 서커스단이 2개나 머무는 중이거든요. 콜로세움에서 9시부터 10시 반까지 해요.”

웨이트리스는 심통이 난 듯이 입술을 삐죽댔다.

“그거 보러 간다고 술 마시러 오는 사람도 줄었죠. 덕분에 가게는 이렇게 한적한데 저는 아빠한테 귀를 잡혀서 보러 가지도 못하고, 손님들한테 물어보며 상상이나 하는 처지──”

“케이트!! 너 또 손님한테 푸념이나 하고 있지!!”

주방에서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웨이트리스는 벌벌 떨며 우다다다 주워섬겼다.

“아무튼 꼭 가 보세요! 그리고 저한테 소감을 들려 주시면 감사하겠구요!! 저는 아빠한테 혼나게 생겼으니 이만 실례할게요!!”

쌔앵─!

뒷문으로 닷지한 웨이트리스를 콧수염을 기른 주방장 아재가 쫓아갔다. 그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추격쇼에 쿡쿡 웃은 프랑이 내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노르. 나 있지, 살면서 서커스를 봐 본 적이 없는데…….”

“그래? 그럼 가 볼까?”

우리 여친님이 보고 싶다면 드래곤 둥지여도 가 봐야지.

“와! 노르 최고!”

프랑은 만세를 하며 기뻐했다. 승급이 확정났을 때보다 더 신나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뭐, 이유가 뭐든 프랑이 기쁘다면 나도 기쁘다.

우리는 음식을 깨끗하게 비운 식기를 대충 테이블에 정리해 두고 콜로세움으로 갔다.

저녁 9시에 공연을 여는 것은 되도록 많은 손님을 받기 위해서일까. 수확철이니까 대낮에 열어도 한가로운 사람이나 부자들밖에는 안 오겠지.

내 생각이 맞았는지 콜로세움으로 가는 도로에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야!! 뛰어!! 좋은 자리 놓치겠다!!”

“똑같은 돈 내고 맨 뒷좌석에서 앞에 앉은 놈들 뒤통수나 보다 오는 건 사양이야!!”

목욕하고 나와서 머리도 덜 말린 사람, 하루 종일 안 씻었는지 얼굴에 검댕이 범벅인 사람까지. 온갖 인간군상이 한 곳을 향해서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자리 쟁탈이 심한 것 같네.”

프랑이 조금 초조한 느낌으로 말했다.

기껏 보러 간 서커스가 맨 뒷좌석이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도 우리 프랑이 처음으로 보는 서커스인데! 그리 생각한 나는 어깨를 풀고 프랑을 업어들었다.

“꼬마기관차 노르드 운영 재개야.”

“푸흐흐. 공주님도 아니고 매번 업히기만 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덧 익숙해졌는지 놀라지 않고 내 목에 팔을 감는 프랑. 솜털 하나 없이 맨들맨들한 뺨에 키스해 주고 나는 야수회귀를 켰다.

사랑의 심야할증이 붙은 마초이즘 야간택시는 그렇게 기어를 넣었다.

“칙칙폭폭 땡!!!”

“으허어억?!”

“뭐, 뭐야?! 서커스단에서 동물이 탈주했나?!”

놀라는 사람들을 제치고 대쉬! 길이 막히면 근처의 튼튼해 보이는 건물을 발판으로 써서 밟거나 뛰거나 하면서 콜로세움에 도착했다.

휘익─!

“꺄앗♡!”

마지막으로 1층 높이에서 낙하하면서 착지하자 프랑은 즐거워하는 비명을 질렀다. 내 목을 끌어안느라고 뺨이 부비부비된 것이 부수입이었다.

“이런. 동종업자십니까?”

입구를 담당하던 서커스단원이 익살맞게 농담을 했다. 난 프랑을 내려주면서 지갑을 꺼냈다.

“설마요. 손님이죠. 입장료는 얼마입니까?”

“오! 그러셨군요. 이거야 실례! 입장료는 어린이 3쿠퍼에 어른 5쿠퍼랍니다!”

씨발거 가격 책정 실화냐? 얼탱이가 밤탱이가 되서 불알이 부랄랄 떨렸다. 서커스단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문안인사가 목까지 기어나왔다가 목젖을 한 방 갈기고 도로 들어갔다.

서커스 관람비가 우리 둘이서 10만원.

‘준내 비싸네.’

그치만 나는 쿨하게 돈을 지불했다. 사내새끼가 여친 앞에서 이런 이벤트의 입장료에 빌빌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벌이가 안 좋다면 여친이 이해해줄 수도 있지만, 돈벌이도 괜찮은 주제에 여친이 좋아하는 데이트 코스에서 가성비를 따진다?

그것도 평소에 여친이 해주는 요리는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 여친한테는 1쿠퍼짜리 국밥만 먹이는 놈이?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서커스는 이세계의 몇 안 되는 시각적 오락이다. 영화관을 여러 번 어치 몰아서 갔다고 생각하자.

“감사합니다! 여기 선남선녀 두 분께 하룻밤의 마법을 걸어드릴 입장권입니다!”

서커스단원은 과장된 몸짓으로 종잇조각을 건넸다.

“저희들 플랑궁쿨라(plangúncŭla)! 최고로 즐거운 눈요기를 선사해 드리죠!”

날짜와 도장이 찍힌 입장권이다. 이걸 안쪽의 경비병한테 보여주고 통과하는 건가 보다.

“플랑궁쿨라……? 내 이름이랑 약간 비슷하다! 노르, 무슨 뜻인지 알아?”

“밀랍으로 만든 인형일걸.”

“인형? 공연 중에 인형극이라도 하려나?”

프랑은 5쿠퍼나 하는 종잇조각을 소중하게 꼭 쥐었다. 그 티켓을 보여주고 우리는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웅성웅성웅성!!

콜로세움 안에는 사람이 수백 명 넘게 모였다.

자리는 선착순인가. 거의 절반 가까이 차 있었기에 되도록 앞쪽에 갔다. 이 정도면 나랑 프랑에게는 별로 멀지는 않은 거리였다. 키 문제만 빼면 말이다.

“……안 보여!”

프랑이 까치발을 서거나 폴짝댄 끝에 풀이 죽었다.

“흐흐. 이리 와. 목말 태워 줄게.”

“뭐, 뭐?! 시, 싫어! 어린애도 아니고!”

신장 때문에 이런 것에 예민한 프랑은 살짝 성을 내며 싫어했다. 하지만 내가 등을 보이면서 어깨를 툭툭 치자 결국 마지 못한 듯이 올라탔다.

“으으……. 이 높이에 올라오니까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다 어린애잖아…….”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리는 프랑.

그 말에 나는 주변에서 나처럼 목말을 태운 사람을 쳐다봤는데, 멀리 떨어진 좌석에서 어느 남자 꼬맹이가 프랑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였다.

키가 작아서 동년배인 줄 알았나? 프랑의 폭력적인 가슴에 성에 눈을 뜬 걸지도 모른다.

‘근데 요 발랑 까진 꼬맹이가?’

감히 우리 프랑한테 눈독을 들여? 나는 프랑 몰래 살의를 담은 시선으로 꼬맹이를 째려봤다. 그 꼬맹이는 숙련된 모험가의 살기에 부르르 떨더니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고서 다시 콜로세움의 무대를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기다리자 사람들이 계속 몰려와 우리 뒤를 채웠고, 모래밭 중앙에 남성용 연미복을 입은 여성이 걸어나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은 저희 ‘서커스 플랑궁쿨라’에 찾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마 대표자── 그러니까 서커스단장이겠지. 나이는 30대 정도인가? 꽤 젊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리면서 확성 마법이 달린 막대기에 대고 말했다.

“처음 뵙는 분들께는 환영의 인사를!! 다시 뵙는 분들께는 기쁨의 인사를!! 오늘밤 찾아오신 여러분들께 최고의 추억을 선물할, 저희 자랑스러운 서커스단원들의 일대 쇼!!”

발을 척 모은 서커스단장이 검지로 밤하늘을 가리키며 드높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부터어어──!! 시이이─ 작!!! 합니다아아──!!!!”

─퍼엉!!

콜로세움의 입구에서 폭죽 같은 것이 터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나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마법의 일종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코끼리 보여줘, 코끼리!!!!”

“라리루라!! 라리루라!! 라리루라!!”

─짝짝짝짝짝짝!!!!

달아오른 분위기에 주변 좌석을 채운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질러댔다. 근데 앞뒤로 손을 올려대니까 무대가 잘 안 보인다. 시발럼들 무대 매너가 없구만.

─뿌오오오오!!

서커스의 시작을 장식한 것은 커다란 코끼리들이었다.

회색 덩치에 길쭉한 상아까지 달린 코끼리 2마리가 몸에 체크 무늬 옷을 입고서 무대를 뱅글뱅글 돌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경쾌하게 춤까지 춰대는 것이 내 기준으로도 심히 신기했다. 마치 동물원에서 재롱을 피우는 동물을 보는 느낌.

“노르! 저것 봐!! 무지 크다!!!”

21세기 지구인인 나조차 그랬으니, 서커스를 처음 본다는 프랑은 오죽할까.

우리 프랑은 무대 중앙의 서커스단장이 젓가락처럼 보이는 코끼리의 덩치에 눈 깜짝할 사이에 텐션이 올라버렸다. 저 서커스단장은 이걸 노리고 초반에 임팩트 있는 생물을 배치한 거겠지.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게!! 엄청 크다!!”

나는 프랑의 흥분을 방해하지 않도록 신명난 분위기로 대답하고 서커스 쪽에 눈을 돌렸다.

─두다다닷!!

코끼리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인지 사람만큼 작은 녀석이 튀어나와서 무대 중앙으로 달려갔다. 그 놈도 체크 무니 서커스단원 옷을 입었다.

입구에서 나타난 서커스단원이 커다란 공을 던졌다. 연금술로 만든 고무공 비슷한 짐볼이었다.

코끼리는 거기에 올라타서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았다. 나도 그 모습에는 가식 없이 흥분했다. 이 시발! 영화관에서나 보던 것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오오, 올라탔어!! 올라탔다고!!”

“공이 안 터지나?! 의외로 가벼운가?!”

“이 씨발, 내 등에 포도주 쏟은 새끼 누구야!!”

관객들도 제각각 흥분하면서 외쳤다. 프랑도 몸을 움직이며 흥분을 표시했다. 뒤통수에 프랑의 고간이 닿자 여성 특유의 향기로운 체취가 났다.

시발 존나 다른 의미로 흥분되네. 이 서커스 4D임?

그때였다. 내가 프랑의 체취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입구에서 어떤 여자애가 뛰쳐나왔다.

─휘리리릭! 척! 팽그르르!!

그 여자애는 백덤블링에 옆구르기, 공중 3회전까지 온갖 화려한 기예를 뽐내며 무대 중앙까지 아크로바틱하게 이동해서 공 위에 탄 코끼리를 향해 점프했다.

“뿌오오오오!! (야호!!)”

꼬마 코끼리가 기합을 넣으며 나타난 여자애를 태웠다.

존나 놀랍게도 여자애는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으로 볼 위에 탄 꼬마 코끼리를 짚고 회전하면서 그 길쭉한 코 위에 착지했다.

짐볼 위에 꼬마 코끼리! 그리고 그 코 위에 여자애!

균형 감각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초인적인 움직임! 지구의 서커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에 과연 나도 입이 떡 벌어졌다.

코끼리 코 위에 올라탄 여자애는 빙긋 웃으면서 색종이 조각을 뿌렸다. 그 여자애에게 집중한 사이에 콜로세움의 무대 곳곳에 모여든 악대들이 악기를 연주했다.

─빠바바밤!!

빠바밤─! 빰! 빠아아아아아아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