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009)

‘저택에 있을 때부터 영주한테 뇌물이라도 먹여뒀을지도 모르잖아?’

여기 영주의 성격은 대충 파악이 된다.

콜로세움과 서커스는 활발한데 고아가 많다. 돈이 드는 목욕탕은 밤에만 운영한다.

이것만 놓고 봐도 정상적인 새끼는 절대 아닐 것이었다.

경비대의 성실함과 영주의 인격은 별개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지만 영주가 서민 생활에 관심이 없으면 조금 얘기가 다르다.

근데 내 짐작이 맞다면 답이 없는데.

명백한 증거를 찾아서 내밀기 전까지는 이 놈들을 체포할 껀덕지가 없었다. 여기 새끼들도 하루 이틀 이 지랄을 한 놈들이 아닐 텐데, 내가 탐정도 아니고 증거를 어떻게 모은단 말인가!

정말로 영주가 뇌물을 쳐먹었다면 손절각이 서기 전까지는 이 놈들을 변호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는 존나 신분주의의 앞에 단두대에 목이 마밋! 하고 날아가버리고 말겠지.

‘염병. 여관에서 프랑이랑 상의를 해 보고 결정해야겠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울적해하는 프랑에게 말했다.

“프랑. 여기 있어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이만 여관에 가서 쉬자? 응?”

“으응. 그래.”

─끄덕. 수긍한 프랑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라리루라도 우리를 따라서 엉덩이를 들었다.

“돌아가실 건가요?”

“어. 나도 프랑도 오늘은 뭘 할 기분이 아니야.”

“저도에요. 단장님한테 혼나고 기분을 일신해서 밤의 쇼가 열릴 때까지 마음을 추스러야죠.”

“후훗.”

농담하듯이 말한 라리루라 덕분에 프랑이 살짝 웃었다.

나는 라리루라의 프로 정신에 감사하면서 개씨발 이세계의 애1미없음랜드를 벗어났다.

“여는 또 오데고??”

아니 시발, 벗어나려고 했다.

천막이라는 천막이 죄다 똑같이 생겨 쳐먹어서 당최 어디로 가야 출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정교한 진법에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것은…… 마교의 절기, <미혼표식구궁진>!!”

“저기요. 출구는 저쪽인데요.”

“앗, 네.”

라리루라의 말을 따라서 행선지를 U턴한 우리.

그러나 거짓말처럼 한 바퀴 돌아서 아까 있던 찻집으로 돌아와버린 것이 아닌가?

“출구가 이쪽이라던 년은 앞으로 나오시오.”

“자, 잠시만요!”

내가 정색을 빨고 부르자 급하게 자신의 옆구리를 가리는 라리루라.

“제가 그, 도시 사이를 이동할 때 빼고는 숙소 주변에만 머물러서 길잡이 능력이 부족하긴 해도! 이건 전적으로 제 책임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정말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하는구나.”

쳐 맞는 소리 새끼야.

나는 라리루라의 머리에 딱밤을 놓았다. ─따콩! 이마가 튕겨진 라리루라는 울상을 지었다.

“으그극!! 후배 주제에 건방져요!!”

“자꾸 까불면 가면에 새긴 룬 풀어버린다? 네가 쫓겨나는 걸 따라가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죄송해요그러지마세요저단장님한테혼나요!!”

“리허설 빼먹었으니까 혼나긴 하겠지.”

“제 파트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으니까 땡땡이니까 가볍게 혼나고 끝이지만, 다른 서커스단에 몰래 들어가서 사고를 쳤다가는 제대로 혼쭐 난다구요!”

“알겠으니까 얌전히 있어. 내가 알아보고 올게.”

말했다시피 여기는 놀이동원 느낌이 드는 넓은 부지였다. 나는 천막 중에서 활짝 열려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아직 훈련이 덜 된 것으로 보이는 동물들이 모여 있었다. 마침 코끼리 1마리가 나를 쳐다보길래 물었다.

“뿌으으뿌 쁘우뿌뿟 뿌우? (여기 출구가 어딘지 알아?)”

코끼리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코로 오른쪽 방향을 가리켰다.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다. 친절한 아저씨로군.

“굿 엘리펀트. 다음에 또 보자.”

얘네들도 학대를 받고 있을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걸 증거로 삼을 수는 없었기에─코끼리 어는 나밖에 해석을 못하니까─ 나중으로 미뤘다.

“저기 안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오른쪽으로 가래.”

일행에게로 돌아가서 턴 라이트했다.

그런데 시발 내가 상상 못 했던 건.

좆간에게 시달리던 불쌍한 코끼리가 같은 좆간에게 친절하게 굴 리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노르. 이쪽 길이 아닌 느낌 안 들어?”

“사실 나도 3분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

뭔가 갈수록 천막이 세우다 말고 방치된 느낌이었다.

길을 잃어서 공사현장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시발 잘못 왔나?’ 하는 불안함! 빤히 쳐다보는 라리루라의 무언의 시선에 존나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시발! 코끼리 새끼가 아니라 사람한테 물어볼 걸! 여기서 내향적인 아싸 인생의 단점이 드러나다니!

“──히히힝.”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데 근처의 천막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났다. 공사 중인 천막 주변에는 물어볼 사람이 1명도 없었기에 거기에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1번만 더 물어보고 온다! 여기서 딱 기다려!”

“네?! 저, 저기요! 이런 데에 훌쩍 두고 가지 마세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느낌이 드는 장소라서 라리루라는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일이 이렇게 되니 프랑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줌마 왜 따라와요!”

너까지 들어오면 벡터-애니멀 토킹이 불가능하잖아! 나의 말에 라리루라는 조목조목 반론했다.

“우선 저는 꽃다운 18살이구요? 저희가 밖에 있다가 들켜서 쫓겨나면 노르드 씨 혼자만 여기에 남게 되구요? 뭣보다 안내를 받을 거라면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에요☆!”

줄줄이 정론이었다. 논리 전개에서 줘털린 나는 석사 학위를 고아 접어서 내다버려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프랑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얘, 얘들아. 저거 뭐야?”

프랑의 손가락아 가리킨 것은 천막의 구석에 포박된 망아지였다.

아니, 저게 망아지가 맞나? 그 말은 대갈통에 양의 뿔이 자라난 놈이었다.

시발 저건 또 뭐야. 이세계 이로치가이 유니콘인가?

“히흐흐힝! (풀어라!)”

뿔 달린 말은 천막의 구석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 철저한 구속에서는 존나 범죄적인 냄새가 났다. 불법 밀렵 같은 범죄 말이다.

“히흐흐힝! 히히힝히흐힝히! (풀어라! 나를 풀란 말이다!)”

거 시발 존나 시끄럽게 구네. 이대로 갔다가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게 생겼다. 나는 그 놈에게 다가갔다. 풀어줄 수는 없겠지만 닥치게는 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 아이, 어쩌면 바이콘인가?”

프랑이 묶여있는 망아지를 살펴보다가 말했다. 바이콘?

“맞는 것 같네요☆ 뿔이 2개 나 있는걸요.”

라리루라는 프랑의 말을 받으면서 천막 안을 훑었다.

“안쪽에는 아무도 없네요? 그런데 저 새끼 바이콘, 일부러 이런 외진 곳에 혼자 묶어서 방치해 놓다니 보통 일이 아닌 듯한 느낌인데요?”

“그러게.”

140% 동감이다. 희귀동물을 붙잡아서 따로 구금 중이라고 치기에는 분위기가 필요 이상으로 오싹했다.

“여기 있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얼른 나가자. 여기에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사람을 봤다고? 어디서?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인상을 썼다. 근처에서 이 천막으로 접근해 오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 시발 쫌! 또 이런 식이냐?!’

저번에도 그렇고 왜 자꾸 어디 숨어만 있으면 사람이 계속 들락날락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대놓고 이 서커스단 안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조급해진 나는 일행에게 말했다.

“망할! 누구 온다! 어쩌지? 숨을까?”

“수, 숨는 편이 낫겠어!”

“그치만 어디로요?!”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을 찾아 봐!”

─덜컹! 덜컹!

우리는 비품창고로 보이는 곳을 샅샅이 조사했다. 천막의 안에 숨을 공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프랑은 빈 오크통 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랑 라리루라는 저 작은 통에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

“좆 됐다! 야, 라리루라! 이리 와! 여기밖에 없어!”

나는 조급해져서 절반 정도 공간이 남은 옷장을 가리켰다. 라리루라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놀랐다.

“네에?! 저 낡은 옷장에요?! 진짜 죄송한데 저는 저 안에 들어가서 끼익 소리 안 낼 자신이 없어요!”

“됐으니까 잔말 말고 들어가! 이 분야에서는 내가 너보다 선배야!!”

옷장을 열고 안에 들어가서 라리루라를 끌어들였다.

안의 옷장 벽에다가 역방향의 ᚲ(Kenaz)를 새겼다. 책에서 읽은 ᚲ(Kenaz)의 특수한 발동조건을 생각하며 룬을 켰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일 것. 움직이지 않는 공간일 것.’

이 옷장은 조건이 맞았다. 나는 룬에 마나를 넣었다.

─휘리리릭! 룬이 빛나고 효과가 발동했다. 옷장에 녹색의 마나가 감돌았다. 마법이 제대로 발동한 것이었다.

“됐어. 이제 이 안에서 생기는 소리는 바깥에 안 들려.”

내가 옷장을 두들기며 말했다.

안팎이 단절된 공간에서 발동하는 역방향의 ᚲ(Kenaz)는 ‘결계’의 기능을 한다. 대단한 효과는 아니었다. <침묵(Silence)> 마법보다 사용조건도 빡세고 마나 연비도 나쁘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제 옷장이 열리지 않는 한은 안 들키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어둠 속에서 내 숨결이 귓가에 닿자 라리루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기요? ‘자칭’ 선배님? 제 백만금짜리 엉덩이에 뭔가 딱딱한 게 닿고 있는데요?”

옷장에서 나랑 밀착한 라리루라가 갑자기 개소리를 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저랑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딱 붙어있으니까 남자로서 반응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만, 평생 남자 손도 안 잡아본 생판 숫처녀인 저한테 이건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닌가요? 손보다 먼저 그렇고 그런 부위를 몸에 비벼버린 제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너 임마. 암만 안 들린다 해도 말이 조금 많지 않냐.”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건 중대한 사태에요! 알콩달콩한 츄-도 안 하고 바로 엉덩이에 문질러버리시다니 무드가 없어도 너무 없어요!”

“존나 뭐라는 것이지? 드디어 머리가 맛이 갔니?”

“아아뇨! 저는 완전 멀쩡해요! 어쩔 생각이신가요? 선배가 책임이라도 져 주실 건가요? 그보다 부탁이니까 아까부터 계속 제 엉덩이를 찌르는 그 그렇고 그런 물건 좀 어떻게 해 주지 않으실래요? 서로 그렇고 그런 부위라서 제가 몸으로 밀어내기도 그런데요.”

“시끄럽댔지. 그리고 지금 네 엉덩이 찌르고 있는 건 내 검 손잡이니까 괜한 오해 마라.”

“검이라니 뭔가요? 사이즈 자랑인가요? 남자는 정말이지 그런 성희롱을 좋아하네요. 선배도 변태였군요. 실망이에요.”

이 새끼 때려주고 싶네 진짜.

알렉산드라 씨의 조언에 따라 딱밤이라도 놔 주려던 나는 천막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손을 멈췄다.

[이쪽에 단원이 아닌 놈들이 들어올 수 있겠냐? 아나시스 누님의 결계가 지금까지 잘못된 것 봤어?>

[아, 거 되게 떽떽거리네. 봤으니까 봤다고 그러지. 어차피 이 곱추년이 일할 시간이니까 잠깐 들리면 되잖아. 야, 안 그러냐? 어?>

[윽!>

남자들의 대화에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섞였다. 떠들던 나와 라리루라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조용해졌다. 남자들의 말은 로마니아 어였다.

[아이구야, 우리 뿔 달린 망아지는 아직도 우릴 꼬라보는 눈깔이 곱지를 못하네? 곱추야. 네가 밥을 제대로 안 멕여서 저러는 거 아니냐? 니는 시다바리도 제대로 못 드는 거야?>

[끄윽…!!>

[야, 야. 작작 패. 그 새끼 뒤지면 우리가 단장님한테 존나 혼난다. 곱추년 만드는데 몇 년이 걸렸는지 몰라?>

[쓰벌. 여자랑 애새끼는 갈궈야 말을 잘 듣는 거라고. 나더러 어떻게 주먹질 없이 계집애 새끼를 교육하라는 건데?>

[짐승들 교육시키듯이 하면 되지. 공교롭게도 교육해야 할 짐승 새끼도 2마리나 있겠다…… 이 짐승년들 오랜만에 채찍이나 맞아볼까?>

[힉!>

낄낄거리면서 웃는 남자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나는 대번에 인상을 쓰며 품에서 타뷸라의 가면을 꺼냈다.

이 서커스단이 용의자 후보였기 때문에 챙겨온 거였는데, 가져오길 잘 했다. 파인 플레이다, 오늘 아침의 노르드.

나는 가면을 썼다. 라리루라에게 아서 웨인으로서의 신분을 들킬 마음을 먹고 로마니아 어로 말했다.

[라리루라. 저 놈들 말 알아들었지?>

<물론이에요. 그러는 선배도 알아들으셨나 보네요?>

<개인사정이 있어서 로마니아 어도 배웠거든. 앞에 놈은 맡긴다. 죽이지는 마.>

<노력해 보죠.>

─벌컥! 우리가 말을 마치니 옷장의 문이 열렸다.

<체벌용 채찍이 여기 있었─ 컥?!>

라리루라가 달려들어서 긴 머리의 로마니아 인을 후려쳤다. 턱을 맞은 장발 게이 새끼는 눈이 돌아갔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뒤쪽의 멸치놈에게 달려들어 배빵을 날렸다.

“꺼흑?! 끄르르르륵?!”

내 주먹질에 맞은 멸치놈은 몸을 숙였고, 재빨리 뒤로 돌아간 내가 목을 조르자 3초만에 기절했다.

기절한 놈을 대충 소리 안 나게 내려놓고 나는 그들에게 맞고 있던 여자애를 찾았다.

<으으……?>

그 애는 등이 굽고 머리가 푹 찌그러진 아이였다. 금발의 예쁜 머리카락과 일그러진 허리의 부조화가 내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한, 이 아이는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닐 듯 했으니까.

<쉿. 꼬마 아가씨? 조용히 해 줄 수 있죠?>

나는 그 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말했다. 가면은 존나 위압감을 줄 수 있기에 벗었다.

<아……?>

내 로마니아 어에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아이는 브리타니아에 와서 서커스단원 외에 처음으로 로마니아 어를 써 주는 사람을 만났을 것이었다.

오크통에 숨어있던 프랑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왔다. 프랑은 제압된 두 남자와 곱추 소녀를 보더니 숨을 삼켰다.

“너무해…! 그 애, 몸이 멍 투성이잖아! 이 사람들, 저렇게 어린 아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저거, 절대 서커스를 배우면서 생기는 멍이 아니에요. 알고는 있을 생각이었지만, 크뤼소스 서커스단 놈들은 정말로 제 상상 이상의 인간 말종들이었네요.”

라리루라가 쓰러진 남자들에게 경멸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녀들을 조용히 시키고 소녀에게 물었다.

<예쁜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로, 로잔나… 요.>

<네. 로잔나. 좋은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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