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작전을 설명했다.
내가 떠올린 생각이지만 아마 존나 터무니없는 작전으로 들렸을 것이었다.
그래도 로잔나에게 질문해서 주변 천막의 구조를 듣고 다른 아이들의 위치를 알아보니 해볼 가치는 있을 듯 했다.
“──해서, 빠져나가면 끝. 1번 더 말해줄까?”
“아냐, 충분해. 우리는 도망만 치면 되잖아.”
프랑이 대표로 말했다. 로잔나는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듯 했지만, 어차피 라리루라가 업고 달릴 거니까 상관 없었다.
“좋아. 여길 벗어난 다음의 일은 그때 가서 마저 의견을 나누기로 하고, 곧바로 시작하자.”
나는 로잔나에게 타뷸라의 가면을 씌워주고 주변에서 찾아낸 서커스단의 가면을 얼굴에 썼다.
그리고 야수회귀의 손톱을 세웠다.
【가만 있어라, 다친다.】
망아지를 구속하고 있는 줄을 손톱으로 잘라냈다.
─투두둑 툭!
상당히 질긴 밧줄이었지만 자르기는 쉬웠다. 포박에서 해방된 망아지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대의 후의에 감사한다. 잠시 신세를 지마.】
【프랑한테 가서 업혀. 나는 바쁠 예정이거든.】
【그렇게 하지.】
좆 같은 처녀 알레르기는 프랑이 업는 것으로 해결했다.
“으으…….”
품 안에서 얌전하게 있는 비처녀충의 모습에 프랑은 어딘가 부끄러운 듯 했다. 하긴 바이콘이 얌전하다는 것은 남자를 아는 몸이라는 것을 알리는 셈이니까.
<로잔나. 이리 오렴.>
그리고 나서 로잔나를 불러서 내 앞에 앉혔다.
뻣뻣한 머리카락을 걷어서 목덜미를 드러냈다. 굽은 등을 보자 안쓰러움이 밀려왔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휘리리리릭!
아까처럼 내가 룬을 새기고 망아지가 주문을 외웠다. 얇은 목에서는 마법의 기색이 싹 사라졌다.
이제 아나시스도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게 됐을 것이다. 자기가 납치한 아이에게 건 마법이 풀렸다는 것은, 그 아이가 죽었거나 우리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뜻이니까.
나는 ᚲ(Kenaz)의 룬을 새긴 가면을 쓰고 혼자서 천막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법을 발동했다. 로잔나가 알려준 ‘납치된 아이들이 있는 천막’을 피해서 불을 질렀다.
“아아. 이것은 키타이의 좋은 문명, ‘방화’라고 한다.”
─활활! 나는 타오르는 크림소스 서커스단의 천막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불길은 가을철의 마른 공기에 힘입어 빠르게 거세졌다.
그 불의 진행방향은 바로 서커스 쇼가 벌어지는 텐트! 나는 불길의 방향을 유도하며 서커스단의 분위기를 살폈다.
“부, 불이야!!”
“제기랄! 영주님의 칭찬을 받았다길래 기대했더니, 이게 뭔 날벼락인가!”
남아있던 손님들은 화재가 일어나자 출구로 피난했다. 검은 매연이 매케하게 올라오는데 뭣하러 여기 남겠는가. 나는 딱 바라던대로의 전개에 씨익 웃었다.
‘손님들이 피난하고 경비대가 화재 진압에 나서는데 결계를 켜 둘 수는 없겠지.’
존나 자명한 이치다.
서커스단 전체에 결계를 쳐놨으니, 저 손님들과 경비대의 출입을 위해서는 결계를 해제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만약 화재 진압에 마법사가 나선다면 그 자리에서 결계의 존재와 효과를 깨닫고 조사를 나설 것이었다. 아나시스는 이제 결계를 풀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은신 효과를 톡톡히 누리면서 천막으로 돌아갔다.
“얘들아, 나와! 쥐불놀이 깽판 작전 스타트야!”
“선배! 머리는 똑똑한데 작명센스는 최악이네요☆!”
전혀 납득이 가질 않는 지적을 받으면서 우리는 바이콘과 로잔나를 만난 천막에도 불을 질렀다.
안에는 2명의 서커스단원이 남아 있었지만 살려둘 가치도 없는 놈들이다. 우리 존재를 파악하기도 했고, 여기 천막을 태워두면 서커스단 측에서 사태 파악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다음은 납치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내 호령에 맞추어 일행이 달렸다. 로잔나가 말한 ‘새로 온 아이들’의 보금자리는 천막 같지도 않은 창고였다.
상자를 열자 갇혀있던 아이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얘들아, 일어나!”
나는 상자에서 아이들을 꺼내서 흔들어봤지만 아이들은 푹 잠들어서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런 시발. 마법이나 포션으로 잠을 재워둔 건가? 어쩔 수 없이 근처의 포대기로 목이 부러지지 않게 잘 묶어서 어깨에 맸다.
위험하지만 내버려뒀다간 100% 인질이 될 테니 말이다.
“이 새끼들!! 불을 지른 게 네놈들이구나!!”
그때였다. 탈출 준비에 시간을 너무 오래 끈 탓일까? 채찍을 든 조련사가 사납게 생긴 호랑이를 끌고 나타났다.
“크르르르르……!”
호랑이는 약물에라도 맞은 것처럼 이성을 잃고 으르렁댔다. 라리루라에게 안긴 로잔나가 비명을 질렀다.
“시, 싫어……!!”
“크흐흐. 로잔나. 곱추년이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도망을 치려 들어? 네년도 친구들처럼 펠프스의 먹이로 만들어주마.”
조련사는 음충맞게 웃으면서 라리루라와 프랑을 훑어봤다.
“가라, 펠프스!! 여자들은 죽이지 마!! 저 년들은 단장님께 선물로 드려야겠다!!”
“캬르르르──!!!”
맹호(猛虎)가 달려들었다. ─타탓! 그에 따라 나도 아이들을 묶은 포대기를 두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라리루라!! 로잔나의 눈을 가려!!”
나는 그렇게 외치며 야수회귀를 켰다.
검은 뽑지 않았다. 맨손으로 충분해서가 아니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위력의 공격은 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타오르는 손길>. <구름 소환>.”
주문 2개를 빠르게 외웠다. ─풀쩍!! 호랑이가 뛰어올랐다. 내게는 호기(好期)였다. 높이가 높아지면 호랑이의 공격도 위력이 높아지지만, 그 약점도 훤히 드러난다!
─휙!!
프랑이 날린 나이프가 정확하게 호랑이의 눈을 맞췄다. 이 시의적절한 서포트는 역시 내 사랑스러운 여친님다웠다.
“커흥!!”
점프한 상태에서 팔을 휘두르려던 호랑이는 눈에 나이프가 박히자 몸을 비틀었다. 팔꿈치가 꺾이지 않게 반대팔로 팔을 붙잡았다.
나는 호랑이의 손톱 밑으로 달려나가며 열증기를 뿜어대는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불에 타오르는 5개의 지건!!
다시 말해서!
“오지폭염건(五指暴炎鍵)!!”
─푸화아악!!
동물계의 날카로운 손톱이 더해진 뭉게뭉게-지건은 호랑이의 가슴을 때려부수고 심장을 쥐어 터트렸다.
─철푸덕! 중력에 이끌린 호랑이는 시체가 되어서 바닥을 굴렀다. 나는 절명한 호랑이에게 사죄했다.
“미안하다. 너한테 원한은 없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는 살려둘 수 없어서.”
아니 시발 근데 팔 존나 아프네.
일단 가오를 잡으며 지껄이긴 했는데 뭉게뭉게-시리즈는 내 몸의 관절에 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기압의 출력에 노출되어 근육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을 펼쳐대서 그렇겠지.
그래도 이것은 무모한 기술의 대가이니 참았다. 이렇게 안 했다면 살아있는 호랑이를 원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페, 펠프스!!”
조련사는 한 방에 죽어버린 자신의 살인 호랑이의 시체에 절규를 바쳤다. 존나 어이가 없었다. 호랑이에게 식인이나 시키는 새끼가 저따위로 슬프게 통곡을 해대다니? 나는 짜증이 치밀어서 그 새끼 대가리에 수도를 내려쳤다.
“이 새끼가 바빠 죽겠는데 마나까지 쓰게 만들고 있어!! 공포의 쓴맛!!”
─퍼억!!
수도로 머리통이 터져나간 조련사는 그렇게 절명했다.
손의 마법을 끄고 포대기를 업었다. 조련사들의 숫자가 적어도 이대로 시간낭비를 하다가는 따라잡히게 생겼다.
“달려! 담장까지 금방이야!”
결계가 사라졌기에 직선으로 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서커스단의 담장을 뛰어넘고 뒷골목에 몸을 숨겼다. 이제 서커스단의 권역에서 벗어난 것이다.
“푸하! 힘들었어요☆!”
라리루라가 로잔나를 내려놓으며 안도했다. 나도 가면을 벗어서 차오른 땀을 털어냈다.
“잘 했어. 이제 놈들은 우릴 쫓지 못해. 경비병들이 안에 들어와서 사정을 청취하고 흔적을 조사할 테니까.”
“아핫♥ 이제 저것들은 눈 돌아가게 바쁘겠네요? 사람도 얼마 없는데 범죄 흔적도 치우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내랴, 정신이 하나도 없겠어요☆!”
한 방 먹여줘서 즐거워졌는지 라리루라는 텐션이 높아졌다. 프랑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응.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숨만 고르고 아이들을 피난시키자. 노르는 여기서 기다릴 거랬지?”
“어. 누구 하나는 사태의 추이를 확인해야지.”
저 씹새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빠르게 대처하는 역할은 내가 가장 적임이었다.
은신 되지, 발 빠르지, 힘 세지, 다쳐도 문제 없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튼 라리루라. 너도 수고 많았고, 도와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살았어.”
나는 감사를 담아서 그렇게 전했다. 라리루라 덕분에 단서를 알아내고,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애들을 데리고 너희 서커스단이 묵는 여관으로 돌아가서 숨어 있어. 그 대신, 만약 우리가 실패하면 그때는 네가 이 애들의 증언을 경비대에게 들려줄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라리루라는 어째선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저기요? 뭔가요, 그 상큼한 작별 대사는? 설마 저더러 이 아이들이 겪은 이야기를 듣고도 여관에 돌아가서 얌전히 덜덜 떨고 있으라는 말씀이세요?”
“아니, 임마. 화가 나는 마음은 나도 알지만, 너는 우리하고는 사정이 다르잖아.”
나랑 프랑은 처음부터 납치 사건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라리루라는 다르다. 라리루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크림소스 서커스단에 왔다가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사람이 양심이 있지, 무슨 낯짝으로 더 이상의 조력을 바라겠는가.
“그리고 뭣보다, 역겨운 이야기라서 말은 안 했지만──”
“제가 저 인간들한테 노려지고 있어서 그렇다구요?”
내 생각을 가로채듯이 라리루라가 말했다. 나는 아가리를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너도 눈치 채고 있었냐?”
“그야 물론★! 독서가 취미인 지혜로운 여자 라리루라를 깔보지 마세요? 선배 정도로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제 목에 목줄을 걸려는 인간들을 못 알아볼 정도로 바보는 아니랍니다♡!”
익살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말의 내용은 섬칫한 것이었다.
납치범이 자기 몸에 표식을 붙여놓았다는 것을 알고도 저렇게 밝게 말할 수 있다니. 일류 광대라는 직종은 연기자의 소질도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도 저 놈들을 때려잡는데 동참하겠다고?”
“네! 얼굴을 뭉개려고 했든, 성대를 뽑아내려고 했든, 저를 잡아서 쓰기 좋은 서커스 노예로 만들 생각이었겠죠♡? 저요, 그런 짜증나는 짓을 당하고도 넘어갈 정도로 배알 없는 애는 못 되서 말이에요☆!”
이빨을 드러내며 라리루라는 서커스단을 노려봤다. 나는 그 눈빛에서 나와 비슷한 수준의 분노를 느꼈다.
“하아, 알겠어.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네.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애들만 맡기고 돌아와.”
“후후. 걱정 마시라! 누구처럼 집채만 한 호랑이를 단박에 죽일 정도는 아니어도, 저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구요☆? 제 비밀 병기를 가지고 돌아올게요!”
라리루라는 호승심을 드러냈다. 비밀병기라. 뭐 꼭두각시 골렘이라도 가지고 오려나?
“노르. 이거 써. 팔 다쳤지?”
그때 쓰러진 아이들의 상태를 살피던 프랑이 내게 포션을 주었다. 내가 팔을 움찔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왠지 약간 쑥스러워졌다.
“이거 둘이서 아주 줄줄이 내 생각을 꿰차고 계시구만. 나 부끄러워서 죽겠다.”
“바보 같은 소리 말구. 얼른 치료해.”
아까부터 왠지 프랑의 말투가 험해지는 느낌.
옆에서 내가 몸을 안 아끼고 무리하는 꼴을 실시간으로 봐서 그런가? 입장이 반대면 나도 화 정도는 내겠지.
아무래도 나는 이 귀여운 마눌님에게 잡혀 살 운명인가 보다.
─찰랑.
프랑에게 맡겼던 포션을 받아서 상처회복 포션을 팔 상박(上膊)에 발랐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업고 일어섰다.
“얼른 갔다올게. 노르도 조심해.”
“너희야말로. 저 놈들이 쫓아가진 못하겠지만 무슨 일 안 나도록 경계 잘 하기다?”
“후후, 믿어줘. 금방 올 테니까.”
그렇게 프랑과 라리루라는 아이들을 피난시키러 떠났다.
망아지 새끼는 눈에 존나 띄기 때문에 여기 남았다. 우리 셋이 다시 습격을 개시할 때에 풀어줄 생각이었다.
“화재다!! 디르고리 님들을 모셔와!!”
“시민 분들의 피난을 서둘러!! 불길은 거세지 않으니까 겁 먹지 마!!”
경비병들은 서커스장의 상황을 정리하는 모양이엇다. 불은 빠르게 진압되었고, 젊은 조련사가 1명 나와서 사정 청취를 받았다.
【그대여. 저들은 너희들 인간의 치안유지기구 아니더냐? 저 자들에게 조력을 요청하지는 않는 것이냐?】
【치안유지기구? 어려운 말을 다 아는군.】
망아지는 뒷골목에 몸을 뉘이고 물었다. 나는 픽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힘들어. 저 놈들의 윗선에 뇌물이 흘렀을 가능성이 더럽게 커서.】
영주가 뇌물을 받아먹고 피의 실드를 쳐 준다면 서커스단 놈들의 본격적인 처벌은 힘들다.
저들은 외국인이기도 하니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저 놈들의 악행을 고발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나라면 부하로 쓰던 조련사 새끼 몇 명만 꼬리 자르듯이 버리고 빠져나갈 걸. 그리고 내 사업을 망친 놈들을 죽일 준비를 할 거고.】
【로잔나들에게 가한 폭행을 부하들의 탓으로 떠넘기고 도망친단 말이냐? 인간의 생태란 참으로 추악하군.】
【흐흐. 그건 인정한다. 왜? 너희는 좀 다르냐?】
【다를 바 없지. 우리 바이콘처럼 운명에게 버려진 자들은 동족을 헐뜯으며 멸망하거나, 힘을 합쳐서 살아가는 것 외에는 삶의 수단이 없느니라. 그리고 우리는 후자를 골랐기에 살아남았다만.】
【그다지 자랑스럽게 말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후후. 그건 전적으로 동감이로군.】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방심하지 않고 서커스단의 추이를 확인했다. 30분 가까이 지켜봤지만 나가는 사람도 없고 들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냐아…….”
고양이 울음소리? 나는 발 아래를 보았다.
피투성이의 고양이가 내 발 앞으로 와서 섰다.
내 머리는 생각을 거칠 것도 없이 뭔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풀썩! 고양이는 체력이 다한 것처럼 쓰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야, 임마! 이 시발, 너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