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하는 놈이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우리를…….”
“나?”
죽어가는 조련사의 말에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해줬다.
“나는 베를린의 적광(赤光). 베를린-레드라이트다.”
오늘의 나는 빛(Light)이자 우파(Right)였다.
레드 라이트(赤光).
피에 젖은(Red) 우파(Right)! 그야말로 지금부터 내가 펼칠 인터내셔널에 걸맞은 이름이 아닌가! ─ 촤아악!! 나는 손톱을 세워 놈을 찢어발기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촤르륵.
마법을 끄고 품에서 우리의 열쇠를 꺼냈다.
철창 안에 가둬져 있던 온갖 동물들은 내가 든 열쇠에 주목했다. 그들의 자유는 내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직 교육 도중이거나, 학대를 받아서 스트레스가 쌓인 짐승들이었다. 이곳은 자유를 잃은 이들의 이세계 동물농장인 것이다!
“동지들. 만나서 만갑소.”
나는 가면을 살짝 들어올려서 맨 얼굴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시간이오.”
벡터-설득하기.
ON.
“뿌오오오오오오오오오──!!!”
“커허헝──!!!”
“우끼끼끾끼!! 우끼이이이──!!!”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이 미친 놈들이!!! 죽여!! 스크롤로 마법을─ 갸악!!!”
우리에서 풀려난 짐승들은 제각기 날뛰면서 내가 부탁한 방향으로 달렸다.
“흐흐흐. 자업자득이군.”
나의 5분에 걸친 벡터-설득하기는 야성을 잃고 애완동물이 된 짐승들에게 힘을 되찾아주었다.
코끼리, 사자, 원숭이에 곰까지!
동물들은 이빨이나 손톱이 뽑혀서 전의도 꺾여 있었지만 그 타고난 야성과 근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으갸아아아아아아악!! 도망쳐어어어엇!!!”
“경비벼어어어엉!!!!! 경비병을 불러어어어엇!!!!”
얼마 남지도 않은 조련사들은 사건의 흔적을 은폐하는 것도 잊고 도망쳤다. 나는 그 혼란에 섞여서 서커스단의 움직임을 관조했다.
“동물농장은 이 시간부로 혁명의 땅으로 바뀌었다!”
내가 저 동물들을 풀어주며 부탁한 조건은 2가지였다.
1. 프릭쇼 피해자들은 건들지 말 것.
2. 저 놈들을 죽인 다음에는 얌전히 투항할 것.
분노를 삭이고 있던 짐승들은 내가 서커스단의 단장을 조질 것을 약속하자 조건에 따랐다.
분노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날뛰었다가는 경비대에게 사살당할 거라고 경고하자 다들 납득했다. 저들의 원수는 자신들을 괴롭히던 조련사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경비대가 다시 진입하면 내부는 혼란에 빠진다!’
화재만으로는 어떻게 변명할 수 있어도 짐승들이 날뛰기 시작했으니 경비대의 진입은 막지 못할 것이었다.
공권력의 화신인 경비병들이 범죄현장을 급습했을 때, 그 범죄조직의 보스라는 놈은 어떻게 움직일까. 존나 뻔할 뻔 자였다.
‘이미 침입자가 납치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친 상황. 이 위기에서 놈들이 취할 행동은──’
──인질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
타타탓─!
서커스단의 움직임에 빡집중을 하던 나는 발견했다.
등에는 커다란 보자기를 매고, 품 안에 기절한 어린아이를 안은 남자!! 크림소스 서커스단의 단장인 로만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추적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아니시스는?’
그 여자 광대가 안 보였던 것이다.
─휘익! 로만은 담장을 간단하게 뛰어넘었다. 꼴에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기절해서 축 늘어진 에리카의 얼굴이 보였지만 내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함정이다.’
팽팽해진 긴장감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
내 작전대로 놈들은 에리카의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지는 못했다. 경비병들이 그 광경을 봤다가는 좆망 확정이니까. 이 혼란은 모두 그것만을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래서 서커스단 단장인 로만은 여길 벗어났다.’
경비대의 눈을 피해서 뒷골목으로 이동한다면 에리카를 인질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니까. 나나 라리루라가 쫓아오면 저 아이를 방패로 삼겠지.
그러면 아나시스는?
그 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렇게나 치밀하게 움직이던 악독한 년이 이런 일촉측발의 상황에 어설픈 대처를 했을 리는 없었다.
‘저 놈은 미끼야.’
아마도 아나시스는 단장에게 도망치라고 시킨 다음, 그걸 쫓아가는 나를 찾아내서 죽일 생각이다!
여기 어딘가에서 나처럼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로만 놈을 안 쫓으면 저 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영주와의 커넥션? 뒷사회의 인맥?
뭐든 간에 동원해서 자기 목숨을 간수할 것이었다. 살 구멍이 없었다면 본거지를 버리고 도망을 치진 않을 테니 말이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군.”
내가 읊조렸다. 아나시스의 실력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이렇게 멍청하게 서서 에리카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아나시스가 나에게 던진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아나시스는 나를 사로(死路)로 몰기 위해 에리카의 목숨을 지킬 활로를 열어젖혔다.
로만을 습격해서 에리카를 구해낸다면 내 승리.
로만을 놓치거나 아나시스에게 당한다면 내 패배.
그렇다면── 정면에서 돌파한다.
“혁명의 끝은 부르주아의 피로 장식해야 하니까!!”
─끼에에에에에엑!!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로만을 뒤쫓았다.
‘아나시스의 무기는 투척 나이프겠지.’
나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저글링에도 사용되는 나이프에 <꼭두극>을 부여해서 드론 무기처럼 날려서 쏘아대는 것이 그 여자의 전투법일 것이었다.
‘그러면 추격 중에 뒤에서 기습당하지 않기 위해선──’
적에게 보이지 않고, 따라오기 힘든 위치로 가면 된다!
골목길에 들어서서 힘차게 땅을 박찼다. ─탓! 은밀한 발걸음으로 벽을 박찬다.
신체의 마나를 돌리면서 움직임에 집중한다. 곡예로 갈고 닦은 신체 컨트롤 능력이 내게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탓! 타타탓!
양쪽 벽을 번갈아가며 박차고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브리타니아의 건축 문화에는 옥상이 없었다. 나는 밑에서 들려오는 로만의 발소리에 집중하면서 달렸다.
영화에서 나오는 파쿠르 장면처럼 지붕과 지붕 사이를 박차고 뛰면서 내 공격의 범위에 들어올 때까지 쫓아갔다.
‘일격으로 에리카를 돌려받는다!’
로만은 뛰어난 전사로는 안 보였다. 저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달리면 금방 체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때를 노린다.
“허억, 허억……!!”
달리면서 로만은 시종 뒤를 돌아봤다.
추격자를 두려워하는 몸짓이었다. 지붕 위를 달려서 쫓는 나의 존재는 눈치를 못 챈 듯 했다. 공포와 체력 소진으로 생각이 짧아진 탓이었다.
골목길의 분위기가 슬럼가의 더러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 개발되다가 말고 버려진 듯한 거리에서 5미터 가까운 단차가 나타났다.
로만은 계단을 사용하지 않고 단차를 뛰어 넘었다.
‘──지금!’
2층 가까운 높이에서 로만과 에리카가 공중에 떴다. 나는 지붕을 박살낼 것처럼 박차면서 검을 뽑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줄어든다. 등을 보인 로만은 내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대로 베어내고 에리카를 빼앗으면──
‘씨발!’
나는 욕설을 웅얼거리면서 검을 휘둘렸다. ─쐐애액!! 빠른 기세로 날아온 나이프가 검에 부딪혀서 튕겨나갔다. 머리를 노린 공격이라 몸으로 떼울 수도 없었다.
채앵─!!
금속성 소리가 들리자 로만이 경악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단차에서 떨어지는 도중에 곡예사처럼 몸을 뒤집은 로만은 에리카를 끌어안았다. 두 팔로 붙들고 목에 단검을 가져다가 댔다.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0.1초. 기절한 에리카의 얼굴이 보였다.
0.5초. 내가 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1초. 로만의 얼굴이 절망감에 물들었다. 내가 공격을 멈출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두 손으로 검을 들고 집중했다.
에리카를 베지 않고 인질을 붙잡은 로만의 팔만을 자른다. 야수회귀의 효과가 더해진 몸놀림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신체조율로 몸놀림은 정확해졌지만 나는 몇 번이고 검의 간격조절에 실패했었다.
‘할 수 있을까?’
체계적인 검술을 배운 적도 없었기에 내가 원하는대로 검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살면서 ‘간격’을 신경써 본 경험이 거의 없었으니까.
‘──아니, 아니야.’
나의 뇌리를 깨달음이 스쳤다. 생각을 정말로 나는 ‘몸의 간격’을 신경쓰면서 움직여 본 적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세계에 온 뒤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넘게 ‘정확한 간격’을 파악하며 움직여 본 경험이 있었다.
간격이다.
내 팔의 간격을 파악하고 휘둘러라! 검의 길이와 팔의 길이를 하나로 만들어서 에리카를 구해내라!
지금의 나라면 그게 가능할 것이다!!
“비천삼검류.”
프랑과 섹스할 때의 나는── 언제나 내 자지의 정확한 간격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자지섬(自至閃).”
뒷골목에서 검이 번뜩였다.
내가 휘두른 검이 로만의 팔을 동강냈다. 에리카의 앞섬이 살짝 베였지만 핏방울은 튀지도 않았다. 내 공격은 정확하게 로만의 팔을 잘라 에리카를 구해낸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악!!”
팔을 잃은 로만한테서 풀려난 에리카가 붕 떠오르고, 그런 에리카를 내가 잡았다. 로만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보따리를 쏟아내며 굴렀다.
여기까지 단 2초.
──그 여자는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꼭두극>.”
내가 바닥에 착지하려고 두 발을 뻗은 순간.
8개의 나이프가 나를 포위하여 날아들고, 에리카가 나이프로 내 목을 찔렀다.
불똥이 튀고 피가 쏟아졌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나이프는 4개 모두 받아쳤지만 뒤에서 날아온 것들까지는 막지 못햇다. <꼭두극>의 효과를 강하게 받는 마법질을 새겼는지 나이프들은 야수회귀의 방어를 뚫고 내 살갗을 갈랐다.
─뚝. 뚝.
“……씨발. 존나 아프네.”
등에서 흐른 피가 허리를 타고 바닥에 쏟아졌다.
다행히 목은 멀쩡하다. 에리카를 조종해서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기에 막을 수 있었다. 데미지가 심한 것은 등쪽이다. 깊이 박히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놀랐어요. 죽일 생각이었는데.”
아나시스가 단차 위에서 나를 굽어보며 말했다. ─둥둥. 그 년의 주변에는 나이프들이 10개도 더 부유하고 있었다.
─꽈아악!
나는 에리카를 한 팔로 품에 붙들었다. <꼭두극>으로 조종당해도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방금 공격…… 에리카를 노렸겠다.”
내가 으르렁거리면서 뇌까렸다. 아나시스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네. 노렸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저희 뒤를 쫓는 사람들을 여러 명 묻어왔거든요. 그래서 잘 알죠.”
─스릉! 나이프들이 뱀처럼 일사분란하게 나를 겨눴다.
“당신 같은 위선자들은 인질을 구할 수 없을 때는 쉽사리 냉정해지지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틈을 내주더군요.”
“그래서 뭐. 등을 훤히 드러내도 못 죽였는데, 주먹만 한 나이프를 던져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그렇고 말고요. 슬슬 서 있기도 힘들죠?”
아나시스가 눈꼬리를 휘면서 웃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좆 같은 년.”
─풀썩! 무릎이 떨리면서 저절로 바닥에 꿇려졌다.
독이다. 나이프에 뭔지 모를 발라둔 것이었다. 아나시스는 내 용태를 유심히 살피면서 말했다.
“잘 버티시네요. 바이콘도 주저앉힌 마비독인데요. 푹 쉬실 수 있게 <수면(Sleep)> 마법도 걸어드릴까요?”
“좆까. 오늘밤은 예정 꽉 찼어. 너희의 촌극으로 더러워진 눈알을 일류 서커스 쇼로 세척할 거라서.”
나는 말초신경의 떨림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무슨 독인진 모르겠지만 효과가 빠르다. 에리카를 붙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야수회귀가 근력을 강화시키는 마법인 것이 구제였다. 마법은 마비독과 상관없이 유지되니까.
그래도 인질을 노리고 나이프가 날아들면 다 막지 못한다. 머리도 띵했다. 역전의 한 수를 짜내려고 해도 사고력이 흐트러지는 느낌이다.
“자, 버텨 보세요. 움직일 때마다 독이 빨리 돌겠지만.”
─슈슉!!
아나시스의 손짓에 나이프가 쏘아졌다.
화살에 버금가는 고속의 사출! 당연하다는 듯이 에리카를 노리는 나이프를 평소보다 큰 움직임으로 튕겨냈다. ─버둥버둥! 의식이 없는 눈을 한 에리카가 몸부림을 쳤다.
“하나~ 둘~ 셋~.”
─챙! 챙! 계속해서 하나씩 쏘아지는 나이프! 나는 그것을 쳐낼 때마다 팔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