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009)

세 번째는 거대 골렘을 마무리 지었던 공격을 힘 조절해서 펼친 것 같았고, 네 번째는 골렘 무리를 갈아버렸던 연격의 재현이었다.

‘기초에서 바꿔 나간다는 건가?’

약간 알 것 같기도 하다. 네페르티티의 말을 받아 적고 잘 이해가 안 되는 걸 질문했다.

“우선은 하나의 공격 동작을 완성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기술을 상황에 맞춰서 다르게 쓰고요?”

“비슷해. 이건 기초 단련.”

채찍을 도로 넣은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마법의 술식처럼 체계적인 공격을 만들어. 네 마나가 가장 움직이기 편하고 익숙한 길을, 몸 안에 틀면 돼. 그렇게 만든 기술이 가장 강하고 빨라.”

“마나가 움직이기 편하고 익숙한 길…….”

빨리 받아적자. 다시 물어봐도 말 안 해 줄 것 같으니까.

─파바바박!

야수회귀까지 써서 얼른 필기하는 나. 네페르티티는 그걸 신기하다는 것처럼 구경했다.

“너는 싸우는 법을 배운 적 없구나.”

“네? 아, 없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배울 곳이 없어서.”

“아냐.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싸우다 보면 다 자기 성격이나 몸에 맞는 기술을 만들게 되니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지론처럼 현기가 깃든 말이었다. 근데 이 사람 나이가 몇 살이지. 나보다 연상이기는 할 텐데.

“같은 무술 유파에서 출발해도 도달하는 곳은 달라. 내 《사막의 뱀》처럼.”

존나 그러면 나도 나만의 오리지널 기술 문파를 창시하게 될 거라는 얘긴가?

이건 이것대로 기대가 되는 점이었다. 노르드식 파동기나 교수암쇄권, 아방류 헌법 같은 개쩌는 이름을 지어줘야지.

내가 그렇게 미래의 마스터-노르드가 펼치는 108개의 필살기를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네페르티티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잘 있어.”

붙임성 없는 인사로군. 너무 쿨해서 한 순간 인사인 줄도 못 알아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예. 안녕히 가시길.”

인사를 나눈 네페르티티가 도약했다. ─탓! 가볍게 점프한 그녀의 뒷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알게 모르게 나랑 자주 엮였던 선임 모험가는 그렇게 사르가디스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는 네페르티티도 나도 각자의 복수를 완수한 다음이면 좋겠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

프랑이랑 라리루라는 해가 저물기 30분 전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개운한 표정을 보니까 만족스러운 쇼핑을 한 모양잉었다.

“둘 다 잘 다녀왔어?”

“아핫♡! 그럼요! 역시 돈은 쓸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한 법이던데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달은 라리루라는 자기 몫의 봉투를 챙겨서 방으로 돌아갔다.

“파티 날을 기대하시라☆! 프랑 언니와 저의 일대 변신을 보시면 선배도 기절초풍하실 걸요?”

가는 길에 저렇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아니 근데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계속 기다려야 돼? 나는 그런 뜻을 담아서 프랑을 쳐다봤다.

“……저기, 노르.”

그러자 프랑은 부끄러운 것처럼 내 귀에 속삭였다.

“나…… 새로 산 속옷 입고 왔어.”

그 말에 내 눈은 프랑의 가슴에 못박혔다.

자주 보는 외출용 평상복인데 저 말을 들으니 어째서인지 말도 안 되게 야한 것처럼 느껴졌다.

프랑은 옷 봉투를 내려놓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볼래?”

“프랑, 내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

크르르르! 못 참겠다! 내가 프랑을 침대에 눕히고 올라타는 소리가 뜨거운 밤의 시작을 알렸다.

‘석사! 덮친다!’

3실버 짜리 속옷은 존나 야했다.

그날, 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몽환적인 지평선을 굽어보는 나의 몸에서는 형언하는 것이 바보 같을 정도의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모자라.”

꿈 속의 나는 중얼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반쯤 무의식에 가깝게 이게 내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남의 꿈을 그 본인이 되어서 엿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내 의식은 위화감을 못 느끼고 꿈 속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만 했다.

“제물이 필요해.”

‘나’는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신문에 적힌 글을 읽는 것처럼 머리에 감정이 없는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제물은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공양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소리였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나무 아래에 좌선한 채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하늘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무릎이라도 두드리고 싶을 정도로 명쾌하게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내가 나를 제물로 바치면 돼.”

말도 안 되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리 중얼거리자 화면이 바뀌었다.

페이드 아웃. 페이드 인.

꿈 속의 ‘나’는 거대한 나무에 창으로 못 박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자는 구천세계를 다 뒤져봐도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심장을 뚫은 창은 ‘나’ 자신이 벌인 일이었다.

‘나’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장난이나 다름 없는 의식이었지만 이미 몇 번 비슷한 짓을 했던 경험과 방대한 지식으로서 ‘나’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제물이 되어서 세계를 굽어보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체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에서 얻은 지식과 1명의 ‘신’을 제물로 삼은 대가는 달콤했다.

첫째 날, 태초신의 피바다에 잠긴 소의 존재를 알았다.

둘째 날, ‘우리들’ 신의 존재를 알았다.

셋째 날, 우리가 올라탄 것의 존재와 불타는 세계를 알았다.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일곱째 날. 여덟째 날.

그리고 아홉째 날.

총 9일의 시간 동안 제물로 바쳐졌던 ‘나’는 의식이 끝나고 땅으로 내려왔다.

목숨을 대가로 많은 지식을 얻었기 때문일까. ‘내’ 안에 존재하던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한 분노는 크게 사그라들었다. ‘나’는 수십 년 만의 상쾌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18자의 문자. 18개의 마법.”

9일 간의 의식에서 얻은 성과를 뭐라고 명명하면 좋을지, ‘나’는 또 길고 길게 고민하다가 속삭였다.

“이걸 【열 여덟(Ochd Deug)】이라고 부르자.”

──아니, 그건 이름이고 뭐고 아닌 것 같은데.

꿈을 꾸면서 처음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이 떠올랐다. 그게 방아쇠가 된 것처럼 내 의식은 ‘나’의 몸에서 떨어져나가서 바닥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휘이이이잉!

따뜻한 늪에 가라앉으며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었다.

흰 모자를 쓴 작은 키의 여성이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안대는 푹 파인 것처럼 보였고, 왼손에 쥔 창은 그녀의 피에 젖었다가 말라서 굳어 있었다.

“아아. 하지만 역시 아직 모자란걸.”

하얀 옷을 말라붙은 피로 검게 더럽힌 여성은 아쉽다는 듯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더 알고 싶네. 아직 모르는 모든 것들을.”

“……존나 또라이 같은데요.”

나는 꿈에서 깨어나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패션도 그렇고, 길에서 마주치면 지릴 것 같은 미치광이 싸이코녀였다. 매드 사이언티스의 본보기 같은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으, 시발 머리 아파……. 몇 시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들기며 일어났다. 어제 프랑이랑 섹스하다가 뒤통수라도 맞았나. 머리가 말도 안 되게 아파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어났는가, 그대여.”

내가 아직도 꿈을 꾸는 중이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말이다.

─불쑥.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양뿔 달린 여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눈치를 깐 나는 초원에 몸을 뉘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직 한창 자고 있는 거 같은데.”

꿈속에서 또 꿈을 꾸다니 이상한 체험도 다 있다.

그것도 방금 전의 꿈이 어디 보통 꿈이던가?

개꿈이라고 치고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나는 문과의 심장과 이과의 두뇌를 가진 멀티 플레이어지만 저런 꿈을 꿔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되는 꿈이라니! 나한테 성전환 욕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무의식이 그딴 꿈을 꾸게 만들었다고? 시발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므로 방금 그건 보통 꿈이 아님. 나는 그렇게 가설을 매듭지었다.

“꽤 오래 잠들어 있더군. 좋은 꿈이라도 꿨나?”

“아니, 내가 머리가 이상한 마법사가 되는 꿈이었어.”

“쿡쿡. 그대는 이미 머리가 이상한 마법사가 아니더냐.”

내 말이 뭐가 재밌었는지 바이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웃어댔다. 나만큼 멀쩡한 정상인이 얼마나 된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바이콘은 그렇게 웃어대다가 말했다.

“자리를 마련하지. 들어오도록 하거라.”

양뿔이 달린 바이콘은 손가락을 튕겼다. ─쿠르르릉! 그러자 초원에 돌로 만든 작은 오두막이 생겨났다. 시발 개쩐다. 존나 말대가리의 연금술사네.

“이런 게 가능한 놈이 왜 서커스단한테 잡혀 있었냐?”

“여기는 꿈속이지 않느냐. 오늘밤은 그대의 꿈에 간섭할 준비를 해 왔으니 이 정도는 쉬운 일이다.”

“오, 그래?”

개꿀이네. 나도 해 봐야지. 그립디 그리운 짜파구리를 먹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마관광살포의 포즈를 취하며 의식을 집중했다.

“루시드 드림 ON!”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돼요.”

“나는 마법적인 준비를 해 왔노라고 막 말한 참이었다만? 그대는 아무 대비도 않고 온 것이니 당연하다.”

“내 꿈인데 남이 멋대로 조종하는 거야? 왠지 억울한데.”

“그리 생각 말거라. 그대가 거부한다면 내가 임시로 만든 물건도 사라진다. 어디까지나 꿈의 주인은 그대이고, 나는 방문객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야.”

“글쿠나.”

다시 말해서 저 바이콘 녀석은 꿈에 휘말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대책을 세워놓고 잠들었다는 소리일까?

몽마를 비롯해서 꿈에 침입하는 적을 막거나 물리치는 마법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이콘이 입은 점잖은 드레스를 지워버렸다.

“흐꺄앗?!”

갑자기 알몸이 된 바이콘은 저번처럼 쪼그려 앉아 버리고 말았다. 몇 초 전까지의 당당한 태도가 거짓말 같다.

와, 이게 되네.

머리로 생각만 한 건데 아무런 과정도 없이 슥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저것도 내가 거부하면 없어지려나? 하고 생각해 봤을 뿐인데 타임랙 0초로 캐스트 오프였다.

“으극, 으으으윽…….”

바이콘은 쪼그려 앉아서 나를 노려봤다. 죄책감을 유발하는 눈물 고인 눈에 그만 머리를 박는 나였다.

“미안하다. 조심할게. 근데 너 어차피 망아지 모드일 때는 24시간 전라 아니냐? 존나 이제 와서 뭘 새삼 부끄러워 하는 것이지?”

“사죄 뒤에 붙는 말이 많구나! 사과하는 것이냐, 놀리는 것이냐!”

“어, 아니, 어. 내가 진짜 미안합니다. 옷 입어 얼른.”

“크으으윽…… 분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주도권에 차이가 날 줄이야…….”

─휘리리릭! 바이콘은 룬 마법을 발동해서 하얀 드레스를 복구시켰다. 머리가 몽롱해서 무슨 룬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꿈이나 의식을 보호하는 의미의 룬일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옷을 입고는 있구나.’

내 몸을 내려다보니 여기에도 하얀 옷이 있었다.

바이콘과 내가 입은 옷은 어딘지 모르게 로마니아의 전통 복장 같기도 했다. 약간 그리스 철학자의 복장 같다고 하면 알기 쉬울까?

“그 옷은 토가(Toga)일세. 양복을 겸하는 옷이지. 남성복이 토가, 여성복이 스톨라(Stola)라고 한다네.”

“아아, 그렇군요.”

브람마톤 교수님이 설명을 해 주셨다. 역시 이 분은 좋은 교수님이셨다.

토가인가. 확실히 예~전에 들어본 것도 같았다. 시민들이 의례가 있는 날에 입는 전통복이라고 했던가.

“그대여. 누군지도 모를 인간이랑 얘기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거라. 나는 이미 기다리느라 지쳤다.”

돌 오두막에 들어간 바이콘이 나를 재촉했다. 내가 깨기를 계속 기다렸던 모양이니까 지칠 만도 했다.

“교수님,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앗. 근데 요즘 운동은 잘 못 하고 있어요. 제가 너무 강해진듯.”

“허허. 고얀놈.”

그렇게 브람마톤 교수님과 작별하고 바이콘을 따라서 오두막에 들어갔다. 수수한 돌 오두막에는 김이 나는 찻잔이 2개 준비돼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바이콘에게 손짓했다.

“자, 너도 일로 와서 앉아. 얘기 좀 하자.”

“왜 그대가 상전처럼 구는 것이냐……?”

“내가 주인이고 네가 초대받은 입장이라매요.”

“초대객에게 접객 준비를 시켜놓고는 잘도 말하는군.”

그건 그릏네. 내가 감탄하며 깔깔대자 바이콘은 대화하는 게 지친다는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나는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두 손을 깍지꼈다.

“그래서 무슨 얘기였지? 왜 노출증 망아지 주제에 인간일 때에만 노출을 꺼려하냐는 얘기였나?”

“그딴 화제는!! 응한 적도!! 꺼낸 적도!!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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