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콘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반론했다.
“그리고 말의 모습일 때는 털이라도 있잖느냐!! 옷을 입는 말은 없으니 부끄럽지도 않고!!”
“그래? 인간일 때는 털이 없냐?”
나는 테이블을 공중에 띄우고 바이콘의 드레스 아랫쪽을 지웠다.
으음. 무모증이십니다. 태어난 모습 그대로시군요.
우리 프랑도 그렇던데.
“흐꺄아아아아악!!”
기습적인 하의실종 140% 현상에 자지러지는 바이콘.
그녀는 급하게 상의를 잡아당겨서 매끈매끈한 하반신을 가렸는데, 그 바람에 상의의 묶음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힛?! 흐읏?!”
졸지에 수건 1장 들고 호텔 복도로 쫓겨난 투숙객 꼴이 된 바이콘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최악이다!! 꿈속의 그대는 정녕 비할 데 없이 최악이다!! 내 평생을 통틀어 내게 이렇게 수치스러운 경험을 겪게 만든 것은 그대가 유일하니라!!”
“그른가? 꿈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꿈속에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그걸로 사람을 고소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각자 자기 의식이 있는 상태니까 성희롱이 성립하려나.
근데 그런 식이면 트위터에서 랜선 섹스하는 아다들도 자기를 후다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된다. 이건 매우 심오 깊은 문제였다.
SF 느낌이 물씬 풍기는 철학적인 주제로군.
“최악이다. 이루 말할 데 없이 최악이다.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자고 이런 꼴을…….”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바이콘. 심각한 멘탈 쇼크를 받은 듯 해서 나는 오두막 안의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잠시 멘탈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얌전히 기다리자 바이콘은 자기 옷을 복구하고 다짜고짜 말했다.
“그대여. 아무 생각도, 아무 말도 말고 여기 놓인 차부터 마셔라.”
─달그락. 김이 나는 차를 나한테 내미는 바이콘이었다.
“알겠느냐? 아무 생각 말고 마셔라. 뭐가 묻고 싶든, 뭐가 하고 싶든 우선은 그 다음에 하자꾸나.”
나는 꿈을 꿀 때, 꿈속의 등장인물에게 항의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마치 최면상태에 놓인 것처럼 하라면 하고 도망치라면 도망쳤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다정하게 말하는 바이콘의 말대로 뜨거운 차를 원샷 때렸다.
“꼬로로로로록.”
김이 나는 차를 원샷. 상식적으로 화상을 입을 짓이었지만 여기는 꿈속의 세계였다.
차에서는 어째서인지 다나가 날 배웅할 때 먹여줬던 줜나 맛 없는 음료수 맛이 났는데, 그걸 뱉지도 않고 전부 마실 수 있었다.
그러자 바이콘은 날뛰는 코끼리한테 마취총을 맞춘 것처럼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대여. 어떻느냐?”
“어떻고 자시고, 맛은 안정적인데…… 어라?”
차를 다 마시자 제정신이 약간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까까지 벌였던 만행을 냉정하게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저번 꿈에서 바이콘의 머리를 붙잡고 펠라핸들이니 뭐니 지껄였던 것까지 말이다.
“통한 모양이군. 안심했다.”
바이콘은 자기 몫의 차를 다 마셔버리고 말했다.
“이 차는 현실의 내가 잠들기 전에 베개맡에 준비해 놓은 안배다. 꿈에서 깨지 않고 이성을 조금 되찾아주는 마술을 위화감이 없도록 구현해 봤다.”
“아, 그, 그래. 아무튼 그…… 아까 전의 일은──”
“그만.”
시뻘건 얼굴로 바이콘은 내 말을 끊었다. 한 마디라도 더 하면 내 혀를 꿰매 버리겠다는 분위기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오늘밤도 저번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해 다오.”
“……미안.”
“되었다. 그러나 이성이 증발했을 때라면 몰라도, 만일 제정신을 유지한 상태에서 조금 전과 같은 짓을 저지른다면 나도 반격에 들어가겠다. 명심하거라.”
─째릿.
매섭게 노려보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쓰벌. 조심해야겠다. 잠깐 방심하기만 해도 생각이 즉시 꿈에 반영되니까, 이성을 되찾은 지금도 실수할지 모른다.
“……알면 됐다. 이제까지의 흉행은 실수라고 치고 넘어가마.”
바이콘은 그런 나로부터 진지함을 읽어냈는지 조금 태도를 고쳤다.
예전에 나한테 신세를 졌었기 때문일까. 성별이 반대여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엄청 자비로운 판결이었다.
“그대와 헤어졌을 때, 나는 말했지. 다음에 만날 때는 이 은혜를 갚고 나의 이름을 밝히겠다고.”
분위기를 잡으며 바이콘이 말했다. 그런 약속도 했었던가. 꿈속의 재회가 너무 서스펜스감 넘쳐서 까먹고 있었다.
간신히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듯 해서 나도 성실하게 얘기를 듣기로 했다.
“나는 베로니카 에클립시스. 애시르(Æsir)의 말예다.”
애시르란 게르마니아의 신족을 뜻한다. 거창하다고 해도 좋을 자기소개에 나는 조금 놀랐다.
“신족의 말예라. 내가 저번에 잘못 들었던 게 아니었네.”
저번에 꿈속에서 만났을 때도 들었던 얘기였지만 역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세계에서 자기가 누구누구 신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은 꽤 있다. 왕족이나 교단의 높으신 분들이 그렇다.
그래도 설마 저리도 당당하게 자기가 신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다니!
신이 지상에 손을 뻗치지 않게 된 현대 이세계에서 저 말은 의미가 꽤 컸다. 21세기 지구인인 나조차 놀라움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네가 신족의 후손이란 거야? 바이콘이 아니고?”
애시르(Æsir)는 옛 게르마니아 어로 신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저 말부터가 어느 유적에서 발견된 문구로, 고고학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대문명 초기의 기록에 따르면 인간에게 친화적인 신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내 질문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바이콘이란 우리 종족의 이름이다. 유희신의 후예로서 현대까지 명맥이 이어진 종족은 우리들 바이콘과 유니콘, 그리고 ‘그라니’가 고작인 걸로 아느니라.”
베로니카는 자신의 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혹시 우리들 모두가 신성(神性)을 잃고 저주를 받았기에 살아남았다고 할 수도 있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어머님과 아버님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다. 과거의 전말은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도입부 정도인데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논문 소재로 쓸 수 있을 듯한 화제라서 욕심이 치솟는다.
‘아서라. 하루 이틀 걸릴 연구 거리가 아니잖아.’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도였다.
내가 왜 번역능력을 가지고도 미해독 문서를 해독하지 않았겠는가. 내 해석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증빙자료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 얘기도 마찬가지다. 그야 신화시대와 고대문명의 비화(秘話)라면 석사 쉐끼가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괜찮은 논문이 나올 것이다.
‘내가 바이콘이랑 대화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증명하면 증명하는 대로 내 장래가 심란해질 것이었다.
‘번역능력을 들키는 날에는 귀족들의 새신랑 노예 루트가 코앞에 들이닥치겠지.’
그러니까 이건 당분간은 쓰지 못할 연구 소재였다.
아니, 베로니카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연구를 진척하는 것도 방법이기는 한가? 존나 나랑 프랑 둘이서는 몇 년이 걸릴지 감도 안 잡힌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당장은 머릿속에 입력만 해 두자.’
증거를 찾아서 논문으로 쓰려면 1, 2년으로는 모자라다. 이 얘기를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여유가 됐을 때 연구해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물어봐야 할 점은 따로 있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베로니카. 뭣 좀 물어봐도 되냐?”
“물론. 뭐든지 묻거라. 그대에게는 많은 신세를 졌으니.”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하는 베로니카. 호방한 대답에 나도 마음이 놓였다.
그러므로, 내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던 의문에 대해서 물었다.
“구신(九神)이나 ‘천공신(deiwōm dyēus)’이라는 건, 혹시 신들의 피휘자(避諱字)야?”
피휘자.
높은 신분인 상대를 함부로 부르지 않도록 존경을 담아서 부르는 관습을 말하는 것이었다. 로마니아에서 포모나 신을 ‘풍요신’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래서 천공신이라는 말을 두고 프랑이랑 파라곤이 잠깐 갑론을박을 펼쳤었지.’
설마 그때 들었던 얘기가 핵심을 찌르고 있었을 줄이야. 답을 두고도 멀리 돌아온 기분에 나는 인상을 썼다.
“천공신(deiwōm dyēus)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구신(VIIII Óss)이라면 잘 알고 말고.”
내가 예전 일을 생각하고 있자 베로니카는 찻잔에 차를 채워주며 말했다.
“뇌신. 유희신. 미신 등, 신화시대를 이끌던 아홉 신들을 옛 문명의 숭배자들은 구신이라고 불렀다고 하지. 아홉 신들은 출신도 생김새도 달랐으나, 그들의 맹위를 두려워하고 따르는 자들은 많았다고 들었다.”
─달그락.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베로니카가 단언했다.
“그대가 말했던 Deiwōm Dyēus가 【천공신】님과 동일한 분을 가리키는 거라면, 그리 불리울 수 있는 분께서는 모든 하늘과 땅을 통틀어 오직 한 분뿐이다.”
나는 대답을 안 들어도 베로니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눈치를 챘다.
꿈에서 보았던 척안(隻眼)의 여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여성이라는 얘기는 못 들어 봤지만, 기록에서도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존재라고 했으니 말은 될 것이었다.
바이콘의 선조인 ‘유희신’이 로키 신(Óss Loki)이라면, 게르마니아의 신들 중에서 천공신이라고 불릴 만한 신은 그녀밖에 없을 테니까.
마법과 지혜, 시와 죽음, 전쟁과 분노, 하늘과 폭풍의 신!
나는 그 아스가르드 최고 주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천공신 오딘(Himinnoss Óðinn).”
오딘.
그녀는 룬 문자의 창조주이며, 수많은 이름과 직책을 가진 게르마니아 신화의 최고 주신이었다.
‘3대 야만족인 베르세르크 족이 섬기는 분노의 신이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옳다구나 싶은 곳도 있었다.
내가 꿨던 꿈속에서 오딘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 궁금증을 품는, 어떤 의미로는 마법사의 귀감 같은 싸이코패스녀였다.
‘거기까지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지.’
나도 학자로서 그런 삶의 자세에는 존경심을 가질 마음도 약간 있다. 저런 호기심이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니까.
‘근데 보통은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고 머리가 빡돌며 짜증이 뱃속에서 치밀지는 않지 않냐?’
그러다가 답이라고 내놓은 게 ‘배가 고프니까 내 살을 잘라서 구워먹고 포션으로 회복해야징’ 수준의 어썸한 결론이라니!
‘아마 인신공양을 받기는 싫어서 자기 목숨을 제물로 바친 것 같은데…….’
그야말로 셀프 인신공양이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미지의 지식을 의식소환하고, 소환 종료 시에 묘지에서 제물로 바쳐진 자신을 부활시키는 미라클 매직!
‘아즈테카의 우신(愚神)들에 비하면 양심적이기는 해. 근데 저것도 보통 미친년의 사고방식은 아니지.’
나도 나름대로 좋게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치만 역시 암만 생각해도 존나 또라이 그 자체였다.
대체 무슨 약을 하면 대갈통 구조가 저딴 식으로 발달을 하는 걸까. 왜 저 크레이지 핫 또라이가 게르마니아에서 광기의 신이라고 불렸던 건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렇다. 망령되게 신의 이름을 부르는 용기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만.”
베로키나는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 반응에 나는 약간 기가 찼다.
“수백 년 넘게 인류의 삶에 관여를 안 하는 신들인데 뭘.”
“……나는 언젠가 그 분들이 돌아오실 거라고 믿는다.”
“네 믿음에 내가 참견할 자격은 없지. 돌아오시는 건 나도 찬성인데, 그때 나한테 천벌을 내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지구에서 듣던 북유럽 신화의 지식을 반추했다.
내가 아는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은 라그나로크라는 거대한 멸망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했다고 들었다. 제대로 된 지식은 아니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랬었다.
‘이세계에서도 ‘신들의 멸망’이나 ‘신들의 황혼’이라는 말은 고대문명의 유적에 기록이 남아 있어.‘
그런데 그렇다고 진짜로 신들이 멸망했는지 아닌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고대문명의 멸망이랑 같이 기록이 훼손됐으니까.’
존나 각국의 신들이 모조리 싹다 손 잡고 와장창 엔딩을 맞이한 것도 아닐 것 아닌가.
왜 신화시대 이후로 모든 신들의 지상 개입이 동시에 멈춰버렸는가. 그것은 현대 이세계인들도 모르는 역사의 미싱 링크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각 밖의 질문이었군. 내 이야기에 맞춰준 것이냐?”
베로니카는 화제를 바꾸어 그렇게 물었다. 내 질문이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쓰는 마법의 주문에 나오는 말이거든.”
“그대의 마법…… 구신의 마나를 휘감는 그것 말이로군.”
“알고 있었어?”
타뷸라도 그러더니만 룬 마법사들은 보면 다 아는 건가? 베로니카는 내 말에 손가락에 붉은 룬 문자를 띄웠다.
그 룬은 ᚨ(Ansuz)의 변형인 ᚬ(Óss).
ᚨ(Ansuz)보다 광범위하게 ‘신’을 뜻하는 룬 문자다.
“그 마법의 마나가 룬의 마나와 유사하더군. 룬 마법과는 기원이나 모티브가 비슷한 듯 하다.”
“어어. 아마 그럴 걸. 야수회귀라는 마법인데, 주문부터가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ēus)》거든. 나도 이건 아무래도 오딘님을 흉내내는 마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어.”
베로니카의 말에 나는 야수회귀의 주문을 읊었다.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ēus)》.
천공신(deiwōm dyēus).
여기서 말하는 데이웜(deiwōm)은 신이라는 뜻이다. 노르드 ‘석사’처럼 칭호에 가깝다.
그러므로 디에우스(dyēus)라는 말이 그 유적을 만든 원시인들이 부르던 천공신의 이름이다.
“마법을 만든 원시인들이 오딘님의 본명을 모르고 지들끼리 부르던 표현이 저렇게 정착된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면 가설도 틀이 잡히기 시작한다.
한국어의 ‘병신’도 어원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었는데 21세기에서는 머리나 성격이 삐뚫어진 놈을 싸잡아서 부르는 욕이 된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야수회귀의 주문은 디에우스 신께 기도드려라 라는 뜻이 되려나.’
베로니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룬을 지우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마법은 천공신님의 마나를 모방한 거겠구나. 어쩐지 순수한 구신의 마나라기에는 느낌이 내가 아는 어느 신의 마나와도 어울리지 않더니, 그런 이유였나.”
“아마도.”
야수회귀는 사제나 수녀들의 기도처럼 제대로 된 형식을 취한 마법이 아니다.
내 추측이지만, 눈대중으로 파쿠리한 마법이라서 100% 똑같이 카피하지는 못한 게 아닐까?
‘야수회귀는 주문부터가 존나 근본이 없으니까.’
디에우스는 로마니아 어에서 신을 가리키는 말인 데우스(Deus)의 원형이다.
21세기 지구의 연극용어 기계장치를 타고 온 신(Deus Ex Machina)에서 말하는 데우스의 원형이며, 그리스 신화의 신 제우스(Zeus)의 유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