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실제로는 어디까지?”
“끝부분의 대화만 조금. 하지만 전부 못 들은 걸로 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누구나 말하기 싫은 비밀은 있고, 저는 그 비밀을 파헤치는 악취미는 갖고 있지 않아서요.”
나는 절충안을 내밀었다.
브리타니아 어로 말할 때보다 훨씬 기품이 있는 로마니아 어휘라든가.
귀족인 헨네시스 영애와 말을 놓고 있었다든가.
10년 쯤 전에 로마니아의 귀족 가문들이 전쟁으로 대거 몰락했다든가.
그런 얘기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동료들이랑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티르시가 파티에 가입하는 걸 거부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파티원들을 대신에서 묻죠.”
나는 불문곡직 말했다.
화제를 돌렸다? 설마. 이것은 아까 전의 화제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티르시. 당신의 과거는 다 끝났나요?”
로마니아 귀족들의 몰락은 내전(內戰)이 아니라고 들었다.적대세력의 보복이 없다면 파티를 꾸리지 못할 이유도 없다.
과거 얘기를 꺼내자면 나만큼 어메이징한 뒷사정을 숨긴 놈은 세상 어디에서도 못 찾을 것이고 말이다.
티르시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여러분한테 악영향을 끼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됐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마법사 길드의 연금술사인 티르시 아르마슈나스인걸요.”
몰락 귀족이라는 건 진부할 정도로 범백(凡百)한 일이었다.
로마니아에서는 그때의 여파가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 문제로 남아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
‘IMF 같은 사건이 연달아 터졌댔나.’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출신이나 과거가 어떻든 사람은 오늘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지도교수한테 성희롱을 당하고도 참아가며 말이다.
“……고마워요, 노르드. 배려해 줘서.”
티르시는 조금 감정이 복받쳤는지 목소리가 잠겼다.
솔직히 지금 대화의 어디에서 눈물의 여지가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여자들의 감정선은 가끔씩 이해가 안 간다.
─훌쩍. 작게 코를 마신 티르시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번에 말씀드린대로 노르드가 묵는 여관에 찾아뵐게요. 아,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예. 안 그래도 지금은 잠깐 쉬는 시간이니까 편하게 찾아 오세요.”
다시 모험가 일을 시작할 때까지는 탱자탱자 놀 생각이다. 미스릴 무기는 제작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그래요? 알았어요. 내일 뵈러 갈게요.”
그렇게 말한 티르시는 떠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내가 이 장소에서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먼저 가세요.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나는 손사레를 치며 멋쩍게 뺨을 긁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티르시를 떠나보내고 10분이 흘렀다.
“──노르? 왜 이런 곳에 있어?”
조마조마하게 연습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나는 기다리던 프랑의 등장에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라리루라가 이리로 가라던데. 노르가 불렀던 거야?”
프랑은 내 부탁을 듣고 같이 왔을 라리루라를 찾아서 뒤를 돌아봤다. 라리루라는 눈치 좋게 물러났는지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틈에 얼른 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이제부터 굴러가야 하는 혀다. 암만 기름칠을 해도 모자라다.
“내가 불렀어. 라리루라한텐 파티 시작 전에 부탁했고.”
“그래? 왜 이런 곳에── 아.”
프랑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설마 눈치채버린 건가? 심장이 멈춰버리는 느낌이라서 당황한 나에게 프랑은 수줍게 말했다.
“저기…… 노르? 귀족님의 저택에서 야한 짓은 안 된다고 생각해.”
“아니아니, 아니거든요? 전혀 아니거든요?”
이런 시발. 야외 플레이의 폐단이었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영주 저택의 정원에서 여자친구랑 그런 짓을 하겠냐고요. 나는 가슴 주머니 안의 든든한 감촉을 느끼며 라마즈 심호흡을 했다.
“사실은 그…… 좀 더 그럴싸한 타이밍에서 하고 싶기는 했어. 막 엄청난 유적을 찾았다든가, 드래곤 같은 몬스터를 잡았다든가 하는 거.”
“영주님의 파티에 불렸다는 상황이기는 해도, 불린 원인은 흑마법사 퇴치에 머리를 들이민 덕분이었잖아? 약간 그 뭐시냐. 고조감이 모자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원래 이런건 사전 준비가 필요하지만, 나는 그런 준비를 마법으로 떼울 수 있도록 습득했다.
어떤 때에라도 결정적 타이밍을 잡을 수 있도록 말이다.
축하연 소식을 듣고 지난 7일 간을 온갖 핑계를 대며 혼자 돌아다녔던 것도 이것 때문이다.
중간에 바람 피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나는 하늘을 높이 쳐다봤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은 초승달이었다.
“하지만 뒷일은 뒷일이지. 더 나은 기회를 찾으려다 손에 들어온 기회도 놓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부른 거야.”
“미안, 노르. 잘 모르겠어. 무슨 얘기야?”
“──이런 얘기야.”
고개를 모로 꼬는 프랑. 나는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리고 주문을 외웠다.
“<구름 소환>. <수사의 랜턴>.”
─사르르르르르.
두 개의 마법이 섞인다.
마법은 조합이다. 수학의 수식이 사칙연산이라는 계산식을 정돈하고 합산한 결과물인 것처럼 말이다.
‘<구름 소환>의 마법에 <수사의 랜턴>의 마법을 더한다.’
<수사의 랜턴>은 음유시인이 연출용으로 즐겨 쓴다는 저위 마법이다.
빛의 밝기나 마나 연비를 무시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빛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마법!
파란색으로. 좀 더 파란색으로.
나는 마법의 빛을 프랑의 눈동자에 최대한 가까운 푸른색으로 바꾸었다. 구름이 빛무리에 섞여갔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푸른 구름! 그것은 언뜻 밤하늘의 성운(星雲) 같기도 했다.
<구름 소환>과 <수사의 랜턴>은 모두 형태 조작이 가능한 마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 프랑이랑 함께 올려다봤던 보름달이 뜬 밤하늘을 여기에 재현했다.
“……예쁘다.”
프랑이 읊조렸다. 언제였을까. 프랑이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던 건 제대로 적중이었던 모양이다.
푸른 꽃에 손을 가져갔다. 장미를 닮은 꽃이었다.
내 고향 지구에서 푸른 장미의 꽃말은 ‘원래 얻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술과 노력으로 그 푸른색을 장미에 재현하게 됐을 때부터는 ‘기적,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사라라락.
푸른 성운이 내 손의 움직임을 따라 느릿하게 휘몰아쳤다.나는 가슴에서 푸른 장미를 뽑았다. 빛으로 장식한 장미를 세련된 손놀림으로 프랑의 가슴에 달아줬다.
무릎을 꿇는다.
요령은 바닥에 옷이 더러워지지 않게 정말로 꿇지는 않는 것. 나는 최근 집사장한테서 죽도록 배워서 몸에 익힌 예법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배에 힘을 주고 전력을 다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꿈도 다 버리고 여기서 혀 깨물고 죽어버릴 각오로 품 안의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내가 클라라에게 제작을 부탁한 것은 창이 아니다.
창은 설계도만 짜 놨을 뿐이다. 애초에 창만 만들 생각이었다면 금속 세공 능력 따윈 보지도 않았다. 가지고 돌아갈 미스릴 주괴가 남았을 리도 없고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때를 위해서 준비했다.
신은(神銀)의 반지가 빛무리를 받으며 자태를 뽐냈다.
보석으로 장식된 것도 아니었지만, 뛰어난 대장장이가 세밀하게 세공한 반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프랑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나를 쳐다봤다.
이 세상에서도 한 쌍의 같은 반지가 가지는 의미는 지구와 똑같았으니까.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 양.”
나는 심혈을 기울여서 생각했던 멘트를 입에 올렸다.
여러 명의 여성을 아내로 들이려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꼴마초 새끼가 무슨 말로 사랑을 고백하겠는가.
내 20년 넘는 지구 인생에서 배운 프로포즈 멘트는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쳐박혔다. 지난 7일 만큼 내가 작문에 재능이 없는 것을 한탄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나라고 하는 못난 놈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바람’이었다.
“─────.”
프랑은 빛구름과 반지와 내 얼굴을 눈빛으로 쓰다듬으려는 것처럼 천천히 번갈아담고.
대답했다.
“──네. 기꺼이.”
나는 미스릴 반지를 프랑의 손가락에 끼워주고, 내 손가락에도 끼운 다음.
“사랑해, 프랑.”
“나도야, 노르.”
프랑과 끌어안고 조용한 키스를 나눴다.
혀를 섞는 것도 아닌, 풋풋하고 애절한 키스였다.
“히윽, 흑…… 흐이잉…….”
키스를 나누고 프랑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며 엉엉 우는 것이었다.
“왜, 왜?! 손가락 사이즈가 안 맞아?!”
존나 놀란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발을 굴렀다. 이 시발, 베로니카랑 만난 날에 마침 프랑보다 일찍 일어났길래 몰래 반지 사이즈도 측정해 놨었는데, 그게 틀렸었나?!
“아, 아냐. 나, 나…… 이런 거 꿈 꿔 본 적도 없어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멈추질 않아…….”
─뚝뚝. 눈물을 흘리며 우는 프랑.
나는 등줄기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가 손수건을 챙겨왔다는 사실에 사고가 도달했다!
이때를 위해 손수건을 준비했다!! 잘했다 과거의 강북호!! 네가 넘버 원이다!!
나는 얼른 손수건을 장비하고 프랑의 눈가를 닦아줬다.
“울지 마. 좋은 날이잖아. 아, 그리고 있지? 네 반지에는 내가 따로 마법을 걸어놨어.”
“마법……?”
“응. 두 손을 모아서 집중해 봐.”
이야기의 물꼬를 바꿔서 눈물을 뚝 그치게 하려는 나의 작전에 프랑은 그대로 걸려들었다.
기도하는 것처럼 손을 모으는 프랑. 그러자 미스릴에서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저게 프랑의 마나인 모양이었다.
“반지는 심장과 연결된 가장 큰 마나의 맥(脈)이 있다고 해. 프랑. 네 반지에는 룬으로 감각을 강화하는 효과를 넣었어.”
부모가 베개맡에서 동화책을 들려주는 것처럼 애정이 뚝뚝 담긴 목소리였다. 와 씨, 이게 내 목소리야? 안 믿기네. 존나 스윗하다.
“이건……?”
프랑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을 벌린다.
‘잘 된 건가?’
나는 영감(靈感)을 살려서 프랑의 몸에서 움직이는 마나를 찾아냈다. 내 예상과 바람대로였다.
거대 골렘의 코어와 미스릴의 증폭 효과! ᚲ(Kenaz)의 룬이 프랑의 영적 감각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만족한 나는 프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마나 각성 축하해. 프랑.”
“……흐에에에엥!! 노르으으으!!”
“아 이런.”
조졌다. 어르고 달래서 진정시켜 놨는데 다시 울려버렸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프랑을 안고 달랬다.
프랑은 감동한 것처럼 내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댔다.
“울지 마. 귀여운 얼굴이 아깝잖아. 이래서 파티 회장에는 어떻게 돌아가려고.”
“히끅. 흑…… 안 돌아가면 안 돼?”
머라고요?
눈물콧물 범벅이 돼서도 세상 예쁜 프랑은 나를 절대 안 놓겠다는 것처럼 안으며 그렇게 물었다.
“홀에 돌아가지 말고…… 여관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
“…………………………그래도 되나?”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나도 존나 그러고 싶다아아아…….’
엉망이 된 프랑을 쓰다듬어주며 침대에서 뒹굴고 싶다. 이 드레스랑 그 아래에 있는 개 야한 속옷의 흑색과 프랑의 하얀 살결의 백색이 자아내는 콘트라스트의 하모니를 즐기고 싶다아아아…….
─수유우우우우웃!!
쥬지드라가 포효하는 환청까지 들린다. 이 씹새는 고새 부활하고 지랄이네.
─문질문질.
“후으으…… 노르으…….”
프랑은 이젠 내 쥬지콘다에 하복부를 문지르는 지경까지 왔다. 눈을 보니까 아주 하트가 쏟아져 나온다.
진짜 미안한데 순간 발정났다는 표현이 떠오르고 말 정도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향한 사랑이 넘쳐나고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래 시발꺼, 뭐 어떠냐. 좋다. 침대 딱 대라.
그리 생각한 내가 프랑을 업고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으와와와.”
“……흐와와와.”
건물 그림자에 숨어서 우리를 구경하던 여자 피플이 2명.
이 시발. 라리루라랑 티르시 아녀.
“아니 뭔……. 댁들 거기서 뭐합니까?”
“앗! 흐꺅?!”
내가 말을 걸자 숨을 죽이고 구경하던 엿보기 범들은 같이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