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009)

마음이 복잡해졌을 다나가 자기 감정을 자각하거나, 그게 아니면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침착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나절만에 끝나진 않겠지.

지금은 나랑 다나의 관계가 어떻게 끝나던지 상관 없도록 유적 탐사 호위 의뢰를 대비해 마법을 배워두는 것이 옳았다.

물론, 나는 빼고 말이다.

“티르시. 저는 나중으로 괜찮으니까 프랑한테 마법 강의를 해 줄래요? 제가 지금 다른 여성분과 같이 있는 건…… 조금 다나한테 면목이 없네요.”

“아, 네. 이해해요.”

내 말에 티르시는 알겠다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서 마법 공부를 시작했고 나는 여관 우물가로 나갔다.

바위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운동이라도 하면 잡념이 없어질 것이다. 이 잡념을 없애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때까지도 짐작을 하지 못했었다.

내 친구 다나의 강한 멘탈을 말이다.

“야, 노르드. 누님 오셨다.”

그날밤, 해가 진지 10분도 안 된 오후 6시에.

다나는 우리가 묵는 여관에 찾아왔다.

다나의 별명인 ‘개털머리’는 내가 지어준 것이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이 표현은 브리타니아에는 없던 것인 모양으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분개한 다나의 얼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적당히 던진 드립이 랩실 동료들에게 순식간에 퍼진 탓에 저 녀석한테 장난 삼아 목을 졸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스스한 머리를 한 다나도 가끔씩은 자기 머리를 정돈하고는 했다. 공석에 나갈 때나 발표회에 동행할 때에는 열심히 머리를 빗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랩실 노예에서 커리어 우먼으로 클래스 체인지를 하는 다나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거야말로 다나의 원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랩실 노예 시절에는 자기 관리를 할 틈도 없었지만 말이다.

“……왔냐?”

내가 다나를 보고 속으로 놀란 것은 그래서였다.

여관을 찾아온 다나는 머리를 빗어서 정돈하고 산뜻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던 여성스러운 옷은 오늘 막 새로 산 것처럼 뻣뻣한 느낌마저 들었다.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닌데, 마치 곰인형에게 드레스를 입힌 것처럼 본인부터가 껄끄러워 하는 티가 났다.

“그래. 오셨다. 새끼, 좋은 곳에 묵고 있네.”

여관 앞에서 멈춰선 다나가 그리 말했다.

여관 샘의 쉼터는 그날 따라 많이 붐볐다. 수확철이 거의 끝나가기 때문인지 농부로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을 노리고 찾아온 행상인들이 회포를 풀고 있었다.

나는 여관 안쪽을 들여다보고 피식 웃었다.

“어. 여기가 음식도 존나 맛있어. 술은 먹어본 적 없는데, 영 구리면 술을 안주 삼아서 스프를 마셔도 될 듯.”

“웃기고 있네. 취하기 전에 배 터져 뒤질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대답하는 다나. 그렇지만 평소였다면 훨씬 말의 랠리가 이어졌을 것이었다.

다나의 눈이 화제를 찾는 것처럼 여관의 모습을 훑었다.

나는 약간 슬펐다. 그 ‘화제를 찾는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 전까지의 우리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 녀석과의 침묵이 어색했던 게 대체 얼마만인지.

“……춥네.”

“……그러게. 이번 겨울은 조심해야겠다.”

애매한 곳에서 끊긴 대화가 어색함을 낳았다.

──우리가 언제나 한참을 길게 티키타카를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싫어하거나 사이가 나빠져도 아무렇지 않은 놈으로 여겼으니까?

그럴 리가 있나. 반나절 전까지의 우리에게는 ‘이 녀석을 상대로 허물없게 굴어도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었다, 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다.

말하자면 나와 다나는 그만큼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3년 동안의 밀접한 동고도락(同苦同樂)이 만든 우정이.

그랬던 거리감은 반나절 전에 비해서 살짝 벌어졌다. 해도 될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고르느라고 말재간 없는 나와 다나는 상대방의 눈치를 봤다.

도중에 끊긴 대화와 어색한 분위기는 그것 때문이었다.

“뭐해. 마시려고 왔는데 계속 서 있게 할 거냐? 오늘은 네 썰풀이를 안주 삼을 거니까, 내가 쏘마.”

다나는 그 어색함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말했다. 내가 처음 랩실에 연구원생 노예로 들어왔을 때보다 작위적인 말투였다.

“아니, 잠깐 걷자.”

내 말에 다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쏜다니까 비싼 데로 가게? 똑똑한 새끼 같으니. 알았어. 내 맘이 바뀌기 전에 네 아내분도 데려와.”

“걘 술 잘 못해. 하프 드워프인데 신기하지?”

“그래? 나랑은 정 반대네.”

씁쓸하게 웃은 다나는 여관의 2층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겉옷 입고 와. 감기 들라.”

티르시는 밤이 되기 전에 떠났다. 여관에 남은 것은 나중에 얘기를 들은 라리루라와 프랑 뿐이다.

나는 방에 올라가서 외투를 입었다.

방에서 기다리던 프랑은 내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런 것까지 안 해줘도 된다고 매번 말려도 듣지 않았다.

“노르.”

프랑이 내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러고는 옷깃을 정돈해 주며 웃었다.

“나는 노르의 족쇄가 아니야. 잊지 마?”

“……응. 다녀올게.”

아내를 꼭 안아주고 나는 밑으로 내려왔다.

다나는 여관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온 것을 보고 짖궂게 웃을 뿐이었다.

“안에서 기다리지, 궁상맞게 뭐해.”

“니가 할 소리냐? 너, 그 옷 대학 시절부터 입던 거잖아. 잘 나가는 놈이 그러면 쓰나. 이제 옷차림에도 신경 좀 써야지.”

“냅두셔. 잘생긴 놈이 입은 낡은 옷을 빈티지 패션이라고 부르는 거거든?”

“아하! 그래서 빈티 패션으로 오셨군요? 너 그걸로는 비싼가게 못 들어간다?”

“상관 없어. 오늘은 안 마실 거니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하자 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왜? 나는 마시고 싶은데. 네가 사고 치고 다니던 걸 맨정신으로 들으면 기절하겠다니까?”

그렇겠지. 나도 오늘은 취하고 싶다. 술의 힘을 빌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면 정말 편할 것이었다.

술기운에 말이 헛나오더라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색하게 있다가 헤어지는 거에 비하면 낫지 않겠는가. 술자리가 좋은 대화의 장이라는 점은 이세계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래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나. 1달 전의 우리는 취하지 않아도 자기 속내 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어.”

“─────읏.”

사이 좋은 친구를 연기하던 다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2주일 전, 나와 프랑의 첫날밤에는 술이 필요했다.

프랑은 자신이 품은 호의를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술기운에서 용기를 빌어 내게 안긴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고백이나 유혹도 할 줄 모르던 프랑이 내 품에 안기며 보여준 호의는 술기운이 복돋아준 용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때 프랑은 아직 나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지만, 내가 보여준 말과 행동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이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아직 잘 모르던 나에게 자신의 첫 사랑을 내주었다.

쉽게 말해서 프랑은 내게 ‘사랑을 가불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프랑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려고 애썼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일까. 프랑은 내게 반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프랑한테는 남자를 보는 눈이 있었다는 말이 되려나.’

프랑은 호감이 생기자마자 대쉬해서 연인관계를 맺고, 그런 다음에 나의 장점을 찾아갔다.

아까 나에게 ‘매일 반했다’고 했던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술의 힘을 빌려서 첫사랑을 쟁취해낸 것은 드워프 답다면 드워프답다고 해야 할까. 보통은 그 반대니까 말이다.

호감이 생긴 상대의 좋은 점을 천천히 알아가며, 21세기에서 말하는 ‘썸’을 타는 게 평범한 연애의 과정이다.

──그야말로 1달 전까지의 다나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술의 힘을 빌려서 대화하는 건 간단해. 하지만 그건 분명히 다나 너에게 후회를 남길 거야.”

나는 다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뻔뻔하게 말한 것은 이 거리감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3년이야. 너랑 내가 만난 시간이. 그 시간 동안 나는 네게 내 성격의 전부를 보여줬어. 네가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절대 술기운으로 그걸 대신해서는 안 돼.”

다나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나는 그 손에 내 손을 포갰다.

나는 다나가 어떤 대답을 가지고 왔든 상관 없다.

아니, 아무 말 없이 얘기만 듣다가 돌아갈 생각이더라도 괜찮았다. 그 결론에 다나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술 따위 마시지 않아. 3년 동안 공유해 왔던 시간만 가지고도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다나가 여기서 술에 취해서 속내를 털어놓고 돌아간다고? 그랬다가는 다나가 지금까지 품었던 마음은 술기운보다 못한 것이 돼 버린다.

때 늦은 고백이든 뭐든 술 몇 잔이면 내뱉을 수 있는 말을 3년 넘게 가지고만 있다가 허무하게 낭비하는 것은 안 된다.

다나의 진심이 술보다 가벼워지지 않게 막는 것은── ‘그 기분’을 만들어버린 나의 책임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나.”

나는 무릎을 꿇어서 다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네 눈에 지금의 나는, 3년 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야?”

“──────.”

다나는 오랫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내게 큰 불안함과 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시간.

그 시간이 지나고 다나의 입술이 열렸다.

“……가자.”

내 손을 끌어안은 다나가 말했다.

“연구소에, 내 방이 있어.”

나랑 다나는 붙어 서서 거리를 걸었다.

“사르가디스는 조용하네.”

다나가 앞을 보며 말했다. 아인히르에 익숙한 다나에게 사르가디스의 밤거리는 적막해서 그렇겠지.

“교역도시에 비하면 그렇지. 밤에 산책할 때는 여기가 더 좋더라.”

유동인구가 적은 도시는 이게 보통이었다. 내 말에 다나는 고개만 까딱였다. 나는 다나를 따라서 연구소가 있는 곳으로 가며 보폭을 맞췄다.

‘역시 여관은 안 잡아놨나.’

누가 말마따나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다나는 나를 일찍 만나려고 현지 답사를 핑계로 먼저 오느라고 여관도 못 잡은 게 아닐까.

‘……내가 대학을 떠난지 대충 30일.’

내가 여기서 논문을 다 쓰고, 그게 카르미네 대학이 있는 아인히르에 도착할 때까지 대충 20일 정도.

다시 말해서 다나는 나랑 떨어지고 2~3주만에 연구소장 전근 신청을 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기다린 시간을 빼면── 거의 며칠 정도만에 말이다.

말이 없는 시간이 조금 덜 어색해졌을 때, 다나가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었던 날, 기억해?”

“어떻게 잊겠어. 어머니 것 말고 처음으로 여성 속옷을 본 날이었는데.”

“푸후훗.”

다나는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었다. 그때는 얼굴이 토마토가 돼서 죽으려고 하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농담거리로도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네가 네 교수님 속옷을 가지러 온 줄 알았어. 설마 젊은 사람이 노예한테 맡기는 공용 빨랫감에 레이스 팬티를 넣을 거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어?”

“빨랫대에 걸리지 전에 눈치채서 다행이지. 속옷 서랍에서 팬티가 1장 비더라고.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그때 만난 노예가 갑자기 랩실에서 연구원생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 아냐? 내가 널 신경 안 쓰고 배겨?”

“그거야 니 자업자득이지. 나는 네가 몰래 독이라도 타서 죽이려고 저러나 했어.”

“진짜냐? 이 시발, 그러고 보니까 네가 차 타오는 거 도맡았었지. 이유가 그거였어?”

“당연한 걸 물으시네. 나 처음 1달은 찻잎 체에 걸렀던 거 아냐? 혹시 뭐 탔을까 봐?”

“미친놈. 다 같이 먹는 차에 그걸 어떻게 타 놔.”

다나는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갭이 느껴지는 색다른 모습의 옷 맵시도 평소의 미소가 섞이니까 그녀다움에 녹아들었다.

“아아. 눈이 많이 마주쳤던 것도 그래서였나? 초원에서 풀 뜯는 야생마처럼 두리번두리번, 두리번두리번. 아주 뭣 빠지게 바쁘시더만.”

“우리 고향에서는 미녀보다 명마(名馬)를 더 높게 쳐주던 장수가 있지. 같은 이치로 야생의 명마인 저는 절세미남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하핫. 그래. 그거. 네 고향 얘기, 그것도 그립네. 대학 시절에는 그거 듣는 낙으로 출근할 때도 있었는데.”

입김을 내 보려고 했는지 다나는 숨을 뱉었다.

─후우우.

가을 날씨가 그만큼 춥지는 않았기에 다나의 숨길은 한숨으로 변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깊은 한숨이었던 걸까.

“야. 내가 너한테 고향 얘기 했던가?”

“아니, 한 번도. 물어본 적도 있었는데 씹혔지.”

“그거 미안하게 됐다. 너 말고 다른 대학 사람들한테도 말 한 적 없었거든.”

다나는 자기 손을 만지작 거리다가 내 어깨에 밀착했다. 하얀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너랑 같아.”

“학위논문 제도. 그걸로 석사 동장을 땄었어.”

“……너 외국인이었냐?”

외국인은 고사하고 이세계인인 나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빼박 브리타니아 태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억양도 완전히 이쪽이고 말이다.

“12살에 브리타니아로 넘어왔거든. 어릴 적에 고향에서는 굳이 따지자면 사제 계급── 드루이드의 가계(家系)였어.”

“드루이드? 얼스터의?”

“응. 방계라서 얼스터랑은 꽤 다르지만.”

나는 그 말에 새삼 다나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게 되었다.

얼스터 인의 특징은 붉은 머리카락이다. 보라색은 색조에서 붉은색의 조합이니까, 다나의 머리색도 거기서 기인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 말야, 고향에서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10년은 걸려서 배워야 하는 내용을 3년만에 끝냈거든. 나머지 반을 배우기 전에 고향에서 나와버렸지만.”

“왜인지 물어봐도 되냐?”

“그냥? 고향에서는 ‘왜?’ 라고 묻는 게 허락이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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