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1,009)

“아직 실망하기는 일러. 아래층에는 다른 시설이 있을지도 모르는걸?”

프랑이 위로하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프랑. 저기 있는 큰 유리구슬 보이지? 저건 전문 증류기야. 더럽게 낡아서 우리가 써먹을 수도 없고, 골동품으로도 안 팔릴 정도로 흔해빠진 물건. 하지만 저걸 배치한 곳은 백이면 백 포션 연구소더라고.”

“그, 그래?”

“응……. 그래도 네 말도 맞기는 해. 벌써 포기하기는 좀 아깝지. 조금 조사해 보자.”

실드를 푼 다나의 말에 우리는 조사를 시작했다.

연구실 안에다가 함정을 깔아놓진 않았을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쓰던 기구는 녹이 슬거나 곰팡이가 슬었다가 그 곰팡이들마저 뒤져버린 모양새였다.

“여기!! 일지에요!!”

티르시가 고급 소재로 만들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 어느 노트를 발견했지만, 그것도 꽝이었다. 종이에 비해서 잉크가 싼 물건이었는지 번지고 스며들어서 읽을 수가 없더라.

꽝을 뽑고 호기롭게 외친 것이 부끄러웠는지 티르시는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결국 30분에 걸친 노력은 개고생으로 끝났다.

프랑도 벽을 두들기며 조사했고 다나랑 나도 경험과 지식을 살려봤는데 건진 것은 없었다. 자료는 못 쓸 정도로 엉망이 된 종이밖에 안 보였다.

존나 삭은 약초 식초의 시큼한 냄새만이 방 안에 충만할 따름이었다. 시발 풀내음&시큼축축한 냄새의 콤보가 환기 안 되는 유적에 퍼지니까 좆 같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나갈까요?”

“그럽시다.

티르시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헛고생한 충격을 털어내며 출발하려고 했다.

“──응?”

내가 무너진 벽면 아래에서 어느 양피지 조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벽이 부숴지지도 않고 그대로 엎어져서 커다란 바둑판이나 체스판 같았다. 벽쪽의 돌 부스러기에 묻혀 있어서 조사하던 중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 저것만 봐 보고.”

“뭐? 뭐를?”

“저기 벽면에 뭐가 깔려 있는 것 같아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신중하게 무너진 벽에 깔린 종이를 조사하는 나. 이렇게 보존 상태가 엉망이라면 집어들자마자 찢어지는 수가 있었다.

─부스스스.

돌조각을 치우고 종이 끝을 잡았다. 질감은 두껍고 물컹하다. 가죽 종이였던 걸까? 잡아당기면 쫙 찢어질 것 같은 느낌에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글을 들여다 봤다.

고대 로마니아 어로 적힌 글자는 이랬다.

<## ## 기지 임시 좌표.>

“──임시 좌표?”

글자를 해석한 나는 깜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앞글자는 훼손되서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좋은 잉크를 쓴 것인지 보존 상태에 비해서 글자는 선명했다.

‘양피지에 좌표? 기지?’

아무리 공기가 거의 흐르지 않는 밀폐공간이어도 수백 년을 걸쳤는데 양피지에 형태가 남았다니!

이건 말이 양피지(羊皮紙)일 뿐, 몬스터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생물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종이였다. 거기에다가 고급 잉크로 글자를 써서 벽에 붙여 놨다면──

“──이거 씨발, 지도 아냐?!”

“지도?!”

내 기행을 보며 인상을 쓰던 다나가 경악해서 외쳤다.

고대문명 시대의 지도! 그것은 때로는 보물지도가 되기도 하는 값어치 있는 유물이었다.

예를 들어서 옛날 지도에서 브리타니아 남부에 어느 시설이 있다고 기록이 돼 있는데, 현대인들이 거기에서 유적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없다?

그럼 거기를 뒤지면 미발견 유적이 나올 확률이 컸다. 그건 존나 아무도 모르는 새 유적을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휘리릭! 척! 몸을 튕겨서 일어난 내가 외쳤다.

“뭐시기 기지 좌표래! 다나! 지면보강제(紙面補强劑)!”

“보강제?! 시발, 칸시스 B형밖에 안 가져왔는데!!”

다나는 가방에서 낡은 종이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포션을 꺼내며 욕설을 뇌까렸다.

칸시스 B형── 쉽게 말해서 조금 저렴한 보강제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요리에 우유를 써야 하는데 저지방유밖에 없는 느낌이다.

“염병. 아니, 됐어. 그거면 돼! 만졌는데 손에 묻어나올 정도는 아니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다른 포션을 챙기러 돌아갈 여지가 없었다.

함정이 가득하던 공간을 우리가 뚫어놓지 않았는가. 여길 비운 사이에 다른 하이에나들이 기웃거리다가 지도를 곱창낼 확률은 100%라고 봐도 됐다.

“양은?! 2병으로 충분해?!”

“해 봐야지! 피크── 는 없겠고! 프랑! 네 코어 나이프랑 망치 좀 빌려줘!”

“어? 아, 응!”

없는 연장을 끌어모아서 나랑 다나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팔 근데 이게 몇 달만이지?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란가 몰겠다. 보강 작업에서 조지면 찢어진 지도를 복원해도 읽기 힘들었다.

내가 쫀 게 티가 났는지 다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야, 병신아. 뭘 뻣뻣해져 있어. 이 일 한두 번 해?”

“아니 쫌, 시발 맞은 아줌마야. 내가 망치 놓은지가 2달이 넘었는데 안 쫄리고 배겨? 노예 일 오래 했다고 부심 부리고 지랄이여, 지건 마렵게.”

“씹새가 까분다? 내가 왜 아줌마야, 애아빠 예비군 새꺄.”

“내 아내니까 아줌마지 씨발. 누나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어, 그렇네? 나 언제 품절녀 됐냐?”

“이거 존나 빡대구리년 아냐. 아주 대굴빡에 남편을 향한 사랑만 남겨놨네. 박사모 벗어 이년아.”

“이 시발……. 됐어 새꺄. 존나 나란 년은 왜 이딴 새끼한테 죽고 못 사는지 몰라.”

“내가 세상 스윗하게 생겨서?”

“망치 내놔 시발아. 니 와꾸부터 보강하게.”

주절대면서 다나는 프랑의 골렘 코어 나이프를 잡았다.

이 눈나는 망치에 손이 찍혀도 태연한 아이언-스킨 우먼! 그래서 맨날 다나가 이렇게 피크를 잡았고, 나는 망치질을 해서 돌에 구멍을 뚫곤 했다.

“실례합니다~? 두 분이서 신나지 말고 설명해 주실래요? 뭐 하시는 거에요~?”

라리루라가 고개를 모로 꼬며 물었다. 나는 빡집중을 하며 대답했다.

“이 종이조각을 보강하게. 돌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에 종이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포션을 흘려넣는 거지.”

“아, 그래서 구멍을? 그 벽을 들어올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바닥이랑 습기로 밀착해 있어서 돌을 들면 지도가 위아래로 찢어져. 그보다 나 여기 벽이 조각나지 않게 조심해서 구멍을 뚫어야 하거든? 집중하게 우리 후배님 3분만 쉬~ 하고 있자?”

“──넷?! 쉬, 쉬를 하라구요?”

“쉿. 미안, 쉿 하라고. 나 제정신 아니니까 말 걸지 마.”

보물지도! 유적! 논문! 척척박사 노르드!

개쩌는 미래도에 정신이 나가서 3초 전에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나는 다나가 잡은 나이프를 적절한 힘으로 두들겼다.

─까앙!

나이프 끝이 조금 박혀들어갔다. 존나 망치 무게도 나이프 사이즈도 내가 아는 발굴장비랑 하늘과 땅 차이라서 집중이 힘들었다.

10년 쓴 베개를 바꾸고 침대에 누운 첫날보다 10배 더 좆 같다. 돌겠다 시발.

“아, 존나 갑자기 빡치네? 사랑하는 아내님아. 왜 유적탐사 오면서 피크랑 망치를 두고 왔어요? 남편 꼴받게 할려구?”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않이 저기요? 거기서 사과하면 내가 뭐가 돼요?”

“키타이 평균남?”

“난 왜 이 년한테 죽고 못 살지. 얼탱이가 싹 나가버리네.”

─까앙! 까앙!

아가리 하자. 집중해라, 집중.

나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망치질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잘못해서 벽에 커다랗게 금이 가서 쪼개진다? 지도도 그 개시팔 염병할 균열에 맞춰서 천하삼분지계에 들어간다.

제갈량도 3번 보러 가면 나오는데 지도는 30일을 거쳐서 복원해도 로마니아라는 글자가 똘마니야로 변신한다.

그랬다가는 보물 창고라고 적혀 있어서 갔는데 실제로는 오물 창고여서 폭풍을 부르는 이세계 푸세식 화장실 대탐험을 찍는 수가 있다.

“빠바밤 바바밤 빠바바바밥~ 빠바바바바 빠바바바바 빠바바바밥~.”

“아, 시발. 이 새끼 또 정신병 전원 들어왔네.”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맥가이버 OST.

나는 만능 공돌이가 된 기분으로 피크를 뚫었다. ─카앙! 새된 소리를 내며 벽에 구멍이 뚫렸다.

시발, 성공이다!

─툭툭툭. 망치로 나이프 좌우를 두들겼다. 이렇게 틈을 벌려야 나이프가 뽑히기 때문이었다.

“쓰으으읍…….”

다나가 바닥에 쓰러진 벽에서 나이프를 뽑았다. 내가 체중을 넓게 실어서 벽이 들리지 않게 눌렀다.

그렇게 4번을 반복해서 벽에 포션을 넣을 구멍을 냈다.

“봤냐? 봤냐고. 지렸죠? 실력 녹 안 슬었죠? 타고 났죠?”

“암. 새끼가 구멍 파고 뚫는 건 존나 잘하네. 니 손놀림에 나까지 막 이 구멍이랑 싱크로나이즈가 된다, 새꺄.”

“……누나. 라리루라랑 티르시 있는데.”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내 말에 받아치기 바빠서 때와 장소를 망각한 다나는 고개를 박고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누나 깔대기 똑바로 들어 시발. 나 뒤져 진짜로.”

─덜더르덜덜덜.

수전증이 켜진 손으로 다나가 받친 깔대기에 포션을 붓는 나였다.

벽을 뚫고 밑으로 샌 포션이 내 발치로 나왔다. 잘못한 거 아니다. 이래야 되는 거 맞다.

─졸졸졸.

2병 있는 포션을 다 부어서 지도를 보강했다.

삐져나온 지도 부분이 잡아당겨도 안 찢어질 만큼 튼튼해졌을 때, 우리는 벽에서 일어났다.

“프랑, 라리루라. 와서 같이 들자. 모서리 잡고 동시에 들지 않으면 찢어져.”

“네? 저 힘 부족할 텐데……. 링링이한테 맡겨도 돼요?”

“어. 안 돼. 걔는 프랑이랑 키 차이가 너무 나.”

“윽. 노르, 너무해…….”

의문의 일격을 맞은 프랑이 신음을 흘렸다. 미안. 이번만은 용서해 주라. 이따가 여관에서 벌충해 줄게.

“자, 하나~ 둘에 맞춰서 든다? 하나~ 둘!”

“으기잇!!”

라리루라의 이상한 기합을 들으며 벽이 세워졌다. 티르시가 눈을 크게 떴다.

“머, 멀쩡해요! 조금 번졌지만 거의 멀쩡한 지도에요!!”

“조심해!! 벽 안 무너지게 조심해서 내려놔!!”

존나 섬뜩한 소리였지만 무게를 생각하면 가볍게 내려놓은 거라고 해도 좋았다. 안심하며 벽에 세운 지도를 보는 나.

존나 입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성능 확실하구만.”

복원한 것은 갈색 가죽 종이에 그려진 세계지도였다.

과연 번진 구석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연구원들 굴려서 복구 시키면 1달 내로 원형을 되찾을 것이었다! 그때 다나가 눈에서 빛을 뿜어대며 지도 구석을 가리켰다.

“구석! 저기 구석! 연력 좀 봐! 시발, 미친! 발행일이 존나 황금시대 전이야!!”

“뭐?!”

나는 개구멍에 머리를 쳐박는 동네 똥개처럼 지도 아래의 발행일자에 코를 박았다.

“허미 시팔! 진짜잖어!!”

고대문명이 멸망하기 전, 황금 시대의 연력이였다! 학계에 보고가 안 된 고대문명 시기의 온전한 세계지도라는 뜻이다!

“보물지도!! 겟또다제!!”

─짜악! 나랑 다나는 희열에 찬 열기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월척이야!! 이건 복원 못 해도 연구소 단위 논문감이라고! 나 연구소장 달고 반년만에 세미나 단상에 오르면 어쩌지?!”

“어쩌긴 어째!! 존나 발표 깔쌈하게 하고 교수 달면 되지! 존나 우리 누나 하고 싶은 거 다 해! 29살 여교수 해 버려!!”

“개새끼가 굳이 나이 언급하고 앉았네 뒤질라고!! 그래도 기분 좋으니까 봐 줬다!!”

“흐흐헤헤헤헷!! 프랑!! 프랑 너도 이리 와서 춤춰!!”

“어? 나, 나도? 왠지 좀 싫은데…… 앗. 아, 알았어! 잡아 당기지 마!!”

“이히히히히힛!! 에헤헤헤헤힛!!”

우리는 격한 행복을 참지 못하고 프랑까지 잡아당겨서 춤을 춰댔다.

그것은 껍질을 벗긴 도마뱀을 불판에 올린 것보다 좀 나은 개구락지 댄싱에 불과했기에, 몰락 귀족 출신인 티르시와 서커스단에서 춤을 배웠을 라리루라는 일행이 아니라는 것처럼 약간 거리를 두었다.

“아,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거 떼야지!”

그렇게 한껏 즐거움을 표현한 다나는 땀을 닦으며 웃었다.

“프랑! 지도 떼어내는 거 도와줄 거지?”

“으, 응……. 그럴게에……. 반지 끼고 도니까 어지럽다아…….”

내가 프랑을 끌어안고 3600도 회전을 했기 때문에 프랑은 취했을 때를 방불케 하는 발걸음으로 지도로 향했다. 감각 강화 반지의 효과를 가감하지 못했나 보다.

─찌이이익. 찍.

지도를 떼어내서 잘 말리고 가방에 넣는 다나. 거의 회사 지원서를 면접에 들고 가는 취준생 같은 신중함이었다.

“우후후후후!! 이 지도가 복구되면 미발견 유적을 추가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나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텐션으로 말했다.

“학계에 보고는 가능한 늦게 할게요. 아니, 복원 작업도 저 혼자서 해야겠어요. 그렇게 저희만 알아낸 유적을 발토하면 실적을 계속 올릴 수 있잖아요!”

“추, 축하드립니다.”

“추, 축하드려요……?”

약간 텐션을 못 따라가는 그녀들의 반응에 다나도 조금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 어쨌든 오늘은 이걸로 돌아가죠. 지도를 빨리 연구소 금고에 숨겨놓고, 아랫층 탐사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해요.”

─으흠. 헛기침을 하며 맨날 지루해 보이는 다크서클녀의 표정으로 돌아오는 다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은 애교로 봐 주도록 하자.

“아핫♡! 언니랑 선배가 너무 즐거워 하시니까 저희들은 기뻐할 틈도 없었네요!”

상황을 정리하는 라리루라의 그런 말에 나랑 다나는 같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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