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1,009)

“여러분. 야생의 오크가 출몰하는 지역까지는 조금 멉니다. 재촉하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늦장은 부리지 말아 주세요.”

“안다. 나는 풀을 먹고 말 같은 힘을 가졌다. 말기운 빵빵. 체력은 자신 있노라.”

“설마 거리가 있는데 시험 장소까지 걸어갈 건가? 빠르게 도착해야 토벌 중에 문제가 생겨도 조바심이 안 나지.”

티르시의 말에 대답하는 트롤러들. 칼도 역날검일 것 같은 인간 염소 새끼는 무시한다 쳐도, 아서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우둠라 길드에서 정해준 시험 장소는 도보로 3일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운이 나쁘면 왕복만 하다가 시험이 끝나버리는 거리!

‘10일 안에 가져오라는 제한도 있으니까, 대놓고 걸어 가지 말라는 소리지.’

시간이 촉박한 의뢰에서 돈을 아끼려 드는지도 시험하는 게 아닐까.

모험가에게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중요했다.

배달 라이더들처럼 욕심을 부리며 일감을 잔뜩 쌓아놓다가 펑크내도 되는 건 브딱이까지다. 실버 클래스부터는 의뢰를 조지면 길드 지부의 신용이 추락하니까.

오크를 찾는 시간, 몸을 쉬게 하는 시간까지 계산을 하면 도보로 가는 것은 어리석었다. 티르시도 그건 인정했다.

“물론이죠. 마차를 빌릴 생각이에요.”

“돈은 나눠서 내고? 끄응. 이번만큼은 반드시 합격하려고 준비했기 때문에 나는 수중에 가진 게 별로 없네만. 나중에 꼭 갚겠네.”

알코올 중독자가 입 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멘트였다.

저딴 말에 속아서 돈을 빌려주면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해야 속이 덜 쓰린 법이었다. 비건 놈도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동물들 먹이 주느라고 동전이 없다. 고양이들 입맛 왜 까다로워졌지 모른다. 몸에 좋은 풀을 먹어야 짜증이 없어지는데, 요즘은 잘 안 먹겠다.”

그건 내가 이 동네 좆냥이들한테 생선을 멕이고 다녀서 그래.

아니 것보다 캣맘+채식주의라니. 이 풀로 딸칠 것 같은 비건 새끼는 개 끔찍한 혼종이었다.

저 새끼 내가 고양이들한테 생선 준다고 하면 칼 뽑는 거 아니냐?

애초에 고양이들한테 풀을 어떻게 멕이는 거지.

캣닢이라도 들고 다니나.

“돈이 없으시다면, 마차 비용은 제가…….”

그때였다. 티르시가 심사숙고 끝에 승급전을 위해서 자기 돈을 투자하려는 스탠스를 취하려고 했던 것은 말이다.

“잠시만요. 제 의견도 들어보시죠.”

나는 티르시의 말을 멈추었다.

목 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트롤러 새끼들한테 조별과제 팀장이 하드 캐리를 하는 것은 자주 발생하는 비극이긴 하다.

‘근데 아는 사람이 그러는 꼴을 내가 두고 볼 수는 없지.’

티르시의 지갑 사정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말이라고 아십니까? 정말 좋은 이동수단입니다.”

반신반의하는 파티원들을 데리고 나는 하말 목장으로 갔다.

저번에 홉 고블린을 조지러 갈 때도 갔던 그곳이다.

“어이쿠. 저번에 오셨던 모험가 양반 아니여?”

걸쭉한 목소리로 농장주가 우리를 맞이했다. 여기는 별로 바뀐 것도 없었다.

“예. 이번에도 하말을 빌리러 왔습니다.”

“크, 그래. 하말. 내가 댁이 하말을 타고 달렸다는 얘기를 했다가 거짓말 말라며 뭇매를 맞았다니까.”

“흐흐. 그거 재난이었겠군요.”

“말도 마슈. 여기 차용증에 서명하시고. 그런데 추수기라서 하말들이 얼마 안 남았수다. 괜찮수?”

“예. 커다란 놈들이니까 1마리에 2명씩 탈 겁니다.”

그렇게 사인부터 해 놓고 왔는데, 다른 파티원들은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하말이라고 하면 게으른 동물의 대표 아닌가. 보증금까지 생각하면 마차가 낫지 않겠나?”

“얘네를 타고 오크를 잡으러 갈 것도 아니잖습니까? 근처 마을 여관에다가 맡겨놓으면 되죠.”

하말을 빌리는 게 마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이었다.

정보통신&교통이 씹창난 이세계에서 마차는 대도시 사이가 아니면 거의 배치가 안 되어 있는 편이었다. 몬스터한테 뒤질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타는 사람도 없는 버스를 운용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는가.

오크 토벌 시험의 무대가 된 아그로스 마을이라는 곳까지 가려면 중간에 대도시에서 내려서 하루 정도 걸어야 하는데, 이 녀석을 타면 하루면 충분했다.

“히히힁헹 히잉!! (그때 그 사람!!)”

내가 마굿간에 가자 4마리 있던 하말들이 나를 알아봤다.

당연히 나는 똑같은 색깔의 말대가리 놈들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없었는데, 나한테 가까이 오는 놈이 있길래 눈치를 깔 수 있었다.

“너 이 새끼! 저번에 우릴 태워줬던 따릉이구나!”

“행!!! (맞다!!!)”

홉 고블린을 잡으로 페르포트 마을에 갈 때에도 탔던 하말! 이 대책없는 경박함은 고놈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자식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낄낄댔다.

“후르히힝행! (오랜만이다!)”

“행! 후르히힝행! (맞다! 오랜만이다!)”

내가 털이 빽빽한 목을 긁어주자 좋아 죽는 따릉이였다.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행복해 하는 것이 영락없는 가축이다.

‘얘네가 신마(神馬)의 후예라고? 정말로?’

그래서일까.

나는 저번에 꿈에서 저주 얘기를 하며 바이콘 베르니카가 말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라니!! 그라니로구나!! 그대여, 혹시 그라니의 저주까지 풀었는가?!

─그 녀석들은 말의 형태가 본래 모습이기에 사람을 등에 태우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느니라!!

사람을 등에 태우지 못하는 저주라.

말의 앞뒤는 맞는데 영 의심스럽다. 이 게으름의 상징이자 순해빠진 놈들이 신의 피를 이은 말의 후예라니.

나를 보러 온다더니 1달 가깝게 깜깜무소식인 베로니카.

그 녀석을 다시 만나면 물어볼 수 있을까?

‘저번에 헤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물어볼 기회도 없이 존나 바짓가랑이만 당겨질 것 같지만.’

일족의 숙원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투로 애걸복걸을 하던 베로니카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딴에는 품위 있게 굴던 녀석이 분위기 잡는 것도 잊어버리며 빼액대던 것이 엄청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가끔씩 떠오를 때마다 생각해 봤었다. 바이콘의 저주를 해주하는 방법을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하말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빌리러 올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여전히 짐작 가는 방법은 그다지 없다.

아무튼 그렇게 따릉이와 회포를 푼 나는, 하말과 떠드는 나를 미친 놈처럼 쳐다보는 드워프와 외노자 앞에서 놈의 위에 올라탔다.

“끄허어억!!”

“꺄아앗?!”

이번에도 가려움이 도지지 않았는지 따릉이는 기쁨의 포효를 올렸다.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포효에 기겁하는 파티원들. 나는 따릉이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보시다시피 키타이의 톱 시크릿인 원시 고대 주술을 잘만 쓰면 하말을 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야생 하말이 얼마나 발이 빠른지는 익히 아시죠?”

나는 야생 하말의 속도 따위 모르지만 말은 그렇게 해 뒀다.

─끄덕끄덕!

다행히 다들 야생의 하말에 대해서 아는지 반응은 극적이었다.

“내가 미래다!!”

어썸한 브리타니아 워딩을 자랑하며 비건 놈이 손을 들었다. 아마 다음은 나야 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를 미래로 만들어라!!”

“옆에 있는 하말을 타십시오. 그 놈의 기운을 복돋아 드리겠습니다.”

“나는 수근이다!!”

수긍한다겠지 병신아.

알겠다는 말을 두고 왜 저딴 어설픈 고급 어휘를 쓰는 건지 모르겠다. 외국어는 깐지나는 표현부터 기억하게 되지만, 그걸 제대로 기억할 지능은 없어서인가.

류승룡 기모찌나 전북익산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비건 놈이 탄 하말도 기운을 차리게 해 줬다. 저번처럼 간지러운 곳을 묻고 긁을 뿐이라서 순식간이었다.

“크흠. 미안허이. 나는 말을 못 탄다네.”

“사실 저도요.”

“아니 자네도? 말도 못 타는 사람이 왜 하말을 빌리겠다는 소리를 했나?”

“티르시랑 비건 씨가 탈 줄 아신다셔서요.”

저번에 프랑이랑 탔을 때를 생각해 보자.

이 새끼들한테 사람 1~2명 정도는 오차에 불과했다. 세상 게으른 새끼들인데 밥을 먹여주는 건, 게으르게 일해도 다른 소나 말보다 일을 잘 하기 때문이거든.

그리고 뭐, 빡긴장만 하면 지금의 나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말 위에서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었다.

기술은 힘이 부족한 자가 습득하는 잔재주다. 트롤에게는 봉술을 배울 가치가 없다.

나무를 뽑아서 후려치는 새끼들이 란나찰을 배워서 어따 쓰겠어.

“커허험. 그래서 그, 파티장 아가씨?”

그때였다. 드워프 아서스가 어색하게 티르시에게 물었다.

“저 친구랑 나, 누구랑 같이 탈 겐가?”

“……그렇군요.”

티르시는 품위 있게 입가를 가리며 생각하다가 주저 않고 내 옆으로 왔다.

양심 상 3초 정도 고민해 드렸습니다, 하는 몸짓이었다.

“씨부럴. 남자는 키가 전부가 아니건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마법사라서, 만일을 생각하면 합을 맞춰본 분과 짜고 싶어서…….”

“허허. 됐수다. 별로 기대도 안 했소.”

아서스는 점심 시간에 복권을 긁는 노가다 반장처럼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정신승리를 했다.

─탁탁! 비건은 자기 뒷자석을 두들기며 환하게 웃었다.

“야! 타!”

“하여간에 이 새끼는 웃어른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

드워프 꼰대는 하울링을 하며 비건의 하말에 올라탔다.

그래도 브론즈 짬이 있는 걸까? 아서스는 안장에 올라타며 낑낑대지는 않았다. 나는 하말에 올라타서 티르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티르시.”

“고마워요. 실례할게요.”

─풀썩. 티르시가 내 손을 잡고 올라타서 안장에 앉았다.

나는 고삐를 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아내인 프랑이나 다나라면 몰라도 티르시의 허리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팔랑. 티르시는 지도를 꺼내서 길을 확인했다.

“여러분, 이제 가죠. 해가 질 때 까지는 길이 난 곳으로만 달리면 되겠어요.”

“초원! 승마! 석양을 향해 달리는 하말! 로-마!!”

“왜 거기서 로마니아 얘기가 나오는 게야?”

몰라. 아마 로망이나 로맨틱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저 국적도 모를 또라이 채식주의자의 전담 통역사가 될 생각이 없었기에 설명은 않았다. 티르시가 내가 잡은 고삐 앞을 쥐고 내리쳤다.

“히히히───힝!! (씐난다!!)”

─다그닥다그닥다그닥다그닥!!

저번에 나를 태우고 달렸던 경험 덕분일까? 따릉이는 좋아하는 중에도 적당히 속도를 조절할 줄 알았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 따릉이만 조절할 줄 알았다.

“히으힁 히헤휴헤헹!! 휴힝 헤흥흥 히 헤헤행!! (이 바람이 바로 나다!! 내 운명은 내 것이다!!)”

“달려라!! 락토-페스코!! 바람의 너머로──!!”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처음으로 사람을 타고 달리게 된 하말은 본능에 몸을 맡겨버렸다.

엄청난 속도로 사라져버린 채식주의자와 알코올 중독자.

─다그닥다그닥. 티르시는 그 광란의 질주를 천천히 쫓으며 중얼거렸다.

“저는 왜 이렇게 인복이 없죠?”

“……힘내십쇼.”

고통이 마법사를 키우는 것이다.

내가 보고 겪으며 느낀 건데.

모험가라는 직업은 싸우는 시간보다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끄아악…….”

아그로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알코올 중독자 드워프는 하말의 안장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저 인간은 라이딩 펫으로 각성한 하말의 속도에 첫날부터 속을 게워내고서는 그 뒤로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존나 생각하지도 못한 긍정적인 효과였지만 마을에 도착했으니 다시 술을 입에 대겠지.

“조금 피곤하군요. 숙소를 잡는 게 좋겠어요.”

티르시가 하말의 등에서 내리며 그리 말했다.

우리는 초원에서 노숙을 하며 이틀을 달렸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이동하면서 소모한 체력을 회복시키는 게 맞았다.

“로-마. 좋은 드라이브였다.”

“염병은 작작 하게.”

그리 떠드는 병신들을 이끌고 티르시는 여관에 체크인을 했다.

참고로 전원이 각방을 쓰기를 바랐는데, 남자끼리도 야영 중에 딴 놈들의 코골이 소리나 뒤척거림에 시달려서 짜증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방을 잡았으니까 이제는 작전 회의다.

티르시는 파티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오크는 후각이 뛰어난 개체가 많아요. 제가 <정화(Clean)> 마법을 걸어 드리겠지만, 여러분들도 오늘 밤까지 몸을 씻고 와 주세요.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정찰을 나갈 생각인데── 반론 있으신 분?”

“마법사님 작전이라면 우리 천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하고 어여 해산하세나.”

아서스는 여관 손님들이 마시는 맥주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티르시는 인상을 썼다.

“알겠어요. 이걸로 해산하죠. 하지만 말씀 드렸죠? 내일은 정찰을 나갈 거에요. 음주는 삼가해 주세요.”

“크하하하!! 나를 뭘로 보는 겐가? 그렇게 하겠네!”

큰 웃음을 터트리며 아서스는 골목길로 사라졌다.

티르시는 그만 얼굴을 감쌌다. 알코올 중독자가 이틀 동안 못 마신 술을 마을에 와서도 안 마신다? 바랄 걸 바래야지.

그가 사라지자 비건도 음식을 주문했다.

“주인님! 나 미트 스튜 고기 빼고 줘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