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1,009)

이런 시팔. 나도 내 아가리 터는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감 떡락하네.

너무 늦게 깨달은 감이 들지만, 나는 여성한테 이런 어필을 받고 능청맞게 넘겨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유사 아다였던 것이다.

‘하긴 우리 아내님들은 여사친 시절에는 장난 삼아서 이런 말 안 했었지.’

나는 입 안을 맴도는 멘트를 어색하지 않게 뱉으려고 입술만 달싹거리던 때였다. 티르시가 갑자기 쿡쿡 웃었다. 품위 있는 웃음이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놀려서 죄송해요?”

그리 말한 티르시는 내게 목례를 했다.

“승급 의뢰, 같이 쳐 줘서 고마워요. 다음 번에 선물 들고 댁에 찾아뵐게요. 잘 자요, 노르드.”

“예. 안녕히 주무십쇼.”

쓰벌. 간 떨어지는 농담도 다 있네. 티르시는 웃으며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도 목깃을 당기며 방으로 들어갔다.

존나 귀염뽀짝한 망아지가 내 마음을 달래줄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것은 로마니아 드레스를 입은 뿔 달린 거유 미녀였다.

나는 양반다리로 바닥에 정좌해 있는 베로니카를 보고 존나 놀랐다.

“쓰벌 깜짝이야. 아니 뭔데 변신 풀고 있냐.”

【저주가 풀린 뒤로는 말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기만 해도 마나가 들더구나. 나도 저주에 적응해야지 않겠느냐.】

“니 지금 식은땀 개쩌는데?”

베로니카는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고 땀도 이상하게 쏟아졌다. 무슨 죽을 병 걸린 사람 같다.

─힐끗. 한쪽 눈만 뜬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하마. 심장이 지네 둥지가 된 것 같구나.】

“미련하게 그걸 왜 참고 있어. 이거 써라.”

─휙! 나는 베로니카에게 오우거의 옥새를 던졌다. 좌선을 하고 있던 베로니카가 눈이 동그래졌다.

【……흐음. 이리 믿음을 사기 편하다니. 맹세를 빨리 할 걸 그랬구나.】

베로니카가 얼굴에 짖궂은 미소를 띄웠다. 꿈에서는 전부 다 비현실적인 느낌이라서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이 녀석도 엄청나게 미인상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워서 손사레를 쳤다.

“개소리 말고 거기 든 마나로 변신해서 자라. 오늘 새벽에 너희 성지에 갈려면 지금 자도 잠이 모자라겠다.”

【고맙게 쓰마. 내 깨워줄 테니 편히 자거라.】

“예이. 고맙슴더.”

대충 그렇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씨발. 꿈에서도 티르시가 나올까 봐 무섭네.’

최근에는 이상하게 선명한 꿈을 많이 꾸게 됐지 않은가. 베로니카가 의식을 연결하는 룬은 끊어뒀다지만, 왠지 옥새 얘기도 있어서 잠들기 무서운 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꿈에 등장한 것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상대였다.

사실 이건 남들한테 말하기엔 부끄러운 내용이라서 계속 숨겨 왔던 건데.

나는 이세계에 오고 나서 도통 가족의 꿈을 꾸질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자취를 시작했을 때나 훈련소에서는 존나 전 여친과 가족 꿈이 4:6으로 꿈에 나왔었는데 말이다.

그랬던 시절이 거짓말처럼, 나는 이세계에 오고서부터 도저히 가족의 꿈이 꿔 지지를 않았다. 존나 불효막심하게도 말이다.

이세계 생활 1년차가 됐을 때는 부모님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게 되어서 화가를 찾기도 했다. 유명한 화가를 찾아서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질 못해서였을까. 결과물은 우리 부모님들이랑 전혀 닮지 않았었다.

뭐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대략 1500일만에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뵐 수 있어서, 그것이 꿈이라도 굉장히 기뻤다는 얘기다.

“북호야. 여 앉아 봐라.”

소주를 깐 아버지가 초원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셨다.

내가 이세계에 온지 4년은 됐으니까 아버지 연세도 53세를 넘으셨을 것인데, 아버지의 겉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셨다.

5살 때였나. 나한테 서울 경치를 보여주겠다며 한강에 데리고 가셨을 때랑 비슷한 나잇대시다. 내 무의식이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아버지가 이때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예. 아버지.”

나는 자리에 앉으며 다른 사람이 있는가 찾아봤다. 하지만 보이는 건 별을 구경하는 어머니 뿐이셨다.

나랑 아버지가 있는 곳은 훤한 대낮인데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별을 보시는 걸까. 아무튼 오늘은 베로니카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른 초청객이 없는 꿈이어서일까. 나는 평소보다 더 생각과 행동이 의식의 흐름에 휘둘렸다.

존나 벌써부터 지리멸렬한 전개가 예상되는 것은 왜일까.

“너 이 놈의 자식아. 내가 니 컴퓨터에서 뽀르노 찾았을 때부터 다 알아 봤다마는, 애비한테 연락도 안 하고 며늘아가를 둘이나 들이고 자빠졌어?”

─까드득. 소주병 따는 소리는 왜 잊어지지도 않는지. 그리 소주를 깐 아버지는 이세계 2000cc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셨다.

어떻게 소주 1병으로 2000cc를 다 따랐는지는 묻지 말기를 바란다. 꿈이니까 옆에서 본드 빤 공룡이 지나가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렇게 맥주잔을 채운 아버지께 나는 양심고백을 했다.

“저 사실 제가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이사가신 집 주소 아직도 못 외웠는데요. 까놓고 말씀드려서 지구로 돌아가도 파출소부터 들릴지도 몰라요.”

“자랑이다 내새끼야. 됐고, 일단 한 잔 따라 봐.”

─꼴꼴꼴. 나는 유교 탈레반이셨던 친조부께 배운대로 술을 따랐다. 아버지는 2000cc를 원샷때리셨다.

“크하! 맛 좋구만.”

아버지는 바이킹 수염에 묻은 거품을 슥 닦았다.

황인종의 피부에 붙은 빨간 수염이 솔직히 좀 기괴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뭐가 일어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도 내 잔을 마셨다. 공장 소주의 합성 알코올 같은 맛이 목울대를 때리자 갑자기 집이 그리워졌다. 2000cc 공장제 알코올 원펀치에 알딸딸해진 아버지는 혀 꼬인 말투로 말씀을 하셨다.

“너 임마, 내가 니 며늘아가가 여럿 생겼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여.”

“그래요?”

“그래요? 가 아니지! 너란 놈은 왜 상견례도 없이 결혼을 하고 사후 보고를 하냐, 이 말이다!”

─탕탕! 테이블을 두드리며 아버지가 화를 내셨다. 어디서 나온 테이블이지. 소환술인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사후 보고라고 몇 번을 말했어? 엉? 임마 이거 수의대 붙고 철 든 줄 알았더니만 다 말짱 황이였다니까.”

에메랄드 소주병으로 병나발을 분 아버지는 계란말이를 안주 삼아서 잡수셨다. 그리고는 나한테 한 잔 더 받으시며 혀를 차셨다.

“너 임마. 나중에 손주들 데리고 오면 그게 니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손주 낳기 전에 며늘아가들 데리고 얼굴 비추러 한 번 올라와라. 알겠냐?”

“옙. 조심하겠습니다.”

그리 대답한 나는 몽롱한 머리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진짜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낸 꿈이었다. 어쩌면 내 뇌는 빨리 가족들에게 내 안부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드림 테라피인가. 내가 그렇게 웃자 아버지는 술맛이 다 떨어졌다는 것처럼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짜식이 표정이 왜 그따위야? 알아들은 거 맞지?”

“그럼요.”

“알아들었다면 됐다. 요즘 장사가 잘 안 되서 용돈은 못 주겠고, 이거나 가져가라. 인내심을 길러주는 좋은 말씀이다.”

─쿵! 전신거울처럼 긴 액자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약간 옛날 집에 가면 늘 있는 한자로 된 명필(名筆) 문구 같은 것인데, 우리 집에 걸려 있는 거랑 똑같았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검색해 본 적이 있었기에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버지. 제가 착한 아들이라서 이제껏 말 안 한 건데요. 이거 적당히 한자 격언을 모아다가 짜집기한 글이에요. 뭐 대단한 사람이 쓴 명언이 아니고요.”

“당연하지. 내가 만든 거니까. 글도 내가 썼어.”

“우리 집안은 왜 이렇게 밑도 근본도 없답니까?”

꿈이니까 팩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진짜여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

내가 아는 강씨 집안은 대대로 무교였는데,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이런 건 좋아하시는 분이셨다.

가끔 그런 어른들이 계시지 않은가.

서점에 카운터에 있는 책 중에서도 ‘인생에 도움 되는 격언 150개! 하루에 3개씩 읽으면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같은 인쇄지 렉카에 낚이시는 분들.

우리 아버지가 딱 그런 과셨는데, 내가 명언충이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내가 자주 읊는 근본 없는 포엠은 인터넷에서 읽은 게 더 많지만 말이다.

“자, 무슨 뜻인지 읊어 주마. 변산의 아홉 구비 굽은 길에──.”

“아버지. 그만하셔도 됩니다. 제가 평소 아버지에 대해 은밀하게 품고 있던 존경심이 지금 절반 정도 증발하게 생겼거든요.”

“도로 주입해주마. 이 애비가 소싯적에 주유소 알바 경력만 일주일 반이었단다.”

“가보로 삼겠습니다. 빠따 놓고 얘기하시죠.”

아버지는 내가 액자를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가자 만족하신 것처럼 오토바이에 올라타셨다.

“잘 지내라. 애비는 일하러 간다.”

빨간 중국집 오토바이다. 예전에 잠깐 퇴직하시고 배달 알바를 하시다가 어머니한테 등짝을 맞았던 기억이 났다. 존나 내 꿈은 이런 데서까지 고증을 다 하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만류했다.

“어어. 아버지, 술 마시고 오토바이 운전하면 큰일나요.”

“괜찮아. 야수회귀 켤 거야.”

“아. 그럼 되겠네.”

뭐가 그럼 되겠네인지는 몰라도 나는 납득을 하고 말았다. ─부르르릉!! 아버지는 중국집 오토바이로 앞바퀴를 세워서 윌리를 하셨다.

직각 90도로 도로를 질주하는 중국집 오토바이.

“와 나 정신 나갈 것 같애.”

나는 어설프게 이성이 남아 있는 만큼 이 상황에 뇌가 따라가지 못하고 골치가 땡겼다. 그러자 별을 구경하던 어머니가 무릎을 털고 일어나셨다.

“흐음. 얘기는 다 끝났니?”

꿈속의 어머니는 파릇파릇한 20대의 외모셨는데, 어디서 났는지 모를 노새를 끌고 오셨다. 비루먹은 말처럼 비실비실한 놈이었다.

예루살렘이 보이기 전에 쓰러져서 뒤질 것 같이 생겼군.

“예. 솔직히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은 들지만요.”

나는 의식은 몽롱해도 이게 꿈이라는 자각은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조금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얼마 전에 벌레 새끼들의 이계에 갔었기 때문일까.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처럼 다른 세계를 헤맸던 경험이 옛날을 그리워하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노새에 옆으로 걸터앉은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들 고민이나 망설임이 없겠니. 완벽해 보이는 상대도 속으로는 오뇌하며 앓고 있지. 그러니까 노르드 너도, 억지로 남을 흉내내지 않아도 된단다.”

흉내를 낸다니?

조금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꺼벙하게 대꾸했다가 어머니의 눈빛을 보고 눈치를 깠다.

“누구냐, 너?”

이 녀석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겉모습은 내가 오해해버릴 만큼 똑같이 생겼는데, 하는 말이나 분위기가 천지차이였다.

마치 자라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다정한 눈빛!

그것은 심각하게 우리 어머니답지 않은 시선이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심각하게 표리부동한 분이셨기에, 나는 저런 낯 뜨거운 눈빛을 하는 어머니를 뵌 기억이 없었다.

새침떼기 우렁각시처럼 내 자취방에 반찬을 채워놓고 도망가시던 반백살 지천명의 김선희 씨.

제주도 여행에 가서 말을 보고 겁을 먹고 당근으로 후려패시던 우리 어머니가 노새에 올라타셔서, 3년 넘게 실종상태인 아들에게 자상하게 말을 건다?

그것도 내 본명이 아닌 이세계식 이름으로?

암만 꿈속이지만 세상 말 같지도 않은 일이라서 나는 그만 정신이 또렷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100% 트루 토종 한국인이시다.

만약에 나의 부모님들이 이세계의 잘나신 누구누구 님이셨다면, 솔직히 나는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자 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 바닥의 국룰 반전에 따라서 여기가 우리 부모님의 고향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세계에 오게 된 것은 존나게 필연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3세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여기는 내가 거쳐가야 할 나의 뿌리일 것이니 말이다.

근데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나는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일을 내 이세계 인생의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가족과 화목하게 살아온 내가 이세계에 적응해서 이세계인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그래도 되겠는데, 존나 내가 이세계 수의대생 깽판물을 찍는 동안에 우리 부모님들이 지구에서 인간극장을 찍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자 좋다고 이세계에 안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세계에서 부모님 꿈을 꾸는 게 오늘이 처음인 불효막심한 놈이라도.

최소한 사람 새끼라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으니까.

“누구냐니. 너도 참 대답하기 어려운 걸 묻는구나.”

말로만 그렇게 말했을 뿐,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아무개는 내가 자기 정체를 눈치까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들켜도 상관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눈치채 줬으면 했던 건지.

후자라면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걸까?

아무튼 기분이 들뜬 아무개는 말투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며 말했다.

“예전에는 99개의 별명과 41개의 가명을 가졌었는데, 그 이름은 전부 잃어버렸거든.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나도 생전의 내가 남긴 안배일 뿐이야. 비유하자면, 그냥 글을 읽어주는 정령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돼.”

“생전의 안배라.”

본체는 이미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겠지.

그 말에 나는 대충 이 녀석이 누구인지에 대한 후보를 몇 가지의 세웠다. 그리고 내가 꾸는 허무맹랑한 꿈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야 할 정도로, 그 ‘안배’에 남은 힘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게 머리가 굴러갈 수록 내가 깨어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꿈은 의식이 선명해지면 깨어나는 것이니까.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건 네 계획이냐?”

내 그런 질문은 이러한 제반사정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그런 TMI에 남은 시간을 낭비하긴 아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내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당황하는 아무개.

“너는 내가 무슨 흑막인 것처럼 말을 하는구나? 나, 너한테 의심받을 만한 짓을 했던가?”

마치 내 물음이 존나 마음 속 깊이 예상 밖인 질문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체계에서 정점에 군림했던 주신의 분신이 취할 반응으로는 당최 어울리지가 않아서, 나한테는 좀 인상깊었다.

“솔직히 의심할 만 하지 않아? 아, 존댓말 써야 되나?”

“아냐, 그럴 건 없는데……. 안배라는 표현이 나빴나?”

고개를 모로 꼰 아무개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하게 말을 했다.

“의심하는 맘은 알지만, 그건 지나친 생각이야. 【중간 가지(Miðgarðr)】에 남은 신들은 가짜나 패배자밖에 없는걸. 안심해. 너는 신좌의 노리개도 운명의 노예도 아니니까.”

“으……. 못 믿는구나. 그럴 것 같았어. 지금의 나는 믿어달라고밖에 못 하는걸.”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들킨 모양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못 한다기보다는 아무개가 눈썰미가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것만은 믿어줘. 나는 운명이나 예언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해. 너희들에게 무질서한 미래를 살길 바란 것은 그것 때문이야.”

아무개는 그리 말하고 안대를 쓴 쪽으로 마녀 모자를 눌러썼다. 어느샌가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게 된 아무개 씨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처럼 말했다.

“거듭해서 말할게. 너는 자유야. 그러니까 나나 다른 누군가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돼. 나는 내가 남에게 본받아질 정도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 안 하거든.”

현기 어린 척안(隻眼)의 주신은 노새의 옆구리를 발로 두들겼다.

주인이 안장에 옆으로 걸터앉은 것을 본 노새는 일어서며 몸을 변모시켰다. 비루먹은 노새가 눈 깜짝할 사이에 듬직한 회색 말로 변신해버린 것이었다.

“허미 씹.”

저걸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 존나 말이라기보다는 말 모양 탱크 같은 느낌이었다.

존나 씨발 깝치면 뒤질 것 같다. 저 말의 뒷발차기 한 방에 내 상반신이 믹서에 갈린 것처럼 터져나가지 않을까. 무슨 활화산 같은 게 다리를 8개 달고 걸어다니는 느낌이다. 세상 초현실적이라서 보고 있어도 쫄리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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