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칵테일 셰이커처럼 흔들던 베로니카는 갑자기 눈알이 콩알만해졌다.
【죄, 죄송하옵니다! 제가 그만 정신이 나가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러고는 자기가 잠결에 만지던 게 수천만 원 짜리 도자기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처럼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전신주의 전선을 만져도 저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바들바들. 몸을 떤 베로니카는 치맛자락을 들며 무릎을 꿇었다. 어지러운 머리로 그것을 목격한 나는 밑도 끝도 없는 태세전환에 어이가 없었다.
“뭔데 갑자기?”
【죄송하옵니다! 입이 백 개여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죄송하옵니다!】
은근히 잘난 척 하던 말투를 내다버리고 극존칭을 날리는 베로니카.
솔직히 아예 상상도 못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오딘의 분신이 나를 후계자라고 했던 것 때문에 저렇게 군다는 말인가?
물론 정말로 소식을 감춘 신의 후계자가 나타난 것이라면 신실한 사람이 겸손하게 굴 만은 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도 그랬잖은가.
“너 지금 꿈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보낸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리 물었다.
물론 나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한 꿈이었는데, 증거도 뭣도 업슨ㄴ 이미지만으로 저렇게 덮어놓고 신뢰를 한다는 말인가?
【꾸, 꿈에서 내려오는 계시는 원초적인 예지이옵니다. 하물며 천공신님께서 태초에 문자를 자아내셨던 경험을 직접 체험하시다니, 접신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이옵니다. 이 꿈만으로도 의심할 나위가 없사옵니다.】
베로니카는 가당치도 않다는 것처럼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그러면서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베로니카한테 조금만 더 무례함이 남아 있었다면 나한테 경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심코 인상을 썼다. 공주님처럼 자신만만하게 굴던 베로니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떠니까 내가 존나게 씹새끼 같았던 것이다.
【힉.】
그런데 내가 얼굴을 찌푸릴수록 베로니카는 더 몸을 떨게 돼 버렸다. 존나 악순환이다.
당황한 나는 표정을 풀고 베로니카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죄 없는 사람을 갑질로 몰아붙여서 떨게 만드는 악랄한 변태 새끼가 아니었다.
“야, 베로니카. 됐으니까 일어나. 답지 않게 왜 그래?”
【노, 노르드 님! 저 같은 것을 만져선 아니되옵니다! 옥수(玉手)가 더러워지십니다!】
“않이 그만 좀 해요. 너한테 존댓말을 들으니까 몸이 막 간지럽다니까?”
생판 남이 이러는 거였으면 잠깐 말리다가 냅뒀을 건데, 이 녀석은 나랑 남남도 아니잖은가. 서로 쥬지와 뷰지를 깠다는 점에서는 어떤 의미로 티르시나 라리루라보다 더 숨김이 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시발 진짜 솔직히, 정말 140% 속내를 털어놓자면 나도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다.
나도 건전한 남자고, 베로니카는 인간형일 때는 미녀다.
구미호한테 박는 소설 주인공 새끼들을 여우박이라며 씹던 나였지만, 아다 시절이었다면 베로니카의 가슴이나 다리에 눈길이 가도 인정 또 인정이었겠지.
육감적인 몸매는 언밸런스한 꼴림의 프랑과 세련된 실루엣의 다나와는 다르게 남자의 시선을 움직임에 맞춰서 따라가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아니, 140% 진솔되게 말하는 겸에 까놓고 말하자.
뭔가가 있는 게 아니라 주로 빅-젖과 골반이 있었다. 뿔은 옵션이라고 치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미녀가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한다?
판타지 야설이라면 나쁘지 않은 시츄에이션이었다. 이게 이 녀석이 아니라 10분 전에 만난 처음 보는 미녀였다면, 어떻게 말로 잘 타일러서 친하게 지내자는 생각이 조금도 안 들었겠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고자가 아니다. 조금쯤은 흑심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
‘근데 좀 전까지 잘만 지내던 애랑 그러는 건 쵸큼…….’
상상 속 미녀 E-14를 절하게 시키거나, 굴복 복종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새끼가 있어도 나는 같은 남자로써 눈감아 줄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랑 친하게 지내던 여자 사람 친구가 자기한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데 노빠꾸로 좋아하는 새끼다?
그런 놈은 이유가 뭐든 상종하면 안 된다. 섹스 판타지랑 현실은 엄연히 다른 거니까.
‘것보다 우리 5분 전까지만 해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하하호호 거리는 분위기였잖아.’
존나 갑자기 이러셔도 내가 적응이 안 된다고요.
【아, 알아 차리는 것이 너무나도 늦어서 염치 없이 고개를 들 수가 없사옵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어도 일족을 모두 무릎 꿇리고 성지에서 노르드 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을 텐데…….】
“씨발, 제발 그러지 말자…….”
나는 라임을 넣어가며 베로니카를 억지로 잡아세웠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노견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강제로 일으키는 듯한 비쥬얼이었다.
─풀썩. 손에 힘을 빼자마자 다시 바닥에 무릎과 손을 짚어버리는 베로니카. 완전 4족보행 모드로 복귀다. 염병. 네 발로 걸어다닐 거면 저주는 뭣하러 풀었니.
“내가 뭐라고 하면 원래 말투로 돌아올 거냐?”
【뭐, 뭐라 말씀하셔도 경칭을 생략하다니 무례한……】
“기록에서는 신들한테 반말 까는 인간도 널리고 널렸어.”
고고학자인 나는 단언을 했다. 로키나 토르한테 반말을 까는 드워프나 인간은 신화에서도 쓸어다 버릴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이건 그만큼 게르마니아의 신들이 인간과 사이가 긴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본 오딘만 해도 엄청난 힘에 비해서 위엄이라고는 좆도 없었으니까.
“나를 존중한다면 말투부터 원상복귀 시켜. 네가 섬기는 신들도 너희 종족을 땅에 꿇리고 고삐를 잡아당기는 작자들은 아니잖아.”
베로니카는 입을 벌리더니 우물쭈물 거리며 끄덕였다.
【아, 알겠습…… 알겠어. 이, 이 정도로 말하면 돼?】
“아니 되느니라.”
【……아, 알겠, 느니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주제에 대답은 성실하게 하는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주인님을 물어야 하는 개처럼 울상을 지으며 나한테 호소를 했다.
【하, 하지만 노르드 님도…… 아, 아니. 그대도 너무했다. 왜 조금 더 일찍 밝혀주지 않았…… 느냐. 적어도 성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더라면……】
“그렇게 말해봤자 나는 실감도 안 나. 오래 얘기했던 것도 아니라서.”
나는 창대로 어깨를 치며 한숨을 쉬었다.
좀 뽕 차는 장면에서 정체를 밝혀줬으면 나도 당연히 와! 오딘! 이랬겠는데, 뭐가 원인으로 유령 오씨가 머갈통을 빼꼼한 건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으큭.】
내가 그리 말하자 베로니카가 배를 차인 멍멍이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변신의 룬을 읊더니 다시 망아지 모드로 변신했다. 저주의 부작용을 억누르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었다.
“10분 넘게 억지로 버티니까 그렇지.”
【죄송합── 아, 으, 미안하구나.】
내 말에 허겁지겁 일어나는 베로니카. 뭐라고 말도 못 하겠구만.
【저, 저어…… 그대여. 그대가 허락해 준다면 내가 그대의 꿈을 조사해 보아도 되겠느냐?】
베로니카는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꿈을 조사한다니?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나는 조금 신기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은 없는데, 해서 뭐 하게?”
【그대도 천공신님께 전해들은 말이 적지 않으냐. 그대의 꿈을 조절할 수 있다면 첫 번째 꿈처럼 천공신님의 기억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가능성도 있사옵…… 있다.】
“꿈에서? 그런 게 가능하다면…… 손해 볼 일은 없겠네.”
잠깐 머리를 굴려만 봐도 이득 계산이 팍팍 돌아갔다.
우리 힘으로 어디까지 조사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운만 따라주면 바이콘의 저주를 건 신과 그 해주법도 찾아볼 수가 있겠지.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허나 그것을 위해서는 내가 노르드님과 셰이드(Seiðr)의 의식을…… 어떻게? 무례를 저지른 내가 염치없이 그런 성은을 바랄 수는 없을 터인데…….】
그런데 나한테 설명을 해준 베로니카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되짚는 것처럼 혼잣말했다.
【무엇보다 마법을 영창하고 유지하려면 내 저주부터…… 아니, 셰이드에서 끝까지 가 주시길 부탁드리면……. 만나뵐 때마다 경험 횟수가 느는 비율을 보면 노르드 님도……. 읏, 그렇지. 애초에 사모님들께서 허가해 주실 리가…….】
─중얼중얼 중얼중얼. 내 청각에도 잡히지 않는 속삭임은 반쯤 자신한테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귀를 기울이다가 엿듣기를 실패한 나는 헛기침했다.
“베로니카. 나한테도 들리게 말 해 줄래?”
【히야앗?! 죄, 죄송하옵니다!!】
─파아앗! 신족 형태로 변신해서 머리를 박는 베로니카.
거의 뭐 악덕교사의 수업 시간 중에 졸다가 깬 80년대 초딩 같은 부산함이었다. 씨발 반응속도 봐라. 좆도 말을 놓은 게 아니잖아.
【그, 그것이!! 설명을 드리려면 저도 귀한 시약과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하여서……!! 부디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베로니카는 베품을 청하는 사제처럼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요청을 올렸다.
갑자기 중대장이랑 야자 타임을 하는 이등병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애1미. 이래서야 주종역전 컨셉 플레이랑 다를 게 없잖냐.
【──헤윽! 죄송합…… 합!】
자기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나왔었다는 것을 눈치채자 아예 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내 안색을 살펴대는 베로니카.
이 녀석을 프랑이랑 라리루라한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골치가 땡겨오는 느낌에 나는 얼굴을 덮으며 애꿎은 애꾸눈 년에게 5700자의 욕설을 보냈다. 생각해 보니까 그 잡신년, 여자애한테 적극적으로 대쉬하라느니 어쩌니 했었지. 그게 다 이걸 예측한 조언이었을까?
그렇다면 나한테 욕을 먹는 것은 애꿎은 게 아니라 그 년의 자업자득이 맞았다.
‘이 시팔 도이치 괴력난신 년아…….’
내가 곰박이의 후손이랍시고 나한테 쑥마늘 멕여서 기른 말고기 츄라이 하지 말라고…….
그렇게 나는 내 친구를 따까리로 만들어버린 오씨한테 기도를 바쳤다.
부디 내 기도가 그 유쾌한 게르마니아 연놈들에게 닿기를.
말박힘이 노씨(Mr.Roki)를 소울 브로로 둔 게 니 원죄다, 퓨리의 신 새끼야.
나는 베로니카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왔다.
아침이 밝자 집밖으로 나온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받으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티르시는 병상에서 일어난 파티원들을 데리러 갔을 것이다.
【이 아이는 그대가 데리고 온 것이냐?】
점점 반말에 적응해 가는 베로니카가 말했다. 오고 가면서 계속 얘기를 나누었더니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그런 베로니카가 쓰다듬고 있는 것은 하말 라이딩 펫 따릉이였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이동수단을 봐 두려고 마굿간에 들린 것이었다. 존나 지푸라기 냄새 나네.
【많이 야위었구나. 가여운 것.】
“헤르르릉(헤으응)!”
베로니카가 턱을 간지럽히자 좋아하는 따릉이.
덩치가 나보다 5~6배는 더 나갈 것 같은데 야위었다고? 이 새끼가 킥을 날리면 오우거도 맨몸으로는 척추뼈가 나사 빠진 실로폰 건반처럼 되게 생겼는데?
‘아, 그러고 보면 얘네도 그 신마의 후예라고 했었지.’
나는 꿈에서 봤던 4족보행 바이오-탱크를 떠올렸다.
신마 슬레이프니르와 그 후손인 그라니인가. 혈통빨만 놓고 보면 따릉이도 베로니카랑 맞먹을 것이었는데, 손길을 즐기는 꼬라지는 마냥 순둥한 말이었다.
“네가 만져도 거부 반응은 안 보이네?”
【먼 이웃사촌 같은 것이니까. 나는 인간도 아니잖느냐.】
“아아, 그랬지. 인간 폼으로 있으니까 헷갈리기 시작하네.”
【……마, 말 모습으로 변신해 있을까?】
“일일히 눈치 보지 마. 뭔 말을 못 하겠구만.”
【아, 알겠습니라.】
돌겠네 씨발.
내가 한숨을 쉬자 베로니카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거 존나 나도 이제 모르겠다.
시간이 고쳐주겠지. 원래 어색해진 인간관계는 대화를 하다 보면 낫는 것이었다.
나는 따릉이를 쓰다듬었다. 따릉이가 목털을 긁어주자 히힝 거리며 울었다. 손절당한 베로니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가 저주를 풀어주었다는 것을 아는 듯 하구나.】
“나한테 말하지 말고 직접 물어 보지 그래?”
【멍청한 소리…… 가 아니었지. 크흠. 그대가 잠깐 착각을 한 모양이구나. 나는 그대와 같이 온갖 동물의 말에 능통하지 않다.】
베로니카는 말투를 신경 쓰며 그리 말했다.
그런가. 나한텐 같은 말이어도 그라니의 히히힝과 바이콘의 후히힝은 계통이 다른 언어인가 보다. 위협이나 경고 같은 울음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하겠지.
아무튼 그렇게 내가 쓰다듬어주고 있는 동안에 베로니카는 따릉이를 검진했다. 나보다 더 수의사처럼 냉철하게 발작이나 두드러기를 조사하는 베로니카.
【예상했던 대로다. 그라니의 저주도 해주된 것은 절반이 전부로구나. 인간을 태울 수는 있게 되었으나, 본래의 힘은 절반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힘이 뭔데?”
【인간이 말하는 고대문명 시대의 기록에서, 그라니는 육체만은 가장 신마님을 닮았다고 전해진다. 헌데 그랬어야 할 녀석이 이리도 굼떠 보이지 않으냐. 발굽도 4개이고 말이다.】
그리 말한 베로니카는 따릉이의 발을 들었다. 탈모어들이 보면 오열할 것처럼 풍성한 갈기가 달린 다리였는데, 거기에 갑춰진 발굽은 존나 평범한 말 편자의 그것이었다.
【그라니는 네 개의 발에 앞뒤로 2개씩 발굽이 나 있어야 맞다. 전부 8개의 발굽으로, 신마님과 발굽의 수만은 같은 것이지. 신체가 가장 닮았다는 증거다.】
따릉이 다리를 놓아준 베로니카는 어깨가 결린 것처럼 목을 주물렀다.
【어쩌면 그대의 힘은 인간과 접촉할 수 없다는 저주만을 해소하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그대가 예언의 계도자라고 한들, 어찌해서 해주법을 손에 넣게 될련지…….】
“차근차근 알아보면 되잖아. 초조해 하지 말자고.”
그렇게 베로니카를 토닥거려준 나는 티르시가 데려온 다른 파티원들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오우거는 죽었다고 들었다. 불살 실패. 매우 슬픔이다.”
“실버 클래스는 달게 될 테니까 그걸로 만족하게.”
화상과 골절을 치료한 그들은 밀가루 포대를 묶은 하말을 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말의 날렵한 움직임에 놀랐지만 상대해 줄 이유도 없었다.
나는 룬 스톤을 채운 가방을 따릉이의 안장에 묶고 티르시 뒤에 올라탔다.
발이 느린 베로니카는 노멀 모드보다 50%의 크기로 변신한 망아지 폼으로 나한테 안겼다. 베로니카의 고양이도 나한테 안겼고 말이다.
물론 내가 등빨이 있어서 티르시 앞에 앉을 수가 없었기에, 나와 티르시 사이에 낀 베로니카는 저주의 반동으로 다리를 휘저어댔다.
【으큭……. 티르시야. 미안하다만 조금만 더 앞으로 앉아 다오…….】
【최, 최대한 앞으로 앉은 거에요. 불평하지 말아 주세요.】
베로니카 판사님의 쉴새없는 처녀 판정에 티르시는 목소릴 떨며 대답했다.
뒤에 앉은 나한테는 얼굴은 안 보였는데, 그 귓볼은 홍당무처럼 빨갰다. 베로니카의 저주가 자신이 아다라는 걸 5초 간격으로 말해주고 있으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모양.
아무튼 그리하여 우리는 마을을 출발했다.
“쓰벌!!”
골절이 덜 나은 주제에 제로백 5초를 달성한 비건과 그의 드라이빙 파트너 아서스가 앞장을 섰다. 티르시는 짧게 따릉이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중간중간에 쉬어가며 우리는 대충 8시간을 달렸다.
해가 지고 나서는 달릴 수가 없으니 밤이 되자 모닥불을 피우고 쉬기로 했다. 인간이 사는 것이 친환경이라고 믿는 모험가들답게 초원의 풀을 헤집고 마을에서 받은 공짜 장작에 불을 지폈다.
다친 트롤러들은 땅에 등을 대자마자 드르렁했으며, 나랑 티르시가 불침번 전번초를 맡았다. 베로니카도 처녀 멀미─어감이 존나 어메이징하다─의 여파로 조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티르시랑 다니면 곧잘 파란만장해지네요.”
나는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로 뜨겁게 덥힌 물을 마시다가 그리 말했다.
“지능을 가진 오우거라니 생각도 못 했습니다. 며칠 전에 이 주변에서 야영했을 때는 오크를 찾을 방법이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놀란 건 저인걸요. 룬 스톤의 영상이라고 하셨죠? 노르드. 그거 논문으로 쓰실 거에요?”
학자 비슷한 직업이라서 그런지, 논문 거리를 찾았다는 내 얘기에 눈을 빛내는 티르시였다.
티르시가 오우거에 대해서 길드에 보고하지 않도록 대충 설명을 해 두었던 것인데, 내가 증거를 보여주지 않아도 티르시는 덥썩 믿어버렸다.
─노르드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 말하면서 말이다.
“글쎄요. 이걸 주제로 논문을 써 볼 생각이긴 한데, 쓰기 전에 겹치는 논문이 있는지 확인부터 하려고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벌써 쓴 논문이면 시간만 버리는 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