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뭔 얘기 중이었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 나온 것도 같았는데.”
“노르가 일 나간 동안에 우리도 브론즈 클래스 의뢰를 몇 개 했었는데, 유적 경비 의뢰에서 같이 일했던 에스트 발카스 씨가 승급 시험으로 같은 의뢰를 받았었거든.”
“그랬어? 좁은 업계니까 그런 일도 다 있네.”
그런데 에스트가 누구더라.
정확하겐 기억이 안 나는데, 나한테 창의 장점을 생각하게 해 줬던 단창방패 전사였던 것 같다. 아마 우연히 같은 의뢰를 받았었나 보다.
‘세상 참 좁군.’
한편으로는 내 성장속도의 가파름이 엿보였다.
나보다 먼저 모험가 일을 했을 그 사람은 이제 막 브딱이 시험을 쳤는데, 나는 벌써 실버 클래스의 시험을 [email protected]로 퍼펙트 클리어를 했다니.
냉정한 프로로서 행동하려고 해도 약간 실력 부심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보다 쎈 놈들을 자주 만나봤기에 금방 침착해졌다.
‘미스릴 클래스를 맞다이로 따버릴 정도로 강해지기 전엔 오만해지기도 힘들겠구만.’
천상계의 전사들이 싸우는 꼴을 봤으니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었다.
오딘이나 슬레이프니르는 꿈속에서 만난 신이라서 실감이 잘 안 나지만 말이다. 대학 친구들끼리 게임 잘 한다고 다투는데 운영자 슈퍼 계정이 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아무튼 지금은 실버 클래스다. 양심이 있으면 승급 빠꾸는 안 시켰겠지.
“선배~. 하실 말씀이란 건 뭐에요?”
모험가 길드로 가는 길에 라리루라가 물었다. 나는 실수로 큰 길에서 유적의 얘기가 나오지 않게 손가락을 입에 댔다.
“일 때문에 게르마니아에 가게 됐는데, 너도 따라올 건지 물어보려고.”
이번에도 즉답이었다.
얘는 무슨 입술에도 자아가 있나. 니 뇌한테도 의견을 좀 물어보면 어떠니. 프랑도 어이가 없는지 어쩌다 보니 반대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설득을 했다.
“라리루라. 길어지면 겨울 내내 거기에 있게 될 수도 있어. 봄에는 로마니아에 갈 거잖아? 로마니아에 계신 서커스단 분들한테 보여줄 쇼 연습도 해야지.”
“으…… 괜찮지 않을까요? 저, 서커스단에 있을 때는 유람하면서 연습 했었다구요?”
프랑의 말에 풀이 죽어서 대답하는 라리루라.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은 일인데, 아직 18살짜리 애니까 근거 없는 자신이 아닐지 걱정이 됐다. 민증을 받은 19살은 어느 세상에서나 자기가 어른인 줄 아는 정신년자이기 마련 아니던가.
아 근데 씨팔, 내가 이런 쉰내 나는 생각을 다 하다니.
나도 어느새 노땅 다 됐군.
“그게 아니면 혹시…… 저는 따라오면 안 되는 애인가요?”
라리루라가 치켜뜬 눈으로 주저하며 물었다.
입술을 깨물며 내 안색을 살피는 눈빛!
효과는 굉장했다. 양심에 방어 관통 데미지다. 장난 반 진심 반이라는 건 아는데 50% 딜이 2배로 들어와서 남들 눈에는 내가 천하의 씹새끼로 보이겠다.
쟤가 진짜 전투능력 없는 애였으면 피를 토하며 거절해야 하는데, 라리루라는 데려가면 자기 몫은 할 녀석이었다. 나는 손사레를 쳤다.
“아, 됐어. 오고 싶으면 따라 와. 같은 파티인데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우리가 이역만리에서 훅 가면 너 엘릭서 값 개평도 못 받는다?”
“아핫♡! 그럼 죽어도 같이 죽는 거네요! 기뻐라!”
“라리루라. 지금 말한 내용에선 기뻐할 구석이 없는데.”
“존나 목숨이 두 개인 여자.”
그렇게 얘기하다 보니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프랑은 가구 가게가 있는 거리를 보더니 내 소매를 당겼다.
“노르. 우리 여기서 잠깐 헤어졌다가 집에서 다시 보지 않을래? 오늘 안에 가구를 받으려면 일찍부터 주문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
“맞다, 그렇네. 근데 헤어진다고 그러지 마. 그런 뜻 아닌 거 알아도 가슴이 찢어진다.”
“후후. 노르 가슴이 찢어지면 내가 꿰매주지 뭐.”
짖궂게 혀를 빼무는 프랑. 으윽, 프랑아. 대책없이 그렇게 귀엽지 마라. 니 남편 쥭는닷……!!
“여기 돈. 뭐 살지는 알지?”
“응. 있다 봐. 라리루라도 집에 올 거지?”
“네~! 선배 산책은 맡겨주세요♡! 사고 안 치게 잘 돌보고 있을게요!”
─툭툭! 자기 가슴을 치며 말하는 라리루라. 오늘따라 날 개취급하는 주인님들이 많군.
“그럼 선배! 렛츠 고에요!”
“아르르르르…….”
“선배 안 돼! 손!”
“이게 진짜 디질려고.”
─빡! 선 넘는 라리루라한테 딱밤을 놔 주고 모험가 길드에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따분해진 과정을 거치자 접수원이 서류인지 종이인지를 가지고 왔다.
“노르드 님. 승급 축하드립니다. 금일부터 본 길드 일동은 노르드님께서 실버 클래스 모험가로써 보다 멋진 활약을 해 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실딱이부터는 전직 기념 멘트도 쳐 주는 것일까? 접수원은 승급 증명서까지 주며 시험 통과를 축하해 주었다. 그래도 플레이트는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아직 못 받는 모양이다.
“잘 됐네요, 선배!”
기다렸다는 것처럼 박수를 치는 라리루라.
건물 안이라서 볼륨 조절은 했지만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기분이 충분히 보였다. 나도 씨익 웃어서 대꾸해 주었다.
“그런데 접수원 님? 다른쪽 일은 어떻게 됐나요?”
“오우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길드장님께서 대표로 조의를 표하시며 유품을 유가족에게 전하셨습니다. 아, 퇴치에 참가하셨던 노르드 님 이하 세 분께는 승급 실적과 보수가 나와 있습니다. 받아가 주십시오.”
─촤르륵. 동전을 쌓은 트레이가 나왔다.
여윽시 세상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우리 좆소다.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의 보수도 가죽 봉투에는 안 담아주는군. 사망자 조의금을 수십만 원으로 땡치는 21세기의 개차반 기업과 박빙의 쓰레기력 대결이 가능하겠다.
아니, 이건 위험수당은 아니겠지. 반은 오우거 목숨 값인가.
돈 주고 의뢰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니 별로 많은 액수도 안 될 것이었다.
“아르마슈나스 님 외의 두 분이 오우거 퇴치 보수 습득을 사절하셨으므로, 길드에서 나온 보조금의 절반인 2실버 50쿠퍼가 되겠습니다.”
역시.
그 오우거라면 까놓고 골드 클래스는 될 것이었는데, 대충 이 보수는 오우거의 평균 토벌 난이도에 맞춘 금액 같았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돈 말고도 얻은 게 많았으니까.
“오우거요? 오크가 아니구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는 라리루라. 아, 맞다. 얘한텐 설명을 안 했지.
“어쩌다 오우거랑도 싸웠거든. 시험관도 그 놈한테 목숨을 잃어서 승급 시험 절차도 약간 이상해졌었어. 그래도 통과했다니 다행이구만. 자세한 건 이따가 출장 얘기를 설명할 때 마저 해 줄게.”
안심하라고 그리 말했는데 효과는 없었던 듯 했다. ─움찔! 라리루라는 병세를 숨기는 가족을 걱정하는 것처럼 내 몸에 손을 뻗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마 유부남인 나한테 외간 여자인 자기가 손을 대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라리루라는 아닌 척 하면서 그런 걸 무지 따지는 애였으니까.
“……싸워서 안 다치고 이기신 거죠? 엉망이 됐다가 저랑 만나기 전에 다나 언니한테 치료받고 왔다거나 한 거면, 저 울지도 몰라요?”
“안 다쳤어. 니가 창대에 <부여>해 준 <꼭두극(Puppetry)> 덕분에 쉽게 이겼지.”
딱히 그것 덕분은 아니었지만─굳이 전공을 따지자면 폭딜을 넣어줬던 티르시랑 베로니카 덕분이다─, 말은 그렇게 해 뒀다.
‘100% 구라인 것도 아니니까.’
내가 <꼭두극>으로 창을 회수 할 수 없었다면 쉽게 창을 던지지도 못 했을 것이었다. 전투의 양상을 바꿔줬으니 도움이 된 건 맞았다.
“……그랬나요? 제가 그거 새기려고 고생하기는 했어요.”
내 말에 라리루라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기쁨을 숨겼다. 얘는 죽을 때까지 남들한테 사기는 못 치겠군.
접수원은 헛기침을 해서 우리 주의를 모았다.
“그래서 드리는 말씁입니다만, 노르드 님. 길드장님께서도 조사 불충분에 대해서 사죄하고 싶으시다며 노르드 님께 이 편지를──”
그렇게 TMI를 듣다가 돈과 승급증을 챙기고 일을 끝냈다. 티르시가 귀찮은 건 다 해치워주고 간 느낌이었는데, 칼라일 새끼가 따로 컨택을 넣은 것이었다.
길드에 있는 우편 보내는 곳에서 답장을 써갈겼다.
마침 딱 좋다는 생각에 티르시한테 당분간 멀리 떠난다는 거랑, 라리루라가 제자 등록을 부탁하고 싶어 했다는 얘기도 적었다. 승급 축하드린다는 얘기는 당연히 서두에 적었다.
티르시한테 갈 편지는 우편을 사서 붙이고 칼라일 쉑한테 쓴 편지는 접수원한테 줬다.
‘이걸로 모험가 길드 일은 끝.’
일주일 정도 텀이 남으니까 의뢰를 받을까도 했는데, 미친 짓이겠지.
안 그래도 오우거 퇴치 실적까지 들어와서 파티원들이랑 더 격차가 벌어져버렸다. 프랑이랑 라리루라가 실버 클래스를 찍기 전에는 나도 자기개발에 매진하자.
나는 손끝에 묻은 잉크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너희도 다 승급하면 그때 축하라도 하자. 저번에 집들이 때처럼.”
“저는 승급하려면 아직 멀었는데요?”
“걱정 마. 사르가디스의 모 연구소장님께서 우리한테 유적 탐사 출장의 도우미로 지명 의뢰를 넣어줄 거니까. 실적 쌓기 편해서 좋지?”
“다나 언니가요? 저야 좋지만, 그래도 되요? 선배랑 언니가 혼나는 거 아니에요?”
“크크. 손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혼나. 이럴 때 아니면 인맥 뒀다가 어따 쓰겠어.”
21세기에서 부부가 서로 연줄을 써서 업적작을 했다가는 매스컴을 타겠지. 이건 까놓고 말해서 비리랑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치만 여기는 이세계였다.
모험가 길드도 자기들한테 수수료를 떼 주면서 길드 연력에 ‘소속 모험가가 어디어디 유적 탐사를 완수함’이란 기록을 남기면 개꿀이다.
손해 보는 것은 승급전에서 상대적으로 밀릴 모험가들 뿐!
그리고 어차피 승급 시험은 인원수 제한이 없고, 절대평가였다. 얘들도 지가 실력 되면 알아서 올라오게 돼 있는 것이었다.
꼬우십니까? 꼬우면 지구로 가십시오. 민주주의 시위방법 가르쳐 줄 수 있다. 갔다 와서 나한테도 방법 알려줘.
“그래도 모험가 길드도 그런 외부 인력이 꼼수로 상층부를 차지하면 안 되니까, 골드 이상으로는 제한을 많이 둔다더라. 다 알고 넘어가 주는 거겠지.”
티르시랑 처음 만났을 때도 했던 얘기다. 자세한 건 나도 다나한테 들은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면 선배도 승급하기 어려운 거 아니에요?”
“골드 클래스를 넘어가면 또 모르지. 그런데 나 이제 실버 달았는데? 그런 나중 일을 벌써부터 생각해서 뭐해.”
골드 시험부터는 모험가 길드 연합에서 정기 시험을 친다 들었는데, 어떨까 모르겠다.
‘이젠 애써서 높은 모험가 등급을 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현장직 모험가가 된 것은 빨리 박사를 달려고 한 건데, 난 이제 박사+연구소장 직위를 달고 있는 아내가 있지 않은가! 아다 좆밥 석사 아딱이 시절과는 상황이 존나 달라졌다.
내 비밀도 전부 깠으니 다나도 차원이동 연구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었다.
석사 동장인 내가 교수를 다는 것보다 다나가 개인 연구소를 차리는 게…… 어?
‘……생각해 보니까, 진짜로 그냥 내가 다나를 교수로 밀어주는 게 훨씬 빠르지 않나?’
자고로 옛말에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눈나 일이 곧 내 일 아닐까?
‘농담 빼고 봐도 존나 괜찮은 생각 같은데?’
나는 노트에다 떠오른 내용을 적어 두었다. 기둥서방 짓을 연상하게 하는 방법이라서 저항감이 들지만, 그렇다면 내가 존나 개쩌는 기둥이 되면 될 일!
내 쥬지드라처럼 굵고 튼실한 궁전의 대들보로 변하여 우리 눈나를 지지해 주면 OK다.
‘다음 유적에서 나온 성과를 보고 상의해야겠다.’
─턱. 그리 생각하며 나는 노트를 닫았다. 깨달음이란 이리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법이구나.
“갑자기 뭘 적으신 거에요~? 무슨 가구를 살지 떠오른 거라도 있으셔요?”
라리루라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걷다가 필기를 하는 짓이 좀 이상해 보일 수는 있겠다.
“앗. 그러고 보니까 선배랑 언니들이 무슨 가구가 필요하신 건지도 안 물어봤네요? 어차피 가구를 사도 금방 게르마니아로 가실 것 아니었어요?”
“어. 그 전까지 우리 집에 식객으로 있을 애가 쓸 가구야.”
“식객이요? 게르마니아에 가기 전까지?”
─쫑긋. 귀를 기울이는 라리루라. 얼굴에 기대감이 차오르는 모습에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기대하게 만들어도 미안하니 말이다.
“그래. 베로니카라고, 너도 아는 녀석이야. 집에 가서 소개해 줄게.”
라리루라는 멍하니 눈을 뜨더니 갑자기 눈이 반달처럼 변해버렸다. 그것은 마치 생일날에 아버지한테 동생보다 5만원은 싼 선물을 받은 사춘기 여자 중학생 같았다.
“흐응……. 베로니카……. 흐응─?”
게르마니아산 비처녀 레이더의 이름을 되내던 라리루라는 입술을 삐쭉대며 말했다.
“여자 이름이네요♥?”
목소리 뭐야. 준내 무섭네.
나는 당황스러웠다. 라리루라는 목소리 톤이 개성 있고 다양해서 그런지, 이런 소리도 낼 줄 알았나? 하고 놀랄 때가 많다.
근데 얘가 이렇게 목소리 낮게 까는 거, 벌레 대장이 나를 붙잡고 죽이려 했을 때밖에 없던 것 같은데. 라리루라는 손을 뒷짐지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신기하네요? 손님방도 있는데 침대까지 들인다니. 식객이 아니고 새 가족인가요? 선배 표정을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일류 검사의 기술처럼 치고 들어오는 설검(舌劍)에 나는 그만 당황해서 어버버 거릴 뻔 했는데, 내 주둥이가 모험가 일에서 갈고 닦은 반사신경으로 대답을 발사했다.
“식객이야, 식객. 진짜 어쩌다 알게 된 녀석인데, 다음부터 우리 파티에도 참가할 것 같아. 그니까 너도 사이 좋게 지내주라? 응?”
“선배도 참! 왜 그런 걱정을 하세요?”
─활짝. 라리루라가 웃었다.
근데 씨발 웃을 거면 눈도 같이 웃어주면 좋겠네. 눈꼬리가 휘질 않고 입만 웃으니까 인형 같다. 분장을 안 하고 사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실제 무서움!
“제가 어디 선배 집에 누가 묵는지 참견할 입장이 되나요? 저야 뭐, 신혼집에 눈치없이 묵게 해 달라고 하기 싫어서 여관에서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하다가 코코낸내 하는 일 동료일 뿐인데.”
“아니, 그…….”
존나 뭐라고 하면 되는지 몰겠다.
베로니카는 딴 곳에서 지내기 어려운 녀석이라서 우리 집에 묵게 한 거였는데─바이콘 모드로는 여관을 못 잡고 나랑도 연이 깊으니까─, 그걸 가지고 라리루라가 토라질 줄이야.
‘아니, 마법사 길드원이 됐다면 여관에 묵을 필요가…….’
마법사 길드는 분명히 정식 길드원한테 기숙사를 내 주는 걸로 아는데?
나는 그리 생각했다가 머리를 스치는 전류에 눈치를 깠다.
물론 아직 기숙사 방이 정해지지 않은 걸수도 있는데, 우리 집에서부터 마법사 길드까지는 존나 멀다는 걸 말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의 여자애가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자취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친한 언니오빠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출세지옥 같은 마법사 길드에서 혼자 살기 싫다는 마음은, 금전 손해를 참을 이유가 되지 않을까?
─툭. 데굴데굴. 잘못 없는 길가의 돌멩이가 라리루라의 구두 굽에 까였다.
“네에~. 베로니카라는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죠. 저보다 그 분이 더 믿음이 가고 그러실 수도 있고요. 네에, 그렇죠~. 저는 다 이해해요~?
제가 선배를 곤란하게 해서 득 볼 게 어디 있겠어요? 이런 식으로 선배네 집에 묵는 걸 허락받아도 계속 어색하기만 할 건데, 바보도 아니고 불평해 봤자죠. 안 그래요?”
조목조목 자기 행동을 바보 짓으로 깎아내리는 라리루라.
“흥~ 이다. 선배도 언니들도 다 미워요. 지금부터 30초 간 미움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러더니 못 참은 것처럼 숨을 토해냈다. 30초라니, 나는 미안해 하는 중에도 그 짧은 시간제한이 우스워서 그만 입을 열어버렸다.
“3분도 아니고 30초라. 짧구만.”
“그럴 수밖에요. 3분이면 기억에 남잖아요. 저는 3분이면 관객들한테 제 얼굴을 기억하게 만들 수 있다구요? 으음, 그래도 벌써 10초나 써버렸네요.”
라리루라는 발뒤꿈치를 열심히 들어서 내 머리를 헤집었다. 누가 세팅해 준 머리도 아니라서 별로 상관 없었는데, 라리루라는 엉망으로 만든 내 앞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다.
“역시 이게 제일 멋지시네요.”
그러고는 푼수떼기처럼 웃었다.
─사라락. 만족한 것처럼 라리루라가 손을 뗐다. 앞머리가 내려오자 나는 대충 손빗으로 정리했다. 라리루라는 내 머리를 만진 양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눈초리를 둥글게 휘었다.
“선배. 저, 뒤끝 없이 딱 30초만 미워했으니까요? 선배도 절 미워하기 없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