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지직!! 우드드득!!
먼저 떨어진 좀비들의 시체가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이어서 몸을 던지는 자살 좀비떼. 추락한 좀비들이 쿠션이 된다면 곧 우물 아래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놈이 나올 것이었다!
【에이와즈는 거친 거친 껍질을 가진 나무이니(Eoh byþ utan unsmeþe treow)!】
베로니카는 룬 문자를 띄우며 주문을 외웠다. 볼링공처럼 굴러온 좀비가 지하묘지의 입구에 손을 뻗었다!
【땅 아래에서는 강인하고 빠르게 뿌리로 지지되는(heard hrusan fæst, hyrde fyres), 부(富)와 기쁨의 붉은 수호자로다(wyrtrumun underwreþyd, wyn on eþle)!】
─우르르르르! 쿠궁!
룬 문자가 스며든 우물의 벽에서 흙이 솟아났다. 셔터문을 방불케 하는 단단함으로 닫히는 흙벽에 좀비의 팔은 짜부가 되어서 삼켜져버렸다.
“……후우, 후우.”
조급했던 상황이 약간 나아졌지만, 멀리 보면 좋은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우리 파티는 모두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지하묘지의 안쪽을.
“안으로 가자. 여기 있으면 위험하겠어.”
나는 좀비들이 벽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그리 말했다.
좀비들의 숫자가 늘어나도 베로니카의 흙벽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좁은 우물 안에서는 인구빨을 살리지 못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리가 빠져나갈 통로를 찾으려면 전진하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좀비를 조종하는 마법진이나 아티팩트가 있다면 그것으로 언데드를 쫓아내고 빠져나가면 될 일! 그게 아니어도 탈출구 정도는 다른 곳에도 있을지 몰랐다.
파티원들은 아이 컨택트로 쇼부를 보고 전진을 택했다.
우리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방해하는 상대는 없었다. 벽에 박힌 백골들이 스켈레톤이 돼서 움직이면 어쩌나 하고 약간 쫄았던 내가 바보 같은 느낌이었다.
참새 골렘이 갔던 길을 되짚는 동선으로 이동했다.
묘지는 생각보다 좁았다. 참새 골렘보다 보폭이 넓은 우리 파티는 전부 돌아보기까지 30분도 안 들 정도였다. 고대문명 시절에는 뭐하는 유적이었던 건지, 왜 이런 곳을 지도에 표기해 놨는지도 감이 안 잡히는 곳이었다.
“……이 안에서는 마나의 흐름이 존재하는구나. 밖으로는 마나가 빠져나오지 않게 해 놓았다.”
베로니카가 말했다. 지저의 탑에서 추리했던 것처럼 밖에서 ‘적’들이 알지 못하게 마나가 새지 않는 차폐 작업이라도 한 걸까.
아무튼 이번에는 베로니카의 감지능력이 나설 차례였다.
프랑이 경계할 것도 없었다. 베로니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서 이동한지 10분만에 넓은 공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문도 없는 공간이라서 벽에 밀착해서 은신했다.
─휙휙. 손짓으로 준비는 끝났는지 물었다.
대답은 Yes 사인이었다. 배부한 아이템이나 포션까지 체크한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 지하묘지의 넓은 곳으로 들어갔다.
──첫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어서 다행이다.
제일 먼저 엄숙한 공간에 들어간 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감상이었다. 왜냐하면 돔 경기장처럼 넓은 공간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그림자가 우리를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푸른 로브에 장식을 붙인 여자였다.
존나 서양 판타지 게임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마법사 같은 꼴을 한 년이다. 설마 흑마법사인가? 나는 일단 마나를 감지해 봤는데, 놀랍게도 마나에서는 사악한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할 순 없다. 이런 곳에서 저딴 꼬라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고한 새끼여도 책임이 있다. 과실 책임은 약 5:5라고 사료됐다.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3분만에 바뀌었다.
과실은 5:5로는 모자랐다. 0:10이다. 푸른 로브의 여자는 베일을 쓰고 있었는데, 거리가 30미터 남자 어두운 곳에서도 나는 그 년의 머리색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남색 머리카락이다.
푸른 베일에 감춰져 있던 것은 남색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에서 빠져나온 길쭉한 귀도 있다. 남색 머리카락의 엘프인 것이다.
나는 가슴이 에어컨 바람에 노출된 것처럼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거울이 있었다면 내 눈빛에서도 얼어붙는 듯한 살의를 엿볼 수 있었겠지.
그렇게 억누르고 억누른 나의 살의가 약간 새어나갔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기다렸던 것일까.
“──인간의 아이들은 있잖니? 가끔 착각을 하곤 하더라.”
등을 보이고 선 엘프는 당연하다는 듯, 그런 말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엘프는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체감시간이 전혀 다를 거라던가. 어리석기는. 거인의 손에 쥐어졌다고 꽃잎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건만.”
엘프는 훼손된 벽을 보다가 여성스러운 손짓으로 손바닥을 폈다. ─팔랑. 엘프의 손에서 미라에 피어 있던 거랑 똑같은 꽃이 피어났다.
나와 다나는 그게 무슨 꽃인지는 몰랐지만, 어떤 마법의 결과물인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피나 체액을 빨아들여서 제압하고 죽이는 마법.
연구원생 시절에 유적 탐사를 하며 골백번은 봤던 어느 엘프의 마법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흘러. 다른 점이 있다면, 그렇네. 시간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일까. 세월을 받아들이는 그릇의 차이 뿐이겠지.”
그리 말하는 엘프의 발치를 지네가 한 마리 기어갔다.
지상에서 기어들어온 녀석일까. 엘프는 꽃잎을 뜯어서 지네에게 던졌다. 지네는 갑자기 몸에 얹어진 꽃잎에 몸부림을 치며 도망갔다.
“벌레는 꽃의 무게에 발버둥치고, 굵은 나무에 깔리면 죽어버리지. 하지만 숲은 달라. 꽃과 나무가 수명이 다해서 흙으로 돌아가도 우리 엘프는 여명을 살아가야만 해.”
엘프는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과 엘프의 생각에 차이가 생기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체감 시간이 같아도 쌓아온 적층이나 남겨진 시간이 다르니까.”
─콰득! 이끼 낀 바닥을 달리며 도망치던 지네는 바닥에서 솟아난 식물에게 잡아먹혔다.
몬스터에 가까운 작은 식충식물은 그 지네를 육식동물처럼 으깨고 삼키더니 이끼로 돌아가버렸다. 마치 상어가 해수면의 새를 잡아먹고 가라앉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많이 놀라고 있단다. 헤어지고 나서 아직 2달 하고 조금 정도잖니?”
엘프는 그때까지도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다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얼굴이었다.
“내 앞에 도달하기에는, 너희 인간들에게도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말이야.”
흥미로운 소재를 보는 미술가처럼 돌조각을 품평하는 듯한 눈빛!
나는 그 눈빛에 어째서인지 친가 집의 마당에 자랐던 감나무가 떠올랐다.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부터 10년 넘게 변함이 없던 나무를 말이다.
엘프라는 생물은 이리도 인간과 다른 걸까.
──아니, 아니다. 종족은 상관없다.
이 여자다.
이 여자의 본성이 절실하게 나랑 맞물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나는 엘프의 질문을 씹고 대답했다.
”뵙고 싶었습니다, 예르나 교수님.”
의식해서 존댓말을 썼다. 존경심이 남아 있어서 그랬을 리는 없다. 내가 존댓말을 써 준 것은 저 년의 놀음에 어울려줄 마음이 없어서였다.
내가 여기 있단 사실이, 저 썅년한테는 실험실에 두고 간 쥐새끼가 이사간 곳까지 쫓아온 것처럼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으니까.
“후후. 그랬니? 노르 너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예르나의 대답은 무신경하게 친절한 것이었다.
내가 질문을 무시한 것도 신경쓰는 것 같지가 않다. 마치 나랑은 장소와 상황이 다른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자칫하면 나까지 여기가 3년 반 전의 대학 랩실인 줄 알겠다.
존나 묘지의 구석에 버려진 신선한 뼈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저들도 우리처럼 예르나의 흔적을 찾아왔다가 살해당했던 걸까. 이끼가 낀 백골 시체들은 지하묘지의 백골들이랑 상반되게 조금의 존중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져 있었다.
“많이 화가 난 모양이네? 짐작 가는 게 많아서 이유를 콕 찝지를 못하겠는걸.”
─쿡쿡. 상냥하게 웃는 예르나. 저 년도 우리가 다 알고 왔다는 것을 눈치 깠을 것인데, 웃는 낯짝만큼은 예전하고 하나도 다름이 없어서 존나게 소름이 끼쳤다.
“……예. 묻고 싶은 말이 많아서 정리가 안 됩니다만, 이 상황은 알기 쉽군요.”
궁금한 것? 물어볼 얘기? 그딴 건 나중에 하면 된다.
저 씨발련이 내 호기심을 채워주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내가 물어본다고 예르나가 대답해 줄 거라 생각하는 것은 개병신 빡대가리들이나 할 생각이었다.
이 꼬라지를 보고 낙관에 찬 생각을 할 정도로 내 머리는 꽃밭이 아니었다.
한편으론 존나게 애석한 일이었다. 죄 없는 모험가들을 납치해서 죽여대는 꼬라지를 봐라. 저 시체를 보고 말았으니, 내가 예르나 년의 머리채를 끌고 가서 논문의 소유권을 되찾는다는 미래는 없어져버렸다.
생각을 멈추었다. 가망 없는 미래예측은 시간과 집중력의 낭비였다.
예르나의 구둣굽이 모험가들의 시쳇물로 젖어갔다. 나는 그 살인마 년에게 창을 겨누었다.
“──저희가 술이나 마시면서 회포를 풀 사이는 아니죠?”
“……후후후후.”
예르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참지 못하고 어깨를 떨던 예르나는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려댔다.
“후후후후, 후후후후훗!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쓸데없이 큰 지하묘지에 예르나의 광소가 울려퍼졌다.
─찌릿찌릿. 뒤를 보지 않아도 파티원들이 임전무퇴의 기백을 뿜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들도 직감한 것이었다. 싸우지 않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단 것을.
“후후후후……. 노르, 혹시 알고 있니?”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얼굴을 가리고 쪼개던 예르나는, 불쑥 그렇게 뇌까렸다.
“이 세상 놈들은 모두 가축과 머저리들 뿐이란다. 구신과 우신의 쓰레기들. 로마니아의 배교자들. 평화에 노망난 타타르니아의 천치들. 기록해 놓은 글귀는 잃어버렸고, 입으로 전해온 전승마저 잊어버린 천하의 아둔한 놈들.”
후반으로 갈수록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중얼거림이었다.
무작위하게 증오를 표출하는 말! 거기에서만큼은 예르나의 진실된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예르나 그라시에’라는 착하고 친절한 교수의 가면이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좆도 신기해 할 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이 있겠는가.
자고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법이다.
저 년에게 무슨 목적과 꿈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상의 행복도 없다. 막연한 ‘착함’만큼 가식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착하고 친절한 사람은 가식을 부리고 있단 뜻밖에 안 됐다.
“그런 놈들 사이에서 수백 살 씩이나 나이를 먹으면 삶이 따분해지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틈틈이 즐길 거리를 찾아 놀고 싶어질 만큼 말이야.”
씹어뱉듯이 읊조렸던 예르나는 얼굴을 가리며 나를 봤다.
“──어서 오렴. 너라면 쫓아와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은 무르익은 열매를 따며 즐거워 하는 정원 주인의 눈빛이었다. 요사스러운 눈이 우리 파티를 쓸었다.
“후후. 다나도 있었구나? 좋아하는 노르랑 볼 장 다 봤나 보네. 여기 위치는 릴리안에게 들었니? 온다면 그 애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사는 당최가 생각대로 안 된다니까.”
좆대로 떠들더니 불만족스럽다는 것처럼 혀를 차는 예르나. 존나 사람 성질을 긁는 말투다. 잘도 이런 성격으로 선량한 엘프인 척을 하고 있었군.
“저기, 물어봐도 되니? 나랑 헤어진 뒤부터, 날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어떤 감정을 느꼈고? 복수심이었니? 아니면 그리움? 만약 사랑이었다면 나는 정말 기쁘겠는걸!”
─킥킥킥. 예르나는 자기 농담에 웃는 3류 코미디언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손가락 너머로 정갈한 얼굴이 음습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논문을 도둑맞을 날에 잠들며 봤던 미소보다 열 배는 더 노골적인 웃음이었다.
이제는 자기 본성을 숨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인 듯 했다.
“아깝게 됐네! 이렇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1, 2년 정도는 너희의 사랑 노름에 어울려 줘도 좋았는데.”
“……미친 년.”
다나가 더는 할 말도 없다는 것처럼 쏘아붙이자 예르나는 유쾌한 것처럼 팔짱을 꼈다.
“왜? 알기 쉽잖아. ‘사랑하는 척’이라면 내가 너희보다 잘 할 수 있을 걸? 종족을 불문하고 수컷들이란 것들은 하초의 쾌락과 우월감만 채워주면 돼. 아내라는 계집애가 남자한테 아양 떠는 방법도 모르게 생겼으니, 우리 노르도 불쌍해서 어떡한담?”
─까드득. 예르나의 농짓거리에 누군지 모를 사람이 이를 갈았다. 일단 나는 아니었다. 아마 아내들 중에 한 사람일 것 같다.
“아하하핫!! 노르가 써 준 논문 덕분에 머저리 놈들도 거품을 물면서 날뛰고, 내 목적에도 오랜만에 진보가 있었거든! 이 은혜도 못 갚고 끝나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니! 노르의 수집품 중 하나가 돼 주는 것도 몇 년 정도는 재밌었을 것 같은데, 나로서도 유감이야.”
예르나는 그런 파티원들의 반응마저 향신료인 것처럼 과장되게 손을 펼쳤다.
“그러면 노르. 대답해 주련? 이대로라면 나는 아껴둔 사탕을 맛보지도 못하고 흙바닥에 떨어트린 듯한 기분이란다. 네 시체를 치우기 전에,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도는 들려 줘.”
일그러진 예르나의 웃음이 기대감으로 뭉개졌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지, 이 시츄에이션은 자신의 삶에 톡 쏘는 탄산이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라.
나는 냉철하게 예르나를 경계하면서 생각했다.
솔직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이실직고하자. 나도 생각은 해 봤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예르나 그라시에라는 엘프가 어떤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려고 논문을 훔쳐간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가 당사자인 사건이다. 남들보다 2~3배는 더 생각하고 이유를 상상해 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실제로 오늘까지 내 뉴런을 스쳐지나간 가능성의 종류는 수백 가지를 넘었다.
그래서 타뷸라가 가지고 있던 지령서를 봤을 때부터 나는 약간 기대하고 있었다.
예르나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예르나가 선의로 내 논문을 훔쳐간 거였다면 논문의 실적은 돌려받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언젠가 재회한 예르나가 정색하고 구라를 까거나, 논문을 털린 석사 놈을 비웃는 것에 비하면 100배는 좋은 가능성이었다.
내가 예르나에게 뭔가 사정이 있기를 바랐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진심으로 그럴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예르나가 정말 선의로 논문을 훔쳐갔던 거면 나한테 귀띔은 해 줬어야 했다.
다짜고짜 그렇게 튀어버렸다가 내가 학계에 신고를 하거나 같은 주제로 다른 논문을 쓰면 어쩌려고 지 혼자 그렇게 룰루랄라 외국으로 날라버린다는 말인가?
예르나는 내 앞으로 글 한 줄조차 남기려 하지 않았다.
편지라도 남겼놓았면 다 잘 풀릴 일이었는데 말이다.
일류 대학으로부터 계약 제의까지 받는 유능한 년이 저딴 멍청한 실수를 할 리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예르나가 좋은 의도로 내 논문을 쌔벼갔을 거라는 가설은 처음부터 구멍이 많았다는 소리다.
타뷸라한테서 얻은 추살지령서도 같다.
악독한 새끼들한테 목숨을 노려졌다고 그 사람이 선량하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렇게 치면 내가 족친 도적단 우두머리도 타뷸라 새끼한테 맞아 뒤질 운명이었으니 실은 좋은 새끼였을 것이다.
이렇듯 생각하면 할 수록 예르나가 썅년일 가능성은 몹시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면을 벗기고 밑천을 까발리고 보니 예르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기 지루함을 달랠 장난감으로 삼아서 즐기는 싸이코패스년이었다.
‘내 생각보다 수천 배는 더 썅년이었던 모양이지만.’
뭐, 아무렴 어떻겠는가.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명확했으니까.
나는 100%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대답했다.
“고맙다.”
“………………………………뭐?”
예르나의 고조된 감정이 찬 물을 부은 것처럼 식어버렸다.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꼴 좋다는 기분이 반이고 한심하다는 기분이 반이었다.
“니 덕분에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어. 감당이 안 되는 미친 놈들한테 쫓길 일도 없었고. 니가 뭐 때문에 내 논문을 훔쳐갔든, 니 본성이 뭐든, 그런 거랑 상관없이 네 덕분에 얻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다고 생각해.”
예르나는 내 예상을 웃도는 천하의 썅년이다. 하지만 이유가 뭐였든 팩트는 팩트다. 그 에고이즘에 가득찬 행보가 내 인생의 줄기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틀어놓은 것은 인정을 해야 했다.
저 년이 나를 노예 시장에 두고 갔거나, 논문을 훔쳐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사르다기스에서 야수 회귀를 얻지도, 프랑이랑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다나가 나랑 떨어져서 자기 사랑을 자각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라리루라나 베로니카랑도 모르는 사이로 지나쳤을 것이며, 그녀들의 앞날에도 구름이 드리운 채였겠지.
내가 손에 넣은 힘과 자유, 만남은 나의 재능과 노력으로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계기에는 예르나의 트롤링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고맙다.”
끝까지 쓰레기로 있어 줘서.
나는 전혀 상상 못 했던 대꾸에 얼이 빠져버린 예르나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감사는 다 전했다. 사람 새끼가 아닌 짐승년을 상대한다고 나까지 짐승처럼 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걸로 나는 인간의 도리는 다 한 것이었다.
청산할 관계는 다 청산했다.
기탄없이 말해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사회적 위치 때문에 줘패버리기도 어렵던 년이 지 본성을 못 숨기고 내 창이 닿는 곳으로 내려와 줬으니 말이다.
마침 나랑 예르나 사이에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내 논문을 쌔벼갔다는 사실. 그것 하나 뿐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