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1,009)

킹능성 있는 추리지만 이쪽으로 생각하지는 말도록 하자.

저게 허세일 때는 수를 겨루다 보면 밑천이 드러나겠지. 하지만 진짜로 여력이 남아 있는 것을 못 알아보고 개겼다가 뒤져버리면 죽어서도 억울해서 지박령이 돼 버릴 것이었다.

유비무환이다. 언제나 적에게는 아직 꿍쳐둔 힘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새나라의 꼴마초가 가져 마땅한 자세였으니까.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어서 그렇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돼.’

여기는 상태창도 없는 힙스터 픽 좆망 이세계라서 전투력을 수치로 계산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지금 예르나한테서 느껴지는 마나는 객관적으로 강대하다고 해도 좋았다. 현실에서도 마동석 씨와 마산동 아저씨 중에 누가 더 쎈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으니까.

내 마나로 강화된 오감이 위험신호를 보내댔다. 진심을 다한 예르나는 최소 미스릴 클래스라고 잡아야 할 것이었다.

저 에고이즘 깐프년은 나나 다나랑 유적을 다니는 중에도 자기 전력을 숨겨왔다. 그건 틀림없는 팩트였다.

하지만 고작 저 정도 마나로 이토록 개세적(蓋世的)일까?

예르나한테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전투력의 갭이 이상하게 컸다. 수학 공식을 생각해 봐라. 닶이 이상하게 크게 나오면 내가 놓친 계산식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내 엘리트-대갈통이 실마리를 붙잡았다.

마법의 술식이나 이 지하묘지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이다.

‘시팔. 그치만 어쩌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계산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우리 다섯이라면 미스릴 클래스가 상대여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심 모드 예르나는 아디다스인지 아다두스인지 했던 유니콘 새끼보다 강해 보였다.

전개된 넝쿨은 10개를 넘었다. 혹시 저 넝쿨들이 내가 바닥에 꽂아놓은 넝쿨의 반 만큼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 파티는 전멸하고 말 것이었다.

순수한 공격 마법이 아니라서 그런지 ᚦ(Thurisaz)의 룬도 작동하질 않았다. 내가 타뷸라의 방어를 뚫었을 때처럼 순간 화력에서 밀리는 걸지도 모르고 말이다.

─슈팍!!

그때였다. 나를 몰아세우려는 것처럼 넝쿨이 쏟아졌다. 우리 파티가 협력하는 걸 막으려는 것일까. 넝쿨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우리를 죽이려고 들었다.

“──칫!”

내 손이 다나를 밀쳤다.

반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나를 치료하고 있었기에 다나는 자랑거리인 실드를 펴지 못했을 것이었다. 다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급소를 팔로 지키며 앞으로 달렸다.

슈오오오오오…….

공격해 오는 넝쿨이 느리게 보였다. 설마 주마등이라도 보는 걸까? 그 정도의 위력은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나는 전투적인 함성을 내질렀다.

“눈도 꿈쩍 안 한다!!”

X자로 가드한 팔을 넝쿨이 때려갈겼다.

─뻐어억!! 극심한 통증! 눈은 꿈쩍도 안 했지만 눈앞은 번쩍거렸다. 지우개를 줍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을 때의 아픔을 수십 배로 늘린 듯한 고통이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무릎이 저절로 숙여졌다. 불초 제자가 무릎을 꿇습니다.

‘씨, 발…….’

무지막지한 데미지에 정신이 나갔는데도 내 엘리트한 대갈통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었다. 넝쿨이 팔을 때리고서 구렁이 담 넘듯이 내 뒤통수로 넘어가 뻑치기를 감행한 것이었다.

위력을 조절하면 공격 궤도도 수정하기 쉬워진다. 야구의 포크볼처럼 넝쿨이 팔 1대, 뒤통수 1대씩 갈겨버렸으니 발을 딛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뒤통수가 뜨뜻미지근해졌다. 의식이 흐릿해지자 꿈속에 들어온 것처럼 눈이 감겼다.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유지했다. 개시팔 후회막심이었다.

‘역시 예르나가 방심한 틈을 타서 족쳐놨어야 했어.’

예르나가 스켈레톤 부대를 풀지만 않았어도 잘만 가능했을 것인데, 분명 예르나도 그걸 알고 잡몹을 보낸 것이었겠지. 저 년은 놀기 위해서 우리의 포지션과 실력을 간 본 것이었다.

‘──스켈, 레톤?’

그때였다. 깨달음이 내 머리를 스쳤다.

스켈레톤. 스켈레톤이다. 다나의 신성 마법에 쓸려나간 그 스켈레톤들!

예르나의 저 무지막지한 힘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이 유적은 어둠과 음의 마나를 모으는 결계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딴 부작용만 있는 마나를 모으는 것은 왜인가? 유적을 지킬 언데드 병사를 만들려고? 아니다. 사악한 마나를 모으는 것은 진짜 목적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나는 말했었다. 자연은 균형을 사랑한다고.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그것은 이세계에서도 변함이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유적이 유골과 결계로 어둠과 음의 마나를 생성하고, 끌어모으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여기는 자연현상을 이용하는 고대문명의 발전소인가.’

어둠과 음의 마나를 생성해서, 그걸 희석시키려고 모이는 ‘빛의 마나’를 흡수하는 장치!

그것이 이 유적의 정체였다.

지구의 풍력-화력-수력 발전소도 다 자연의 힘을 전기로 바꿔먹는 장치 아니던가. 이세계 발전소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저 식물 마법의 말도 안 되는 위력도 그것 때문이야.’

나는 기절할 것 같은 머리로 생각했다.

이세계의 언데드는 힐에 데미지를 입는다. 왜냐하면 상성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에다 찬 물을 부으면 미지근해지지 않는가! 이런 +와 -의 물리법칙을 고대인들은 발전소에 역이용한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핵융합이나 핵분열이라는 물리법칙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 보면 내가 모즈리운을 방사능 폐기장처럼 빗댄 게 정답이었다.

인륜적인 부분을 눈 감아 줘도 이 발전소는 위험했다.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마나를 모으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부작용을 주는 마나부터 모아야 한다는 모순이다.

21세기의 원자로 붕괴보다는 수습하기 쉽겠지만 위험한 것은 거기나 여기나 도토리 키재기였다. 실제로 모즈리운은 이 유적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고대문명의 발전소가 수천 년을 버려졌다가 기어이 어둠과 음의 마나라는 방사선을 도시 위로 뿌렸던가, 유물 렉카충 새끼들이 여기 왔다가 벽을 허물어놓고 방치해서 사건이 터진 것으로 보였다.

추리해 보자면, 수천 년 동안 농축된 이세계-원자력 발전기의 이세계-방사능이 우물이나 어디로 퍼져버린 것이겠지.

도시의 수도관에 방사성 용액이 흘렀다면 하룻밤 사이에 도시 사람들이 다 전멸할 만 했다. 어쩌면 정말 해피네스 좀비 스플래터 무비를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생존자 0의 배드 엔딩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대가로 막대한 에너지는 모을 수 있었겠지.

관리인도 백골이 됐을 것이니 수천 년 동안 계속 기동해 온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수백 년’ 분량의 노심급 마나가 이 유적에 잠들어 있었을 것이었다.

‘예르나는 유적의 발전기가 모아온 빛의 마나를…… 식물 마법에 쓰고 있는 거야.’

빛의 마나는 생물의 치료에 사용되고, 이세계 치료 마법의 최고봉은 로마니아의 포모나 신을 믿는 풍요의 사제들이다.

다시 말해서, 빛의 마나는 풍요의 마나와 뿌리가 같다.

빛의 마나는 식물을 성장시키는데 최적인 마나였다. 식물은 물과 빛에서 영양분을 만드니까. 존나 물 타입 교수몬인 예르나가 자기 실력을 웃도는 파워를 내고 있을 수밖에.

존나 시팔 어이가 없었다. 목둔 원자융해의 술법이라니.

‘……애미. 답이 없네.’

절망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는 적의 마법이나 힘을 분석하면 거기에 맞는 공략법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를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단순하게 마나가 존나 많은 것 뿐인데 무슨 약점이랄 게 있겠는가!

수백 년이다.

이 원자로가 마나를 모아온 게 존나 수백 년이라는 말이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덮을 출력의 원자로가 그만큼이나 되는 시간에 걸쳐서 모아온 마나가── 지금 우리들의 적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버렸다.

승산이 없었다. 작전이고 지랄이고 어느 세상에서나 체급은 깡패니까.

50kg 라이트급 복서가 암만 펀치력이 쎄면 뭐해. 150kg 초헤비급 선수는 턱만 지켜도 절대로 질 일이 없는데 씨발아.

첫 빠따로 여기 왔던 흑마법사 년은 왜 뒤진 걸까. 어둠과 음의 마나에 낚여서 찾아온 거지, 유적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지는 못했던 걸까?

내 생각이 맞다면 그 년이 예르나에게 살해당했던 건 그래서일 것이었다. 빛의 마나를 선점하고 있었다면 반대로 예르나가 역관광 당해서 언데드가 돼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몰랐고, 예르나는 알았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를 낳은 것이었다.

─채앵! 쿠르르릉!

몽롱해진 눈이 전투의 양상을 비췄다.

일부러 통수를 갈긴 것은 나를 제압시켜놓고 다른 애들이 당하는 것을 보게 만들려는 악의의 발로였을까? 나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의식의 동앗줄을 붙잡고 차례로 공격당하는 파티원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쿵…….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낮은 파괴음. 저주 때문에 체력이 전부 소진된 베로니카가 넝쿨에 얻어맞아 쓰러졌다. 넝쿨은 쓰레기를 걷어차는 것처럼 그녀를 벽에 날려버렸다.

4개나 되는 넝쿨이 라리루라로부터 꼭두각시를 빼앗았다.

주 무기를 잃고도 라리루라는 몇 번인가 넝쿨을 피해냈다.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불공정한 시합이었다. 회피할 때마다 이것도 피해보라는 듯 빨라지는 넝쿨에 라리루라는 그만 배를 강하게 얻어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평소의 나라면 분노해야 마땅할 참상이었는데,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이어서인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마치 여래신장에 쳐맞은 낡은 브라운관 TV처럼 화질과 소리가 맛이 간 영상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의식은 뇌라는 이름의 바보 상자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프랑은…… 다나는……?’

앞뒤로 휘청거리는 고개를 움직여서 다나를 찾아냈다. 날 치료해주려고 달려오는 다나의 뒤에서 넝쿨이 슬며시 살의를 뿜어냈다.

─탓.

나는 다나를 구하기 위해서 대쉬했다. 팔다리가 땅을 딛는 감각이 안 들었다. 렉 걸린 VR 게임을 하는 것처럼 갑갑했다. 그래도 덕분에 넝쿨에게서 다나를 구해낼 수는 있었다. 존나 내 인생 버그갓흥겜이다.

넝쿨을 피하며 다나랑 나려타곤을 펼치는 나.

다나가 뭐라고 말하며 내 머리를 잡고 힐을 걸었다. 다나의 손은 눈 깜짝할 사이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내 출혈량이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아와갔다.

그런데 프랑은? 프랑만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난 뇌의 각성에 뒤따르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바닥을 짚었다. ─덜그럭. 피투성이 청동 거울이 내 손가락에 걸렸다.

‘…………청동거울?’

─쿵!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이 거울은 우리가 좀비떼한테 습격당하기 전에 튀었을 때, 프랑이 챙겨갔었던 물건이다. 참새 골렘의 시야를 비춰주던 그 거울 말이다.

그러면 그랬던 거울이 왜 여기에 있는가.

어째서 피투성이가 돼 있는가.

바닥을 짚은 내 손을 적시고 있는── 이 빨간 액체는 대체 무엇인가.

느려졌던 시간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프랑이 새빨간 웅덩이에 잠겨서 쓰러져 있었다.

“.”

프랑은 엎드린 자세로 일어나지를 않았다.

숨은 쉬고 있다. 등이 거의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빨간 액체는 포션일 것이다. 코를 쑤셔대는 피 냄새는 내 코피 때문일 것이다. 이게 다 프랑의 피일 리가 없다. 다나가 이런 중태의 프랑보다 나를 먼저 치료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을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그 애도 네 아내였니?”

─킥킥. 예르나가 요사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내 품에서 다나가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볼륨을 0으로 한 영상처럼 한 귀로 들렸다가 다른 귀로 빠져나갔기에 무슨 말인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겁게 침체되어가는 피가 발을 무겁게 했다.

진창에 빠진 것처럼 체온이 낮아지고 발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체가 돼 버린 것처럼 식어버린 몸뚱이에서── 왼눈만이 인두에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후욱.

야수회귀의 마나가 사라졌다. 저렴한 갑옷만 입은 내 몸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자, 예르나는 즐겁게 듣던 라디오가 고장을 일으킨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러니? 귀여운 아내가 무척 다쳤단다? 빨리 나를 쓰러트리고 치료해 주면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뭔가를 말하던 예르나는 문득 눈썹을 八자로 만들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려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기 때문이었다. 예르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렸다.

예르나의 손이 사라져 있었다.

“────하?”

관통당한 손바닥에 엄지와 소지가 남아서 덜렁거렸다. ─푸확! 예르나가 이변을 깨닫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바닥에서 혈액이 치솟았다.

하지만 예르나는 무언가에 꿰뚫려버린 자신의 손을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 ‘무언가’가 아직── 자신의 옆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창?”

검은 마나를 감은, 반쪽의 창이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창대에 부여한 마법이 발동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의 술식은 넝쿨에 부러졌을 때 붕괴했다. 애당초 창에 부여된 <꼭두극>은 저렇게 마나를 휘감으며 움직이는 마법이 아니다.

예르나가 깨닫지 못한 속도로 비상하여 그 손바닥을 관통할 위력도 없다.

──보통이라면 말이다.

─피이잉!!!

창은 180도 회전하더니 범용한 초인들의 눈으로는 목시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로 내 손에 날아들어 잡혔다. 나는 땅 다른 반쪽의 창대로 끌여당겨 부러진 부분을 맞댔다.

창대는 파편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기에 접합부가 맞물리지도 않았는데, 빛이 빛나자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깨끗하게 접합되었다.

─휘릭. 내가 손을 놓자 창대는 일회전 하더니 내 옆을 부유했다. 마치 주인을 섬기는 종처럼.

“──큿!”

─파앗! 빛의 마나가 관통상을 입은 예르나의 손을 재생시켰다. 유적이 수백 년을 들여서 모아온 빛의 마나에게 신체 결손의 재생은 일도 아니었다. 성냥으로 불을 켜는 것보다 간단하겠지.

그리고 빛의 마나의 용도는 치유 외에도 있었다.

“──꺄하하하하하하핫!! 위력은 괜찮았어! 하지만 제대로 맞췄어야지!!”

내 창의 위력을 몸으로 깨달은 예르나가 살의를 일으키며 마법을 조종했다.

빛의 마나에 힘 입은 넝쿨은 드릴처럼 스핀하며 쇄도했다. 나를 처음 공격했을 때보다 곱절은 빠른 속도였다.

콰아아앙─!!

고개를 숙인 내 가슴에 넝쿨이 꽂혔다. 수류탄에 휘말린 노병처럼 방어구가 폭발했다.

무리도 아니다. 야수회귀의 방어력을 발휘해도 치명상을 면치 못했던 공격이 원래보다 까마득하게 강해진 것이다.

강화 마법을 해제한 나약한 육체로는 망치에 맞은 수박처럼 박살이 나서, 뒤에 있는 프랑과 다나까지 믹서기에 갈린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리겠지.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하지만 나는 층암절벽처럼 견고하게 서서, 그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다.

갑옷이 박살나고 옷가지에 들고 다니던 내용물이 환풍기에 던져진 지갑의 내용물처럼 튀었다. 그러나 단 1mm의 후퇴도 없다. 장갑판도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출력의 마법은 내 피부를 뚫지 못하고 공회전했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의식은 또렷해졌다. 나는 광증에 습격당하는 병자처럼 내면세계에서 봤었던 하얀 불꽃을 환시(幻視)했다.

하얀 불꽃의 한가운데에 검은 티눈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오염시키는 것처럼 불꽃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그 검은 불꽃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것은 내 가슴에서 피어난 광기 어린 분노였다.

─광기에 물들지 말고 분노를 길들이렴.

꿈에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은 오딘이 이런 사태를 짐작하고 남긴 말이었을지도 몰랐지만, 떠오르던 조언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격정에 묻혀 없어졌다.

창을 쥐었다.

검은 마나가 야수회귀처럼 왼팔을 감쌌다. 그 손에서부터 침식하는 것처럼 창까지 마나로 덮였다. 공장의 분쇄기처럼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넝쿨에 창을 휘둘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