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ㅎ을 어떻게 쓰느냐로 필적을 구분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로마니아 어도 글씨 쓰는 법에 개성이 드러난다. 존나 자필로 적은 논문이나 책을 읽는데 익숙한 우리 척척석박사 부부에겐 필적 구분 쯤은 쉬운 일이었다.
“다나 네가 모른다면…… 적어도 카르미네 대학에서는 본 게 아니라는 소리인데.”
아니면 내가 학위논문을 쓰면서 모으던 자료에서 본 건가?
아닌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조사하는 중에 뉴런의 기억을 헤맸다.
그러다가 눈치를 깠다.
“……아 씨발, 이거 아비두스 새끼 같은데?”
“아비두스? 그 흑마법사?”
함정 조사를 다 한 프랑이 내 중얼거림에 대답했다. 맞다. 그 거대 골렘을 조종하며 네페르티티를 피규어로 만들려고 발정 났었던 아다 유니콘의 글씨체다.
“그 놈의 연구소에서 봤던 필적하고 똑같아. 소문자 o를 쓰는 방향이나 소문자 p, 대문자 M의 곡선 같은 게 왼손잡이 글쟁이가 쓰는 식이었어.”
아다 악당 주제에 조금 달필이라서 눈에 거슬렸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 새끼의 필적이 왜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예르나가 임모르탈리스 소속인가?’
그럴 가능성은 솔직히 높지 않았다.
거기는 충간충 곰보빵 흑마법사 새끼들의 단체라고 했다. 예르나가 흑마법사였으면 절대로 교수까지 못 올라갔다. 그 전에 들켜서 체포당했겠지.
“공통점은 인간족이 아니라는 것 뿐 아닌가요~?”
“그런가? 종교교단에서 ‘인간’이라고 하면 엘프나 드워프도 포함하잖아.”
대화하는 프랑과 라리루라. 각 나라마다 ‘인간’이라는 말에 어떤 종족을 포함하는가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 왜, 기독교의 성서도 해석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베로니카가 말했던 ‘룬을 제한당하는 저주에 걸린 인간’이란 인간-엘프-드워프 등 보편적인 종족을 전부 일컫는 말이었다.
게르마니아에선 신족 외에는 전부 인간으로 친다.
그 나라 말로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단어인 【Mannheim】이 ‘인간의 집’이라는 뜻이니까.
“……으으으음?”
나는 그리 생각했다가 뇌리를 스치는 미약한 직감에 머릴 눌렀다.
인간 외의 다른 종족이라.
이세계에서 살아오며 여러 인종과 종족을 만난 나였는데, 최근에 만난 이종족 중에서는 씹새끼가 많은 기분이 들었다.
프랑이나 베로니카, 다른 바이콘들은 예외로 치자.
하지만 그밖에 나랑 싸웠던 유니콘 아비두스, 오우거, 엘프 예르나는 죄다 웬 선민사상에 지배된 놈들 아니던가? 여기서 아비두스와 예르나가 접점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만 같았다.
“범죄조직도 전부 으르렁 대기만 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인간말종들은 나와바리를 건들지만 않으면 끼리끼리 노는 경우도 많다.
이세계 범죄조직들도 그런 게 아닐까? 태생이 지들 좆대로 세운 미학으로다가 가오를 잡으며 사는 병신 새끼들이다. 야쿠자와 러시아 마피아가 AV나 마약으로 어깨동무하는 것처럼 이 씹새들도 뭐 접점이 있는 거겠지.
유니콘에 엘프라. 존나 김치에 라면 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얘네는 무슨 파인애플 김치에 민트 라면 같은 느낌이지만 말이다. 애1미 시발 죄가 깊구나.
“예르나랑 딴 놈들의 관계야 나중에 그 년 기억을 찾아보면 알 일이지.”
다나는 그리 말하더니 프랑이 안전을 확인한 상자를 갖고 왔다. 얼굴에 기대감이 서린 것을 보면 무게가 무척 만족스러웠던 듯 했다.
─벌컥! 프랑은 1분만에 자물쇠를 따서 상자를 열었다.
나는 상자의 내용물을 보고 상자의 이름을 보물 상자라고 개명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상자에는 지갑 만한 금색 주괴가 3개나 빼곡하게 들어있던 것이다!
“씨이─ 발!! 골드 바──!!”
“가, 감정해 볼게!!”
─달그락. 프랑이 금괴를 만져보더니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24K 트루빠따 금괴라는 뜻!!! 나는 진기명기에 내놓은 효자손이 10억에 팔린 의뢰주처럼 경기를 일으키며 자지러질 뻔 했다.
“이 시바!!! 이게 다 얼마냐!!!”
“와와와와와와!! 눈부셔서 못 보겠어요♡!!”
기겁하는 우리. 존나 무게만 쳐도 이건 최소 억 단위였다! 대체 뭐 때문에 이딴 곳에 거금을 들고 왔는지는 모르겠다. 숨기 전에 재산을 처분해서 온 건가?
아니면 뭐 거래라도 할 생각이었나? 뇌물? 쓰벌 우리가 알 게 뭐냐!! 이젠 우리 건데!!
“기쁘긴 한데 한편으로는 빡치네. 예르나 년 존나게 부자였구만.”
“흐음. 금이라. 나는 마법 소재의 사금밖에 만져 본 적이 없구나.”
냉정한 것은 베로니카랑 다나 뿐이었다. 베로니카야 아직 인간 세상 물정을 몰라서 저런다지만, 우리 눈나는 연구소장 일 하면서 돈에 무덤덤해지기라도 했나? 기뻐하는 우리가 바보 같구만.
“우리 여편네 왤케 태연한 것이지? 금이 어디 쓰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가?”
“서방님아. 쳐맞기 전에 후딱 해치우고 튑시다? 집에 가져가지 못하면 요것들이 우리 돈이 아니게 되는 수가 있어요?”
나는 프랑이랑 라리루라의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다가 다나한테 귓볼을 잡혔다. 아 맞다, 아직 탐색 중이었지. 이러다 체포되면 황금이고 뭐고 다 나가리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남은 건…… 저거 뿐인가?”
우리는 대망의 아티팩트를 두고 군침을 삼켰다.
“베로니카, 뭔지 분석 가능해?”
“분석이고 뭐고 보자마자 알아차렸느니라. 저건 오리할콘(Orichalcum)과 미스릴의 합금이다.”
“오리할콘?”
21세기 지구인인 나한테는 익숙한 단어였지만 이세계인들 시스터즈에게는 낯선 말이었을까? 나 빼고 모두 처음 듣는단 반응이었다.
“산의 황동이라고도 불리는 희귀금속이다. 현대에는 실전되었다고 들었다만…… 미스릴에 약간 섞은 듯 하군. 이곳의 자연에서 무언가를 흡수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구나.”
“아아, 이게 그건가.”
이 금속이 빛의 마나를 흡수해서 응축하는 건가 보다.
파티원들한테 얘기하는 것이 늦어져서일까. 나 빼고는 아직 이 유적이 마나 발전소라는 것을 다들 모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나의 그런 대답에 귀를 쫑긋 세웠다.
“무언가 아는 게 있느냐?”
“이따가 설명할게. 근데 이거 뽑아가도 되냐?”
“문제 없다. 이것 자체로는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 외에는 위험하거나 대단한 점은 없느니라. 이 지하묘지의 구조와 연결이 되어 있을 뿐이다.”
원자력 발전소로 치자면 이건 중요 부품이긴 해도 발전기구는 아닌 듯 했다.
하긴 발전소를 털어도 사람 몇 명이 가져갈 수 있는 거엔 한계가 있겠지. 값비싼 핵심 파츠만이라도 챙겨갈 수 있으면 됐다.
베로니카의 눈이 초롱초롱해 진 것만 봐도 이게 존나 귀한 물건이라는 건 알겠다. 저 녀석이 순금에 반응이 없었던 건 이것 때문일까?
‘무슨 금속일지 설명을 듣는 게 기대되는군.’
─쿠웅. 나는 오리할콘 사각기둥을 뽑았다. 존나 오랫 동안 박혀 있어서 뽑기 힘들었는데, 다행히 이걸 제거했다고 여기 유적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밑에 석판도 챙기거라. 그 엘프가 손을 봐 놨지만 쓸모는 많을 것이다.”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에 나는 뭐라고 묻거나 하는 대신에 얼른 석판을 뜯어서 가방에 챙겼다.
전문가의 말은 따르는 게 맞으니까 질문은 시간 낭비였다. 그리고 씨발 챙겨갈 물건이 늘어날 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느낌이었다. 얼른 튀어야지 이것들을 안 잃어버리고 잘 챙겨갈 수 있을 텐데.
존나 도굴꾼 같은 생각이었지만 부정은 않겠다.
고고학자란 대대손손 남의 나라 유적을 털어가서 자기 나라 박물관에 전시하는 종족인 거에요. 불만이 있으면 루팡 박물관으로 오십시오. 하하하.
“책도 챙기자. 벌써 내가 사고 친지 30분이나 지났어.”
게르마니아 왕국군 병사들이 뭔 리액션을 취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정당한 유적털이범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신속하게 도망치도록 하자.
“책이라니, 분신 책? 금서로 지정돼 있으면 어쩌려구?”
“문제 없다. 자연지물로 만드는 분신이니라. 인간의 혈육을 쓰지만 않으면 보통의 마법이다. 정령화 술식의 파생이라고 해도 좋겠지.”
베로니카는 망아지 모드에서 맬 가방에 짐을 쌓으며 싱긋 웃었다.
“인간의 마법도 꽤나 흥미롭더구나. 나는 적성이 없어 보인다만.”
“분신인가. 나는 약간 땡기는데.”
그림자 분신술을 단련하면 싸움에서 도움이 될려나. 물론 다른 곳에 쓸 생각은 없었다. 예를 들어서 아내들이 잠자리에서 내 분신을 꺼내달라고 하면 절대로 사양할 것이었다.
아무리 나랑 똑같이 생겼어도 그렇지, 내가 아닌 누군가의 품에 프랑이랑 다나가 안기는 걸 보라고? 미쳤습니까 휴먼?
아, 하지만 프랑이랑 다나가 10명, 20명으로 늘어난다면…… 아니, 생각 말자.
‘호문쿨루스를 만들 것도 아니니 어차피 그런 용도로는 못 쓰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루팅한 아이템들을 챙겨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물건 감정은 최소한 쿠드세스로 돌아간 다음에 하도록 하자.
지상으로 올라온 우리는 숨어서 모즈리운 밖으로 나갔다.
숨어서 나간 이유는 언데드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고 현장에서 ‘사고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고려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길 바란다. 총소리에 폭발소리가 터져대는 곳에서 유유히 걸어나오는 집단이라니,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내가 경찰이었으면 100% 기억해 둘 것이었다.
우리가 은밀하게 빠져나온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왜 이렇게 늦게 나오신 겁니까!!”
하지만 아예 출입 기록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입구 밖으로 나오자 정렬해 있던 게르마니아 왕국군에서 어떤 병사가 튀어나왔다. 아마 왕국에서 배정한 관리자일 것이었다.
“어서 빨리 대피하십시오!! 도시에서 일어난 폭발음은 들으셨겠지요?!”
“죄송합니다.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초동이 늦어졌습니다.”
다나가 상의했던대로 핑계를 댔다. 시내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어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충분히 말이 되는 핑계였다.
“출입 기록은──”
“벌써 다 해 두었습니다!!”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관리자는 경비소에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소지품 검사를 했다. 정식 절차를 통해서 출입한 사람이 범인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거의 가방만 둘러본 수준이었다.
“이 석판은 뭡니까?”
담당관은 뭔가 일어날까봐 걱정하는 눈치를 보이면서도, 우리들의 짐 중에서 ‘유일하게’ 눈에 뛰는 석판을 가리켰다. 앞뒤에 아무런 문양도 없는, 돌바닥 타일 같이 생긴 석판이었다.
그 질문에는 내가 헛기침을 했다.
“그냥 마법에 관련된 물품입니다. 일행에 흙마법을 쓰는 파티원이 있어서요.”
“아아, 모험가시니까요. 알겠습니다. 문제 없겠군요. 도시 안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니까 되도록 먼 곳으로 피난 바랍니다.”
“예. 다른 모험가나 행상인들은 다 피난한 모양이죠?”
“여러분이 마지막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예의바른 축객령에 쫓겨난 우리는 쿠드세스로 가는 초원으로 나왔다. 게르마니아 왕국군은 대장 같은 사람이 인솔해서 도시를 수색하러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선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다급한 거에요~?”
라리루라는 이해가 안 가는 것처럼 물었다. 내가 벌인 일의 크기를 직접 못 봐서 그런 걸까? 하긴, 직접 봤다면 본 대로 그런 위험한 곳에 왜 들어가냐는 생각을 했겠지.
“누가 테러를 일으킨 걸 수도 있으니까. 성벽이 무너져도 초원에 좀비가 돌아다니게 되는 걸로 그치겠지만, 차폐물이 없는 초원하고 성벽 내부, 어느 쪽이 언데드들을 관리하기 편할지는 뻔하지.”
“아하! 뭔가 미안해지네요♡”
“미안한 걸로 말하면 유적을 털어온 거에 미안해야지.”
나는 작게 대답하며 검사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던 ‘보통 석판’을 꺼냈다.
베로니카가 씌운 바위 뚜껑을 완력으로 부쉈다. 폭주인가 【게르튀르】의 각성인가 덕분에 기본 상태의 완력도 조금은 높아진 것이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그려진 석판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손을 댔다. 수면에 잠기는 것처럼 석판에 손을 넣어서 분신 마법의 책을 꺼냈다.
“<아공간 주머니(Portable Subspace)>. 아니, 그것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인가?”
“나는 인간의 마법체계를 모르니 마법의 이름에 대해서는 묻지 말거라. 단지 그 마법진과 오리할콘을 써서 마나를 아공간에 채워놓았던 것으로 보이는구나.”
베로니카가 석판의 가치를 재설명했다.
우리가 빠져나오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바로 소지품 검사였다. 행인의 물품을 검사하는 건 이세계에서는 어지간하면 안 하는 일이었는데, 긴급상황에서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지하묘지의 공간이야 감춰버리면 됐다. 프랑과 베로니카가 흙 마법을 써서 예르나가 숨어 있던 곳을 무너트렸으니까.
근데 빠져나오면서 소지품 검사를 당하면 파밍한 아이템을 들켜버리고 말 것이었다.
베로니카가 룬 마법으로 숨어서 빠져나온다는 선도 있었는데, 들켰을 때를 생각하면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같이 들어갔던 망아지는 어디로 갔습니까? 따위의 질문을 받아도 곤란하고 말이다.
그때 베로니카가 제시한 것이 이 석판이었다.
게임의 인벤토리처럼 물건을 아공간으로 보내는 마법진!
그 효과를 살려서 우리는 파밍한 아이템을 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걸 마법진이 망가지지 않게 감추어서 검사를 통과한 것이었다.
‘정당하게 소유권을 주장해도 됐겠지만…….’
<편찬대대>라는 조직이 어디까지 마수를 뻗고 있는지 모르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베로니카 언니. 이것도 고대문명의 아티팩트 아니에요~?”
라리루라가 내 어깨에 달라붙어서는 석판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뺐다. 아공간이랑 연결된 마법진이 신기한 모양인데, 이 녀석은 어느새 또 베로니카랑 언니동생 하는 사이가 됐담.
“아티팩트 급은 아니야. 현대에도 아공간 기술 정도는 개발됐거든.”
다나는 건틀렛을 벗어서 땀을 닦으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베로니카는 인간 세상의 마법 발전도를 알지 못하니까.
“그래도 그거, 무지 비싼 거다? 구체적으로는 2실버 하던 우리 남편님을 대충 100명 정도 사서 무기까지 싹 뿌려줘도 남을 정도로.”
“기냥 몇 골드쯤 한다고 말해주면 되지 않냐? 그렇게 치면 너도 존나 노예 마누라에요.”
“마누라가 아니라 주인님이라고 부르렴. 고장나기 전까진 중고시장에는 안 내놓을게.”
“라리루라. 50년 쯤 지나서 노예시장에 에누리 되는 키타이 남자 노예가 보이면 꼭 사 주라.”
“절대 싫어요☆ 앗, 그치만 5년 안이면 생각해 볼래요!”
잠깐 개소리를 하고 석판을 가방에 다시 넣었다.
“공간이랑 공간의 연결은 현대 마법으로 재현이 돼. 그게 생물을 보내거나 원하는 이계로 이어지는 기술이 되면 완전 다른 레벨의 문제가 되지만 말이야.”
비유하자면 세계일주냐 우주여행이냐의 차이였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하며 쿠드세스로 돌아갔다.
마차는 편도밖에 없었기에 돌아가는 길에 야영할 준비는 해 놨었다. 하룻밤 밖에서 자고, 다음날 점심에는 여관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릴리안한테는 뭐라고 말하냐. 느그 교수가 씹새였다고 할 해도 못 믿을 텐데.”
“어쩌긴 어째. 못 찾았다고 해야지.”
“아쉽지만 그럴 수밖에 없나. ……편지 써 두자.”
나는 예르나한테 속아넘어갔던 불쌍한 석사 동료에게 정성 들여서 안타까움을 표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녀 덕분에 예르나 년이 뭔가 저지르기 전에 해치워버릴 수 있었으니, 그 감사를 담아서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노르한테 설명을 들을 때가 왔네.”
내가 여관에 편지를 맡기고 오자 프랑이 말했다.
워낙에 얌전하고 착한 프랑이지만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보여주는 이런 카리스마에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뭐시냐, 다나가 등짝을 때리면서 혼내는 성격이라면 프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혀놓고 실토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어느 쪽이 더 무섭냐면, 프랑이 3배는 더 무섭다.
“얘기라는 건, 음, 그거지? 내가 훼까닥 했던 그거.”
─끄덕. 뭘 묻고 있냐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네 사람.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한 그녀들이었는데, 불현듯 라리루라에게 눈길이 모였다.
“넷? 왜, 왜요?”
라리루라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눈치 빠르게 무슨 뜻인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아, 네. 그렇군요. 저는 들으면 안 되는 얘기란 거죠?”
약간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을 까는 라리루라. 내 사정을 다 아는 프랑, 다나, 베로니카랑은 다르게 라리루라는 모르는 게 많았다.
아내들과 베로니카는 내 폭주가 당연히 오딘의 후계자가 어쩌구 하는 것이랑 연관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탓에 라리루라에게 눈빛을 보낸 것이다.
다나는 그 반응에 당황한 것처럼 정정했다.
“아, 아니, 나가라는 뜻은 아냐. 그냥 네가 얘기를 못 따라올까봐 걱정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