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라리루라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저기요 저기요~? 바다에 있는 섬이라면 기후도 내륙이랑 다를 것 같은데요~? 추우면 큰일이니까 따뜻한 옷을 준비해 가야 하나요~?”
“좋은 착안점은 좋았다만 정 반대니라. 그 섬은 불의 마나가 충만한 장소다. 간혹 사시사철 기후가 덥기만 한 나라가 있잖느냐? 그와 비슷하다.”
정정해 주는 베로니카. 아열대 기후의 섬이라는 소리인가?
‘무슨 불타는 가지라는 게 자라나는 섬이라니까 그럴 만도 한가.’
적도의 개념은 이세계에도 있겠지만, 3일 거리라니까 별로 적도랑은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지하묘지 때처럼 이세계에는 환경 나름으로 기후가 정해지기도 하니 말이다.
“아핫♡! 다시 말하자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활동해야 한단 뜻이네요?”
그런데 라리루라는 베로니카의 대답에 귀를 쫑긋 세우고는 짖궂게 웃었다.
“선배애~? 혹시 저희의 수영복 차림이라든가 기대버리신 건 아니죠~? 저희가 속옷보다 나을 게 없는 쬐~ 끄만 천만 입은 모습이 궁금하시다든가~♥?”
“어. 존나 궁금해.”
쌉정색을 빨고 말하자 라리루라는 귀까지 빨개졌다.
“네? 네? 아니, 갑자기 그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면…….”
“우리 아내들 수영복 차림은 아직 구경한 적이 없걸랑.”
“…………아, 네~. 그러시겠죠. 네~ 저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구요?”
알았으면 뭐땀시 실망하고 있는데.
다나는 라리루라의 리액션에 쿡쿡 웃더니 내 목에 손을 감았다.
“수영복이 그렇게 보고 싶냐? 존나 변태 같은 새끼. 다음 여름까지 기다리지?”
“이 누나가 뭘 모르네. 바다에 왔는데 수영복을 안 입는 건 바다에 대한 모욕이야.”
“단순히 그대의 성욕 때문이 아니더냐?”
닥쳐봐 말딸련아.
“나는 입을래. 해수욕도 재밌을 것 같아. 앗, 위험한 데는 아니지?”
프랑은 안전하기만 하면 찬성인지 그리 말했다. 역시 우리 프랑이 뭘 좀 안다니까.
베로니카는 그 말에 기억을 떠올리려는 것처럼 뿔을 긁었다.
“전승에 의하면 몬스터가 나올 걱정은 없다. 먹을 수 있는 과실이 한가득이 열매 맺는 낙원 같은 장소라고 하더구나.”
“크크. 그런 곳을 결계로 숨겨놓고 독점하다니 나빴네.”
“흐흥. 인간들에게는 넘겨줄 수 없는 신족의 땅이니라. 잃어버린 땅을 내놓으라고는 않겠다만, 원래 우리 것이었으니 불만을 가져봤자다.”
“농담이야. 자기 땅문서 지킨 건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
아무튼 이걸로 할 일은 결정이군. 우리는 이걸로 대충 상의를 끝내기로 했다.
“셰이드에 쓸 재료는 이걸로 다야? 2개 뿐은 아니지?”
“아직 몇 가지가 남았다. 직접 찾으러 가야 할 정도로 희귀한 소재는 아니니, 인간 사회에서도 유통될 거라고 생각한다만…….”
“알았어. 마법사 길드를 찾아보자. 안 그래도 가 봐야 해.”
나는 창에 부여했던 <꼭두극(Puppetry)>이 없어졌고 라리루라도 링링이가 반파됐다.
섬은 안전해도 가는 길까지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몬스터 말고도 해적도 있다─ 전력 보강은 필수였다. 그러자 베로니카는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그…… 그렇다면 말이다? 나도 따라가도 되겠느냐?”
“셰이드의 재료를 너밖에 모르는데 당연히 따라와야지. 바이콘 상태에서 텔레파시로 나한테 어떤 게 제일 괜찮은 건지 말만 해 줘.”
“아, 아니, 그, 원래 모습으로………… 가고 싶어요.”
십펄, 존나 갑자기 존댓말 쓰지 마라. 당황스럽잖아.
베로니카는 내 그런 벙찐 반응에 답지 않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세상 부끄러워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구, 궁금해서 그래요. 저희는 다른 종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할 수가 없었는걸요……. 일족의 다른 바이콘들이 기껏 원래 모습을 되찾아놓고 세상 굴러가는 모양새도 모르고 왔다면서 놀리는 것도 싫고…….”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저주는?”
나는 어안이 벙벙해했지만 존나 합리적인 질문을 던졌다. ─쭈뼛쭈뼛. 그러자 베로니카는 요염하게 생긴 외모랑 안 어울리게 부끄러움을 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요. 뿔이야 ᛒ(Berkanan)의 룬으로 감추면 되겠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버려도 변신 마법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사실 거짓말도 아니고요…….”
그렇긴…… 한가?
변신 마법으로 바이콘으로 변했습니다! 라는 말엔 쥐뿔도 거짓이 없었다. 베로니카의 원래 모습은 저거고, 바이콘으로 변하는 건 룬에 의한 변신 마법이니까.
전부 사실이니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얹어도 안 걸릴 것이었다.
존나 청렴결백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로니카도 처지가 기구하기는 해.’
저주로 인해서 태어날 때부터 동족한테밖에 원래 모습을 못 보여주는 것도 한스러울 텐데, 저주가 풀리고 나서도 남성 경험이 없어서 원상복귀 상태 아닌가.
그리고 자기들이 숲에서 과일 따먹는 사이에 다른 종족들은 화려한 문명을 쌓았으니 더 가슴이 먹먹하지 않을까.
존나 금수저 흙수저를 뛰어넘는 종족 수저다. 혈통좆망겜 이세계답다.
‘그러고 보면 쿠드세스에 처음 왔을 때도 엘프나 다른 종족들이 속 편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고 푸념을 했었던가.’
사르가디스에서도 계속 갇혀만 지내던 베로니카다. 티는 안 냈어도 이렇게 번성한 교역도시에 왔을 때는 컬쳐 쇼크가 대단했을 것이었다.
기척을 감추며 도시에 숨어 있던 적은 있지만, 실제로 활기가 느껴지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실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겠지.
비유를 하자면 개발도상국에서 자기 마을을 대표해서 나온 젊은 처녀가 L.A 같은 대도시에 도착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거야 정신을 못 차릴 만 하다.
정보 통신 기술이 좆망한 이세계 아닌가. 처지가 같은 다른 동족들도 베로니카한테 인간 문명 사회의 레벨을 알려줄래야 못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기도 미안해지는군.
나는 눈치를 보는 베로니카한테서 눈을 떼고 파티원들에게 눈짓으로 의견을 물었다.
반대 의견 없음.
“그래. 같이 가자.”
“──저, 정말요?”
그리 말하자 쓸데없는 말을 했는지 고민하는 듯 하던 베로니카의 얼굴이 확 펴졌다. 이렇게 쉽게 허락해 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것 같았다.
“대신 존댓말 하지 말 것. 평소 말투보다 더 어색해서 눈에 존나 띄니까.”
“아, 음, 알겠습, 아니! 알겠느니라! 그리 하마!!”
─벌떡! 일어나서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는 베로니카.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아이처럼 좋아하는 걸 보니 반대할 마음도 안 들었다. 나는 낄낄대며 창을 어깨에 맸다.
“일단 마법사 길드에 들렀다가, 그 담에 구경하러 가자.”
외국까지 와서 일만 하다가 가는 것도 조금 아니긴 하지.
출장 나온 회사원들도 현지에서 남는 시간에 살짝 논다고 혼나지는 않잖은가. 우리도 일을 하나 끝냈으니 관광지를 돌아다니거나 수영하며 놀아도 벌은 안 받을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쿠드세스의 마법사 길드로 직행했다.
‘저번보다 사람이 적군.’
시간대가 문제인 걸까? 해가 쨍쨍한 낮 시간인데 번잡하진 않았다.
상태를 엿보자 베로니카도 버틸만 한 모양이었다. 가끔씩 어린 아이들이 주위를 지나가면 안색이 파래지기는 했는데,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
그보다는 거리의 상품이나 먹거리에─특히 먹거리 쪽에─ 시선이 팔리는 베로니카였다.
내가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등을 가볍게 쳐 주자 바짝 긴장한다. 여기서 못 버티고 바이콘으로 돌아가 버리면 죽도 밥도 없으니까 말이다.
“어서오십시오. 길드원이십니까?”
인파가 모인 곳을 피해가며 마법사 길드에 도착한 우리는 접수원에게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교역도시라 그런지 사람을 받는 접수원도 미남미녀였다. 이 마법사 길드 지부장은 체면을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정식 길드원 등록을 했다는 라리루라를 불렀는데, 그 녀석은 손바닥을 포개더니 발랄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새끼, 길드원 자격증 안 들고 왔구만.
어쩔 수 없이 내 길드원증을 냈다. 크롬웰이 준 이세계 코스트코 연회원증이다.
“마법 매체나 소재의 구매처는 2층입니다.”
크롬웰이 발행해 준 허가증이 통할지는 도박이었는데, 마법으로 진위를 검사한 접수원은 웃는 얼굴로 통과를 시켜줬다.
2층에 가서 안내원들에게 물어가며 마법 소재를 판다는 곳까지 갔다. 베로니카는 재료를 엄선하더니 몇 가지를 자기 돈으로 결제했다.
종이 봉투를 한아름 들고 오길래 대신 들어주려고 했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하여간에 그놈의 후계자가 뭔지.
“뭘 산 거야?”
“마운틴 골렘의 뿌리와 그리폰의 침. 신대부터 오랜 시간 사용되어 온 마법 매체니라.”
“그거면 충분하고?”
“다른 재료가 훌륭하니 괜찮다. 의외로 인간 세상에서 취급하는 물건도 품질이 좋더군.”
베로니카한테는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도 저걸 구하겠다고 몬스터를 잡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재료를 구매하는 동안에 링링이 3.5호의 수리도 맡겨놓았으니까, 이제 내 창에 마법을 부여하기만 하면 끝이다.
우리는 마법 부여에 쓸 매체를 사서─거대 골렘의 코어를 들고 오지는 않았으니까─, 길드원에게 무료로 빌려주는 시험실에 들어갔다.
이제 라리루라가 마법을 부여해 주기만 하면 됐는데.
라리루라는 저번처럼 창대에 매체를 바르고 마법을 부여하려다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아뇨, 뭔가 잘 안 되서……. 마나가 부족한가?”
“마나? 이거 써 봐.”
나는 옥새에 마나를 담아서 라리루라한테 줬다. 사용법을 설명하자 라리루라는 금방 알아들었다.
그렇게 그 녀석은 옥새에 충전한 마나를 사용하며 창대에 마법을 부여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라리루라의 마나를 흡수한 창이 갑자기 맥박을 치더니, 실험실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노련미 넘치는 바이브레이션!
내 주무기가 칼날 달린 딜도로 진화하는 것인가? 나는 이 초유의 사태에 경악하여 소리쳤다.
“먼데?! 대체 머선 일이고?!”
“저, 저도 몰라요!! 전 아무 것도 안 건드렸어요!!”
“그건 존나 뭔가 잘못 건드린 사람들이나 하는 말인데!!”
아무튼 관찰이다. 나는 영감을 일으켜 벡안을 발동했다.
위엄하진 않겠지? 설마 내 창이 건랜스가 되어서 대폭발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고 믿자. 벡안으로 자세하게 관찰하자 나는 이 진동이 왜 발생하는지 눈치를 깔 수 있었다.
‘창이 마나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
미스릴 창날의 마나 흡수력은 변함이 없었다.
원인은 창대였다. 트렌트인가 하는 가성비 훌륭한 몬스터의 목재로 만들었던 그 창대가 라리루라가 부어넣은 마나를 튕겨내는 것이다.
가만 보면 창에서 밀려난 마나가 공기를 진동시키는 듯도 했다.
이 진동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핸드폰 진동 벨을 존나 10배 20배로 키운 것 같네.’
아니, 그런 비유로는 귀엽게 느껴질 정도의 진동이었다.
다른 비유를 찾자면 클래식 연주곡을 데스메탈 락 밴드의 앰프로 틀어놓은 느낌이다.
“서, 선배! 일단 이거 받으세요!”
라리루라는 냄비 뚜껑으로 가둬놨던 바퀴벌레가 사라진 자취생처럼 당황하면서 옥새를 던졌다. 나는 마나를 다시 빨아들여서 회복했는데, 옥새의 마나는 거의 그대로였다.
─파지직! 그때 뉴런을 전류처럼 스쳐지나가는 직감! 나는 옥새를 보이며 물었다.
“라리루라!! 너 내가 준 마나 안 썼냐?!”
“네? 네, 네! 쓰려고 했는데 제 마나를 다 쓰기도 전에 저 창이 막 웅웅댔어요!!”
소음을 울려대는 창 때문에 언성이 커지는 우리. 나는 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옥새에서 내 마나를 충전하며 창대를 붙잡았다. 당연히 헬스장마다 꼭 있는 덜덜이 벨트 마사지기처럼 손이 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내가 손을 대자 창대는 마치 지 어미 품으로 돌아온 갓난쟁이 애기처럼 조용해졌다.
─우잉.
그런 단말마 아닌 단말마를 흘리며 아가리를 쌉치는 우리 미스릴 창.
‘아니 씹, 도난 방지 기능도 아니고 뭐야 이게.’
설마 우리 창 놈이 내 게 아닌 마나에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으키게 됐다는 말인가? 나는 얼탱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이 새끼의 데스메탈 옹알이가 바깥에 들렸는지 점검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검하려고 했다.
【무슨 소란입니까!!】
나랑 라리루라가 당황하는 사이에 소란을 파악했는지, 실험실의 문을 열며 어느 중년 남성이 뛰쳐들어왔다. 천안문식 아무 일도 없었음 계획 대실패다.
‘아잇 싯팔.’
이세계 방음 기술 존나 개차반이네 진짜.
후덕한 중년 남성은 실험실 관리인인 요프시라고 한댄다.
중년 관리인이라고 하면 뭔가 허접해 보이는데, 이세계의 마법사들이 실험하다가 일으키는 사고의 수준을 알면 다시는 그런 생각을 못 하게 될 것이었다.
자기 랩실도 없는 6성급 이하 마법사들의 실헐심을 관리한다는 건, 대충 해안 구조요원의 마법판 상위 버전이라고 보면 될 것이었다.
“창이 마나를 거절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사람답게 요프시는 브리타니아 어에도 익숙했으며, 내 자기소개와 설명을 듣고서 0.1초만에 맥락을 붙잡는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끙. 마나를 흡수하는 목재도 아니고, 거절하는 목재라.”
내가 그리 대꾸하자 요프시는 곤란해 했다.
이건 그거다. 일거리가 늘어나서 기운이 빠지는 이 시대의 가장 같은 그거 말이다. 나도 기분은 이해가 갔기에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잠시 감정해 봐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아, 요금이 듭니까?”
“제가 아이템 감정 데스크에 있었을 적이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다행이구만. 여행지에서 이런 공갈 사기는 흔하니 말이다.
먼저 안내를 해 준다며 말을 걸고 돈을 요구한다든가, 지 좆대로 그림을 그려놓고서 몇 쿠퍼에 판다든가 하는 사기는 이세계에도 있다.
“어디 보자…….”
요프시는 틀딱다운 추임새를 넣으며 창대를 조사했다.
그러고서 1분도 안 되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저런 반응에 ‘사기 치려고 밑밥 까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드는 삐뚤어진 내가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노르드 씨? 이 창은 어디서 나셨습니까?”
“감정에 필요한 질문입니까?”
“아니오. 감정은 끝났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정보를 안 주려고 하는 걸 눈치깠는지 요프시는 내게 창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문자가 보이십니까? 아실지도 모릅니다만, 이 창에 새겨진 F와 비슷한 글자는 룬 문자입니다. 창에 부여되는 마법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꼭두극> 마법을 부여할 생각이었습니다.”
“예? 그런 시정잡배 잔재주꾼이나 쓰는 삼류 마법을요?”
“……흐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