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은 생각하다가 네 의견을 묻는 듯 쳐다봤다. 나는 이 절벽 근처에서 가장 큰 나무 밑을 가리켰다. 이파리 그늘이 꽤 넓어 보였다.
“너희들은 저기서 쉬고 있어. 베로니카, 더위 대책 있지?”
“오리할콘 기둥은 탐색에 써야 한다. 얼음 기둥을 여러 개 세워두고 가마.”
그리 말한 베로니카는 내가 가리킨 곳에 주문을 쏘았다.
─쩌저적! 채앵!
ᚺ(Hagalaz)의 룬을 응용한 얼음 기둥은 건물의 중추석처럼 웅장했다. 만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안에 들어가 본 다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면 더워 뒤지지는 않겠네. 그래도 남편, 이거 다 녹기 전에는 와라?”
“여기보다 더운 곳에 가는 남편한테 위로의 한 마디는?”
“……갔다 오면 얼음 키스라도 해 줘?”
“그거면 인정이지.”
히죽거리며 웃는 나. 햇볕이 세니까 계속 대화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창을 매고 베로니카랑 짐을 정리한 다음, 우리는 그 결계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글이글.
그런 소리가 들릴 듯이 더운 공간이었다.
냉기 마법을 쓸 수 없었다면 탈수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증막이나 여름철 군대 행군이 떠오른다. PTSD ON.
“시발, 죽은 화산이라는 말 진짜야? 활화산에 환영 씌운 거 아냐?”
“설마. 화산이라면 마나의 반발 파장이 남쪽으로만 뻗지는 않을 것이다.”
─두둥실. 오리할콘 기둥이 베로니카의 손 위에서 뷰유하기 시작했다. 뭔가 마법을 쓴 모양.
“지반 밑에 타오르는 가지가 자라나 있을 것 같구나. 일단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면 어떻겠느냐?”
“별 수 있나. 해야지.”
몇 분 정도 이동하자 동굴 입구가 안 보이게 됐다. 나는 그 입구를 막은 결계를 떠올리며 물을 마셨다.
“입구의 결계의 조건, 구신의 마나겠지?”
“아마도. 그대와 나의 공통점 중에서 결계가 선별할 만한 건 그것 뿐이니 말이야.”
“그래. 너도 물 좀 마셔 둬라. 다 마셔도 돼. 마법으로 채울 거니까.”
물을 마시는 베로니카를 보며 나는 생각을 계속했다.
구신의 결계를 가진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건, 아마 이 ‘정원섬’을 설계한 선지자의 의도일 듯 했다. 소재를 가져갈 인물을 엄선할 걸까?
‘이 섬은 빠져나가는데도 바이콘 족의 허가가 필요하댔나.’
이중 삼중으로 지켰다고 생각하니 뭐 콩고물이라도 건질 수 있을 듯한 기분.
내 그런 예감은 탁 트인 곳으로 나아가자 실감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엄청 넓은 공동에 도착한 순간, 더위가 씻은 듯이 가셨기 때문이었다. 나와 베로니카는 눈을 마주치며 잘 가고 있다는 느낌에 웃음을 교환했다.
공동에는 딱 2개의 입구만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과, 내 왼편에 난 공간이다. 베로니카는 좀 더 시원해지고 싶은지 오리할콘 기둥에 몸을 대며 말했다.
“여기서도 막다른 길이다만…… 결계가 아니겠느냐?”
“……막다른 길? 저기 입구 있잖아.”
내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고 눈을 크게 뜨는 베로니카.
오, 천공신 맙소사. 설마 이거…….
“……안 보이는구나.”
“시발. 실화냐.”
이번에는 베로니카가 조건이 안 맞는 건가.
혼자서 탐색하는 건 암만 그래도 에바인데.
“……잠깐 쉬었다가 생각하자. 나 땀 때문에 뒤지겠어.”
“그러자꾸나. 나도 꽤 벅차다.”
베로니카는 이번에도 가슴골에 손수건을 넣어서 땀을 닦아댔다. 나는 시원한 공간에 감사하며 <얼어붙은> 손길로 몸을 식히다가, 내 눈에만 보이는 공간에 다가갔다.
“워후 씨발.”
하필이면 거기에 무슨 사람이 웅크린 조각상 같은 암반이 있어서 좀 놀랐다.
조각상이라기에는 형태가 너무 조악하다. 그냥 자연 암반이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앉아서 쉬던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모양이 특이한 암반이거나 예전에 누군가 만들었던 조각이 무너진 거겠지.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모르니까.”
나는 창으로 찔러보거나 마나를 감지해 봤는데, 그냥 보통 암반이 맞았다. 창으로 긁자 베어진 돌 조각도 손가락으로 가볍게 부숴질 만큼 물렀다.
“별 거 없네.”
돌조각을 대충 던져버렸다. 문제는 이 결계다.
안쪽에 위험한 생물은 없을 듯 한데, 뭐 나 혼자 가도 타오르는 나뭇가지인지 뭔지를 알아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나는 약간 생각해 보고 발끝으로 빈 공간을 차는 흉내를 냈다.
─퉁퉁. 발끝에 돌아오는 질감. 나는 눈을 빛냈다.
“와? 오? 야, 베로니카! 이건 만져진다!”
“호오. 환영결계였나? 그거라면 다행이군.”
“흐흐. 그러게나 말이다.”
괜히 지레 겁 먹었네. 나는 창대를 야구방망이처럼 들고 풀 버프를 발랐다.
이까짓거 한 방에 쨍그랑이지. 다나도 없으니까 손목이 좀 저리겠지만 창대로 후려치자. 나는 그리 생각하며 창이 멀쩡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계를 쳤다.
─쨍!!!!
“갸아아아아아악…….”
콘크리트에 쇠망치를 찍는 듯한 감각! 나는 생각보다 강한 결계 앞에 손바닥이 얼얼해졌다.
“많이 튼튼한가 보구나.”
“쓰벌, 아냐. 할 수 있어.”
여기서 가오를 잡지 않으면 꼴마초의 이름이 운다.
나는 좀 더 자세를 바로잡고 진지하게 공격에 임했다. 풀 버프 상태에서 발휘할 수 있는, 화력 면에서 최고의 물리 공격기를 펼칠 생각이었다.
“뭉게뭉게── 삼도 지르기!!!”
무영창 <구름 소환>을 습득한 이후에 가능해진 뭉게뭉게 기술의 연발이었다. ─카가각!! 로켓처럼 쏜 【게르튀르】의 정식 공격기가 결계에 구멍을 냈다.
“──람각.”
그 구멍을 넓히듯이 돌려차기 피니시를 날렸다.
설탕 유리처럼 부숴지는 투명한 결계! 베로니카한테는 꼭 두꺼운 암반이 유리 소리를 내며 부숴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나는 버프를 끄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염병. 몬스터가 없다고 다 능사는 아니구만.”
“고생했구나.”
“어. 조금 더 쉴래?”
“나는 상관없다. 땀은 다 닦았느니라.”
“그럼 후딱 해치우자.”
끝나면 섬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해수욕이나 하러 가야겠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마나 포션을 까서 마셨다. 베로니카는 내 짐까지 들고 먼저 통로로 들어갔다.
─찌르르!!
등골이 오싹해지는 직감. 허리부터 척추까지 전기가 흐른 듯한 섬찟함에 나는 생각하기보다 먼저 움직였다.
“──흐햐앗?!”
마시다 만 포션 병을 던져버리고 통로로 가던 베로니카를 넘어트리듯 밀었다.
─쨍그랑!
우리가 통로로 굴러 들어가자 포션 병이 바닥에 떨어져서 깨졌다. 베로니카는 내 밑에 깔려서 기겁을 했다.
“자, 잠깐?! 주인님── 아, 아니, 그대여! 이렇게 될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저, 적어도 땀을 닦고서 다시──”
“──쉿.”
베로니카의 입을 막았다. 땀을 다 말렸던 목에 새롭게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 있던 공동 쪽을 봤다.
내 돌발행동이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얼굴이 굳는 베로니카.
나는 말없이 같이 일어나서 공동을 경계했다.
변화는── 없군.
몇 분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기에 나는 창끝을 내렸다. 착각이었나?
“크흠, 뭐가 문제였지? 당황했잖느냐.”
베로니카도 끌어올렸던 마나를 몸 안으로 회수했다. 얼굴이 좀 빨갛다. 나는 겸연쩍어져서 목을 긁었다.
“아니 뭐, 잘못 본 걸수도 있는데…….”
“있는데?”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되묻는 베로니카였다. 이걸 굳이 말해야 하냐는 생각은 들었는데, 아무렴 어떻겠냐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뭐냐, 조각상의 눈이 움직였거든.”
“……눈이?”
“어. 나도 잠깐 스쳐지나가듯이 봤을 뿐인데, 시야 구석에서 조각상이 눈을 굴려서 네 등을 쳐다보는 것 같아서. 느낌이 싸- 해 갖고 뛰어들었어. 미안하다.”
진짜 뼛속까지 소름돋는 느낌이어서 나도 모르게 움직이고 말았다. 시팔, 마나 포션 깨진 것만 아깝네.
더운 곳에 있다가 시원한 곳으로 갔더니 피부가 예민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톡톡. 나는 오리할콘 기둥을 건드렸다.
“내 착각이겠지. 몬스터든 골렘이든 뭐가 있으면 이게 반응해 주던가 할 거 아냐.”
“그건 약간 오해가 있구나. 지금 이 기둥이 파악하는 것은 물과 불의 마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성의 마나를 가진 생물이라면 파악할 수 있겠다만, 그것 외에는 힘들지.”
“……어, 혹시 파악하면 어케 되냐?”
“속성에 호응하거나 반발하느니라. 어제 보았듯, 기둥에서 나오는 마나의 파장이 일그러지지.”
“………………이렇게?”
나는 기둥을 가리켰다. 베로니카도 고개를 돌렸다.
기둥의 마나 파장은 이상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대여.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나.”
“……아깝네. 나는 나만 그랬으면 했어.”
우리는 사이 좋게 방금 전까지 있던 공간을 쳐다봤다.
3개 달린 손가락이 공동을 잡고 거인이 얼굴을 비췄다.
─우수수수! 수십 년을 안 씻은 때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 피부에서 떨어지는 종유석.
그렇게 드러난 얼굴을 봤을 때였다.
손발이 공포심에 굳는 것처럼 딱딱해졌고 숨이 막혔다. 내 머리가 난생 처음으로 적을 앞에 두고 아무런 생각도 못 할 만큼 새하얘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예르나한테 좆발릴 위기에서도 못 느꼈던 컬쳐 쇼크였다.
“GGggqeee───!!!”
키가 5미터는 될 법한, 이상하게 생겨쳐먹은 거인은 존나 포효하며 우리가 있는 통로로 뛰어들어왔다. 나는 기함하며 펄쩍 뛰었다.
“씨이이이이이이발!! 와꾸 장애 거인이다아아아아아──!!”
“표현은 최악이지만 정확한 묘사로구나!!!!”
나랑 베로니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싸운다? 아, 그래. 싸우는 거 좋지. 얼마나 쎈지는 몰라도 걍 때려죽이고 땡 칠 마음도 있다.
‘근데 씨이이발!! 너무 못생겼어!!!!!’
도저히 정면에서 봐 줄 수가 없었다!
바위 여드름이 떨어지자 드러난 거인의 얼굴은 그만큼 흉측했다!
인간의 얼굴을 마구 재조립한 것 같은 끔찍한 생김새! 그 모습을 쳐다보자니 토막난 바퀴벌레 단면을 보는 것보다 생리적으로 혐오스러웠던 것이다!!
베로니카는 울상이 되어서 비명을 질렀다.
“못생김도 극한에 이르면 하나의 카리스마구나!! 주인님!! 난 당분간 고기를 입에 못 댈 것 같다!! 살덩이가 이리도 추악해 보이는 건 처음이니라!!!”
“GNnnnnnnnnnxcs!! Guiiiiiiqqqk!!!”
“당분간이고 지랄이고 빠져나가서 생각해애애애!!! 저 새끼 빡쳤잖아아아아아악!!!!!”
프라아아아아아아앙!!!! 몬스터 없다매!! 동물도 없다매!!
나는 처음으로 프랑한테 화를 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애미 시팔, 내가 일케 비명을 지르면서 튀어본 게 얼마만이지?
“주인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생겼다!!”
그때였다. 나보다 앞서서 달리던 베로니카가 외쳤다. 나는 잡담으로 체력 낭비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화색이 되었다.
“좋은 소식부터!!”
“출구가 보인다!!!”
“나쁜 소식!!”
“막다른 길이다!!!”
“씨발!!!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출구로 나오자마자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거의 2~3미터 거리에서 쫓아오던 그 거인은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몸통박치기를 시도했다.
나도 안다. 못 생긴 건 죄가 아니다.
“근데 염병, 그것도 어지간해야지!!!”
세로로 쫙 갈라진 얼굴은 거인이 아니라 거대한 외계생물이라고 불러야 맞을 듯 했다.
와 시발! 우주 최강 미녀! 아니, 수컷인가? 좆 달렸으니까 수컷 맞겠지!!
생리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떨치고 풀 버프 ON. 거인은 그 질주를 유지하며 앞차기를 날렸다.
──막을 수 있을까?
“──하면 된다!!”
나는 발차기를 피하면서 창에 온 힘을 실어 기술을 펼쳤다.
거인의 킥과 내 찌르기가 격돌했다.
─투콰과과광!!!!!
나와 거인은 부딪힌 볼링공처럼 격돌했던 방향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몸이 약간 저릿해졌다. 힘과 힘이 부딪힌 결과였다.
새끼 존나 쎄네. 나는 바닥을 구르다가 입에 고인 침을 뱉었다. 거인도 굼벵이 구르는 재주를 보여주다가 점프했다.
그대로 후퇴해 주면 개꿀이겠는데, 당연히 도망치려는 건 아니었다.
분화구 위쪽으로 높이 도약하는 못생긴 거인.
─쿠우웅!!!
“G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