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1,009)

옥새를 꺼내서 마나를 채웠다. 손을 등 뒤로 돌리자 베로니카도 내 체온을 덥혀주며 옥새에 손을 올렸다. 마나는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충전해 둔 마나는 아직 많다. 지난 시간 동안 꼬박고박 충전해 놔서 다행이다.

나는 접근하지 않는 거인을 분석하면서 입김을 불었다. 개 춥다 진짜. 살아 돌아가면 이번 겨울은 반팔 입고 다녀도 안 줍겠네 씨발.

숨만 쉬어도 폐까지 시렵다.

냉기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무기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면 폭주 모드의 나도 냉동빔을 쏴제꼈던가. 존나 지혜 버프가 걸린 내가 쓴 마법이니까 위력은 보증수표가 붙어 있던 셈이었다.

──또 폭주하면 이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려는 걸 고개를 저어서 멈췄다. 그 정도로 분노하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만화나 영화랑은 다르다. 내 의지를 잃고 날뛰는 게 어떤 참사를 벌일지 모르는데, 옆에 다치면 안 될 베로니카가 있는 상황에서 그 지랄은 할 수 없다.

천장의 결계를 부수고 도망치는 건 가능할까 모르겠다.

환영결계만 있으면 부서볼 만 하다. 문제는 우리가 둘 다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거다.

이번에도 베로니카만 막히면? 아니면 나만 남게 되면?

그러면 도망치는 의미가 없다. 결계 깨는 중에 저 씹새가 가만히 기다려 주겠는가? 지금 얌전한 건 우리 마나와 체력을 냉기로 깎으려고 저러는 거다.

만약 여기서 튀려 하면 조지려 들겠지.

다시 찾아와서 시비를 걸면 저 놈한테도 좆 같을 테니까.

도망은 관두자. 약점을 찾아서 이기는 게 급선무다. 발차기를 먹였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면 내 공격으로도 데미지는 들어갔다.

마나를 아끼고 방심하고 있는 틈에, 어떻게든 저 새끼에게 치명타를 먹여야 했다.

나는 서리 안개가 내린 분화구에서 침착하게 창을 들었다.

‘생각해 보자. 저 새끼가 제일 쫄았던 게 뭐였지?’

사람하고는 전혀 다른 얼굴 생김새에서 표정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지금은 어림짐작이라도 좋았다. 뭔가 승기가 될 만한 단서는 없었나?

‘불꽃? 안 통했어. 냉기? 쫄기는커녕 그리워했겠지.’

가장 유효타가 됐던 것은 뭉게뭉게 드롭킥이었다.

가죽을 베어 가르는 것보다 몸을 두들겨서 내장을 조지는 게 훨씬 잘 통한 듯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라인업으로는 버프를 걸어서 물리로 때리는 게 제일 현명한 방책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저 씹새를 쓸데없이 진지 빨게 만들기만 할 가능성이 더 컸다.

순식간에 죽이지는 못해도 전투력을 깎아야 하는데, 거인 새끼가 진짜 뒤질 것 같다고 느껴서 몸에서 냉기를 지려대면 좆 되는 수가 있었다.

‘최소한 이 공간의 냉기만이라도 어떻게 환기를 시켜야 돼.’

그리 생각한 나는 무영창으로 <번개의 화살(Lightning Missile)>을 발동했다.

숙련도가 올라간 덕분에 주문 없이도 11발의 전기 구슬이 떠올랐다. 거인은 경계하지 않았다. 치명적이지 않은 공격에 마나를 낭비하는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멍청한 새끼.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화살>을 발사했다.

“환기 좀 하고 살아라! 홀애비 냄새 난다, 빙하기 틀딱아!”

<번개의 화살>은 내가 노린 목표에 깔쌈하게 적중했다.

──이 분화구를 덮은, 천장의 환영의 결계를 말이다.

“──Gqqqqqqqqqqq!!!!”

거인이 드디어 경악하며 고함쳤다.

아니, 놀라움만은 아닌 듯 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공포였다. 마치 고소공포증 환자를 문을 열어놓은 헬기에 태운 듯한 발작! 거인은 기함하며 내게 새로 만든 얼음 방패를 투척했다.

역시 저 놈은 병신 새끼가 맞다. 나는 이죽대며 다시 <번개의 화살>을 발동했다.

파지지지지직─!!

결계는 번갯불에 튀겨져서 반투명해졌다. 앞으로 한 방이면 될 듯 했고, 피날레에 쓸 무기는 저기 병신이 친히 제공해 주었다.

나는 얼음 방패를 붙잡아서 하울링하는 늑대처럼 하늘로 던졌다.

물의 마나로 만들어진 얼음 덩어리에 부딪히자 결계는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다.

번갯불에 균등하게 지져진 덕분인지 유리창처럼 쏟아지는 결계의 파편! 나는 무자비하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일광건조를 실시한다.”

“Guaaaaaaaaaaaaaaaaaaaaaaa!!!!”

햇빛이 쏟아지자 거인은 바퀴벌레를 들이밀어진 결벽증 환자처럼 몸을 떨었다.

─푸슈우우우우웃!!

마나를 아끼는 것도 때리치고 온 몸에서 냉기를 뿜어대는 거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친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 놈, 아까 베로니카의 마법을 막으려 할 때도 햇빛 아래로 나오는 걸 망설였던가?

햇빛에 데미지를 입는 건 아닌 모양인데,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든 듯 했다.

─쿵쿵쿵!! 거인은 지가 막아놓은 출구로 달렸다. 도망칠 생각인가?

“어딜 도망가!!”

즉시 쫓았다. 놓치면 안 될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싸움터가 좁은 동굴이 되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좁은 곳에 냉기가 충만하면 얼어 뒤지는 거 순식간이다!

베로니카의 영창은 아직이다. 내가 쫓아야 한다.

─휘오오오오오오오!!!

그렇게 판단한 내가 첫 발을 내딛자 갑작스러운 돌풍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열대우림의 풀 냄새가 섞인 바람에 나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를 눈치챘다.

“씨발! 하강기류인가!!”

분화구에 찬 공기와 열대기후의 뜨거운 공기가 만나서 이 공간에 바람이 불어닥친 것이었다.

물리현상 말고도 마나의 흐름도 느껴졌다.

그렇겠지. 섬의 열기는 불꽃의 마나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거인의 냉기를 만드는 물의 마나와 부딪혀서 상쇄되며 이토록 거친 돌풍을 만든 것이었다.

티르시가 종종 쓰던 바람 마법처럼 앞을 가로막는 바람!

초인의 힘을 가지고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이러다간 놓치는데!’

작전대로라면 냉기를 없애서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고, 베로니카의 중력으로 억누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점프해서 중력을 받으며 놈의 척추에 킥을 날려주면 즉사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소리로 위치를 특정하는 것조차 어렵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

열대의 분화구에 부는 스콜(Squall)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냉기 덕분에 남아 있던 내 <구름 소환>의 수증기가 다이아몬드 더스트처럼 반짝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멍청하게 그것을 쳐다봤다가, 갑자기 뉴런을 스치는 깨달음에 숨을 삼켰다.

지구에서 보고 들은 하잘없는 지식이 사람의 몸으로 극복 못 할 자연현상 앞에 영감을 선사했다. 나는 마치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가 자연현상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두 손을 움켜쥐었다.

대류현상. 대류현상이다.

분자는 밀집된 곳에서 밀집되지 않은 곳으로,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

마나도 그러했다. 상반되는 마나는 부딪혀서 상쇄된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에서 그것은 일상다반사인 일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21세기의 지식을 떠올렸다.

고열과 냉기의 부딪힘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무산된다.

하지만 단순히 그걸로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태풍이란 고기압, 저기압, 난류, 열기와 냉기 등의 요인이 결합되었을 때 발생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던가.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직감대로 마나를 운용했다.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발상을 실현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그야말로 사칙연산밖에 모르는 아이가 고등 수학에 도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문을 손아귀에서 뭉개어 부쉈다.

까짓거 이론 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마법이라는 건 원래부터 술식과 술식을 조합해서 만드는 것이니까. 정말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자는 반대되는 속성을 같이 다룰 수 있지 않았던가!

내가 봤던 유니콘 흑마법사가 그랬고 망령도시의 지하유적이 그랬다.

가설이 증명돼 있다면, 남은 건 도전할 뿐!

나는 창을 놓고 의식해서 주문을 외웠다.

─화륵! 오른손에 불꽃이 피었다.

“<얼어붙는 손길>.”

─쩌적! 왼손에 냉기가 깃들었다.

두 손의 마나를 야수회귀의 출력에 이었다. 2배로 상승된 출력이 거칠게 부는 바람을 뎁히고, 식혔다. 눈을 감고 집중하면서 마법을 계속 더한다.

“<구름 소환>.”

증기의 압력이 더해지자 드디어 열기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적색의 뜨거운 증기와 청색의 찬 증기를 한 바퀴 돌리자, 작은 바람은 내가 힘을 더하지 않아도 저절로 속도를 올리며 몰아치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자연현상의 힘을 빌었기 때문일까. 돌개바람을 만드는 것까지는 내 부족한 실력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전혀 기뻐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지만 말이다.

‘씨, 발……!! 존나 어렵네……!!’

바람을 통제 안에 붙잡아 넣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루는 마법의 숙련도 차이가 문제가 되었다. 나는 헛돌면서 내 주위에서 벗어나려는 바람을 굳게 눌렀다.

무영창이 가능한 <타오르는 손길>에 비해서 <얼어붙는 손길>은 숙련도가 많이 모자랐다. <구름 소환>도 출력이 높은 마법이 아니기에 회전의 원심력이 높아지자 증기의 압력으로 바람을 가둬둘 수가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그냥 바람 마법만도 못한 기술이 된다!’

내 바람은 이 분화구에 부는 스콜에 잡아먹힐 것이었다,

도망치려는 거인에게 튈 시간만 쥐어줄 수는 없다!

그렇게 내가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별의 바람(Stjǫrnunnar Skjötari).】

중력이 바람을 가두었다.

“이건 또 재미있는 발상이로구나. 과연 나의 주인님이다.”

익숙한 마나다. 자유로운 주제에 품위가 있고, 어딘가 발에 족쇄를 채워진 듯한 바람! 그 족쇄가 풀려지면 어디까지고 제 마음 가는대로 불 듯한 바람이 내 마나를 감싸안았다.

“별을 이끄는 ᛏ(Teiwaz)의 룬은 승리를 기원하는 룬이기도 하지.”

나는 그리 말하며 내 등을 짚는 베로니카의 손길을 느꼈다.

“어디 마음 가는대로 해 보거라. 나도 그대의 시종으로서 한 손 보태마.”

호기롭게 웃는 베로니카. 멋진 조력이었다. 혼자서는 못 할 일도 둘이서라면 가능하다.

─키이이이잉!!

나는 마법의 출력을 올렸다.

술식을 통과한 나의 마나는 불과 물의 마나로 변하여 태극 문양을 그렸다.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포효했다. 마법에는 도움이 안 되는 구신의 마나도 1달 만에 산책을 나온 강아지처럼 천공에 부는 바람에 즐거워했다.

그렇게 회전하는 바람이 폭풍이 되었을 때, 나는 닫힌 문을 열듯이 중얼거렸다.

어디 먼 곳의 누군가가 마법에 이름을 내려준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절대천공영역(絕對天空領域).”

─후욱.

바람이 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리의 주변으로 지름 10미터 정도의 공간이 마치 하늘의 신전처럼 엄숙해졌다. 말 한 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자격을 요구받을 듯한 장엄한 공간이었다.

그런 영역 밖에서는 구름의 파도가 웅장하게 불었다.

마치 하늘에서 굽어본 태풍처럼 말이다.

그러한 감상에 착오는 없었다. 이 영역은 그야말로 작은 태풍의 눈이다. 내가 펼친 마법이 태풍이라는 자연현상을 재현한 것이이었다.

나는 손을 펼쳐서 창을 불렀다.

─휘릭.

바닥에 쓰러져 있던 창은 주인의 부름에 충실하게 따랐다. 손바닥에 안착한 창을 깃발처럼 하늘에 걸었다. 보고 있냐, 이 도이치 괴력난신의 망령아.

“집속.”

창에 태풍을 모았다.

솜사탕 기계의 실타래처럼 창날에 바람이 모여들자 거기에 새긴 ᚨ(Ansuz)의 룬이 바람을 금색으로 바꿨다.

아직 모자란 통제력을 베로니카의 마법이 보조했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우리는 마나의 흐름만으로 이미지를 공유한 것이었다.

그렇게 황금의 바람은 창날을 감싸며 낫의 형태를 갖췄다.

천공신 오딘은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으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신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폭풍을 몰아치며 사신처럼 생명을 수확하는 신.

나는 그 신위(神威)의 일부를, 나와 내가 쌓은 만남의 힘을 가지고 재현했다.

지혜를 얻고 짐승처럼 분노에 날뛰던 때와는 다르다. 지금은 분노에도 광기에도 잠식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낫을 휘두르며 포효했다.

“──오딘!!!! 당신의 짝퉁이 돌아왔소!!!!”

폭풍을 벼려낸 낫을 거칠게 휘둘렀다.

방향은 알지 못했지만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늘에서 사는 거인이 푸른 하늘로부터 도망쳐서 어디로 갈지는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으니까.

──서걱.

낫은 엄숙한 천공의 영역을 가르고, 스콜을 가르고, 거인이 살고자 하며 벌린 거리조차 갈랐다.

폭풍의 낫이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내 앞을 위아래로 쪼갠 것이었다.

“──G, giiiiiiiiieeeeeeeeq!!!!!!!!.”

바람에 부딪힌 거인은 허리가 반토막이 났다. 그 억세기가 강철보다 더했던 가죽이 스티로폼처럼 부러지자 남은 바람에 휘말린 상체가 피를 쏟아내며 720도 회전했다.

─철퍽!!

거인은 그렇게 노이즈가 돌아온 분화구에서 명을 다했다.

─콰르르르르르릉!!!

그리고, 위력이 절반도 감쇠되지 않은 회오리가 출구가 있는 절벽에 커다란 손톱 자국을 남겼다. 내가 깜빡하고 힘 조절을 잊은 탓이었다.

““아.””

우리는 벙쪄서 입을 벌렸다. 다음에 일어날 일이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우르르르르르!!

분화구의 절벽은 손톱 자국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절벽에 나 있던 출구는 존나 당연하게도 암반에 막혀버렸고 말이다.

나는 낫을 휘두른 자세대로 굳어버렸고, 베로니카는 입을 딱 벌리고 석상이 됐다.

“……출구, 다른 곳에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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