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던 입장에서 뭘 해 보려던 년이었으니까 나보다는 잘 알 것이다. 신좌라고 하는 새로운 키워드에 대해서도 기대해 볼 만 했다.
‘……여기서 할 일은 끝났군.’
질문 타임도 이걸로 끝이었다.
신좌에 대한 질문은 하느니만 못하다. 후계자 얘기를 듣고 나서도 저토록 반응이 희미하지 않은가. 선지자의 분신한테는 신좌나 후계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쪽은 예르나나 오딘의 기억을 찾는 게 빠르겠어.’
그리 생각한 나는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선지자님? 바이콘의 저주를 해주한다고 얘네들한테 라그나로그 시즌 2가 벌어지지는 않겠죠?】
【저와 후손들은 신족의 말예일 뿐, 신족은 아닙니다. 제가 봤던 파멸의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반복되지 않습니다.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겠죠.】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해주해 놨다가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당하면 나까지 멘탈이 터져버릴 것이니까.
2차 세계대전이나 3연벙이라는 역사의 분기점을 생각하면 안심하기는 이른 듯 했는데, 그래도 해주와 죽음이 하나의 시퀸스로 연결돼 있지는 않은 듯 했다.
그런 사실이 베로니카나 다른 바이콘들한테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제가 더 들어야 하거나, 알아두면 좋을 지식은 없고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중요한 지식은 지금 구두로 전한 것이 전부입니다.】
분신은 이제 할 말을 끝낸 모양.
따져보자면 고 퀼리티 자동응답기 같은 거고, 선지자도 저 분신에 저장 가능했던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는가 보다.
【결계 안에 수상할 정도로 못생긴 거인이 있던데,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시겠죠?】
【거인…….】
로딩 중. 로딩 중. 그런 느낌으로 생각하던 선지자의 분신은 고개를 저었다.
【관련 지식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뭐, 괜찮습니다.】
분신의 하드 디스크에도 없다면 별 수 없지.
아마 마법의 지식처럼 분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깔고 들어간 모양인데, 거인족의 생물계통 같은 사소한 잡지식까지 넣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5천년이나 지났다면 정보의 열화도 있을 수 있다.
알아볼 건 다 알아냈다. 정 뭣하면 다음에 다시 오지 뭐. 영화의 국룰처럼 우리가 나간다고 동굴이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니까.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누워 있던 베로니카를 두 팔로 안아들었다.
당연히 베로니카한테도 불 내성이 발라져 있었는데, 그래도 이 뜨겁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뉘여놓고 떠들던 차였기에 맘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위대한 가능성을 품은 혼돈의 총아시여. 부디 조심해서 돌아가시기를. 저는 언제나 여기에서 당신이 방문하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선지자의 분신은 공손하게 인사하고서 발치부터 빛의 가루로 변해갔다.
그렇게 분신의 영상이 사라지자 석비만 덩그러니 자리에 남았다.
방문하는 날을 기다린다니. 내가 아니어도 도와줄 사람이 올 때까지 앞으로 다시 5천년, 1만년이 지나도 계속 여기에 남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저 분신에 제대로 된 인격이 부여돼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질문이나 반응에 맞춰서 기억에 따른 정보를 내뱉는 영상.
나는 운명에 통수만 맞던 신화 속 예언자의 과거를 잠깐 슬픈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최소한의 예의로 목례만 해 두었다.
나는 지상에 올라와서야 베로니카를 깨웠다.
중간에 깨워서 같이 걸어가면 올 때보다 더 숨이 막힐 것 같아서였다. 계속 업고 가기 위해서 마나를 충전했기 때문에 나도 존나 지쳐버리고 말았다.
“……베로니카. 일어나.”
고민하다가 흔들어서 깨웠다.
수면을 부르는 룬의 마나는 벌써 거둔 뒤였기에 베로니카는 금방 눈을 떴다.
멍하니 푸른 하늘과 내 얼굴을 보다가, 예지를 부정당한 게 꿈이 아니었다는 걸 눈치챈 듯이 입술을 깨무는 베로니카. 그녀는 일어나서 중얼거렸다.
“그대가 마법으로 재워 주었나 보구나. 잘 해 주었다. 그대 덕분에 기분은 꽤 진정됐느니라.”
“……괜찮냐고 물어봐도 되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질문이었기에 베로니카도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조금 지쳤을 뿐이니. 그대가 집 주변의 골목길에서 싸늘하게 식은 바이콘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야. 그 농담, 하나도 안 웃겨.”
“후후후. 그렇더냐? 인간의 유머는 어렵군.”
내가 정색하고 말하자 베로니카는 뿔을 드러낸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튼 타거라. 일단은 이 분화구에서 나가자꾸나.”
룬을 외워서 새로 변신하는 베로니카. 나는 짐들 들고 그 등에 올라탔다.
한 달음에 날아오른 베로니카는 분화구를 넘어서 산의 정상에 착지했다. 이대로 하산하면 다른 파티원들이 기다리는 입구에 도착할 것이었다.
휘이이잉…….
그래도 우리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 고산지대에 부는 바람을 맞았다. 산이 고개 위에 중턱에 있었기에 멀리까지 섬의 풍경이 잘 보였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아름다운 섬이었다.
초록빛 정글에서 해안선의 모래사장, 지평선으로 변해가는 자연의 그라데이션은 인간이 만든 어지간한 예술보다 아름다웠다.
그래도 신이 빚은 신족의 미모에 비할 바는 아니다.
베로니카는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아름다운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를 띄웠다.
“그대여. 사실 나는 말이다. 그대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되묻자 베로니카는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도 그렇지 않으냐. 만약 그대가 서커스단에 잡혀 있던 나를 찾지 못했더라도, 그들의 재산을 처분하는 중에 나를 보러 왔을 것이니라. ‘진귀한 동물이 있는데 어쩌시겠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이야.”
“그건…… 그렇긴 하네.”
그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내가 받을 수 있는 ‘재산’으로 분류됐었다.
만약 우리가 서커스단을 해치울 때까지 만나지 못했더라도 서커스단에 잡혀 있던 베로니카는 헤이스벤트 경비병들이 발견해서 데려왔겠지.
그렇다면 나에게 반드시 얘기를 전했을 것이다.
바이콘이라는 희귀동물이 계속 날뛰고 있으니 한 번 보러 가 보라던가, 뭐 그렇게 말이다.
그랬으면 나는 아마 베로니카가 구금된 곳에 얼굴을 비췄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이콘을 상대로도 말이 통할 자신은 있었을 것이니까.
그런 뒤에는 바이콘의 언어로 성을 내는 그녀와 대화해서, 원래의 첫 만남과 닮은 절차를 밟게 되지 않았을까.
“다른 경우에도 그렇다. 내가 도중에 탈출했거나, 혹은 끝의 끝까지 만나지 못했어도 그대와 나는 엮일 처지였다.”
베로니카는 해안선을 보며 그리 말했다.
“그대는 나와 만나지 않았어도 티르시와 함께 성수의 숲에 갔겠지. 당연히 거기서 오우거에게 룬을 도둑맞았다면 놈을 쫓아갔을 것이니라.
그때 내가 없었다면 오우거가 성지의 마법진을 발동시켰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그대는 오우거를 쓰러트려도 성지의 동족들에게 포위당했을 것이고, 번역능력으로 대화를 나눠서 오해를 풀게 되지 않았겠느냐?”
이번에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서커스단의 보수금을 받은 이후에도, 끝까지 베로니카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치자.
그래도 나는 승급 시험에서 오우거 교수 새끼랑 마주쳐서 싸웠을 것 아닌가.
‘그 새끼는 구신의 마나를 흡수하러 다녔으니까 당연히 날 노렸을 거고.’
베로니카가 없으면 나는 이동마법진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준비를 하고 가려고 1~2시간만 지체했어도 오우거 새끼의 공간이동에 휘말겠지.
그렇게 성지에서 오우거와 싸우다가 어찌저찌 승리.
하지만 승리한 뒤에 몰려든 성지의 주민들에게 포위당하게 되는 판타지의 국룰 전개다.
오지에 숨어 살던 신비로운 종족과의 만남!
거기서 번역능력 빨로 바이콘들과 대화해서 오해를 풀고, 저번에 서커스단한테 잡혀 있던 바이콘의 얘기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베로니카와 인연이 이어지게 된다.
“또 있느니라. 로잔나와 동물들을 데려간 것은 로마니아의 집행관이라 했잖느냐? 당연히 그걸 따라서 팔려나간 나는 구매자를 찾는 자리에 올라갔을 것이니라.”
“그렇겠지. 로마니아의 옥션에 말이야.”
내년 봄에 찾아갈 옥션.
내가 베로니카의 처우를 경비병들한테 처우를 일임했다면, 그녀는 100% 옥션이 열릴 때까지 팔리지 않고 대기 상태로 기다리게 됐을 것이다.
‘희귀동물’인 바이콘을 그냥 땡처리할 리도 없잖은가.
고액에 팔아치울 수 있는 옥션이 열릴 때까지 어딘가에다 구금해 두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나는 지저의 탑에서 주운 엘릭서를 팔려고 옥션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내가 주인 찾기를 일임한 동물 중 하나’로서 베로니카를 보게 됐겠지.
‘바이콘의 성지에 갔었다면 당연히 베로니카를 구출하려고 했을 거고, 아예 쌩판 모르는 남이었어도 판매 취소를 요청했겠지.’
동물들의 판매금은 기부한다고 했지만 ‘재산’을 기증한 사람으로서 그 기증을 취소할 권한은 있다.
수수료랑 식비 같은 돈만 조금 내면 돌려받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내가 베로니카가 날뛰는 걸 보면서, 팔리든가~ 말든가~ 하고 하품이나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운명이란 말이 실감이 되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만나게 될 기로에 서 있었다.
한 번 스쳐지나가더라도 다시 한 번 만나서── 서로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나에게도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을 때── 그대를 만나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느니라.”
베로니카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그리 말했다.
“잘 짜여진 만남이며, 그렇게 되어야 했을 인연이다. 나는 내가 그대를 섬기기 위해서 예지자의 자리를 이은 것이라고 생각했느니라. 운명이라는 커다란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일족을 구원해 주실 신의 후계자님께 헌신하면 서로가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해도 좋다. 눈앞에 뚝 떨어진 운명의 상대에게 헌신하면서 꽃잎을 뿌려주고자 했지.”
“꽃잎?”
신족다운 은유였다. 베로니카는 검지를 까딱였다.
“그래, 꽃잎이다. 예언으로 약속된 성공과 신의 후계자로서 손에 넣을 영광을 그대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그대를 도우며 그대의 성공을 보좌하는 시종이 되고자 했지. 말하자면 그걸 대가로 일족의 구원을 하사받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예언을 의지해서 살아온 바이콘들한테는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이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그건 100% 정해진 미래였다.
만약 베로니카가 개입하든 말든, 내가 오딘의 후계자이며 신족의 말예를 구원할 ‘운명’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베로니카가 거리낌없이 내 미래에 손을 대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100% 이뤄질 미래인데 꼽사리 좀 껴도 괜찮을 것 아닌가. 게다가 베로니카가 개입하는 것으로 그러한 미래가 펼쳐질 운명일 수도 있으니까.
오딘이나 선지자가 예언에 대비하려다가 반대로 예언된 미래를 성사시켜 버리고 만 것처럼 말이다.
정해진 운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헌데 그대는 그런 운명을 앞에 두고 말했느니라. 자신의 미래를 어쩔 수 없이, 단순히 필요하다는 이유만 가지고 고를 수는 없다고.”
바다를 구경하던 베로니카가 나를 보았다. 나는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서 반론을 했다.
“거창하게 해석하긴. 그때 그건 그냥 결혼 얘기였는데?”
“같은 뜻이지 않으냐. 우리 솔직히 말하자꾸나. 그 상황, 그 타이밍에 그대가 ‘해야 할 일’이라며 나를 안고 아내로 삼았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다? 어땠을지는 모르지.”
시치미를 뗐지만 나도 부정은 못 하겠다.
내가 거기서 베로니카를 아내로 삼겠다고 말했으면 프랑이랑 다나는 알겠다고 승낙했을 것이며, 베로니카도 수긍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거절당했다. 그때 당시에는 순전히 부끄러운 기분 뿐이었지. 운명이라는 말에 넘어가서는 그대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았노라고 자책했느니라.”
“그때는, 이라. 그러면 지금은?”
“지금은 자책할 지언정 후회는 않는다.”
그리 단언한 베로니카는 나랑 눈을 마주쳤다.
“──운명이라는 말에 의미가 사라진 이 시대에서, 그대와 나는 운명 따위를 사랑의 구실로 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베로니카는 기지개를 한 번 피더니 웃었다.
“하아. 5천년도 지난 과거의 예언을 언제 이뤄지나 하고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니. 인간은 물론이고 바이콘으로서도 질 나쁜 농담이로다. 일족에게는 또 어찌 말해야 할지.”
“흐흐.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네. 안심했어.”
아, 베로니카가 저번에 이거랑 비슷한 말을 나한테 했던 것 같은데. 베로니카는 농담을 던지듯 짖궂게 눈을 반개했다.
“안심감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거라. 내가 상심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대라는 버팀목이 있어서이니라. 시종에게 의지받는 주인님이라고 어깨를 펴도 좋다.”
“그 놈의 주종계약도 까고 보니까 사기계약이었잖아. 너는 불만 없냐?”
진짜 구원자는 5천 년 전에 나가리가 됐다고 한다.
우리는 운명의 짝꿍 같은 게 아니었다는 모양이다. 여기서 베로니카가 잘 지내라며 손을 젓고 날아가버려도 막을 핑계는 없다.
나는 왠지 모르게 속이 쓰렸는데, 베로니카는 그런 나를 눈치 못 챈 것처럼 말했다.
“불만은 없다. 나는 벌써 그대를 섬기는 것이 즐거워져 버렸느니라. 예언이 거짓이며 미래를 보장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내가 그대의 옆에 있을 이유는 많다. 오히려 불경하게도 상황조차 잊을 만큼 기쁘기도 하구나.”
“기쁘다고?”
“후후. 왜, 나만 기쁜 것이더냐? 나와 그대는 운명에 짜여진 만남이 아니었다잖으냐.”
조금만 움직여도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는 베로니카.
“내가 그대를 보며 가슴이 뛰는 이유는 운명에 이끌려서가 아니었다. 그대가 나랑 있으면서 즐겁다고 말해줬던 것도 그렇다. 이 즐거움과 행복함은,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었다는 뜻이니라.“
베로니카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다시 넘겼다. 기대와 불안으로 게슴츠레하게 뜬 눈은 숨김없는 호감을 가득 품고 나를 쳐다봤다.
“……나의 그대여. 너무 몇 번씩이고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말거라?”
최근 하루가 머다 하고 보여주던── 사랑에 빠진 여성의 얼굴로 말이다.
‘……오늘 이전에도 베로니카가 은근히 어필을 해 온 적은 있었지.’
그때마다 나는 적당히 흘려넘겼었고 말이다.
나는 내가 그러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금 눈치를 챘다.
“있잖아. 베로니카. 나도 말이야. 사실은 후계자인가 뭔가 하는 얘기에 찝찝한 기분이었어.
신족의 후예를 구원할 운명이라는 것도 무지 뜬금없구만, 웬 유명한 신님의 분신이 나더러 신의 후계자라더라고? 당연히 와 개쩐다~ 하는 생각보다 미심쩍고 불편한 느낌이 컸지.”
굳이 말한 적 없었던 내 본심이었다.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그런데 꿈에서 갑자기 오딘이 나타나서는 너는 신이 될 수 있다! 따윌 말해봤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존나 내가 어디 NO.1 주신이 되고 싶은 프로 데미갓 지망생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그 도이치 괴력난신 년은 하필이면 우리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꿈에 개입하는 것에도 제약이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나왔던 거겠지. 그건 안다.
그런데 가족이 이세계의 신으로 변하는 광경은 내 기분을 존나 착잡하게 만들었다.
마치, 네게 어울리는 곳은 여기라는 소리를 들은 느낌이었으니까.
“운명이나 예언 같은 말을 들어도 실감은 안 들더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냥저냥 시키는 대로 따라갔을 뿐이라는 느낌도 들어. 그 운명이라는 게 내 처지랑도 밀접한 일이었고, 너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까.”
벌써 다 결정 난 운명이라는데 내가 뭐 어쩌겠는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내 할 일이나 하다 보면 뭐가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말았지.
베로니카는 나를 과대평가했지만, 사실 나도 그녀랑 크게 다를 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뭐야? 딱히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너랑 내가 운명으로 엮인 것도 아니래. 우리는 그냥 여기서 잘 지내라고 헤어져서 다시는 안 만나도 이상할 게 없는 사이인 거야.”
내 말에 베로니카가 무슨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처럼 쇼크를 받은 듯 했기에, 나는 뜸 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