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생각을 해 봤어. 만약 네가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면서 다른 주인님이나 구세주를 찾으러 가면 어떨까 하고. 그랬더니──”
“……그랬더니?”
“배알이 꼴려서 죽을 것 같더라고.”
그게 이세계 꼴마초 노르드의 이기적인 본심이었다.
옹졸맞다는 거 안다.
추한 질투심이라는 말도 맞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
없어지면 돌아버릴 것 같은 상대를 우정이나 비지니스 관계라고 부르는 건 현실 부정이다.
질투하고 추하게 굴면서도 쟁취해 내는 게 사랑이다.
내가 고자나 눈치 없는 병신 새끼도 아닌데, 다 눈치 채고 모르는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섬에 오기 전에도 말했지 않은가.
아닌 척 했지만 나도 이 녀석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고 말이다.
이제까지는 프랑과 다나를 생각해서 선을 그었던 건데,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라고?
‘미친 소리.’
이 녀석이 은근히 나를 좋아한다는 어필을 해 와도 전부 흘러넘겼던 나다.
그럴 때마다 미안하고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꼴마초 하렘충의 길을 걷는 내가, 서로 마음이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그냥 물러서라는 말인가?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꼴마초답지 않았다.
우리 아내들도 진즉에 다 알아차리고 때 되면 데려오겠거니 하는 눈치다.
하긴, 같이 지내면서 그렇게 자주 보는데 어떻게 못 알아보겠는가. 베로니카는 하루에도 기본 5~6번씩 나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안 그런 척 고개를 돌리고 그러는데.
망설일 이유? 어디에도 없다.
천하의 못된 씹새라고 욕할 거라면 해라.
욕 먹을 각오는 다나를 품었을 때 벌써 했었다.
똑같은 문제를 두고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쓸데없이 고민하는 것은 마초이즘에 있어서는 안 될 일!
이미 결론을 내린 일을 번복해 가며 고민하는 것은 실수를 저지른 다음에 해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베로니카에게 내 진심을 전하는 것은 절대 실수가 아니었다.
“흐, 흐응……. 그렇더냐? 내가 그대의 곁을 떠나면 질투가 나는 것이더냐?”
베로니카는 좀 놀란 것처럼 눈을 껌뻑거리더니 입가가 풀어졌다. 참지 못할 웃음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질투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돼. 니가 나더러 ‘아, 누군가 했더니 예전 주인님 아닌가. 여기 이 분이 진짜 주인님이다.’ 같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속에 천불이 나서 뒤져버리게 생겼다고.”
“어, 어리석은 것! 그따위 미래, 상상도 하지 말아라! 잠깐 상상한 것만 해도 끔찍하다!”
베로니카는 자기가 옥션에서 팔려나간다는 말을 할 때보다 더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돼도 이상하지 않아. 우리 관계를 보장해 줄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너도 나도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입장이야. 그런 우리를 연결해 줬던 게 예언이나 운명이라는 거창한 거였고 말이야.”
근데 베로니카도 말했듯, 이제 그 예언이니 운명이라는 건 핑계로 못 쓰게 됐다.
애시당초 핑계란 게 무엇인가.
핑계란 이유를 위한 이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같이 있고 싶지만 그럴 만한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는가.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야지.’
우리가 같이 있어야 할 이유를 말이다.
“──베로니카. 내 옆에 있어라.”
나는 밀어붙이듯 말하며 베로니카와 이마를 맞댔다. 나랑 얼굴이 가까워지자 베로니카는 숫처녀답게 새빨개져서는 입만 우물거렸다.
“당사자도 못 믿는 예언 따위는 잊어버려. 말했지? 일족의 저주라면 내가 풀어준다고.
봐. 반 년도 안 됐는데 벌써 아무도 모르던 해주 방법까지 알아냈어. 남은 건 내가 한가한 신을 찾아내서 멱살을 잡고 협박하든가, 오딘의 후계자인지 뭔지가 돼 버리면 돼.”
나는 당연한 일을 말하듯 그리 단언했다.
왜냐. 꼴마초는 우선 맹세부터 하고 실천에 옮기기 때문에.
자고로 마초이즘이란 상남자의 맹세와 실천으로 이루어진 신념인 것이다.
“……내,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해 주면 되겠느냐?”
베로니카는 부끄러운 듯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느니라. 그대에게 받은 은혜를 돌려주기 버겁다는 뜻이다. 그대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더냐?”
“아무 것도. 그냥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우리의 관계와, 내가 너를 돕는 이유가 조금 바뀔 뿐이야.”
나는 오딘의 후계자 후보이며, 고고학자다. 언젠가 사회에 암약하는 씹새끼들과 맞닥뜨릴 처지라는 것이다.
이세계에서 군림하는 양심 터진 범죄자 새끼들은 내 안전과 꿈에 존나 악영향을 끼치겠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내가 차원을 이동하는 방법을 찾고자 과거의 마법이나 역사를 찾게 되면 어떻겠는가.
대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를 이세계 수어사이드 스쿼드 새끼들!
그 새끼들이 나랑 내 주변 사람들을 노리고 덤벼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미래 예상 쯤은 예지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다.
어차피 맞닥뜨릴 미래 아닌가. 거기에 손 잡고 따라와 줄 베로니카는 보수도 대가도 미래를 저당잡혀서 지불하는 셈이었다.
내 트러블 체질에 10년 정도 휘말려 봐라. 베로니카도 나한테 코가 꿰인 걸 후회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부담이니 죄책감이니, 그런 성실한 거 생각하고 망설일 필요 없어. 나는 내 여자들한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게 해 주고 싶거든.”
왜냐하면 그게 하렘충 꼴마초의 의무니까.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라고 했구나?”
나는 베로니카의 허리를 잡아서 도망치지 못하게 했는데, 베로니카는 도망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나의 그대여. 이건 비밀이다만, 사실 나는 내 저주를 극복하는 법을 한 가지 알고 있느니라.”
“……그래? 그거 참 놀라운걸. 어떤 방법일지 상상도 안 가.”
“으, 음. 심히 부끄럽고 남사스럽기에, 이 세상에서 오직 그대만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지.”
우리는 상대의 허리를 얼싸안고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체를 했다. 미리 합을 맞춰둔 연극을 펼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미소지었다.
“나도 저주를 푸는 방법을 하나 아는데, 해 볼래? 내 고향에서는 유명한 마법이야.”
“……호, 호오. 유명한 방법이라고 하면 안 해보지 않을 수 없구나. 어떤 마법이더냐?”
“──이런 마법이지.”
나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안으며 입술을 맞췄다.
선학들께서 이르길, 예로부터 저주란 사랑을 담은 키스로 풀어주는 게 예의라 하셨다.
뭐, 남녀의 역할은 반대였지만 말이다.
우리는 하산해서 파티원들한테로 돌아왔다.
부채질 내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프랑은 다나한테 커다란 이파리로 바람을 부쳐주고 있었다.
“노르? 그 가죽은 웬 거야? 새 거 같은데…….”
그러다가 내가 매고 내려온 가죽을 보고 깜짝 놀라는 프랑.
내가 짐을 챙기면서 가져온 거인의 파란 가죽은 장롱을 짊어진 것처럼 커다랬다. 놀랄 수밖에 없겠지. 얼음 기둥과 정열적으로 포옹하던 라리루라도 눈을 크게 떴다.
“선배? 혹시 안에 몬스터 같은 거 있었어요?”
“있었지. 더럽게 쎈 놈이. 풀컨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역대 탑 5에 들 것 같더라.”
다나는 그 말에 눈쌀을 찌푸리더니 나한테 이파리로 부채질을 했다. 아까 막 불 내성이 해제된 참이라서 시원하고 좋았다.
“존나 이 남편 새끼는 눈만 떼면 누구랑 싸우고 돌아오네. 임신도 안 했는데 벌써 철부지 골목대장을 키우는 기분이야.”
“시발. 이젠 다친 데는 없냐는 질문도 없군. 아내님아, 니 남편에 대한 애정이 떨어진 거 아니냐?”
“우리 멋진 남편님이 어디 가서 쳐맞고 올 놈이 아니라고 믿어서 그런 거거든? 뭣보다 니 성격에 다쳤으면 테에엥~ 다나 마망~ 이 지랄 하면서 나한테 안겼겠지.”
“테에엥~. 프랑 마망~.”
“야 이 시발럼아.”
다나를 피해서 프랑한테 안겼다.
존나 더우니까 프랑이 내 포옹을 싫어하지 않도록 <얼어붙는 손길>을 영창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에는 스킨십도 눈치껏 해야 하는 거에요.
“헤헤. 안 다쳤다니 다행이다. 어떤 몬스터였길래 그래?”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본 생물들 중에서 제일로 못 생긴 거인이더라. 크기는 거인 치고 작았는데, 뭐 진짜로 중요한 소식은 따로 있어. 안 그러냐, 베로니카?”
내가 프랑의 품에서 나오며 그리 말하자, 베로니카는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하다. 상당히 중대한 소식이니라. 나의 그대여. 설명은 내가 하면 되겠느냐?”
“아냐. 내가 할게.”
그리 말한 나는 아내들+라리루라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결혼했어요.”
“……주인님. 내가 말한 건 선지자님의 분신 얘기였다만.”
아, 그랬어?
오늘도 반복되는 사후보고 타임이다.
하도 많이 하다 보니까 중요한 정보만 알뜰하게 뽑아서 전하는 요령이 생긴 나였는데, 이번에는 대충 설명하고 넘어갈 내용이 아니었다.
안에 들어감 → 거인 잡아서 가죽 뜯어옴까지는 일사천리다.
가장 중요한 부분─내 새로운 필살기가 얼마나 깐지났고, 거인의 가죽이 얼마나 쓸모 있을 듯 한지─만 설명하고 대충 스킵했다.
근데 선지자의 분신한테 스포일러 당함 → 베로니카랑도 결혼하기로 함이라는 내용은 스킵하면 안 됐다.
그건 듣는 청중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흐응. 생각보다 빨랐네.”
“그러게. 나두 조금 더 걸릴 줄 알았어.”
내가 나무 그늘에서 썰풀이를 마치자 다나는 그런 심심한 리액션을 취했다. 프랑도 반응은 비슷했기에 베로니카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로구나. 솔직히 인정 못 받고 마굿간에서 자게 될 각오도 했거늘.”
“있잖니, 베로니카야. 니가 나랑 결혼했다가 그렇게 되면 난 뭐하는 씹새끼가 되냐?”
“후후. 주인님은 1년에 1번만 찾아와 줘도 좋다. 나는 우리 주인님이 와 계셨던 날을 떠올리면서 매일밤 마굿간의 달빛을 벗 삼아 기다릴 있을 자신이 있느니라!”
“그 이상할 정도로 튼튼한 멘탈 과시는 이제 관두자?”
존나 가축용 말도 그것보다는 자유롭겠다. 나는 프랑이랑 다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고맙다고 말하면 실례야?”
“으응~. 실례는 아닌데, 뭐라고 대답하기 곤란할 거야.”
“내 말이. 너 우리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아니, 잘못한 건 없지.”
꼴마초로서 숙달된 나도 이런 과정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래도 이 타이밍에 죄 지은 것처럼 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고? 내가 지금 죄인처럼 눈치를 보면 우리 베로니카가 뭐가 되겠는가.
아내들한테 미안할 거라면 거기서 베로니카를 받아들이면 안 됐지.
“고맙구나, 둘 다. 허락해 줘서.”
베로니카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자 다나는 프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뭘 허락 씩이나. 특히 나는 너한테 사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잖아.”
내게 프로포즈 연발 쑈를 관두라고 할 때도 그렇고, 어디까지나 둘째 부인으로서 선을 지키려는 우리 눈나시다.
물론 나는 울 아내들이 평등한 입장으로 있었으면 하는데, 아내들이 적당한 선을 지키려고 한다면 내 사상을 강요하는 것도 못할 짓 아니겠는가.
프랑이 내게 현모양처로 있으려는 것처럼, 아내들한테도 자기만의 룰이 있는 걸지도 모르고 말이다.
“다나.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단지 프랑은 그게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것처럼 입술을 一자로 만들었다.
프랑은 남편인 내 결혼관을 존중하며 남한테 우대받는 걸 꺼려하는 성격이었다. 아마 다나의 양보를 좋게 받아들이긴 힘든 모양이다.
“아, 우리끼리 했던 얘기는 안 잊었으니까 걱정 마. 불만이 있으면 말할 거야. 내가 언제 우리 남편 욕하는 거 꾹 참은 적 있었어?”
100% 팩트만 내뱉으면서 다나는 킥킥거렸다.
근데 우리끼리 했던 얘기란 건 뭐야. 내가 없는 곳에서 울 아내들=노르드 하렘 구성원끼리 뭔가 비밀 협약이라도 맺었던 걸까.
“뭐에요 시발. 나 빼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실토해. 얼른.”
“뭐래. 여자들 얘기에 털 숭숭 난 놈이 끼는 거 아냐.”
다나한테 까인 나는 엄마를 찾는 애처럼 프랑을 쳐다봤는데, 그 프랑은 곤란한 것처럼 웃어서 얼버무렸다.
“그냥 이것저것. 노르는 잡담일 뿐이니까 신경 안 써두 돼.”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아내들 없는 곳에서 뭘 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눈나는 쥬지 푹푹 해 주기만 해도 72시간 연속 심문을 받은 것처럼 솔직해지지 않던가.
프랑이랑은 거짓말 안 하기로 했고, 다나는 불만이 생기는대로 말할 성격이니까 크게 걱정은 없었다.
“남편님아. 니 지금 속으로 내 욕한 거 다 알아. 용서해 줄 테니까 손 좀 내놔 봐. 더워 뒤지겠어.”
들켰네 시발. 사죄의 수족냉증 ON이다.
다나의 목덜미와 턱선에 냉 찜질을 해 주는 나. 프랑은 베로니카한테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이제 군식구가 아니구 진짜 한가족이네. 나는 잘 됐다구 생각해. 조금 기쁘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전혀. 나도 기쁘구나. 프랑, 다나. 부족한 몸이지만 부디 앞으로 잘 부탁한다.”
진심으로 기쁘게 웃으며 베로니카는 공손한 인사를 했다. 두 사람도 약간 장난끼를 발휘했는지 격식 차린 인사로 대답해줬다.
“……헌데 라리루라야. 언제까지 거기 있으려고 그러느냐.”
그렇게 우리 집 새 식구로 원만하게 안착한 베로니카는 좀 거북한 것처럼 말했다.
열대우림의 나무에 올라가서 이파리 속에 표범처럼 숨어 있는 라리루라. 수풀 사이로 반개한 눈빛이 우중충했다.
“뭐가요~? 저는 그냥 어느 절조 없는 키타이 모험가 씨의 곁에 있다간 덮쳐질 것 같아서 도망 나온 건데요~?”
“야. 베로니카한테는 아직 키스밖에 안 했거든?”
절조라는 말은 내 안에 남은 언데드 유교 드래곤을 부활시키는 워딩이었기에 나는 그만 그렇게 반박하고 말았다.
“저도 첫 키스는 아직인데요~? 지금 발언은 선배가 저의 입술을 호시탐탐 노리고 계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버려도 되나요~?”
라리루라는 핫 커피용 빨대로 물을 쪽쪽 마시는 것처럼 입술을 샐쭉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