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6/1,009)

쿠르르르르르…….

멧돌이 돌아가는 듯한 소음을 내면서, 벽의 기둥에 계단이 나타났다.

【……제기랄. 미치겠군.】

조이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뇌까렸다.

벽이 움직여 계단이 나타나는 모습이 장엄해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그가 통탄하는 이유는, 이런 계단의 존재 자체가 투스타스 상회의 치부와 죄를 긍정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쿠르르르릉.

우리는 벽면에 생겨난 비밀 계단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여기가 장부가 있는 곳이지 않겠느냐?】

【아직 모르지. 창고인지 탈출구인지는 가 봐야 알 걸.】

다나는 입구를 힐끔거리면서 텔레파시로 대답했다. 소리가 새어나갈 리 없다는 걸 알아도 저렇게 묵직한 소리가 나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조사할게.】

짤막하게 말한 프랑이 통로의 함정 등을 확인해가면서 그 안으로 향했다.

계단은 금방 끝났다. 약간 반지하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함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기에 통로 끝에 도착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막다른 방이 나오자 라리루라는 내부를 보며 중얼거렸다.

“빙고네요.”

반지하 단칸방에는 빽빽하게 채운 책장과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나는 프랑의 GO 사인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서류 한 묶음을 집어들었다. 암호로 적힌 서류다. 하지만 액셀 표처럼 생겨먹은 서류는 어딜 어떻게 봐도 장부일 듯 했다.

【생각보다 허술하군.】

마나를 쓰지 않는 기계장치 비밀 통로라.

영감이나 탐지능력에만 의존하는 침입자라면 못 찾을 것 같기는 했다. 서류를 몇 장 넘긴 라리루라가 말했다.

“전부 암호로 돼 있네요. 대장이 나설 차례에요.”

……대장?

조이드가 있어서 호칭을 바꾼 거겠지. 그래도 조금 싱숭생숭한 느낌이었다.

아니, ‘당신’이나 ‘너’로 불리는 것보다는 나은가? 그딴 생각이나 하던 나는 가면 위로 이마를 두들겼다.

‘정신 차리자.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진지하게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이드는 점심 시간이 20분 남은 회사원처럼 초조해 했다.

【형씨. 암호를 여기서 해석할 생각은 아니겠지? 장부 양이 만만치가 않수. 가장 최신 것, 가장 옛날 것, 그 중간 것으로 몇 개씩만 챙겨서……】

조이드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내가 번역능력으로 해석한 서류를 구분짓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 아아. 그렇군, 그랬어. 암호의 해석법도 조사해 온 거야. 그렇지?】

【네. 맞습니다.】

이성적인 추리를 하는 조이드. 머리를 쓰기도 바빴던 나는 대충 대답하면서 텔레파시를 쏘았다.

【즉효성을 내는 숯 가루의 배합 비율 실험부터 뒷사회와 거래한 기록까지 있군요. 이거 조금 이상한데요.】

【이상해? 어디가 말이냐.】

【보안이 너무 허술해. 범죄의 기록이 전부 여기 있으면 통로에도 함정이나 경보기 정도는 깔아놨어야지.】

【……응. 여기, 단순한 창고가 아니야.】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듣는 듯 하던 프랑이 말했다.

우리 프랑은 계속 반지하 단칸방을 조사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마── 비상탈출로야.】

이젠 도적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해지는 경이로운 손재주가 또다시 뭔가를 발견한 듯 멈췄다. 베로니카는 이번에도 회수했던 룬 스톤을 다시 깔았다.

【방음 결계를 설치했다. 열어도 되느니라.】

─철컥. 말보다 행동으로 대답한 프랑.

그런데 이번에는 거창한 입구가 열린 게 아니었다. 나라면 허리를 숙여도 갑갑할 듯한 작은 통로가 구석에 열렸을 뿐이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몸이 작은 프랑한테도 좁을 것 같은 그 통로!

그 통로는 뒤에서 마법이나 화살을 쏘지 못하도록 굽이치며 여러 번의 커브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중얼거렸다.

【드워프 사이즈니까 딱 맞겠군. 조이드 씨?】

【……형이라면 통과할 수 있겠어.】

그러시댄다. 드워프 비율 75% 혼혈은 남다르시군.

‘……탈출구와 장부 위치를 같은 곳에 뒀다 이거지?’

광오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배치였다. 장부를 훔친 도둑이 편하게 빠져나가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저 통로로는 못 나간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어.’

대충 봐도 탈출구는 커브가 많았다. 벽에 함정을 설치할 빈 공간이 많다는 뜻이다.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고 소음이 날 수도 있는 곳이니만큼 저기로 도망치는 건 하책이다.

‘뭣보다 아직 상회장 뚝배기를 깨주지도 못했잖아.’

장부를 챙겨가는 건 뒷처리를 위해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개새끼를 줘패버리는 거였다.

여기서 후퇴하는 건 고깃집에서 양념갈비에는 손도 안 대고 동치미만 원샷 때리고 계산하는 짓이나 다름이 없다.

【통로 안쪽에 함정을 깔아두겠다. 상회장이 이곳으로 도망간다면 자신이 모르는 함정을 밟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셈이 되겠지.】

그리 말한 베로니카가 눈치를 줬다. 나는 장부가 진품이란 것만 확인하고 입구를 가리켰다.

【조이드 씨. 저희는 나가서 바깥을 경계하죠. 지하 방이니 적들이 저희를 눈치채고 독가스 등을 채워넣으면 곤란합니다.】

【알겠수다.】

나랑 조이드, 라리루라는 비밀 계단이 있던 방으로 나왔다.

물론 지금 말한 얘기는 핑계다. 진짜 이유는 공간 마법이 걸린 석판에 장부를 넣거나 하는 장면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그를 배려해서 여기까지 데려왔지만, 나중 일을 생각하면 적당히 모르고 넘어가는 게 양자(兩者)에게 이로운 일일 것이니까.

아무도 없는 방에서 금발 태닝 양아치는 한숨을 쉬었다.

【제이드 씨?】

【아니, 별 거 아니요. 그냥…… 여기가 내가 아는 건물이 맞는지, 문득 회의감이 들어서 그랬수다.】

가면을 쓴 느낌이 어색한 것처럼 조이드는 턱 밑을 긁었다.

【형씨네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내가 이곳을 떠날 때만 해도 형님은 진짜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수. 돈에 욕심이 많았어도 그건 장인들에게 그만큼 보수를 돌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고.】

그는 회한에 젖은 눈으로 방의 벽을 한 바퀴 돌아봤다.

【그런데 그랬던 형님이, 내가 세상 물정을 몰랐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가족에게 독을 팔아치웠다는군. 거기다가 그 돈으로 자기 안위만을 위한 쥐구멍까지 파서 말이야.】

다음으로는 작은 소리로 그런 말을 내뱉는 조이드였다.

육성으로 말한 건 그만큼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팔짱을 꼈다.

【딱하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위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쇼. 나는 부외자니까. ……앗싸리 나도 개새끼였으면 이런 개 같은 기분은 안 들었을까.】

【그건 생각해봤자 후회만 남는 가정이군요.】

그리 주워섬긴 나는 마나를 끌어올려서 술식을 구축했다.

【그보다, 손님입니다. 싸울 준비나 하세요.】

【──뭐요?】

조이드가 얼타든 말든 나는 내 기감에 걸린 기척을 겨눠서 <번개의 화살>을 쐈다.

─피피피핑!

딱 1초 늦게 라리루라도 마나의 실을 당겼다. 라리루라는 내가 마법을 발동하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호사격을 발사한 것이다.

그만큼 신뢰받는 건 기쁜 일이긴 했는데, 이번에는 아마도 실수였던 듯 했다.

【거울이여! 허상을 비추어라!】

<마법>과 <번개>의 화살은 입구까지 쏜살같이 날아갔다가, 그 속도 그대로 우리한테로 날아왔다. 거울에 마치 반사된 것처럼 말이다.

‘쓰벌.’

창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야수회귀의 손톱을 세웠다.

─카가가강! 닥쳐오는 불똥을 튕겨내서 몸을 지켰다. 전기 구슬은 내가 마나를 끊자마자 사라졌기에 괜찮았다. 조이드나 라리루라도 알아서 피하거나 막은 듯 했다.

하지만 조이드는 오히려 화살에 맞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처럼 외쳤다.

【혀, 형님!!】

【──형님이니 부외자니, 잘도 그런 뻔뻔한 소리가 나오는구나. 조이드.】

야음에 숨어 있던 드워프는 갑옷을 절그럭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쥐새끼를 대동하고 나타났으니 더 이상 너는 이 일의 부외자일 수가 없으며, 나를 배신했으니 이제는 형제조차 아니다.】

그 드워프는 새까만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간지 나게 생긴 갑옷이었다. 그래도 만약 누군가가 나한테 저 새끼를 작은 골렘이라고 소개했다면 그럭구나 하고 속아넘어갔을 것처럼 두꺼웠다.

그런 갑옷이랑 안 어울리게 망치와 큰 방패는 좆빠지게 광 낸 듯한 은색이었다.

저 거울 방패가 아까 우리의 마법을 반사한 것이었다.

【크하하하!! 노땅 말 존나 신랄하게 하네!!】

그리 말한 것은 드워프가 대동하고 온 젊은 남자였다.

철가면에 로브를 쓴 새끼다. 확실한 특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이 흐릿했는데, 복장만 보면 저 새끼도 우리랑 파티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우리랑 친해지려면 우선 그 복장이 자신의 취향인지 직장의 유니폼인지부터 불어야겠지만 말이다.

【영차. 그래서, 노땅. 어쩔 거야? 그래도 동생이라며. 걍 죽여버려도 돼?】

철가면남은 상자 하나를 골라서 거기에 쪼그려앉았다.

그 무심한 질문에 조이드는 굳어버렸다. 하지만 갑옷을 입은 드워프── 상회장 제이드 투스타스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망치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질문했다.

【나도 하나 묻자. 니들, 우리가 온 건 어떻게 알았냐?】

【내가 감이 좋거든. 댁들도 소리는 잘 숨겼지만, 구신의…… 룬의 마나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대?】

0.1초만에 대답한 철가면남은 목 뒤를 벅벅 긁었다.

【그것도 노땅이 절대 출입 금지로 지정했다던 창고에서 말이야. 안 그래도 일을 맡긴 멍청이들이 실패했다기도 했고, 어떤 쥐새끼인가 해서 왔더니만──】

그리 말하고서 나를 쳐다보는 철가면. 가면의 슬릿에서 엿보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쥐 치고는 쬐까 큰데 그래? 잡다가 물리면 손가락 1, 2개로는 안 끝나겠어.】

그 말에 나는 코로 웃었다. 사실 나와 그 새끼는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에 아까 전부터 외야를 냅두고 우리끼리 견제와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제이드 투스타스!! 나를 동생으로 여기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다!! 대신 내 질문에 대답해라!!】

우리가 그러고 있자 드워프 혼혈 형제도 격정을 교환하며 고함을 쳐댔다.

나는 무심코 잠깐 그쪽에 시선이 팔렸다가 실수한 줄 알고 얼른 경계심을 높였는데, 저 새끼는 아예 고개까지 돌려가며 그 얘기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들이 말한 것이 사실이냐!! 독극물을 염료로 속여서 돈벌이 수단으로 썼나?! 정녕 네가 돈을 위해서 악마에게 양심을 팔았느냐는 말이다!!】

【그래. 뭐가 문제지?】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조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후회, 분노, 슬픔이라는 3번의 변화를 보이며 여러 감정이 섞인 얼굴로 정착했다.

【왜냐!! 왜 그딴 짓을 했어!! 그까짓 푼돈 때문이냐?! 내가 이 건물을 박차고 나갔을 때의 문답이 이런 뜻이었나?! 나를 떠나보내던 그 날에도 사람들에게 독을 팔고 있었느냐!!】

【……조이드야. 이제는 나와 피가 섞인 유일한 동족아. 나 제이드 투스타스는 네가 젖병을 떼기도 전에 주판을 두들기는 법을 배웠단다.】

조이드보다 10살 이상 연상인 제이드는 자기 무기를 높이 들었다.

【보아라. 이게 황금시대의 유물이다. 그때의 장인들이 만들었던 우리 니다벨리르의 무구! 헌데 지금의 드워프들은 어떻더냐? 돈과 안락함만을 쫓아서 기술을 연찬하지조차 않지.】

【그래서 망치겠다고?! 니다벨리르를 분노에 점철된 나라로 만들겠다고?!】

【그 반대다. 가마 상수리나무의 숯이란 선별이다.】

그는 자기 몸을 다 가릴 정도의 방패를 내밀었다.

【신대의 명맥을 잇는 상수리나무── 떡갈나무의 분진은 사람을 짐승으로 되돌린다. 그 원시적인 분노에서도 자신을 유지하게 만드는 신념과 이성을 가진 자만이, 참된 장인이며 진정한 드워프인 것이다!】

미친놈.

그리 생각한 나는 어이가 없어서 긴장이 풀리지 않게 존나 고생해야만 했다.

저 개똥철학이 이세계 과학에 근거했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절대 보통 미친 소리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나는 그 묵묵한 광기를 보고 눈치를 깠다.

‘이 또라이 새끼, 자기도 약 했구만.’

숯가루 쳐먹는 약쟁이 드워프인가. 별 미친 놈도 다 있군.

말을 잃어버린 조이드를 보며 낄낄대던 가면남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아, 이상한 착각은 마라? 난 저 노땅 얘기에 찬성 안 해. 재밌는 생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럼 왜 협력하지?】

저 새끼의 말뽄새는 꼭 영화관에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한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어서 역겹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내 물음에 가면남은 후드를 벗고 머리를 긁었다.

【어, 뜻은 안 맞아도 목적이 맞으니까?】

【그러냐. 잘 알았다. 저 놈은 그냥 미친 새끼고, 너는 그냥 개새끼다.】

나는 손바닥 안의 태양을 띄우고 뭉갰다. 가면남은 재밌는 얘기도 아닌데 배를 붙잡고 웃어제꼈다.

【크하하하!! 그렇네!! 미친 짓을 제정신으로 하니까, 나는 개새끼겠구나!! 이 아저씨 꽤 유머 감각이 있네!!】

유머 감각은 지랄이. 범죄자 새끼한테 듣고 싶은 건 유언 뿐이었다.

나처럼 개소리에 넋이 나가서 말이 없던 조이드가 말했다.

【진심이냐, 제이드? 너. 진심으로 그딴 생각을 20년 동안 실천해 온 거야?】

【그게 네 단점이다, 조이드. 너는 위기를 짐작하는 직감은 있는데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 상회의 방향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갔으면 끝까지 돌아오질 말았어야지.】

투구를 쓴 드워프는 조이드에게 말하다가 나를 쳐다봤다.

【고향에서 도망쳐서 한다는 게 기껏 해야 방랑자 흉내에, 길드의 멍청이들의 심부름이더냐? 하다하다 이제는 저렇게 알량한 힘만 믿고 까부는 놈들을 예까지 데려오다니.】

나는 눈을 반개했다.

저기 쪼그려 앉아 있는 개새끼가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몰랐기에─그리고 게르마니아 어를 모르는 라리루라에게 텔레파시로 상황을 설명해야 했기에─ 지금까지는 말을 줄였었다.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 할 얘기였다. 나는 투스타스 형제의 짝짜꿍이 끝나자 질문을 꺼냈다.

【제이드 투스타스. 네 논리대로라면 니새끼가 뿌린 염료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니다벨리르 국민들은? 그러든 말든 넌 상관 없다는 얘기냐?】

가마 상수리나무 숯으로 염색한 검은 투구가 날 쳐다봤다.

【그렇다. 자기 분노조차 다루지 못하는 자가, 뛰어난 기술, 뛰어난 혈맥을 미래로 계승할 수 있겠는가.】

【인간족이나 다른 종족은? 하다 못해 동물은? 그들은 네 논지랑은 무관할 텐데.】

【그것을 네가 묻는 건가? 뱃속에 소름 끼칠 정도의 분노를 품고도, 그 분노의 대상에게 눈썹 하나 깜짝 않고 말을 거는 네가?】

역시 눈치챘나. 하긴, 나도 알았는데 저들이라고 모를까.

조이드는 확실히 자기평가와는 달리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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