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의 질문이었다. 대답은 베로니카가 해 주었다.
“일종의 관용구다. <인간(Hominum)>이면서 <신(Deus)>인 존재를 가리키지. 신이 된 인간. 인간이 된 신.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뜻을 상상할 수 있다만, 그 자들은 전자의 뜻으로 쓴 표현일 것이다.”
신이 된 인간. 인간이면서 신인 존재.
그래서 인신(人神).
“야, 베로니카. <인신>이라는 말은 그거 아니야? 나르메르-나일의 통치자들. 그걸 로마니아 어로 번역한 단어잖아.”
다나는 치료 마법의 손길로 내 상처를 훑다가 질문했다.
눈을 끔뻑거리던 베로니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나르메르-나일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것이 적구나. 내가 아는 인간의 지식은 거의 로마니아와 게르마니아에 편중되어 있느니라.”
그건 그렇겠지. 베로니카는 저주를 풀기 위해서 인간족의 세상을 여행했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타종족과 대화도 할 수 없는 그녀가 이만큼이나 아는 게 대단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아앗! 저요! 저 알아요! 파라오(p r â) 얘기죠?”
그때 라리루라가 거수했다.
“나르메르-나일은 신권정치국가라서 공연하기 전에 반드시 종교관에 대해서 알아야 했거든요! 단장님이 저한테는 특히 정성을 들여서 알려 주셨답니다?”
“선배는 조용히 하세욧!”
발바닥 주무르지 마 시발.
내 발을 괴롭히는 라리루라. 프랑은 고개를 모로 꼬았다.
“파라오 님……? 들어는 봤는데, 뭐 하는 분들이셔?”
“그게 있죠? 나르메르-나일은 파라오라고 하는 ‘살아있는 신의 현신’이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통치한다더라구요.”
“……왕? 신의 현신이 말이냐?”
“네. 정확하게 어떤 건지는 국가 기밀이라서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로마니아 교단의 교황들보다 더 대단한 신성력을 가졌다는 건 분명하대요.”
관광지 가이드북의 설명을 읽는 것처럼 머리를 쥐어짜내는 라리루라.
“뭐, 뭐라더라? 호루…… 호루라기? 호롤롤로?”
“호루스겠지 요것아.”
내가 첨삭을 해 주었다. 호루스. 옛날 잼민이 시절의 내가 딱지겜을 하면서 쓰던 카드에서도 자주 나오던 이름이다.
나르메르-나일…… 이집트…… 파라오…… 어둠의 유희…… 윽, 머리가.
“아핫♡! 맞아요! 아마 그거에요! 그 호루스? 님의 현신을 대대로 파라오라고 부른대요.”
“흐응. 세대 교체가 있다는 것이냐? 살아있는 신이라면서 수명이 있다?”
베로니카는 미덥지 않다는 투였다. 사이비 이단의 교리를 들은 경건한 크리스천 수녀 같다.
‘신들이 멸망한 시대에서 라의 익신룡을 자처하는 왕이라.’
뭐, 대충 들으면 어딜 어떻게 봐도 사이비 느낌이긴 했다.
“그래, 그거야. 그 파라오 왕조의 왕을 로마니아 논문에서 번역한 용어가 <인신>이었어. 논문에서 봤던 기록이니까 아마 틀림없겠지.”
나를 치료하면서 땀을 흘리던 다나가 중얼거렸다.
베로니카는 손수건으로 그 땀을 닦아주었다.
“당초 사용되던 용어를 차용했다는 거로군. 파라오라는 자들의 신위(神威)는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거론할 수 없겠다만, 어떤 뜻으로 썼는지는 확실하구나.”
“신님으로 추앙받으면서 왕으로 군림하고 싶다♡, 로군요!”
“거기 서커스 걸. 본심 나왔다, 본심.”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닐 듯 했다. 프랑은 눈쌀을 찌푸렸다.
“신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거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네.”
“……천공신 님의 후계자처럼 말이냐?”
그 말에 내 머리맡에 모인 아내들은 나를 쳐다봤다.
프랑이 중얼거렸다.
“노르하구 그 엔리르라는 사람을 빼면, 앞으로 8명이나 7명 정도 남아 있다고 보면 될까?”
“모르겠구나. 파멸을 미리 알고 계셨다면 후계자를 선정할 안배를 꾸려두실 시간은 있으셨겠지만…… 구신 분들 모두가 그랬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
“역으로 생각하면 다른 신들도 안배를 남겼을 수도 있지. 게르마니아의 신족이 구신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
두런두런 얘기하는 아내들.
구신(九神)이라 불리는 신격은 게르마니아 신들의 대표다.
당연히 대표라고 함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나서주길 바라는 다른 구성원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바이콘족도 신족이니까, 그것만 쳐도 벌써 수십 명은 되겠지.’
자잘한 신들까지 전부 합치면 수십 수백 명은 될 것이다.
오딘, 토르에 이어서 로키나 프레이야 같은 유명한 북유럽 신화의 신들 말고도 자기 후계자를 기대한 신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으음~.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라리루라는 뭐가 거슬리는 것처럼 팔짱을 꼈다. 상체를 다 치료하고 다리 쪽으로 의자를 옮기던 다나가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상해? 뭐가?”
“그게요? 제 느낌이기는 한데…… 그 엔리르라는 사람, 막 토르 님의 후계자다! 하고 팍 꽂히는 느낌은 없지 않았어요?”
“……팍 꽂히는 느낌?”
“네. 그야 뭐, 겉모습이나 무기나 마법 같은 건 닮았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래서야 그냥 ‘흉내’잖아요?
토르 님께 있어서 묠니르는, 저한테 있어서 링링이 3.5호나 크라운 크라운 님의 책만큼 소중한 물건 아니에요? 그런 걸 저런 성격 나쁜 사람한테 주셨을까요?”
……듣고 보니 그렇네?
우리는 예상 밖의 관점에서 핵심을 찔린 듯한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말로만 후계자라며 용비어천가를 부르던 도이치 짝눈년에 비해서, 토르의 후계자(자칭)인 엔리르는 짝퉁 묠니르를 받았잖은가.
나는 지금 내 창에 다시 마법을 바를 생각에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말이다.
존나 시발 오딘 년도 나한테 지 창이나 줄 것이지.
“저라면요, 자기 후계자를 고를 때는 능력 말고도 성격이랑 마음가짐도 중요하게 볼 거에요.”
라리루라는 양손에 검지를 세워다가 X자를 만들었다.
“선배한테라면 기쁘게 기술도 알려드리고, 라리루라 1급을 내 드릴 수 있죠. 그치만 그 엔리르라는 사람한테는 자격이 어쩌구 하기 이전에 잘 해주기 싫지 않아요? 만약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재능을 가졌어도요.”
“──그렇지. 분명 네 말이 맞다, 라리루라.”
베로니카는 턱을 짚으면서 인상을 썼다.
“드워프는 뇌신 님께 묠니르를 만들어주었던 종족이다. 엔리르는 그 종족의 후손에게 유독물질을 뿌리는 작자였고. 구전되어 오는 뇌신 님의 성격 상, 자격이 있다는 이유로 그런 놈팽이를 후계자로 삼으셨을 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무심코 중얼거린 프랑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우리는 뒤에 이어질 말을 이해했다.
──그렇다는 건, 엔리르는 오딘과 나랑은 다른 방식으로 힘을 얻었다는 뜻이 아닐까?
‘마법의 신인 오딘조차 현세에 거의 영향을 못 미치는 분신밖에 못 남겼어.’
오죽하면 내 꿈에서도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빌려서 나타났겠는가.
내가 아는 토르한테 마법의 달인이라는 이미지가 없다.
수박 겉핥기 수준의 어설픈 이미지로도 그랬다. 토르는 전사들의 신 아니던가.
그런 꼴마초 망치남 토르이니만큼, 로키나 오딘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현대에 제대로 된 후계자 선정 시스템을 남겨둘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운명인가?”
작게 속삭인 베로니카가 자기 말에 놀란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이다! 운명! 운명인 것이다, 나의 그대여! 선지자 님께서도 말씀하셨잖느냐! 운명이란 자가당착의 성질을 띄노라고!”
흥분한 베로니카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예르나라는 엘프는 죽기 전에 ‘신좌’라는 말을 남겼지? 그것이 단서니라! 소멸한 신의 신좌에 오를 자격을 얻은 자는, 신의 힘을 일부나마 내려받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테에엥……?”
무슨 얘기인 테치?
막 혼자 급발진을 밟아대니까 뭔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선생님.
“윽……. 그, 그러니까 말이다? 인간족은 종종 ‘왕좌를 두고 다툰다’는 비유를 쓰곤 하지?”
베로니카는 딱밤을 맞은 고양이처럼 목을 접었다가 차분히 설명했다.
“하지만 보통 왕좌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지나가던 걸인을 붙잡아서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힌다고 왕권이 이양되는 것은 아니잖으냐.”
“그렇지.”
“신좌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자격을 지닌 자가 신좌에 올랐을 때, 그자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신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자격’만으로도 어느 정도 권한이 생기는 것이고!”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왕위계승권 덕분에 왕족으로서 권력이 생기는 것처럼?”
“그래! 멋진 비유로구나, 프랑!”
프랑의 예시에 베로니카는 토끼처럼 폴짝 뛰었다.
아, 그래. 우리 베로니카가 원래 흥분하면 성격이 망가지는 편이었지 참. 깜빡하고 있었네.
그보다 ‘자격’이라.
‘신의 후계자라는 건 게임 판타지 소설의 유니크 직업 같은 건가?’
뭐, 대충 비슷하게 생각해도 되겠지.
퀘스트 조건을 달성해서 힘이 해금된다는 뜻이니까, 조금 너무 직관적인 느낌이 들기는 해도 대략 비슷할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애1미 시발. 역시 상태창이 있어야 했어.’
나한테 상태창이 있었으면 칭호: 오딘의 후계자(1차 전직) 같은 게 따박따박 적혀 있을 건데 말이다.
‘졸지에 이세계에서 염병할 유사 추리물을 찍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골치 아파 죽겠네.’
한숨 쉬어봤자 어쩌겠는가. 세상 일이 다 그렇게 편하게만 굴러가면 누가 고생하겠어.
“이러한 운명은 보통 예언이나 계시처럼 후계자가 정해져 있을 것이지만, 선지자님의 말을 떠올려 보면 얘기가 달라지느니라!”
내가 그리 통탄하고 있자 베로니카가 말했다.
“인간족은 운명을 거스르는 혼돈의 총아라고 하였다! 필시 엔리르와 그밖의 다른 놈들은 그러한 점을 악용하여 구신의 후계자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것이겠지!”
“엔리르는 그런 놈들 중에서 토르의 후계자 후보였고?”
“그렇겠지! 어설프게나마 묠니르의 힘을 일부 다뤘던 것이 증거다!”
얼굴도 모르는 씹새들을 향해서 분개하는 베로니카.
치료를 하던 다나는 잠깐 숨을 돌리는 것처럼 등받이에 기댔다.
“그니까 뭐야? 그 엔리르인가 하는 개자식은 한 7왕자 쯤 되는 권력으로 깝치던 빡대가리 새끼였다는 소리?”
“……으흠. 자격이 모자랐다는 뉘앙스로는 그렇게 되겠지.”
침착한 질문에 흥분을 가라앉힌 베로니카가 대답했다.
“허나 놈도 힘만 놓고 보면 진짜였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작자가 그리 흔할 것 같지는 않구나.”
“근가? 아, 하긴. 그 새끼는 지가 7석차라고 말했다며? 걔 위에 더 쎈 놈이 있어봤자 5~6명이겠지.”
다나는 안심한 것처럼 말했다. 듣고 있던 나도 안심했다.
양산형 짝퉁 토르가 바글바글 모여서 하우스파티 프로토콜을 할 일은 없다는 소리겠군.
어차피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처럼 잡몹이 되는 게 국룰이지만 말이다.
“베로니카, 왠지 기뻐 보이네.”
프랑이 웃으면서 말하자 베로니카는 왜 아니겠냐는 듯 발을 굴렀다.
“그럴 수밖에 없잖느냐! 적들의 위험성도 어느 정도 밝혀진데다가, 우리에게도 이점이 있는 이야기니 말이다!”
‘우리의 이점’이라는 건 내 얘기겠지. 도이치 괴력난신 년의 기억을 뒤져보지 않아도 방침이 생긴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가설은 나중에 오딘의 기억을 조사할 때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찾을 바에야 가설이나마 의지해 보는 게 맞겠지.’
나한테도 잘된 일이었다. 오딘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기억을 뒤지자니 여간 막막한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 생각하던 나에게 갑자기 손바닥으로 스매시를 날리는 다나.
사르가디스 매콤 주먹의 진심 스매시에 눈물이 찔끔 났다.
“머임? 왜 밑도 끝도 없이 남편놈을 줘패는 것이지? 남녀역전세계의 가부장적 아내임을 암시?”
“뭐긴 시발아. 치료 끝났다고. 치료비 청구하기 전에 썩 일어나.”
앗, 글쿤. 일어난 나는 내 몸을 체크하고 감탄했다.
그릴에 지져진 나뭇잎처럼 그물맥 나란히맥이 빽빽하던 내 가슴과 등이 거의 매끈해졌다. 이 정도면 흉터 치료 포션 좀 마시면 다 나을 것이다.
역시 우리 눈나야. 나는 감사하는 뜻으로 말했다.
“오, 시발. 조따 깔끔하게 나았네. 아줌마. 여기 현금영수증 되죠?”
“치료비 뗄 거면 3년 전부터 정산해야 되서 안 됨. 존나 울 남편놈 파산 신청하고 노예로 돌아가게 생겼다.”
“어허. 어딜 혼자 낼름 먹을려고? 부부끼리 공동자산에서 까야제.”
“이 상또라이 새끼가 이젠 창조경제를 넘어선 창렬경제를 노리는구나. 가정 내에서 낙수효과가 터지면 그게 홍수랑 뭐가 달라 씨발아.”
“홍수보다는 사랑의 워터파크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내가 치료비 몸으로 갚는다. 딱 대 시발.”
내가 철없이 안으려 들자 다나는 낄낄 웃으면서 발바닥으로 내 얼굴을 밀었다.
“큭큭. 아, 꺼져 병신아. 지금 니 누나 마나 오링나서 뒤질 것 같으니까.”
“그려, 우리 여보야가 고생 많았다. 고마워.”
일어난 내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 라리루라가 말했다.
“그나저나 다나 언니도 한 번에 다 못 고칠 상처라니, 우리 선배 용케 안 죽었다 싶네요.”
“원래 질럿은 야마토 한 방에 안 죽음.”
“뭐라시는 건진 모르겠는데 아마 평소처럼 헛소리일 테니까 따로 별 말 안 할게요! 환자한테는 배려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후흥~♡ 이런 마음씨 따듯하고 귀여운 후배, 달리 없다구요?”
“그거는 쪼금 따뜻한 게 아니고 타버린 것 같은데요.”
아무튼 됐다. 며칠 정도는 거친 훈련은 자제하는 게 나을 듯 했는데, 움직이는 정도는 지장 없겠지. 나는 윗통에 옷을 걸치면서 말했다.
“이제 분신 마법을 배워서 영주한테 얘기를 전해주고, 내 갑옷이 다 되면 우르실라랑 같이 돌아가자. 게르마니아에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야호♡!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거네요!”
“느이 집은 로마니아 아니니?”
나는 방정을 떨면서 좋아하는 라리루라를 보고 픽 웃었다.
여행의 여로가 생각보다 복잡해졌지만, 이제 돌아가서 셰이드로 오딘과 예르나의 기억을 엿보면 된다.
‘그게 <편찬대대>에 대한 단서가 되겠지.’
상회장도 엔리르도 철저하게 영혼을 남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영매나 사령술사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특히 흑마법사 단체인 <임모르탈리스>의 잡것들과 적대할 <편찬대대>가 영혼의 취급에 철저해 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뒤에는 봄까지 사르가디스에서 보내다가 로마니아의 옥션에 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