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화 (277/1,009)

희귀성까지 따지면 다이아몬드도 못 비비지 않을까. 선호하는 사람이 없어서 호사가를 찾아야 제 값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잘 가. 우리는 브리타니아에 온 김에 물자를 채우고 갖다 팔 물건이나 사 갈 거야.】

【맥주를요?】

【키타이 촌놈이 긴 뱃여행에 그만 미쳐버린 모양이군. 이 나라는 맥주도 소한테서 짠다던데?】

【소 오줌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마시다가 누가 바꿔쳐도 모를 수준이긴 합니다.】

낄낄대면서 농담을 나눈 우리는 악수를 했다.

【또 보자고는 않겠지만, 다시 만나면 아는 척 정도는 해도 돼. 오늘 하루 정도는 그때 네 이름에 성씨가 붙어 있기를 기도해 주마.】

【성씨요?】

이건 또 무슨 관용구래. 우르실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내 착각이었나? 너도 바이킹처럼 성을 버린 거라 생각했는데.】

【그쪽 문화는 잘 모르는데요. 소문으로 들은 게 전부라.】

【시시한 얘기야. 바이킹, 뱃사람들은 육지의 굴레이기도 한 성을 떼 버리거든. 바다는 만물의 어머니니까, 언제 수장돼서 그 품으로 돌아가도 괜찮게 미련도 인연도 끊어두는 거야.】

【그렇군요.】

관습이나 뭐 그런 거겠지. 내가 웃는 얼굴 아래에서 별로 흥미 없어 하는 걸 알아차린 듯 우르실라는 결론으로 넘어갔다.

【바닷사람이 성씨가 있는 경우는 셋이지. 은퇴했거나, 처음부터 관습을 무시했거나, 위업을 이루고 칭송받는 이름을 얻었거나. 바이킹들은 대부분 세 번째를 꿈꾼단 소리였어.】

【아하. 저도 그렇게 성공하길 바란다는 뜻이셨군요. 격려 감사합니다.】

성씨인가. 생각해 볼 얘기이긴 했다.

이세계에서도 가족끼리는 성을 통일하니까. 신족인 베로니카는 어쨌든, 모계사회 출신인 다나-프랑은 어머니의 성으로 가족의 성씨를 맞추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내를 여럿 들여놓고 그 중 한 사람의 성씨로 통일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나도 성씨를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어.’

생각 밖의 귀중한 조언이었다.

아무튼 이 개성 있는 전직 유부녀 해군과도 작별이다. 그리 생각한 나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질문했다.

【우르실라 씨? 이건 물어두는 게 나을 듯 해서 물어보려는 겁니다만, 1~2달 쯤 뒤에 초청드리면 와 주실 겁니까?】

【좀 그런걸. 헤어지고 몇 주 만에 다시 만나면 어색해서. 인원 땜빵이 필요하다면 고려해 보겠는데, 왜? 무슨 축하연이라도 열 생각인가?】

고개를 모로 꼬는 우르실라. 나는 멋쩍게 말했다.

【아뇨. 청첩장을 보낼까 해서요.】

시간과 외적인 요인에 쫓기던 지난 반 년도 발등의 불은 다 꺼졌다.

드디어 프로포즈 이후로 지진부진하게 미뤄왔던 결혼식을 치룰 때가 된 것이었다.

이세계의 결혼식은 21세기 내 고향과는 결을 좀 달리했다.

나라나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단은 가장 일반적인 예시를 들겠다.

우선 주례자가 세례를 받은 정식 신관이나 수녀여야 한다.

친한 친구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하거나 그런 거 없다. 이건 신이 버젓이 존재하던 세상이라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일 듯 했다.

인맥이 넓은 듯 하면서도 친구관계가 곱창난 나한테는 은근 도움이 되는 조항이긴 했다.

다음으로 축의금이 없다.

대신에 가재도구 같은 선물이나 결혼식의 요리는 손님들이 마련한다는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건 결혼식 자체를 화려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구에서는 식 준비에만 1년씩 써도 이상하지 않댔는데.’

아는 형이 내가 일병이던 시절에 결혼 준비한다고 해 놓고 내가 전역할 때까지 존버타곤 했었다.

그런데 이세계에서는 준비를 막 1달만에 끝내고는 한댄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도 아연해질 초스피드 결혼식이다.

듣자 하니 이세계에서는 화려한 웨딩 메리지가 별로 일반적이지 않다는 모양.

이건 아무래도 서민들 기준이라서 그렇게 된 느낌도 있다.

서민 계층 남녀에게 결혼이란 오두막 같은 교회에서 이웃 사람들에게 돼지 꿀꿀이죽을 퍼주면서 와아! 신난다! 하고 호호깔깔 거리다가 끝나는 거였겠지.

고대문명이 대충 멸망하고 중세따리 중세따가 돼 버린 그때 그 시절 이세계인들의 풍습이 현대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귀족과 부유층의 결혼식한테는 해당 없는 얘기야.’

그러므로 나도 프랑과 함께할 결혼식에는 통 크게 금괴 하나를 고대로 투자할 생각이었다.

“노르는 팔불출이야. 결혼식 정도는 검소하게 해도 되는데.”

내 품에 쏙 들어온 프랑이 그리 말했다.

우르실라와 골디네 시프의 선원들을 떠나보낸 우리는 집에 돌아와서 짐을 풀고 하룻밤을 푹 쉬었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고, 꼴마초 노르드는 아내의 방에서 결혼식 예정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프로포즈랑 달리 결혼식을 서프라이즈로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건 독단으로 진행할 안건이 아니다. 프랑이랑 몇날 며칠을 상의해야지 않겠는가.

‘시발, 서프라이즈 결혼식이라니. 어감부터가 어썸하군.’

상상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그건 뭐 아내가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면서 ‘내가 너 자는 사이에 몰래 해서 임신했어! 서프라이즈!’ 같은 소리를 하는 거랑 똑같지 않나 싶다.

“1번 뿐인 결혼식이야. 이런 건 화려하게 하는 게 맞아. 대충 해치우면 100% 후회할 걸.”

나는 프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생각해 봐라. 내 아내만 벌써 셋이다.

만약 프랑이랑은 집에서 쫑파티 하듯이 결혼식을 퉁치고, 다나랑 베로니카의 결혼식은 왕족도 입이 떡 벌어질 스케일로 벌인다면?

그 결혼식에 참여할 프랑이 얼마나 서럽겠는가.

아니, 절대 티는 안 내겠지만 나였으면 가슴이 찢어질 거다.

나 때는 전동 킥보드로 퉁치고 둘째 남편한테는 기깔나게 롤스로이스로 1대 뽑아 준다? 시발 그건 이혼소송감 아니냐?

‘우리 아내들은 마음이 넓지만, 그게 내가 내 좆대로 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아내들 간의 비교거리는 애초부터 안 만드는 게 최고다.

그렇다고 하향평준화로 모든 아내들의 결혼식을 국밥처럼 가성비 따져서 후루룩 뚝딱 꺼억 할 수는 없는 법!

아내들의 고향이나 출신을 생각하면 내가 상상하는 결혼식과는 달라질 듯도 하지만, 프랑은 고향의 문화에 구애가 없는 몸이니만큼 내가 더 성심성의를 다해주고 싶다.

‘것보다 시발, 나 아직 다나랑 베로니카한테는 약혼 반지도 못 줬다고.’

프랑이랑 결혼식을 못 올려서 문어발 느낌이 나지 않게 자제하는 중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도 결혼식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식장은 상의해서 잡자. 내 옷은 프랑이 골라줘.”

“내가? 헤헤. 왠지 느낌이 좀 이상하다.”

“흐흐. 뭐가 이상해. 나를 우리 프랑 눈에 가장 멋진 남편놈으로 만들어야 할 것 아냐. 옆구리에 꼈을 때 옷 매무새가 맘에 안 들면 평생 기억에 남는다?”

“으으……. 노르가 하는 말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니까.”

─부르르. 상상이 갔는지 몸을 떠는 프랑.

우리는 그렇게 결혼식의 일정을 잡아갔다. 준비가 빠른 건 도움이 된다. 편지를 뿌리고 답장을 받는 것도 빨라진다는 소리니까 말이다.

나는 아예 식전까지는 프랑에게 모험가 일도 금지시켰다.

존나 ‘나 집에 돌아가면 결혼할 거야’ 같은 소리는 영화 속 비극으로 이어지는 국룰이니까.

집에만 있어도 생활비 걱정은 없다. 할 일도 많았다.

훈련을 반복하고, 청첩장의 답장을 받아서 참가 인원을 각 잡아 보고.

식장 크기를 잡고 예복을 대여하고, 그런 틈틈이 프랑이랑 대련도 해 봤다.

라리루라는 저번에 말한 대로 뻔뻔하게 우리 집 소파에 앉아갖고 지 무릎을 치면서 ‘변신. 얼른.’ 이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베로니카는 공간 마법 석판 연구에 몰두해서 폐관수련을 하다가 프랑한테 혼나지.

겸사겸사 나는 우리 눈나한테 끌려가서 대학원생 리턴즈를 찍기도 했으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숨을 돌려보니 1달이 지나가 버린 뒤였다.

‘시발. 마지막 건 조금 이상한데.’

다나네 연구소의 랩실에서 풀풀 풍기는 잉크랑 체력 회복 포션 냄새가 너무 익숙해서 논산 앞을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저번에 엔리르 새끼가 지옥에 있는 묠니르 나와라 했을 때보다 2배는 소름이 돋더라.

오죽하면 초면인 연구원들인데 10년지기랑 재회한 기분이 들었을까.

저 더벅머리 새끼, 카르미네 대학에도 게르마니아 대학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시발 가는 랩실마다 있는 것이지.

슈뢰딩거, 당신은 틀렸어. 고양이 말고 대학원생으로 양자역학 실험을 했었으면 인류는 2020년에 우주 진출을 성공했을 텐데.

아무튼 그런 내 일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시간은 시시각각 흘러가, 얼마 가지 않아 결혼식 날짜가 찾아왔다.

겨울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11월의 끝과 함께 말이다.

이세계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나였는데, 직접 겪어보자 생각보다 닮은 부분도 많았다.

예를 들면 결혼 케이크나 웨딩 드레스 같은 것.

그밖에는 신랑신부 대기실에 몰려오는 하객들이 있겠다.

“귀여운 후배, 강림☆!”

수화로 대화해도 시끄러울 것 같은 핑크색 머리 미성년자(유통기간 1달 남음)께서는 수수한 옷을 입고 대기실에 나타나셨다.

주역인 프랑을 띄워주는 눈치 있는 패션이다. 나는 옷깃을 만지고 싶은 걸 참으면서 고개를 모로 꼬았다.

“어? 뭐야? 프랑한테 가 있던 거 아니었어?”

이세계에서는 이상하게도 결혼식 당일에 남녀칠세부동석이 발동된다. 신랑 신부가 별실에서 대기하는 것이다.

‘아니, 지구에서도 이럴 때가 있긴 하던가?’

20살 애새끼는 잘 모르겠소요. 내 그런 반응에 라리루라는 뾰로통해졌다.

“기껏 뵈러 와 드렸는데 반응이 그게 뭐에요? 프랑 언니한테는 언니들이 찰떡같이 붙어 계셔서, 자유로운 제가 정찰 온 거라구요?”

결혼식이 아니라 UFC가 열리나. 적진시찰은 왜 와.

나는 그리 생각했지만 내색 않고 환영했다.

“그래, 어서 와라. 프랑은 어떻든?”

“비 맞은 멍멍이처럼 벌벌 떨고 계세요! 언니들이 두 손을 잡아주는 중이랍니다!”

“프랑답네.”

이런 상황에서 긴장을 안 하면 우리 프랑이 아니지.

빡긴장 모드가 아닐 땐 긴장하고 떠는 게 프랑답긴 했다. 라리루라는 그리 말하는 내 머리 모양을 보고 인상을 썼다.

“아, 선배! 또 머리 만졌죠! 모양 망가진다니까요!”

“간지러워서 살짝 긁었는데. 티 나냐?”

“내가 못 살아. 이리 와요. 또 망치시면 예식 직전까지 냅둘 거니까요? 하객들 맞이하면서 쪽 당하기 싫으면 얌전히 좀 시라구요.”

라리루라는 툴툴대면서 내 올백 머리를 손질해뒀다.

왁스 같은 포션─풀로 만든 화장품─을 발라대는 라리루라.

“아시겠어요? 선배는 앞머리가 없으신 게 보기 좋으니까, 후배의 정성 어린 손질에 감사 또 감사하시기에요?”

“충성충성. 제너럴 프리실라님의 자비에 감읍임미다.”

그래도 내 모근이 ‘베지터’ 당할 것 같은 말투는 하지 말자. 불길하게시리.

내가 왁스의 근질근질한 느낌을 참고 있자 대기실 문이 또 열렸다.

굵직한 덩치에 사나운 얼굴을 한 남자였다. 마피아 영화라면 패밀리의 복수로 결혼식에 사고 치러 온 새끼일 게 100% 확실한 와꾸다. 나랑 라리루라는 그를 알아보았다.

“앗☆! 도르카 씨다! 안녕하세요?”

“오, 왔냐? 온다는 답장은 들었는데 바쁜 놈이 무리했구만.”

“크크. 이 자식은 손님이 와 주셨는데 자리에 앉아갖고 한참 어린 애한테 머리 손질이나 시키고 자빠졌네. 니가 무슨 귀족이냐?”

멋 부리고 온 여관 주인 도르카가 입꼬기를 비틀었다. 나는 넉살을 떨었다.

“사적인 감정은 없단다. 일어나면 라리루라한테 혼나걸랑. 아무튼 와 줘서 고맙다. 청첩장을 써 보려고 생각하니까 정작 나랑 친한 사람이 몇 없더라고.”

청첩장을 뿌려대도 1개 10묶음 들이 편지지가 남을 때의 기분은 겪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하객 알바라는 게 왜 있는지 실감이 가더라.

“그럴 것 같아서 와 줬다. 접객을 맡을 애를 구했거든.”

“거 잘 됐구만요.”

도르카랑 대화하고 있자니 이번에도 열리는 문.

이번에는 마법사 길드의 소서러인 크롬웰과, 우리 좆소둠라의 지부장 칼라일이었다.

아니 시발 식까지 5시간은 남았는데 벌써부터 몰려드는 거 실화야? 낯선 사람이라서 라리루라가 왁스질을 멈췄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 이거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우 차이 시발이네.”

도르카의 불평은 무시하고 악수를 나눴다. 크롬웰은 싱긋 웃었다.

“뭘요. 저희야말로 불러 주셔서 감사하죠.”

지부장급 인선까지 다 불렀다. 에들린도 불렀는데 아마도 프랑한테 갔을까? 이세계 꼴마초 노르드의 인맥 풀 가동이다.

칼라일이 말했다.

“결혼 축하한다, 노르드. 유능한 모험가들이 맺어지니 보기 좋군.”

“아, 이거 선수를 빼앗겼군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물은 식장 관리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이런. 자리를 빛내주신 것만도 영광인데 선물까지 챙겨 주셨습니까? 황송해서 어쩌죠?”

적당히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사회생활 ON.

웃음 짓던 크롬웰은 도르카를 쳐다보고 손인사를 했다.

“도르카. 당신도 왔군요. 노르드와는 여관 일로 안면이?”

“그래. 네가 처분해준 장비 덕분에 여윳돈이 생겼거든.”

“맡아둔 겁니다. 전당포라고 생각하시고 나중에 상환하러 오세요.”

“크크. 내 손은 이제 마누라 안마해 주기도 바빠. 무기 들 손은 없다고.”

둘이 아는 사이인가? 어쩌면 도르카도 나처럼 모험가를 하면서 번 돈으로 자기 집을 세운 걸지도 모르겠다.

하긴, 저 얼굴로 푸근한 여관 주인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 도르카가 말했다.

“우린 가 있으마. 이따 보자.”

“어. 아내한테도 얼굴 비춰 주라. 기뻐할 거야.”

“까짓거 그러지 뭐.”

나는 그렇게 털복숭이 수컷 3인방을 떠나보내고 식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대장장이 클라라, 흑마법사 토벌전에서부터 2번 정도 공투했던 골드 클래스 모험가 팀, 카르미네 대학의 연구원생 노예 동료들, 그밖의 감사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눴다.

“잘 지내나 봐? 프랑은 행복해 보이더라.”

프랑이 묵던 여관 ‘무타라트의 아이들’의 주인, 베이냐 씨도 나를 찾아와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예. 장인 어른께도 성묘를 가서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음, 음. 젊은 것들은 그렇게 살아야지.”

만족스러웠는지 그리 말한 베이냐 씨는 잡담을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식장으로 가셨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그녀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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