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로지컬한 논리 이전에 꼴마초의 의무이자 쫀심이었다.
학계에서 응 이미 본 거야 하고 내 논문을 엎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현장직으로서 평가가 좀 깎여도 제출 기간을 넘는 것보단 나았다.
그래도 역시 새끼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시발. 좆 같은 이세계 홍위병 새끼들.’
논문거리를 찾기도 빡센 세상인데 이렇게 엿을 멕이다니! 하여튼 범죄자 새끼들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나는 한숨을 쉬고 얘기를 정리했다.
“아무튼 다들, 지금한 얘기대로 진행하는 걸로 기억해 둬. 영애한테서 연락이 오면 세부 계획은 수정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얘기를 끝내고 남은 시간을 훈련이나 밀린 업무 처리, 마법 연구 등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뒤.
우리는 헨네시스 영애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티르시의 소식을 더 찾지 못했으니까, 1주일 있다가 자기가 준비한 배편을 타고 현지로 향해달라는 편지를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결정이 되었다.
현대 이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이자, 그 때문인지 수많은 대형 범죄조직의 온상이 되어 버린 세계 유수의 패권국가.
신성제국 로마니아로 말이다.
영애로부터 편지를 받은 건 내가 집에서 훈련을 하던 중의 일이었다.
“편지 배달부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절대천공영역의 연습을 하던 나는─당연히 집을 박살낼 순 없기에 풍차 돌리기 연습이었다─ 배달부가 문들 두드리는 걸 듣고 훈련을 멈췄다.
문을 열기 전에 입구의 룬 스톤을 점검.
베로니카가 설치한 룬에 반응 없음.
적의나 살의를 가진 사람이 집을 방문할 때만 발동한다는, 룬 마법다운 세세한 조건의 인터폰이었다. 여기 반응이 없단 건 배달부가 우리한테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문을 열자 피곤해 보이는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편지 배달입니까?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 예. 여기 수취인에 서명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 연말 세금 통지서가 나왔으니 잊지 마십쇼.”
“세금 통지서요?”
존나 시발 세금 징수는 체계적으로 하는군. 이세계의 기술 발전이 어떤 사람들을 기준으로 행해지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근데 저 세금 안 내는데여.”
받아라, 사르가디스 한정 면세증!
암흑진화 다크 유니콘을 토벌한 대가로 받은 세금 면제증 덕분에 나는 연말 세금 따위 캔슬이다. 가정 단위로 발급된 거라서 다나랑 프랑 몫도 안 내도 된다.
이거 개꿀이네. 1년치 세금이면 몇 실버가 굳는 거지.
“안녕히 가십쇼.”
배달부를 배웅하면서 근처 가로수에 앉은 새들을 봤다. 다 아는 얼굴이구만.
“꼭꼬코─. (안녕─.)”
나한테 날개짓하면서 인사를 한 비둘기는 배달부의 뒤를 쫓아갔다.
저 배달부가 수상한 사람인지 아닌지 쫓아가서 감시하는 것이다. 아마 여기까지 오는 중에도 몰래 쫓아다녔겠지.
“CCTV 성능 확실하구만.”
저 녀석들은 물론이고 테레사를 우두머리로 한 냥냥 드론 프로젝트도 궤도에 올랐다. 사르가디스에서는 낮말은 고양이가, 밤말은 비둘기가 듣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영애의 편지를 읽으면서 가족들을 부르자 다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남편놈 덕분에 세금 안 내서 좋네. 우리 씹새 칭찬해.”
“크흐흐. 영주님도 설마 나한테 내준 면세증 때문에 세금을 3인분이나 잃게 될지는 몰랐을 듯.”
“어? 4인분 아냐?”
“……프랑아. 그건 내 얘기더냐? 응? 내 얘기로구나?”
파이팅, 도이치 불법체류 여신.
우리 시종님의 범죄 경력에 탈세도 추가다. 이거이거 베로니카가 노예로 끌려가면 내가 엘릭서를 떨이로 팔아서라도 사 오던가 해야겠구만.
“선배~? 영애님은 뭐라세요? 바로 출발하라셨어요?”
파티의 전력 보강 때문에 집에 있던 라리루라가 물었다.
내가 우리 집에 신세지는 걸 어려워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이 녀석은 아주 자기 짐까지 다 싸와갖고 남는 방을 꾸며대고 계신다.
새침떼면서 집세까지 갖다주는 게 묘하게 킹 받더라.
“어. 뱃삯이랑 이동비는 지원해 주셨어. 은행에서 받아가라시네.”
연말이라서 학계에서 내주는 연구비가 나왔을 것이다. 돈 들어왔는지도 확인해 두자. 베로니카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동수단까지 지원해 주지 않았던 건 다행이구나.”
“우리 일정도 있으니까 돈으로 준 거겠지. 나도 연구소 직원들한테 얘기해 둬야 해.”
“누나네 부하들은 누나가 맨날 출장 가는 건 뭐라 안 해?”
“이 새끼가 프리랜서 됐다고 고새 랩실 노예일 때 기억 잊어버렸네. 상사는 자리에 없는 게 제일 아니냐?”
코건 맞지. 나는 납득 게이지를 400% 충전했다.
“게다가 이 동네 영애님의 후원이 걸린 출장이라니까 얼른 갔다오라더라.”
“하여튼 월급쟁이 쉐에끼들.”
다나가 뒷담을 안 까인다면 됐다. 하긴 높은 사람은 월급 따박따박 주고 귀찮게 안 하면 욕 먹을 일이 없지. 그러고도 뭐라고 하는 새끼가 있으면 그 놈한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프랑은 약간 심려 깊은 듯이 중얼거렸다.
“우리 내일에라도 출발하자. 티르시 씨가 걱정되니까.”
절절하게 동감이었다. 영주의 따님이 돈을 써서도 찾지 못할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닐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2달의 휴식 아닌 휴식 끝에 다시 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브리타니아의 남부 해안도시로 가는 마차는 영애가 준비를 해 주었다.
이세계의 말도 이세계인들처럼 초월적인 힘을 지닌 놈들과 그렇지 못한 놈들이 있는데, 영애가 부른 마차는 귀족님답게 존나 쎄 보이는 말이 이끌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작 2~3일만에 항구에 도착하고, 마침 그날에 출발하던 배에 올라 고르갈리아에 내려섰다.
가는 길에 따로 문제될 일은 없었다. 마차 안에서도, 배 위에서도 말이다.
‘겨울에는 몬스터들도 얌전해지니까.’
브리타니아의 추위는 나 같은 달인이 아니면 빡세다.
추위 자체는 한국에 비하면 좆밥인데, 방한기구가 비싸서 그렇다. 나도 이세계 생활 초반에 개고생을 했으니까 잘 안다. 시발.
이 계절에 움직이는 몬스터는 안 움직이면 굶어 뒤지는 고블린 같은 놈들이나, 추위에 내성이 높은 새끼들이다.
코볼트 같은 좆밥 몬스터들은 가을에 존버한 영양으로 겨울잠을 잔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 계절에 움직이는 놈들은 그만큼 존나 쎈 몬스터라는 뜻이지.’
몬스터와의 조우 확률이 낮아졌지만, 그 반대급부로 먹이가 부족해서 광폭화가 걸린 보스몹만 남은 느낌이다.
다행히 우리는 그런 몬스터와 조우하지 않고 고르갈리아에 도착했다.
뱃여행 중에 몬스터를 만나는 건 비행기 사고처럼 희귀한 일이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면 시발 이세계 사람들은 어케 살라고.
아무튼 그날밤은 많이 늦었기에 입국 허가증을 따고 한숨 잤다.
다음날에는 아침부터 지도를 사러 갔다. 고르갈리아의 성수의 숲이 어딨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지도 얼마에요?”
“8쿠퍼외다.”
“않이 씹, 세계지도 말고요.”
“그니까 8쿠퍼라고.”
존나 바가지충 새끼들 같으니. 가게에 운석이나 떨어져라.
우리는 빼액거리면서 멱살잡이를 하다가 반값에 지도를 사 왔다. 다나는 지도를 펼쳐놓고 베로니카한테 질문했다.
“베로니카. 너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지?”
“인간의 지도로는 구분이 안 가는구나. 나도 당시에는 저주 탓에 발과 눈에 의지해서 여행했으니.”
“역시 그래? 흐응. 근처 풍경이라도 말해 봐.”
“그러니까, 숲 앞에 바로 강이 보이고 초원의 뒤쪽에──”
“아니지. 니 말대로면 아마 이쪽은──”
머리 좋은 우리 아내님들은 차분한 갑론을박 끝에 위치를 특정했다.
그렇게 장소를 알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근처의 마을까지 가는 마차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인프라가 발달한 지구에서도 시골에는 지하철이나 버스가 드물지 않던가. 이동수단이 발, 말, 마차로 이루어진 이세계 중세랜드에 바랄 걸 바래야지.
우리는 고민하다가 전문가에게 일을 맡겼다. 마차 역참(驛站)에 일하는 사람한테 질문을 한 것이다.
“행상인의 마차를 빌려타 봐. 댁들이 신분만 확실하고 돈 많이 내면 받아주는 놈은 있을걸?”
우리는 수염이 덥수룩한 아재의 제안을 받아들여 봤다.
시골마을에 직빵으로 가는 행상인은 드물었기에 가는 길에 우리를 내려줄 수 있는 마차를 찾았다.
참고로 마차를 구해온 사람은 라리루라였다.
“잘 들어. 상담(商談)의 기본은 기선제압이야. 다나가 신분증으로 나 이런 사람이요 하고 안심시키는 것부터 시작하자.”
“마차 찾았는데요?”
우리가 젠가를 쌓듯 계획을 설계하고 있는 중에 택시 잡는 것처럼 마차를 잡아온 라리루라.
너드녀 둘과 꼴마초, 거유소심녀로 이루어진 파티에서 독보적인 인싸력을 자랑하는 녀석답다. 나는 감격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미 쉽뻘. 역시 00년생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만.”
“아핫♡! 선배, 저 잘 했어요?”
“그래. 오구오구, 잘 했다. 우리 인간 카피바라.”
“카피바라? 귀여운 이름이네요! 어떤 동물인가요?”
“설치류.”
나는 씩씩거리는 라리루라한테 쳐맞으면서 행상인에게 선불 요금을 건네주었다. 우리를 태워준 행상인은 20~3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나랑 동년배구마잉.
“으하하하!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태워드릴 수 있다면야 기쁠 따름입니다!”
“3명 다 제 마누라니까 눈독 들이지 마십셔. 저랑 생사결 벌이기 싫으면.”
“쓰벌, 실화요? 인생 좆 같네.”
며칠 정도 마부로 일해줄 그는 미녀들의 탑승에 약간 들떠있다가 내 말에 멘탈이 나가서는 자기 말이랑 쌰바쌰바하러 가 버렸다.
“아니 잠깐만요? 딱히 그런 눈으로 보여지는 것도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전 애초부터 관심 밖이라는 태도는 약간 열받는데요?”
“꼬마 아가씨. 멀쩡한 어른은 아이한테 눈독 들이지 않아.”
“저도 며칠만 더 참으면 어른이거든요!!”
라리루라는 울컥한 것처럼 따지고 들었다가 베로니카한테 안겨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대충 나이가 뭐시 중헌디 같은 내용의 불평이었다.
그래도 행상인은 우리더러 내리라고는 하지 않았고, 그날 점심에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이쪽도 브리타니아 인종이라서 그런가. 출발 전에 입에 댄 식사는 언급하기도 싫다. 호기심에 만용을 부리던 베로니카가 나랑 만나고 처음으로 음식을 남겼을 정도였으니까.
개시발, 민트 쩡어리 파이라니. 저런 음식을 떠올린 사람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었을까.
미각을 파괴하는 식재료의 요정이라도 되나.
행상인의 이름은 빅투아르라고 한다.
“이야. 행상인 일을 하다 보면 말입니다? 말솜씨가 상당히 중요한데 말을 할 기회는 적어지더랍니다. 하다 못해서 저희 메르세데스랑 시시콜콜한 잡담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메르세데스요?”
“저희 말의 이름입니다. 귀엽지 않습니까?”
나는 덩치 큰 짐말을 보면서 귀여움이란 어디까지 통하는 말인가 생각을 좀 해 보았다.
글쎄. 이걸 귀엽다고 한다면 나 같은 꼴마초도 큐트하다고 해도 되겠는걸.
─다그닥, 다그닥!!
짐말은 덩치만큼 힘도 셌다. 마차의 짐도 있는데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에서는 이 새끼 선조에 다리가 8개인 말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마부는 자기 말대로 이동하면서 말할 기회가 없었는지 참 말이 많았다.
“고향 말로 얘기하는 일도 드물죠. 일하러 가면 맨날 로마니아 말만 주구장창 쓰거든요.”
“저도 고향 말을 쓴지는 꽤 됐군요.”
“키타이 분이시니까요. 그래도 로마니아로 가면 키타이에서 온 분들도 많습니다. 제가 그분들한테 부적을 좀 사 봤는데, 이런 말씀 드리기는 약간 그렇지만 별 도움은 안 되더군요! 하하하!”
약간 말 많은 택시 아저씨 같다.
나이가 젊어서 그리운 기분은 안 들어도 느낌은 비슷하다. 나는 마차의 뒤쪽으로 보이는 풍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부적이 도움이 안 되셨다니, 어디 도적이라도 만나셨나 봅니다?”
“도적이면 그나마 낫죠. 로마니아에서 도적질을 하는 인간들은 짐을 넘기면 살려주는 경우도 많고, 잘만 달리면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몬스터는 얘기가 달라요.”
“몬스터라. 겨울에는 괜찮지 않습니까?”
“으하하하! 그래서 이 추위를 뚫고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그리 말한 빅투아르는 찬바람이 추운지 옷깃을 여몄다.
날이 좀 춥긴 하지. 이따가 교대라도 해 줄지 물어볼까도 생각했는데, 솔직히 마차 안에도 바람이 새어들어와서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프랑이 마차의 틈을 꿰매고 내가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로 안을 뎁히자 그나마 살 만 했다.
“뭐, 이 날씨에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몬스터들도 추위를 뚫고 나오려면 그만큼 굶주렸을 겁니다. 저희 메르세데스가 고것들에게 따라잡힐 일은 없겠죠.”
빅투아르는 자기 말에 대해서 약간 자부심을 드러냈는데, 내 생각에는 그게 안 좋았던 것 같다.
그 왜, 영화에서는 이런 밑밥을 깔면 꼭 뭐가 낚이잖는가.
영화 제작자는 런닝 타임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장면을 송출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운명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 좆도 쓸모없는 잡담이란 농담 빼고는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프랑이 문득 귀를 세우면서 뒤를 돌아봤다. 약지에 낀 결혼 반지가 경비 시스템이 점등되는 것처럼 불이 들어왔다.
“……발굽 소리?”
그 중얼거림에 나도 마차 뒤로 보이는 지평선에 눈깔을 굴렸다.
짐마차는 군대의 사오돈 차량처럼 뚜껑을 천과 지붕으로 덮었을 뿐인 마차였다. 그래서 우리는 뚫려 있는 뒤쪽으로 바깥의 경치를 볼 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까만 점이 2개 달려오고 있었다.
‘말인가?’
2개의 말은 눈을 감았다가 뜰 수록 크기가 커졌다.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던 덩치가 좁쌀만한 크기로 커지는 것도 눈 깜짝할 새였다.
도적은 아니다. 저런 재빠른 준마를 가진 도적이 있을 리도 없고, 고작 둘이서 마차를 습격하는 도적이 어딨겠는가. 나는 무심코 ᚲ(Kenaz)의 룬을 켰다.
그리고 프랑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빅투아르!! 속도 높여요!!”
“예? 예?!”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마차의 끝에 손을 걸쳤다. 눈알에 마나를 집중해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지 확인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