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각성 아수라인가. 조따 쎄 보이네.
“숲에서 2명. 초원에서 3명.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선문답입니까?”
“아니오. 사실입니다. 저희 마을의 전사와 아녀자가 5명. 이 2주 사이에 살해당했습니다.”
역시 피비린내 나는 얘기였구만.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째려보던 건 옷을 입는 게 귀찮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예민한 시기에 낯선 놈들이 몰려와서 그랬던 건가.
그리 생각한 나는 대충 감으로 찍어맞춰 보았다.
“혹시 말의 몸에 사람이 자라난 반인반마의 괴물에게 당한 것은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여러분에게서 놈의 기척이 느껴지던 건 제 착각이 아니었군요.”
기척? 맹인다운 표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베로니카한테 손짓을 했다.
베로니카는 가방에서 낫의 머리를 꺼냈다. 정확하게는 그 가방에 넣어둔 석판에서 꺼낸 거지만 말이다.
“혹시 이런 낫을 든 놈이 맞습니까? 맞다면 저희가 여기로 오는 길에 해치웠습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뭐시기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자 족장은 일어나서 뭔가를 꺼내왔다. 베로니카가 꺼낸 것과 똑같은 바다 쇠로 만든 낫을── 존나 4개나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때마다 저희는 그 만행을 벌인 몬스터를 추격해서 사살했습니다. 첫 피해자 때 출전했던 미숙한 전사를 빼면, 4명의 목숨값을 돌려받으면서 생긴 추가 사망자는 없었죠.”
─달칵. 낫을 봉인한 상자를 다시 닫으면서 족장이 말했다.
“그러나 그 존재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호방하던 전사들도 무력한 아이들이나 노인들마저 노리는 괴물 앞에서 밤잠을 설치느라 예민해져 있습니다.”
“──대화하시는 중에 실례합니다. 누켈라비가 여러 마리 나타났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하이로메인. 오랜만이군요. 그때 알려주었던 저의 이야기는 정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아는 사이인지 족장은 한숨을 쉴 듯한 체념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누켈라비. 바다어미의 손에서 가을마다 빠져나온다는 그 악령이 세월을 넘어서 다시금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1마리가 전부라던 구전이 무색하게도 벌써 5마리 째에요.”
“……숲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셨죠. 저희를 가로막으셨던 이유도 그래서입니까? 그러면 왜 그런 사정이 있다고 설명을 하지 않고요?”
“플루스미러 사람들은 이 일의 주모자로 저희를 꼽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어주실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게 이렇게 이어지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증거도 없이 말입니까?”
“심증이라면 있을 겁니다. 저희는 가을부터 마을의 정책을 바꾸어서 그들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만, 하필 그때부터 흉작이 시작되고 병이 돌다가 이제는 살인까지 일어났으니까요.”
그게 누켈라비나 얼스터 인들이랑 무슨 상관인 걸까. 나의 의문을 눈치챈 족장이 설명했다.
“누켈라비는 바다의 악령. 대지로부터 빼앗아서 농작물을 말라죽이고 가축과 사람들에게 병을 흩뿌린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희가 그 전승을 구실로 악행을 벌이고 있다고 여기는 듯 하더군요.”
“아니, 왜요? 원래 사이가 안 좋았습니까?”
“몇 년 전까지는 접점조차 없었죠. 그래서인지 저들은 아예 저희를 가지고 낭설을 퍼트린 끝에 식인귀라고 여기더군요. 사실, 동물의 심장이라면 산채로 꺼내먹기도 해서…….”
족장은 그런 문화 차이를 극복하고 간신히 교류를 시작했던 게 작년 가을이었다고 설명했다. 생 심장을 뽑아먹다니, 기생충도 안 무섭나.
아무튼 그러다가 오해를 사서 이렇게 대치 상태가 된 거고 말이다.
‘미지의 문명과의 접촉은 어디서나 비슷한 모양이네.’
하지만 식인귀라니.
얼스터 인들이 숲에 진을 치고 사는 식인귀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초원에서 살던 인종이니까.
‘촌장네 선조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입에 물고 다니다가 마을의 나무꾼 사냥꾼들이랑 마주치기라도 했나.’
그게 아니면 예전에 이 숲에 사람을 닮은 몬스터가 살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사람을 닮은 식인 몬스터…… 오우거?’
나는 문득 예전에 만났던 팔 4개인 룬 마법 오우거가 떠올랐는데, 설마 바다 건너 여기에 관계가 있지는 않을 듯 해서 가설을 접었다.
“그런 상황이기에 저희는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었습니다. 불필요한 사상자는 더한 오해를 부르므로.”
촌장이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막은 이유가 그거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저 닫힌 눈이 내 시선을 볼 수는 없겠지만 저 꼴로 숲속을 걷던 걸 보면 뭔가 앞을 보는 마법이나 주술이 있겠지.
살기를 뿜지는 않았어도 내가 취조하는 경찰처럼 압박하자 촌장은 짧게 한숨을 쉬고서 실토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저는 눈을 감은 대가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죠. 여러분들께 협력을 받을 수만 있다면 사태의 원흉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원흉이라는 말씀은?”
“숲의 건너편, 바다로 이어지는 초원에서 악의의 파동이 며칠간 줄곧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마을에 적극적인 해명을 하러 가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저희에게 그 원흉을 쓰러트리길 바란다는 겁니까? 부족의 주술을 가르쳐 줘서라도요?”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이는 결코 강요도 아니고 부탁도 아닙니다.”
촌장의 말투는 굉장히 차분했기에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우리는 촌장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 촌장이 우리더러 숲으로 가라는 권유를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 숲에 목적이 있으시다면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위험과 마주치실 것입니다. 그때 누켈라비를 쫓는데 보탬이 될 수가 있도록 주술을 알려드리려 했습니다.”
하는 김에 우리가 원흉을 쓰러트려주면 좋았겠지만 일부러 바랄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우릴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했으면 지금 얘기를 안 했겠지.’
그래야 우리가 뭣 모르고 갔다가 원흉이랑 목숨 걸고 싸울 것이니까.
숲에 괴물이 있다는데 거기 들어가는 병신이 어디 있는가.
‘여기 있네 시발.’
오우거 때처럼 바이콘의 성지에 뭐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사람이 뒤져나간다는데 니들끼리 해결하라면서 다른 안전한 곳에 있다가 다시 오는 것도 못할 짓이다.
결국 우리는 누켈라비 사태의 원흉과는 싸울 처지였다.
하이로메인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는데, 당연히 우리랑 관계가 없는 빅투아르가 싫은 얼굴을 했다.
잠깐 마을에 들려서 쉬려다가 이게 뭔 봉변이냐 하는 느낌이다.
“빅투아르 씨. 따로 떠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굳이 추천하지는 않겠습니다. 6마리째의 누켈라비가 당신을 쫓을지도 몰라요.”
“압니다. 씨부랄, 행상인 삶이 다 그렇죠 뭐. 여러분들이 하자는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안전하다. 우린 빅투아르의 공짜 호위인 셈인가.
마차 택시비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아깝진 않았다.
‘기왕이면 이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자기들 일이니까 목숨 걸고 싸워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전력도 안 될 거고,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속이 턱턱 막혀가면서 설득하기도 귀찮다.
일단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싸울 준비를 하자.
그리 생각한 내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촌장──!!”
문짝을 박살내면서 누군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끄호악!!”
떨어져나가버린 문은 빅투아르와 부딪혔다. 나는 그를 신경쓰기보다 엔트리를 시도한 제 3자를 관찰했다.
관찰하려다가 눈을 돌렸다. 씨발, 이 여자도 알몸이네.
그녀는 쉽게 말하자면 흰 피부의 아마조네스 여전사 같은 사람이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근육빵빵 엘프 대전사(전라) 쯤 되려나.
배에는 식스팩이 갈라졌고 피부는 얼스터 인답게 하얗다. 알몸에는 진녹색의 문신을 새겼는데, 체구가 커서 도화지에 그린 그림 같았다.
시부랄. 흰피부 알몸 문신 근육 여전사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조합이지. 김치 피자 탕수육 같은 건가?
“우리 딸을 1합에 쓰러트렸다는 남자는 여기인가!!
딸이라고?
그 게보린 양의 어머니인가? 고함친 그녀는 눈을 굴리다가 머리를 붙잡고 있는 빅투아르한테로 걸어갔다.
“남자!! 너인가!!”
“흐아아아악!!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고 여기 계신 노르드 님입니다!”
빅투아르는 참 상인이었다. 여행길에 만난 동료도 떨이로 팔아치울 진짜배기 상인 말이다.
이 개새끼가 하다하다 사람도 파네. 아주 언동 곳곳에서 대상인의 자질이 엿보인다.
노예상인의 자질이 시발럼아.
“으음!! 그것은!!”
스텔라는 나를, 정확하게는 내가 든 누켈라비의 낫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너!! 누켈라비를 잡았나!!”
“놀랐다!! 나를 빼면 부족 전사들도 떼로 몰려가야 잡을 수 있는 놈이었는데, 그걸 잡았나!! 좋다! 자격은 충분하다!!”
뭔 자격이요 시발. 내가 얼타고 있자 그녀는 날 삿대질했다.
“너!! 내 사위가 된다!!”
내가 놀란 거 아니다. 나는 계속 얼타고 있었다.
소리지른 건 라리루라였다. 왜 니가 난리니.
“자, 자자, 잠시만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사위요?! 선배를 따님 분과 결혼시키겠다, 뭐 그런 뜻이세요?!”
“……그래요, 스텔라. 이번엔 또 무슨 바람이 분 겁니까.”
족장은 골치가 아픈 것인지 이마를 감싸쥐며 물었다. 그에 여전사, 스텔라가 대답했다.
“족장! 너는 말했다! 우리도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발전해야만 한다고! 나는 그 말에 여전히 반대다! 하지만 강한 남자는 예외다! 에린의 피를 더럽히지 않을 정도의 남자는!!”
“……그래서요?”
“누켈라비를 잡고 애송이를 디로스 애송이를 제압했다! 그 실력!! 내 사윗감으로 부족함 없다!!”
“따님은!! 나이가!! 어찌 되시나요!!”
“올해로 17이다!! 성인식을 치루고 7년이나 지났지! 아직 미숙하지만 나를 이을 차세대 대전사가 될 것이다!!”
라리루라가 펄쩍 뛰면서 묻자 스텔라는 딸바보인지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아니 근데 딸바보면 오늘 처음 보는 남자한테 딸을 땡처리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유감이네요! 선배는 19살 밑으로는 여자로 안 본답니다!!”
라리루라가 팔로 X자를 그렸다. 아니, 여자로는 보거든. 손 대지 않을 뿐이지.
그러자 스텔라는 알겠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나다! 너!! 내 남자가 된다!!”
“선배 도망쳐요!! 얼스터는 미치광이 변태 소굴이에요!!”
“잠깐만, 라리루라! 저 사람을 기준으로 얼스터의 평균을 정하지 마! 이 마을만 이런 거라고!”
“아니요! 스텔라를 저희 마을의 평균으로 잡지 마세요! 저 사람이 별종인 겁니다!”
족장은 다나의 말에 반박하면서 옷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스텔라! 제가 이방인이 오면 옷을 입어달라고 입이 부르트도록 말씀드렸는데! 어서 가서 제 옷이라도 걸치세요!”
“흠! 미안하다! 씨나락 까먹었다!”
─성큼성큼. 이상한 표현으로 소리친 스텔라는 옷장으로 걸어갔다.
허연 대리석(딴딴하다) 같은 엉덩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시발아 제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서!! 대답의 시간이다! 이방인 노르드!”
족장처럼 미시 드레스를 입은 근육빵빵 밀프 대전사는 날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이 사람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사자후여 씹펄.
“……사양하겠습니다. 아내가 벌써 셋이라서요.”
“셋, 넷, 다섯!! 거기서 거기다! 나나 내 딸이 모자란가!”
다섯은 뭔데 미친년아. 니랑 니 딸이 같이 시집 오게?
나를 장모님께 불꽃 효도하는 미친놈으로 만들 생각인가. 나더러 아내 동생더러 사실 내가 니 아버지다도르~ 이 지랄 하라고?
“……결혼은 모자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을 채워주는 사람이랑 하고 싶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좋은 사랑 해라!!”
이걸 물러나네. 쿨하게 포기한 모양인지 스텔라는 족장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진짜 시발 이걸로 끝이야? 존나 정신 나갈 것 같애.
“……미안합니다, 여러분. 스텔라가 원래 거침없고 생각이 짧긴 했습니다만, 최근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해져서….”
족장은 피곤한 것처럼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기분 십분 이해가 갑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다나를 쳐다봤다.
다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우리 고향에선 울 아빠가 약간 비슷한 정도야.”
“나 상견례 때 청심환 먹고 갈련다.”
존나 시발 절대 말리지 마. 누나네 장인어른까지 저러시면 나 진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근데 상견례를 가는 날이 있긴 할까 모르겠네.’
한참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결혼했다면서 부모님한테 사후 보고를 때리게 생긴 건 나랑 다나랑 도긴개긴인데 말이다.
다나도 고향을 가출한 상여자니까 굳이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나는 벌써부터 혹시 모를 미래가 무서워졌다.
티르시를 찾으면 우황청심포션이나 한 사발 말아달라고 해 보자.
‘아무튼 그때는 그때고.’
나는 실례가 되지 않게 눈을 굴리지 않고 스텔라의 문신을 보았다.
진녹색 문신은 내가 아는 어느 검정색 염료랑 색감이 비슷했다. 아마 염료끼리 섞었겠지.
──가마 상수리나무 숯가루.
‘그럼 저것도 분노조절장애의 다른 버전인가.’
혹시 저 문신에 쓴 도료 때문에 스텔라는 정신이 나가버린 걸지도 몰랐다. 딸이랑 어머니가 쌍으로 말이다.
한숨을 쉰 나는 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입을 열었다.
“족장님, 스텔라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실은 말이죠. 여러분들이 쓰고 계신 도료는──”
……근데 만약 저게 원래 성격이면 어쩌지.
나는 설명 중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 스텔라의 성격이랑 염료는 다른 문제였으니까.
“……유독한 물질이라는 건가요?”
족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텔라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