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2화 (302/1,009)

“응? 아, 그래. 안 그래도 나도 너 부르려고 했어.”

눈을 깜빡이던 눈나는 왜 불렀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시큰둥하게 족장한테서 받아온 선물을 딱 건넸다.

“받아. 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겼다.”

한국 유부남 특) 츤데레임.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뭘 줄 때를 따라하면서 새침떼기 흉내를 내는 나. 다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내가 준 건틀렛을 내려다봤다.

“……너 이거, 나 줄려고 챙긴 거냐?”

“어. 옛날에 [주술 문신] 없이 마법을 쓸 때 쓰던 거래. 너 피부에 문신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거 안에 마법도 몇 개 들어있다는데, 나보다는 니한테 쓸모가 많겠더라고.”

하이로메인이 했듯 문신으로 마법을 각인하는 기술은 얼스터의 문화일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외지에 관심이 많던 다나는 문신이나 노출 문화가 싫었기에 성인식을 치루기 전에 고향에서 탈주했다고 했었다.

그래서 드루이드로서 배운 기술도 문신이 없어서 대부분 못 쓴다는 얘기였다.

쓸 수 있는 건 성표를 통한 언데드 퇴치 기술과 실드, 힐 정도가 전부다.

마법사 길드의 마법을 배우지 않는 다나다. 이걸 통해서 새 마법을 배우면 좋을 것이다. 안 그래도 우리 파티의 전력 증강이 급선무가 된 상황이니까.

마침 다나의 장비도 건틀릿이고 말이다.

“……야. 그 왜, 예전에도 이런 일 있지 않았냐?”

다나는 내 선물을 생각도 못한 것처럼 우물쭈물 거렸다.

내가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을 깜빡였는데, 그러자 다나는 한숨을 쉬다가 나한테 벨트를 내밀었다. 못 보던 물건이지만 까리하게 생긴 갈색 벨트였다.

“이거 뭐야?”

“뭐긴 시발아. 너 주려고 빼놓은 거지.”

“……나 주려고?”

나는 그제야 다나가 한 말이 뭔 뜻인지 눈치를 깠다.

예전에 게르마니아의 뭐시기 대학인가에서도 우리는 서로 자기가 신을 슬리퍼보다 상대의 발에 맞는 슬리퍼를 먼저 찾았었는데, 이번에도 그거랑 똑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허 참, 아니 그…… 허 참.”

내가 쑥쓰러운 기분에 표정 관리를 못하자 다나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귓볼이 빨간 건 모른 척 해 주는 게 나을까.

“그거, 독 내성을 올려주는 유물이래. 니 안 그래도 이번에 누켈라비랑 싸우다가 하이로메인 교수님 아니었으면 독가스 마실 뻔 했다매.”

“아, 응. 그랬지. 그랬었어.”

“내가 늘 니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니가 쎄지긴 했어도 독에 중독되는 건 또 다른 얘기잖아. 내가 없는데서 남편놈 병 걸리는 꼴 보기 싫으니까 잘 차고 다녀. 어디 가서 자랑 말고.”

우리는 무슨 사귄지 1일 된 커플처럼 시선도 못 마주치고 얼굴을 감추거나 발로 바닥을 헤집어댔다.

“아 시발, 누나. 나 존나 부끄러. 이거 어쩔 거야, 어?”

“굳이 말로 하지 마 병신아. 누군 안 부끄럽냐? 새끼가 좀 있다가 몰래 챙겨주려고 했더니 분위기에 초 치고 있어.”

다나는 구둣발로 바닥을 막 비벼댔다. 존나 누가 보면 마법진이라도 그리는 줄 알겠네.

그러면서 내가 준 건틀릿을 꼭 껴안고 있는 걸 보면 도저히 못 보고 있겠다.

와 나, 선물 교환이 이렇게 쪽팔린 일일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거인 가죽 갑옷 하의에 벨트를 맸다.

벨트는 이세계나 지구나 거기서 거기다. 허리에 맞게 차자 다나는 눈동자만 굴려서 착용샷을 확인했다.

“……뭐, 봐 줄만 하네. 어울릴 것 같긴 했어.”

“내가 준 건 전투용 장비라서 껴 달라고 하기 뭣하네. 나중에라도 착용감 들려주라.”

“착용감은 무슨, 같이 싸우다 보면 마법 쓸 기회가 있든가 하겠지. ……아무튼 난 간다. 잘 쓸게.”

나는 손을 휘젓고 도망치려는 다나를 시시덕대며 쫓아갔다.

“흐흐. 가긴 어딜 가, 이 누나야. 걍 같이 있자.”

“아, 꺼져 시발아. 쫓아오지 마. 개쪽팔리니까.”

쪽팔리라고 쫓아가는 건데 뭘. 나는 낄낄거리면서 아닌 척 입이 귀에 걸린 다나랑 꽁냥거렸다.

이런 새콤달콤한 순간도 부부 생활의 일부니까 말이다.

적당한 준비를 마친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여기로군.”

사전 조사를 통해서 위치를 알았으니까 헤맬 일도 없다.

내가 고용한 새가 빙빙 돌던 자리로 가자 베로니카가 바로 결계를 해제했다. 안쪽에는 예전에 티르시랑도 같이 봤던 그 이동마법진이 존재했다.

마법진에서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완충 상태인 모양.

위로 올라가서 베로니카가 마법진을 발동시키면 언제든지 성지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베로니카. 이거 우리 전부 탈 수 있어?”

“알아보마. 잠깐 거기서 기다리도록.”

이 안까지는 결계만 해제하면 누구든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마법진의 효과로 성지로 <공간이동>하려면 룬의 마나를 보유해야 한댔던가. 베로니카는 내 말에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인간 사회에서 배운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나, 족장한테서 배운 요령 등을 가미해서 조사하는 베로니카.

바닥에 비슷한 마법진의 획을 그려보거나 기억을 되살리는 듯 하던 그녀는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도 이렇게 원리를 분석해 보는 건 처음이다만, 이 위에서 피부를 맞대고 있으면 함께 전이할 수 있겠구나.”

“피부?”

“손깍지라도 끼면 될 듯하다. 신마님은 허가받지 않은 자는 막아도 우리 일족이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가는 건 막을 생각이 없으셨던 걸로 보이는구나.”

“그렇구만. 프랑, 다나. 컴온.”

나는 룬의 마나가 없는 아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아니, 너 임마. 손만 잡아도 된다잖아.”

프랑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안겨들었고, 다나는 어색한 듯 얼굴을 붉히면서 안겼다. 아까 전의 쪽팔림이 아직 덜 가신 듯 했다.

“어허. 이 누나가 왜 이래? 그러다가 여기 혼자 남겨지면 이 위험한 숲에서 하루 죙일 기다릴라.”

“아 씹, 얼굴 안 치워? 깨물어버린다?”

튕기긴. 우리가 꽁냥대자 라리루라는 불편한 것처럼 눈을 반개하고는 베로니카에게 달라붙었다.

“베로니카 언니, 저것 보세요~. 언니만 빼고 저기서 알콩달콩하는데 배 안 아프세요~?”

“배라면 네가 안겨든 덕분에 아프구나. 라리루라야. 너 혹시 내 저주에 대해서 잊은 것 아니냐?”

“아핫~♡? 그럼 저 선배한테 갈까요?”

“……아니. 여기 있거라. 참을 만 하다.”

베로니카는 라리루라의 옷을 붙들고서는 타오르는 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럼 발동하겠느니라.”

그녀가 지팡이를 내려찍자 저번과 비슷하게 빛이 번쩍했다.

주변의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우리는 1초만에 어딘지 모를 바이콘의 성지 중 한 곳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절벽?”

내 품에 안긴 다나는 신기한 듯이 중얼거렸다가 내 시선을 눈치까고는 얼른 떨어졌다.

하여튼 숫처녀 딱지 뗀지 반년도 안 된 티를 저렇게 내요. 남편놈은 귀여워서 죽을 것 같은데 차분한 척 연기하고 있는 우리 누나였다.

“이곳은 어느 산맥의 절벽이다. 나도 예전에 룬 스톤을 찾아다니면서 들린 적이 있다만, 변함이 없구나.”

라리루라를 떼어낸 베로니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러고는 노 모션으로 지팡이에 불을 피우더니 거기에 대고 소리쳤다.

【베로니카 에클립시스다!! 아델라이데는 있느냐──!!】

확성기에 대고 소리친 것처럼 절벽에 소리가 울렸다.

만약 결계가 없으면 골짜기 아래 있어도 들릴 듯한 성량에, 자기 이름을 불린 바이콘은 그 거체(巨體)를 드러냈다.

─쿵, 쿵.

【그렇게 귀청 아프게 고함치지 않아도 들리느니라, 풋내기 예지자야.】

누켈라비에 버금가게 거대한 바이콘이다. 한쪽 뿔이 부러진 그녀는 내게 총명해 보이는 눈을 향했다.

【어서 오거라, 위대한 혼돈의 총아야.】

‘──텔레파시인가?’

나는 등빨 오지는 바이콘의 심념을 듣고 눈을 반개했다.

바이콘이 내뱉는 말은 나를 제외한 이종족에게는 전부 말 울음소리로 들린다. 실제로 심념을 쏘아냈지만 다른 파티원들은 고개를 고로 꼬고 있었다.

그래도 저 바이콘이 느닷없이 우리에게 심념을 쏘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베로니카가 연결해 둔 룬에 끼어들었군.’

그녀와 저 바이콘─이름이 아델라이데였나─ 사이에 룬의 연결이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아는 사이라면 번호를 교환하듯 정신을 연결하는 라인 쯤 남겨놨을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의 라인에 끼어들어서 말을 건다는 건 또 다른 얘기다.

이건 예를 들자면 비밀번호를 건 SNS 방에 제 3자가 끼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한 마법 실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흐음.】

아델라이데는 베로니카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코끼리보다 큰 바이콘이 그러니까 카리스마가 오졌다.

【그 어수룩하던 애송이가 눈이 휘둥그레질 손님을 데려왔구나. 옆의 있는 자가 예언의 계도자더냐?】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장차 그리 될 예정이지.】

【……사정이 있는가 보군. 좋은 소식이었다면 네가 그런 시큰둥한 얼굴일 리가 없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서 남편 자랑을 한 것 치고는 어쩐지 담백한 대답이었기 때문일까?

아델라이데는 선지자의 빗나간 예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도 대충 일이 굴러가는 방향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확실히 행동거지나 능력이 어딘가 세속과 떨어진 신 같은 느낌이 드는 바이콘이다.

【좋겠지. 네 근황이나 들려다오.】

아델라이데는 말의 모습으로 행동하는데 적응한 건지 부드럽게 등을 돌렸다. 베로니카가 우릴 보며 말했다.

【나의 그대여. 나는 잠시 저 늙은이에게 사정 설명을 해 주고 오겠느니라. 기다려 주겠느냐?】

【당근빠따죠 쉬바. 천천히 회포나 풀고 와.】

【흥.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다.】

볼을 부풀릴 것 같은 퉁명한 대답이었다. 우리 베로니카답지는 않은 반응이긴 한데, 귀여우니까 넘어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라이데는 말꼬리를 휘적거렸다.

【엘카. 손님맞이는 맡기마. 샘에 데려다 주거라.】

【네!】

아델라이데의 말에 망아지 1마리가 튀어나왔다. 보통 말은 가지지 못할 황금색 털이나 하얀 뿔을 가진 신기한 바이콘이었다.

망아지 모드에서는 베로니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진짜 태어난지 1달도 안 돼 보이는 생김새다.

우리랑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지 엘카는 앞발로 우리 앞을 휘저었다. 따라오라는 소리인 듯 했다.

앞장서는 쬐끄만 망아지를 쫓아가는 우리.

엘카라고 불린 바이콘을 걸으면서 자꾸 나를 돌아봤다. 난 그게 잘 따라오나 걱정되서 보는 건 줄 알았는데, 가만 보면 그 눈빛에 묘한 선망 같은 게 엿보였다.

‘내가 저주를 푼 사람인 걸 아는 건가.’

엘카도 바이콘으로서 내가 품은 막대한 구신의 마나를 알아차린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을 알고 있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마치 날 때부터 불치병에 걸린 아이가 자길 치료해줄 수 있다는 의사를 보는 듯한 분위기다.

고향에 있을 적엔 수의사 지망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옛날 일을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뺨을 긁적였다.

“우와와…… 선배? 금색 망아지도 의외로 귀엽네요♡”

대부분의 동물을 좋아하는 라리루라는 그 귀여운 엿보기에 매혹됐는지 내게 귓속말을 했다.

하긴 종류를 불문하고 어린 동물은 다 귀엽기 마련이니까. 송아지도 망아지도 보다 보면 의외로 귀엽긴 하다.

절벽 같은 언덕을 내려간 곳에서 엘카가 울음소리를 냈다.

내 귀에 해석이 안 되는 걸 보면 대충 아무 울음소리나 내뱉은 듯 하다. 어차피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대화는 포기한 거겠지.

“예쁘다…….”

도착한 샘의 풍경을 보자 프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나랑 라리루라도 말로는 안 했지만 공감하는 듯 했다. 그만큼 샘은 아름다웠다.

보석 같은 푸른 샘과, 그 주변에 핀 꽃이나 잔디가 풍성한 공간이다. 무슨 황제의 정원처럼 꾸며져 있어서 존나 입이 쩍 벌어졌다.

한구석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 공터가 있다. 아마 아델라이데가 몸을 눕히는 공간인 듯 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우리보다 앞서 온 손님이 있었다.

<어?>

발육부진의 중학생처럼 보이는 꼬맹이는 등에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다가, 우리의 등장에 크게 놀란 듯 움찔 떨었다.

사이즈는 대충 플라잉 그린 재민이 정도일까.

반투명한 날개를 가진 어린아이 같은 이종족.

로마니아 권역의 이종족 중에서도 유독 인간과 교류가 적은 페어리였다.

<와아! 인간이다, 인간!>

꽃을 돌보던 페어리는 우릴 보자마자 경계심도 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군대에서 팅커벨 나방이 날아들던 PTSD가 재생하는 기분에 기겁하며 물러섰다.

시발, 이 성지는 바이콘도 페어리도 존나게 크네. 존나 뭔 쥬라기 공원이냐.

드디어 이 뻐킹 이세계물에 킹룡이 나오나? 가슴이 두근두근하는구만.

아니면 페어리 종족이 원래 이만큼 큰 걸지도 모르고.

<뭐야 뭐야? 금둥이 너 또 숲을 헤매는 애들을 데리고 온 거야? 그러다가 짝뿔한테 혼난다?>

이번에도 무의미한 울음소리다. 억양으로 보면 ‘아 예’ 같은 뜻일 것 같다.

페어리도 바이콘과는 대화할 수 없는 걸 알기에 아무 불만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냥 옆집 강아지한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대답을 바라지 않고 하는 말이었겠지.

그래서인지 페어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우리한테 손을 흔들었다.

<인간들 안녕! 나는 앤 미리암이야!>

<노르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응응! 그런데 인간아! 너흰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얘가 데려와줬니?>

<아뇨. 아는 바이콘이 따로 있어서 그 애한테 안내를 받았습니다.>

페어리가 인간이랑 교류가 적다는 건 구라가 아닐까. 얘는 뭐 태도가 이세계 카피바라급인데.

<바이콘 친구가 있어? 나랑 똑같네!>

앤은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놀랐다.

<인간아, 인간아! 혹시 여기 대빵인 짝뿔이랑은 만났니? 너 그거 알아? 여기 사는 바이콘은 금둥이랑 짝뿔밖에 없다? 딴 동물들은 짝뿔이 허락 안 해 주면 쫓겨나! 그래서 사람이 들어오는 건 처음이야! 너희도 짝뿔한테 혼나기 싫으면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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