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아내들의 다굴빵에 노인이 마법으로 대처했다면 내가 마나 탈진으로 기절했겠지. 노인을 잡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가 기절하면 의미가 없잖은가.
─투확!
나는 바닥을 뚫고 노인이 있는 곳으로 튀어나왔다.
생성한 <번개의 화살(Lightning Missile)>을 쏘아내면서 공간을 조작해서 거리를 좁혔다. 노인은 손가락을 휘저어서 전류를 하늘로 흘려보냈다.
마법 실력 차이에 절로 인상이 쓰여졌다.
‘이건 불리해도 너무 불리한데?’
같은 캐릭터를 쓰고 있는데 테크닉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 않는가. 그것만 놓고 봐도 좆 같을 판국에, 마나까지 내 걸 훔쳐다가 쓴다니?
이런 상황에서 이기려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상대보다 훨씬 더한 테크니션으로, 마나를 쓸 틈도 안 주고 조져버리는 것.
그걸 해낼 방법은── 수중에 있다.
나는 아델라이데의 말을 떠올렸다. 여기는 그저 꿈속일 뿐. 내가 뭘 하든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순 없다.
그러니까 쫄 것 없었다.
“시발, 될랑가 모르겠네. 하도 오랜만이라.”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이마 위에 손을 가져갔다.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는 것처럼 한쪽 눈을 감으면서 몸에 고인 구신의 마나에 불길을 넣었다. 범상치 않은 분노가 내 몸을 지배하면서 야수회귀의 마나를 거무칙칙하게 변색시켰다.
──된다.
그때, 망령도시에서처럼 오딘의 지혜를 사용할 수 있다.
“……닌 뒤졌어 씨발롬아.”
변신.
그렇게 읊조리면서, 처음으로 내 의지로 그 폭주 모드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내 손을 낚아챘다.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그만큼 긴장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깠다.
하지만 지금 누가 내 팔을 잡았다는 말인가? 놀라는 가슴을 추스르며 눈을 돌렸다.
허여멀건 그림자다. 형상도 흐릿한 무언가가 내 팔을 잡고 변신을 막고 있었다. 이루 말할 데 없이 이상한 모습의 존재였지만 낯이 익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교수 슬레이어?”
아니 씨발,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진짜 상상도 못한 정체에 싸우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진짜로 왜지? 여기가 꿈 속이라서인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꿈속에 있을지언정 나는 내 이성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내가 아는 존재들이 의식의 흐름대로 꿈속에 튀어나오는 일은 예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교수 슬레이어라니? 이 녀석은 내 뉴런에 깃든 환상 속의 존재가 아닌가!
나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이 하얀 그림자가 야수회귀의 광증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대충 퉁쳐버리고 있었다.
야수회귀는 사용자의 분노를,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광기를 조절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전부터 조짐은 있었다.
처음으로 그 부작용을 눈치챈 건 티르시가 논문을 빼돌려지는 걸 눈앞에서 봤을 때였던가.
그때부터 나는 야수회귀가 내 분노를 먹고 성장한다는 걸 느꼈고, 내 논문이 도적단에게 쌔벼졌을 때 처음으로 머리에서 튀는 하얀 불꽃을 보았다.
그리고 그건 교수 슬레이어라고 하는, 나의 분노를 나 대신 토해내는 존재로 승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을 내가 조헌병 증세처럼 대굴빡이 훼까닥했을 때나 등장하는 환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아마 그 점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교수 슬레이어라고 하는 존재는 내 분노가 구현화된 단순한 환상 속 캐릭터였다. 어린애들이 어릴 적에 만드는 상상 속 친구랑 오십보백보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교수 슬레이어라는 ‘등장인물’의 틀을 빌려서 누군가가 내 꿈에 개입한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게 누구인지 눈치를 깠다.
“……오딘?”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허여멀건 그림자는 힘이 다한 듯 사라졌다.
내가 폭주 모드를 쓰려는 걸 막은 건가? 근데 시발 그러면 나더러 저걸 어떻게 이기라는 것이지?
고오오오오……!!
그렇게 멍때린 게 안 좋았다.
5초나 될까 말까한 짧은 시간 낭비였는데, 달인의 싸움에서 5초면 2~3번 뒤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노인이 내 마나를 쌔벼가서 술식을 구축해갔다.
─틱, 틱틱!
저위 마법이라는 굴레도 의미가 없었다. 호치키스랑 스카치 테이프로 묶어둔 육식공룡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착각!
저 교수 매지션 새끼가 나의 단촐한 마법 지식과 마나로 큰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미 씨부랄……!!”
좆 됐다! 멍 때린 사이에 남은 마나가 다 털렸다!
이제 와서 변신해 봤자 답이 없었다. 마나가 없는데 내가 뭐 어쩌라는 말인가!
뒤지기 싫으면 여기서는 닷지하는 수밖에 없다!
“빡종 각이다, 빡종 각!”
꿈 속에서이긴 해도 뒤지긴 싫었던 내가 긴급탈출 버튼을 누르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품 속에서 이물감을 느낀 나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손에 잡힌 것은 오우거의 옥새다.
왜 여기 있는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거기서 피어오르는 핑크색 마나 덕분이었다.
‘……라리루라!’
나를 지켜보던 그 녀석이 아내들이 깨어난 걸 보고 옥새를 쥐어줬던 것이다.
아마 내가 깨어나질 않은 채로 마나만 쭉쭉 줄어드니까, 옥새를 쥐어주고 마나-인공호흡부터 해 준 것이겠지. 긴급상황에서의 재치라면 라리루라도 파티에서 1등을 다투니까.
옥새에서 막대한 마나가 피어났다.
라리루라만이 아니다. 우리 아내들까지 옥새에다가 마나를 넣어준 것이다. 나는 노인의 술식 구축까지 남은 2초 정도의 시간을 고민에 사용했다.
‘……이거라면, 비벼볼 만 하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승기를 보았다.
─타앗!
나는 몸에 여봐란 듯이 옥새의 마나를 흡수시키면서 존나 열심히 달렸다.
노인이 있는 곳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태풍처럼 회전하는 바람! 무슨 마법인지 알겠다. 시발, 누구는 저거 쓰려면 풍차 좆뺑이를 그렇게 돌려야 하는데!
“이 도둑놈의 새끼이이잇──!!”
야수회귀로 강화된 다리가 가속했다. 나는 주먹에 마나를 쏟아부었다.
노인이 지팡이를 치켜들자 폭풍이 집속된다.
내 발이 암만 빨라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래서는 내 주먹이 닿기 전에 마법이 작렬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고, 그 대가로 내 코앞에서 뿜어지는 폭풍을 바라봐야 했다.
이대로 부딪히면 룬으로 마법 내성을 올려도 믹서기에 넣은 노르드 탕탕이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룬의 마법 데미지 감소량보다 공격 마법의 출력이 높으면 뒤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미러 디멘션.”
대신, 폭풍이 날아오는 곳을 축으로 풍경을 360도 ‘돌렸다’.
구름의 발판이 디스코 팡팡에 올라탄 것처럼 내 몸을 초고속으로 이동시켰다. 꿈을 조작하는 능력으로 폭풍의 공격 범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간 것이다.
‘주변의 환경이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그걸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지!’
공격에는 응용할 수 없겠지만 이동에는 쓸 수 있다. 꿈 속이라는 전투 장소의 특이성을 이용한 반칙이다.
어차피 저 씨발럼도 남의 마나을 훔쳐 썼으니까 나나 저 놈이나 피차 또이또이다!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한다!!”
선학들의 지혜를 읊으면서 노인의 턱에 어퍼컷을 날렸다. 당연히 마법으로 방어하려고 했던 노인이지만, 소용 없다.
노인이 지팡이를 휘둘러도 마법은 발현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나는 내 마나를 아주 조금만 남기고 모조리 옥새에 넣어버렸으니까.
옥새가 있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찰나의 빈틈!
노인의 마법 술식에 마나가 빨려나가서 기절하기 직전이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상대 역시 힘법사일지도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선수를 쳤다.
주먹이 틈을 보인 노인의 턱주가리를 올려쳤을 때, 나는 그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마나를 해방했다.
덤프 트럭도 폐차 시켜버릴 진심 펀치가 마초 노인의 턱에 작렬했다. 마나의 최대치가 비등하다면, 1초만에 야수회귀의 풀 파워를 막을 출력의 방어 기술은 만들 수 없다.
노인의 머리가 튕겨오르면서 그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시꺼먼 혼돈 같은 어둠이었고, 그 한가운데에서는 한쪽 뿐인 눈깔이 희번뜩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여신 오딘의 눈과는 정 반대쪽의 눈이 말이다.
그리고, 지구용사의 용력을 담은 주먹이 악몽의 머리통을 흩뿌리며 박살냈다.
악몽의 머리통을 폭발시켜 버린 다음, 나는 그 자리에 실 풀린 인형처럼 나뒹굴었다.
“크, 하악…….”
무리한 마나 운용이 내상을 입힌 것 같았다.
정신적인 데미지겠지만 덕분에 꿈인데도 골통이 빠개지게 생겼다. 악몽 노인이 흐릿해지면서 소멸하는 걸 확실하게 본 다음에야 힘을 빼고 드러누웠다.
“……씨이발, 이게 대체 뭔 일이여.”
처음부터 끝까지 영문 모를 일 투성이다.
왜 갑자기 이세계 간달프랑 싸워야 했던 건지, 교수 슬레이어의 모습을 빌린 오딘은 어쩌다가 나를 막아섰던 건지, 다 알 수 없는 일들 뿐이다.
베로니카한테 공중날기를 가르쳐서 로마니아로 날아가려고 온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됐담.
‘일단, 나를 막았던 건 오딘의 분신이 맞는 것 같은데.’
예전에 어머니의 모습을 빌려서 나왔던 것처럼 교수 슬레이어라는 모습을 빌렸던 거겠지. 그 상황에서 오딘의 분신이 개입할 등장인물이 없었으니까, 그건 이해가 간다.
근데 시발, 그러면 지가 이런 공간을 설치해 놓고 어째서 나를 만류했다는 말인가?
암만 생각해 봐도 가능성은 2개였다.
내가 폭주하는 걸 막으려고 했거나.
“……이 공간 자체가 오딘의 뜻이 아니었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나는 고민해 봤자 답이 안 나올 일에는 이골이 났기에 그쯤에서 생각을 접었다. 이 뻐킹 이세계는 오늘도 불친절하다.
그때였다. 나는 하늘에 지금까지 없던 하얀 태양이 떠 있는 걸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 내 내면세계에서 자주 보던, 내가 저축한 구신의 마나다.
“하여간 쓰벌놈. 볼 때마다 쑥쑥 크네.”
저번에 예르나의 기억을 뒤질 때보다 약간 더 커졌다.
그리 중얼거리면서 눈부시지 않은 태양을 쳐다봤는데,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 내려오는 게 보였다.
‘……사과?’
황금색 사과다. ─척! 나는 종이로 만든 것처럼 느릿하게 떨어지는 사과를 캐치했다.
그렇게 그 매끄러운 사과를 가까이에서 본 순간, 나는 분식점에서 밑접시에 담겨 나온 김치를 집어먹는 것처럼 이걸 먹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아삭!
마치 이게 승자의 정당한 권리라도 된다는 듯 사과를 베어무는 나.
스프레이라도 칠한 것처럼 생겨먹어서 식욕이 확 가라앉았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학교 급식으로 나오는 사과가 이 정도만 됐어도 짬통이 사과로 채워지지는 않을 텐데.
고려시대 한량 새끼처럼 누워서 사과를 뚝딱 해치웠다. 심지 부분만 남은 사과는 하얗게 변색되다가 사라져버렸다.
“시발, 신의 아바타까지 잡았는데 꼴랑 이거야?”
손가락에 남은 즙까지 쪽쪽 빨아먹어버릴 만큼 존맛이기는 했지만, 뭔가 아쉬운데.
“……배! 선배!”
내가 안타까운 기분으로 그렇게 누워서 쉬고 있자 어디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높은 톤의 앳된 목소리. 라리루라인가?
그걸 자각한 순간, 꿈의 풍경이 무너졌다. 개꿀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것처럼 잠에서 깨어나버린 것이다.
“선배! 선배 괜찮아요?!”
누워 있는 나를 울면서 흔들던 라리루라가 그리 말했다.
난 잠이 덜 깬 머리로 주변을 살폈다. 아내들이 마나가 탈진해서 쓰러져 있고, 앞섬이 마나 포션으로 젖은 라리루라가 나를 흔들어서 깨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꿈 치고는 컨디션이 개판이 된 게 애석하지만, 이걸로 다 끝난 모양이다.
나는 울먹거리는 라리루라에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발톱볶음 향수 말린 선반구석 콩자반.>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라리루라.
당연히 나도 눈을 깜빡거리다가 중얼거렸다.
[……마스크 조깅 미식회?]
이, 이게 머선 일이고?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가 내가 말하려던 거랑은 전혀 다르게 나왔다. 방금 건 ‘뭐임 시발’이라고 말하려고 한 거였는데?
뭐여? 이거 존나 번역 기능에 버그라도 난 건가? 입을 누르면서 신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어 보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미닫이 포경 더듬이 휘청휘청 구텐-탁!!】
와! 돌겠네!
나를 끌어안은 라리루라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앙──!! 선배가 고장났다──!!”
응! 그러네!
성스러운 나라의 그늘
절벽의 초원에 비추는 태양이 눈부시다.
어떤 생물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성지조차 햇빛은 막지 않았다. 성지가 세워지기도 전부터 존재했던 식물들 중 다른 생물의 손을 빌리지 않는 자들만이 성지의 초원에 자생한다.
그러므로 이곳은 고독한 고원(故園)이다.
바람으로 수분하고, 마나로 증식하며, 끈질긴 생명력. 바이콘의 성지는 그런 자격을 갖춘 고대의 식물들이 멸절을 피하는 낙원이자, 혹독한 온실인 것이다.
나는 그러한 성지의 그루터기에 앉아서 읊조렸다.
[발톱볶음 향수 말린 선반구석 콩자반.]
“이 씨발새끼 중증이네.”
참다못해 뇌까리듯 말하는 다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