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경쾌한 풋 워크에 내 가슴에는 그리움마저 치솟았다.
‘장말복 사범님…… 보고 계십니까?’
당신께서 잼민이 유충 강북호에게 가르쳤던 태권의 심득은, 이 판타지 중세랜드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목욕 마니아셨던 나의 첫 무술 사부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미소를 띄웠다.
3인의 변발 마피아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파파바바밧─!
그들은 진법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라리루라를 둘러싸고서 빠르게 움직였다. 분신처럼 잔상이 남는 걸 보면 정말로 공통되는 보법이나 무술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독기 어린 눈을 보고 혀를 찼다.
‘죽을 각오를 했군.’
저 놈들은 라리루라가 오러 사용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라리루라를 상대로, 잘 쳐줘도 골드 클래스도 안 될 새끼들이 저렇게나 결사적으로 덤비다니?
이건 저들이 죽음도 불사할 마음가짐으로 맞서 싸운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점에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다.
‘……왜 도망치지 않지?’
동료를 배신할 수 없다는 의리로 남은 건가?
아니, 설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범죄자 사이에 의리나 정 같은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어.’
선학들께서 말씀하시길, 어느 집단에서 무언가를 자꾸 강조한다는 건 그게 실천되지 않는 사항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서, 세상 어느 단체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려면 호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는 않지 않은가?
당연한 일은 가만히 냅둬도 될 만큼 당연하기 때문에, 굳이 강조할 일도 없는 것이다.
범죄자들이 의리를 따지는 건 그래서다.
‘같은 패밀리끼리 의리를 져버리면 피의 보복이 따를 테니, 배신 따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나는 라리루라의 긴장감을 느끼면서 눈을 반개했다.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새끼들이 자기 목숨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운다?
그건 여길 벗어나도 뒤따를 ‘추격자’에게 보복당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는 배신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인하고 철저한 뒷배가 있다는 것이었다.
〈캬아아아앗─!!〉
눈이 충혈된 변발 검사가 다시 환검을 펼쳤다. 마나를 무리하게 끌어올렸는지 상처를 입고도 검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그 정밀도는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그에게 자기 기술의 정확함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뒤에서 같이 덤벼주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타닷. 라리루라가 풋 워크를 밟았다.
환검이 다가오는 속도보다 그녀가 뒤돌아서 뛰는 속도가 더 빨랐다.
라리루라는 머리를 노리는 철퇴를 베개 싸움 중에 솜베개를 낚아채는 것처럼 빼앗고, 철퇴의 주인을 뒤로 던져버렸다.
〈흐억?!〉
─푹푹푹푹!
빠른 속도에 거침없는 손속이 가해지자 철퇴를 휘두르던 월향 패밀리의 간부는 그대로 동료의 검에 꼬챙이가 되었다.
라리루라는 그렇게 둘의 발을 묶고 마지막 적을 노렸다.
도끼를 무기로 쓰던 그는 공포에 떨면서도 시간을 벌려는 듯 허접한 투척을 감행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건 완전히 역효과였다. 저글링으로 단련한 라리루라의 캐치볼 능력은 날아오는 도끼의 손잡이를 깔끔하게 낚아챘으니까.
─붕붕붕붕! 퍼억!!
0.1초만에 원주인에게로 돌아간 도끼는 사랑하는 주인님과 애틋한 키스를 나누었다. 목숨이 사라져버릴 만큼 격렬한 애정교류였다.
라리루라는 눈을 까뒤집고 절명한 마피아를 확인하고 돌아섰다.
동료를 걷어차서 검을 뽑아낸 변발 검사가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그는 자신의 원패턴 검술에 스스로 어이가 없어진 것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실실을 품은 검의 묘리가 내 자랑이었건만, 상대도 안 해 주는군.〉
〈고리타분한 눈치 싸움이 하고 싶었으면 너희 말고 옆집 도박장 친구들이랑 놀았겠지.〉
〈크하하하! 그건 그렇군. 도박은 이기면 돈이라도 딸 수 있으니까.〉
라리루라는 그의 웃음을 들으면서 팔을 빛살처럼 휘둘렀다.
〈끄악!!〉
도망치려던 테무르굴의 뒤통수에 묵직한 지갑이 적중했다.
아마 던질 게 없어서 자기 지갑을 던진 거겠지만, 지폐가 없는 이세계의 지갑은 묵직함의 수준이 남다르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까 테무르굴의 생사가 걱정될 정도였다.
〈……후우.〉
변발 검사는 보스 뚝배기가 재활용 심사에 들어가야 하는 처지가 됐는데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부릅! 살기가 넘치는 눈초리가 사납게 뜨여졌다.
〈내 생애 최후의 일검, 받아보거라!!〉
나는 뱀 대가리를 로브 밖으로 내놓고 〈번개의 화살(Lightning Missile)〉을 쏴제꼈다.
〈억?〉
외마디 단말마를 남기고 변발 남자는 감전사했다.
보스를 빼면 나머지 간부들도 다 명을 달리했으니까, 놓칠 걱정을 하면서 공격을 자제할 이유가 없었다.
“앗, 선배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이긴 하다만, 너 힘 조절 잘못해서 저 돼지놈 머리 터트려놓은 건 아니지?”
그게 걱정되서 지진부진한 싸움을 끝내려고 일부러 머리를 내민 것도 있었다. 라리루라는 그 말에 자기도 걱정된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게 쓰러진 보스의 맥을 짚는 라리루라.
“으음…… 모르겠네요!”
“하하. 맥까지 짚길래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하긴 나도 남의 생사를 확인하는 건 별로 자신이 없었다.
‘ᚨ(Ansuz)의 룬을 쓰면 뒤졌나 안 뒤졌나 보이겠지.’
그리 생각한 내가 변신을 풀려고 했을 때였다.
나랑 라리루라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테무르진의 몸에서 갑자기 흘러나오는 검은 마나가 기둥처럼 솟아서 천장과 바닥을 관통했다.
푸화아악─!
벌레가 번데기를 짜는 실타래처럼 솟아나는 마나!
라리루라가 입을 싸물고 백 덤블링을 했다. 테무르진은 꼭 멱살을 잡혀서 일어세워진 취객처럼 이상하게 기상(起床)했다.
주먹을 쥔 라리루라가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암만 초인이라도 땅에 손발을 짚지 않고 일어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저건 누군가가 테무르진의 시체에 마법으로 개입한 게 틀림없었다.
소름 돋게 일어서는 시체에서부터 귀기 어린 프레셔가 뿜어졌다.
좁은 방이 더 좁아진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시체를 지배하는 누군가는 졸부 취향으로 꾸민 이 공간을 사방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키잉!
나는 그 위험성을 간파하고 ‘오딘의 눈’을 개안했다. 부작용 같은 걸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방 안에 우리들 말고 인기척은 없다.
내가 간파하지 못한 수단으로 숨어 있나? 아니면 원거리에서부터 조작 중인가?
정답은 후자였다.
‘……실?’
테무르진의 몸은 보이지 않는 실타래에 묶여서, 주머니 속에서 이어폰 줄에 꼬인 영수증처럼 변모해 있었다.
대충 보면 <꼭두극(Puppetry)>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별종의 마법이다.
‘오딘의 눈’이 그 복잡한 구조를 마법을 가장 작은 단위로 해체했다.
술식을 해부하는 것으로 어떤 마법끼리의 결합해서 제작한 마법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영혼의 접신과 시체의 조작.’
포괄적으로 봐서 언데드 화(化) 흑마법의 한 갈래다.
다시 말해서, 미리 마법을 걸어둔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어서 술자의 의식을 빙의시키는 흑마법이었다.
〈……수족 중의 하나가 죽어가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테무르진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투자해둔 ‘채굴장’이 박살나고 있었군 그래. 노력이 가상해서 사업 자금을 지원해 준 게 엊그제의 일인데 말이야.〉
─뚜둑!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는 테무르진의 손으로 그 목을 분질렀다.
얄궂게도, 그것은 테무르진이 자기 부하인 갈스를 죽였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최후였다.
하지만 갈스와는 차이가 있었다. 테무르진은 부러트리고서 바로 자기 목을 다시 이어붙였던 것이다.
〈사업 투자는 손실을 전제로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작업장에 분탕을 친 녀석을 놓쳐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테무르진의 흰자가 검게 물들었다.
빈사 상태였던 시체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시체의 말단까지 어둠과 음의 마나가 스며든 듯 했다.
‘……칫.’
나는 거기까지 분석하고 ‘오딘의 눈’을 껐다.
뇌에 지나친 청량감이 쏟아져서 머리가 띵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적에게서 느껴지는 살기가 대화의 여지를 엿볼 수 없을 만큼 뚜렷한 것이 이유였다.
‘라리루라를 지키려면 마법이 필요해.’
‘오딘의 눈’을 켠 채로는 마법의 영창이 불가능하다.
말이 이상하게 나와서는 룬 마법을 못 쓴다. 예외는 무영창 마법이나 야수회귀 정도다.
물론 오딘의 지혜를 빌리는 상태에서 오딘이 만든 마법을 못 쓴다는 게 어이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내 그런 조촐한 감상은 금방 끊겨버렸다.
대쉬를 개시한 테무르진의 시체가 폭주하는 전차처럼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듯, 정체 모를 난입자는 육중한 몸에 마나를 감고 주먹을 내지르게 시켰다.
─슈파파파팟!!
라리루라와 난입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몇 합을 겨루었다.
양쪽 모두 피해는 없지만 얼굴색은 정 반대였다. 탐색전일 뿐이었지만 라리루라는 얼얼해진 손을 움켜쥐면서 뺨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리고 남자의 입가에는 테무르진의 얼굴에 안 어울리는 난폭한 웃음이 만개했다.
〈실력이 제법이야! 어디에서 왔는지나 들려주겠나!!〉
〈라스베거스!〉
〈듣도 보도 못한 지명이군!!〉
내가 가르쳐준 가짜 출신지를 읊은 라리루라는 매섭게 파고드는 어퍼컷을 회피했다.
─파앙!! 달인의 끊어치기 어퍼컷이 라리루라의 턱이 있던 공간의 공기를 터트렸다.
타점과 운동 에너지를 세밀하게 지배하는 권타!
몸 속에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을 둘렀어도 맞으면 내장이 상할 게 분명했다. 몸을 전혀 단련하지 않은 테무르진의 주먹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위력이었다.
‘변발 놈들이 무서워 하던 게 이 놈인가!!’
보스인 테무르굴한테 부하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만들 정도의 카리스마는 없었다.
이 새끼는 연구와 자기도취에 충실한 골방쟁이 마법사와는 다르다.
마법을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는데 거침이 없는, 폭력적인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성격은 천지차이였지만 마법을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는 나랑 비슷할지도 모른다.
‘꼭두각시를 안 쓰는 라리루라로는 못 당해. 변신을──’
적의 강함을 확인한 라리루라가 공격에 소극적이 되고, 내가 변신을 풀고 뛰쳐나가고자 했을 때였다.
끼이이익─!!
비만 체형이 거짓말처럼 회전하면서 돌려차기를 날렸다.
이건 라리루라로는 절대 못 피한다. 100% 맞을 것이다!
나는 라리루라한테서 떨어지려던 걸 억지로 멈췄다.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을 발차기가 꽂히기 직전의 복부에 집중했다.
이런다고 힘을 강화하는 효과가 늘어나진 않는다.
그래도 마나 코팅의 부피를 늘리면 가죽을 여러 겹 겹치는 것처럼 방어력의 상승은 바랄 수 있었다.
〈카흑…?!〉
살찐 다리가 이상할 정도로 예리하게 라리루라의 배를 걷어찼다.
챔피언의 잽처럼 발끝을 맞추고 순식간에 다리를 회수하는 기술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그건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맨손전투의 달인이 보여주는 기술이었다.
‘뭐하는 놈이야, 대체!’
고위의 흑마법과 그것 못지 않은 육탄전 실력이라니?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살찐 간신배의 몸으로도 숨길 수 없는 난폭함도 좌시할 수 없었다. 마치 폭력의 권화 같은 느낌마저 드는 남자다.
‘3대 패밀리의 보스인가? 어디의 녀석이지?!’
좆도 쓸데없는 추리가 뉴런의 바다에서 파문을 일으켰다가 사라졌다. 라리루라가 실시간으로 맞고 있는데 저 새끼 정체 같은 걸 생각할 틈이 어딨냐, 시팔!
〈오러? 아니, 아니군! 재미있는 기술인걸!〉
대장과 소장을 터트려서 끊어버릴 위력의 발차기가 잠깐의 기침밖에 유발하지 못했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들기라도 한 듯 가가대소를 터트리면서 라리루라의 다리를 후리려고 들었다. 라리루라는 낮게 뛰는 것으로 바닥을 쓰는 킥을 피했다.
〈죽은 자도 잘만 다루면 생각보다 말이 많은 법이지!! 네 시체와 대화하면 대답을 들을 수 있겠나!!〉
〈아아, 진짜! 오래간만에 고향 땅에 돌아와서 듣는 얘기가 몸이 어쩌니 하는 성희롱 뿐이라니, 최악의 하루야!!〉
라리루라가 이를 악물고 고함쳤다. 내게 뭔가 말을 걸어올 여유도 없는 듯 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초조하게 틈을 살폈다.
‘아직은 어떻게 피해내고는 있지만 시간 문제야.’
목에 감겨 있으니까 안다. 이 녀석,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라리루라의 장점인 유연함과 빠른 몸놀림, 임기응변 등이 긴장감 때문에 퇴색돼 버린 것이다.
설마 언데드로 만들어서 빙의했을 뿐인 육체로 이렇게까지 강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그것도 저렇게나 폐급인 몸뚱이인데!
‘공격할 틈을 찾아야 돼! 저 새끼가 반격을 못 하는 순간을 노려서 내가 족치는 수밖에 없어!’
내가 몸에서 떨어지면 라리루라에게 마나 코팅을 둘러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잠깐 떨어진 사이에 저 새끼 공격에 1대만 맞아버려도 우리 후배님은 고향 나라에서 초상을 치뤄버릴 것이다.
라리루라의 방어력이 못 미더웠기 때문에 뱀 모드로 변신해서까지 이러고 다니던 것 아닌가. 나는 혀를 찰 시간조차 빈틈을 간파하는데 활용했다.
─촤아악! 촥!
그때였다. 테무르진이 빈 공간에 손을 휘두르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뻗어나와서 라리루라의 몸에 붙었다.
나는 그것과 비슷한 마법을 써 본 적이 있었기에 어떤 마법인지 눈치깔 수가 있었다.
〈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