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무릎, 허리까지 충격을 완화하며 바닥을 박차는 힘을 낭비없이 속력으로 삼는 기술이다. 나는 시려오는 머리통을 붙잡고 스텝을 와리가리로 밟았다.
파앙─!
기사가 대쉬했다.
가속에 쓴 건 오른발 뿐이다. 중간에 1번 더 가속해서 날 착란시킬 생각이었겠지만 간파당한 이상에는 의미가 없었다.
캘러미티 월(Calamity Wall)
나는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을 벽처럼 펼쳤다.
〈제길!〉
달려오던 기사도 폭포수를 뒤집은 것처럼 위로 뿜어지는 불꽃을 보았지만, 멈추지는 못한 듯 했다. 후드가 벗겨진 투구의 바이저 밑으로 자책이 서린 눈빛이 보였다.
─콰앙!
충돌한 기사는 과속방지턱에 들린 차량처럼 천장으로 튕겨나가버렸다. 존나 튼튼해 보였으니까 저 정도로 죽진 않겠지.
딴 생각을 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가죽 갑옷을 뚫지는 못 했지만 아프긴 했다.
고지를 선점한 궁수는 화살의 위력 부족에 턱이 굳었지만 가져온 화살통을 비우려는 것처럼 연거푸 화살을 쏴댔다.
매직 아이템의 힘인지 화살의 궤적은 물 속의 뱀장어처럼 휘어댔다. 세상에 시발, 궁술에서 변초를 다 보는군. 궁수가 주인공인 무협지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 했다.
〈……게르마늄 원나잇이 초특가!〉
오딘의 눈을 끄는 걸 깜빡했군.
─푸드덕!! 나는 새들과 교류하면서 습득한 깨달음을 실현시켰다. 넓게 펼친 팔 부분의 불꽃을 투우사의 커튼처럼 마구 휘저어서 화살을 걷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아까 본 기술을 흉내내 봤다.
‘이렇게인가?’
발에 스프링처럼 마나를 압축시켰다가, 진각을 밟으면서 그 반발력을 속도에 실었다.
─퓨웅!
어설픈 첫 시도였기에 만족스러운 속도는 안 나왔다. 물론 뭉게뭉게-순보 없이 물류창고의 창틀에까지 점프했으니까 제 역할은 다했다고 쳐 주자.
…끼이이익!
놀랍게도 궁수는 도망치지 않고 나를 조준했다.
점프한 상태에서는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투구가 없으니까 머리만 맞추면 될 것처럼 보였겠지.
‘뭐, 머리 안에도 마나 코팅은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된 거, 전의를 꺾어버릴 심산으로 머리통에 혈수마공의 불꽃을 피웠다. 내 머리는 불타는 해골바가지로 변모하여 흉신악살처럼 타올랐다.
〈……힉?!〉
궁수는 두려움에 손을 떨었고, 화살은 그렇게 빗나갔다.
불꽃 대가리에 스쳐간 화살은 파이어 애로우 상태로 천장에 꽂혔다. 그리고 나는 힘 조절을 한 발차기를 그녀의 배에 먹였다. 뭐, 대충 발 끝으로 툭 건드린 수준이다.
하지만, 심폐정지술 ON.
고스트 라이더 킥(Ghost Rider Kick)
〈──쿠흑, 컥!〉
출력을 조절한 심폐정지술은 제압에도 효과적이다.
내장을 맞고 태연하려면 깡이 개쩔던가 나처럼 몸 안에도 방어수단이 있어야 했다.
그 왜, 여자를 상대로 하는 비유로는 어떨까 싶긴 해도 남자들이 외장형 내장인 불알을 맞을 때랑 비슷한 고통일 것이었다.
추락하는 궁수를 짐짝 들듯이 붙잡고 착지.
〈……마님!〉
천장에 꽂혔던 기사도 때를 같이 해서 추락했다. 그녀는 뭐 철인이라도 되는지 후딱 일어나서 나를 보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마님? 이 사람이?
나는 궁수를 쳐다봤다가 좀 놀랐다. 싸우는 중에는 관심을 못 가졌는데, 이 사람 왼손 약지가 없었다.
그냥 없는 게 아니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것이었다. 당연히 싸우던 중에 생긴 상처인 게 아니고, 원래 여기 오기 전부터 손가락을 잃은 듯 했다.
내가 꺼벙하게 궁수를 쳐다보자 실언을 눈치챘는지,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가 성을 냈다.
〈그 분을 놓아라!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알겠소.〉
─철푸덕! 내가 손을 놓자 배를 끌어안고 앓던 마님이라는 분께서는 바닥에 안면을 찧었다.
……이 사람도 가면 쓰고 있지? 자기 와꾸 개박살났다고 나더러 책임져 달라고 하면 곤란한데.
자신의 레이디가 프라이팬에서 탈주한 부침개처럼 엎어지자 기사는 펄쩍 뛰면서 기함했다.
〈무, 무슨 짓이냐!!〉
〈……놓으래서 놨소만?〉
‘니가 하라매’라는 말을 돌려서 전해주자 기사는 합죽이가 돼 버렸다.
아마 어이가 없는 모양인데, 나도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다 이거에요.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하오만, 난 그대들을 해칠 생각이 없소. 상처없이 이기긴 힘든 난적이었기에 손속에 가감을 두기가 어려웠을 따름이지.〉
〈……우리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고?〉
〈그렇소. 이해 바라오. 내가 무릎 꿇은 다음에 말문을 열면 무슨 말을 하든 패자의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 아니오.〉
같은 생각이었는지 기사는 다시 합죽이가 됐다.
─비틀.
마님이라고 불린 궁수는 일어서서는 내게 주의하며 기사의 곁으로 갔다.
그래서 나는 양손을 살짝 들고 대기했다. 야간에 선임이랑 근무 교대를 나온 신병 같은 꼬라지였다.
궁수는 놓친 활의 위치를 확인하고서 말했다.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사죄 드려야만 하는 입장인 건 저희겠죠. 하지만 저희들도 의심만으로 선공을 가한 것은 아닙니다.〉
〈나랑 어디서 만난 적이라도 있소?〉
〈가면 밑의 얼굴을 모르는 한은 무의미한 가정이겠죠. 단, 영혼과 대화하는 강령술사도 흔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발, 그걸 보고 있었다고?
나는 살짝 초조해졌다. 그러고보면 영혼을 보거나 대화하는 건 나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첫 화살이 내가 심문하던 마피아의 영혼을 터트려버렸던 걸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저 사람도 영혼이 보이는가 보군.’
영매 체질이라는 걸까. 나는 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생각해뒀던 변명을 읊었다.
〈착각 마시오. 나는 그대들 서방인들이 말하는 강령술과 같은 사술을 습득한 자가 아니외다.〉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어요.〉
이해한다. 나도 여기에 있던 마피아 새끼들을 심증만으로 줘패버렸으니까,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피차 도토리 키재기다.
〈이건 중원에서 흔히 말하는 무당의 굿이오. 나는 도술을 습득한 중원의 무림인으로써 환단고기에 적힌 괴력난신과 대화하는 기술을 익혔소.〉
〈주, 중원? 환단…… 무당?〉
〈그렇소.〉
나는 태연하게 개소리를 읊었다.
〈그대들 국가에서 말하는 샤먼의 일종이오. 본디 ‘국조오례의’라는 절차에 기반하여 제사로 영혼을 초청하는 과정이 존재하나, 내가 대화하던 자는 생전에 악인이었고 여기서 죽었기에 일부 과정은 생략했소.〉
〈……흑마법이 아니라고요?〉
〈소저도 영매라면 알 것이오. 내게서 사이한 기(氣)가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소저와 호위 분도 살초를 피한 것 아니오? 나도 초수를 겨루기 전까지는 눈치 못 챘소만.〉
힘 조절을 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저들이 날 죽이려고 들어도 승산이 반반이었을 건데, 화살만 해도 마지막 전까지는 내 급소를 피해서 쏘더라.
그건 저들도 처음에는 날 죽일 맘이 없었단 뜻이었다.
〈……중원이라는 국가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대들이 부르는 키타이, 몽골리아요. 우리들은 그렇게도 부르지. 타타르니아의 엘프들과 교류가 있는 동방의 국가. 나는 황무지와 사막을 건너서 이 이역만리까지 왔소.〉
〈가면을 벗어주실 수는…… 아니, 그건 어렵겠죠.〉
마님이라고 불린 여자는 암만 생각해도 나보다 연하일 것 같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로마니아를 찾아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나요?〉
〈……우리는 그대들의 문화를 모르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소저가 무당과 굿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문화 교류를 위해서 찾아오셨단 건가요?〉
충복처럼 아가리 하고 있는 기사에게 부축을 받다가도 뭔 개소리냐는 듯 묻는 궁수.
시발, 이건 좀 아니었나? 지금 상황에 딱 맞게 대답하면 할 말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자 노력하면서 말을 번복했다.
〈그렇지 않소. 그건 나 개인이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지. 허나 만약 지금 우리의 싸움이 국가 간의 분쟁으로 번진다면, 지금처럼 간결하게 끝날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이시죠?〉
무슨 말씀이시긴 시발. 변명 생각할 시간을 버는 거지.
나는 개소리를 쥐어짜내며 멍멍댔다.
〈이 도시에 우리 중원의 동포가 있을 것이오. 대진국(大秦國) 로마니아(羅馬尼亞)에 해악을 끼치고, 그대들이 이름조차 모르는 몽골리아를, 국가 차원에서 이교도로 여기게 만드는 사파(邪派)의 암상인들이.〉
말싸움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얘기가 있다. 먼저 기세를 잡으면 반론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누굴 부를지 모르니까 함부로 목소리를 키울 순 없었다.
〈……중원의 것은 중원에게.〉
그래서 나는 성량 대신에 눈에 담은 살기를 키웠다.
─화악.
불처럼 뜨거운 살기가 유형의 파도가 되어서 창고를 훑자, 그녀들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겨울에 내복 바람으로 쫓겨난 오줌싸개 소년들처럼 몸을 떨었다.
〈나는 나의 무(武)로써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자 이곳에 왔소. 의와 협을 잊은 불한당들의 만행이 중원을 사악한 땅으로 여기게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아눌루스 패밀리를?〉
목이 조인 새처럼 되묻는 궁수.
나는 근엄하게 수긍했다.
〈그들 전부를 벌할 생각은 없소. 나는 옥황상제의 대리자처럼 굴 위인이 아니오. 단지, 이 도시를 더럽히는 오욕칠정의 흐름이 중원에서 시작되었다면…… 그것을 끊는 것은 나의 천명이오.〉
이렇게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될까? 상대는 대충 봐도 귀족 계층 같아서 약간 뒷감당이 걱정되긴 했다.
‘아니지. 어차피 이 사람들이랑 계속 만날 것도 아니잖아.’
만약 얽히게 되더라도 그 키타이 마피아 새끼들이라면 코르보나 패밀리의 보스나 세력도에도 지식이 있을 것이다.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얼굴을 들킨 것도 아니고, 목소리도 다른데 뭐.
〈말로만 해서는 믿지 못하리란 것, 십분 이해하오. 그러니 맹세하겠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대협의 풍모를 보이고자 가슴을 퍽 쳤다.
〈내 스승이었던 엘프의 명예에 걸고, 지금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오.〉
고맙다, 예르나.
니가 뒤져서라도 내 도움이 돼 주는 날이 오긴 하는구나.
〈……믿겠습니다.〉
내가 스승의 명예까지 들먹이자, 마님인지 마담인지 하는 아가씨는 냉큼 믿어버렸다. 너무 쉽게 넘어와서 거짓말을 한 것에 죄책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마님.〉
〈조용히. 섣부르게 움직인 건 저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책임을 지우지는 않을 거에요.〉
그 말에 책임소재를 확실히 했다고 안심한 건 아니겠지만, 여기사는 다시 조용해졌다.
궁수는 활을 등에 매고서 말했다.
〈먼 나라의 전사님.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예수게이.〉
〈예수게이 님……. 기억했습니다.〉
아니, 잊어도 되는데.
기왕이면 잊어줬으면 하는데.
〈저희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예수게이 님과 저희는 협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협력이라.〉
궁수의 말에 나는 차분하게 대답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진땀을 뺐다.
‘시발, 좀 뇌절이었나?’
적당히 상황을 모면하려고 내뱉은 말이 스노우볼을 굴린 게 아닐까?
존나 이제 밤도 늦었는데 외간남자한테 추파를 던지는 건 어떨까 싶어요.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 아내들은 내가 새들한테 닭고기만 던져주고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리는 중일 것이었다.
‘안 되겠다. 튀자.’
내가 독자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선은 여기까지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서라면 서로 ‘그런 새끼들도 있었지’ 하고 잊어버려도 무방한 시점이다.
하지만 만약 이 사람들 뒤를 따라가면?
협력하든가 함구하든가,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만남을 가지기엔 밤이 늦었소.〉
그래서 나는 그윽하게 달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수능 국어 지문으로 단련한 이과충의 수사적 표현을 한계까지 짜낸 것이었다.
받아라, 분위기 전환!
〈네? 밤이 어쨌다고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궁수. 이게 안 통하네.
이게 다 가면이 내 잘생긴 옐로 페이스를 가려서 그렇다. 솔직히 얼굴 깠으면 통했음.
〈크흠……. 소저의 일행이 따로 있을 것 아니오? 중원에서는 마님이라고 불릴 정도의 지체 높으신 분은 홀몸으로 다니는 법이 없소만, 로마니아는 다른 것이오?〉
〈……물론 양지에서 저를 보필하는 시종들도 있지만, 예수게이 님께 소개드릴 사람은 3명밖에 안 됩니다.〉
그거 수틀리면 5대 1로 맞짱이라는 소리네요? 감사합니다. 내가 미쳤다고 거길 따라가겠니?
나는 말을 계속하려는 궁수에게 손바닥을 펼쳤따. 지구에서 전단지를 뿌려대는 아줌마들을 상대로 단련해 온 단호한 거부 사인이다. 삐끼 멈춰!
〈그게 좋지 않다는 뜻이오.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하나 나는 벌써 소저의 몸에 상처를 입혔소. 내가 소저에게 신임을 받는 종자라면 느닷없는 괴한과 협력하는 건 어려울 듯 하군.〉
〈제가 설득하면──〉
〈내 말을 조금만 더 들어주시오. 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외다. 후일 다시 만남을 잡으면 되지 않겠소? 소저가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불러주시오. 접선 방법은 맡기겠소.〉
물론 나는 안 나올 거다.
지금도 내 창의력이 스쿼트 다음날의 허벅지처럼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지금 이상으로 임기응변의 개쌉소리를 주워섬겼다간 예수게이의 설정에도 모순이 드러날 것이었다.
궁수는 그렇게 말해주자 대답이 없었다.
‘쓰벌, 얼굴이 안 보이니까 존나 쫄리네.’
어쩌지? 그냥 입 싹 닫고 튀어버릴까?
하지만 진짜 귀족이라면 자기를 습격했다든가 하는 선동과 날조로 예수게이를 지명수배자로 만들지도 모른다.
현상금이라도 걸렸다간 큰일 난다. 예수게이가 산적왕이 돼 버릴 위기일발의 상황이다. 하여튼 이 시발 주댕이가 웬수지.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