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3화 (333/1,009)

─탭탭탭. 모코나가 대답이라는 듯 팔을 치자 라리루라는 웃으며 손을 놓았다.

〈케흑! 켈록, 켈록! 으휴…… 너 하는 걸 보니까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 우리가 그럴 줄 알았지.〉

모코나는 목을 만지면서도 딱히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저런 건 진짜로 사이가 좋지 않으면 못 할 짓이긴 했다. 물론 치사량 직전까지 허그를 당했던 그녀는 보복이라는 듯 라리루라의 뺨을 잡아챘다.

〈이거이거, 너 몸 관리는 제대로 하니? 기예 연습 안 하고 탱자탱자 노느라 살 찐 건 아니지?〉

〈으에에엑……. 놔쥬세여…….〉

〈후후.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옛날 생각 나네.〉

그녀는 팔을 뱅글거리며 돌리는 라리루라의 뺨을 쭉 잡아당기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뭐, 아무튼 잘 오셨어요. 안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까 따라와 주실래요? 단장님도 마침 쉬고 계시거든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아, 라리루라? 너는 서커스단 분들이랑 얘기 나누다가 와도 돼. 간만에 만나뵙는 거잖아.〉

〈음…… 음…….〉

라리루라는 잠깐 어쩔까 고민하는 눈치였다가, 그리움을 못 이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코나는 그 대답이 맘에 들었다는 듯 웃고서 라리루라를 놔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건물로 들어갔다.

〈엉? 모코나, 귀족 분들이 오늘 방문할 예정이라도── 엥?〉

〈하이피스 씨 안녕♡! 오랜만이네요?〉

〈아니, 니가 왜 여깄냐! 와! 오늘 돼지 꿈도 안 꿨는데!〉

라리루라를 환영하는 인파는 금방 모여들었다. 라리루라는 망설이던 게 거짓말처럼 금방 웃고 떠들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라리루라. 얘기 나누고 있어. 우린 좀 이따가 올게.〉

〈네에~!〉

라리루라의 밝은 대답을 듣고, 우리는 모코나를 따라서 2층의 응접실로 갔다.

〈여기에요! 휘황찬란한 곳이지만 편히 계세요!〉

보통은 누추한 곳이라고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방 안을 보고 목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진짜 말 그대로 휘황찬란한 게 보통 공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귀족이 아니면 서커스단에 찾아와서 얘기를 나눌 일은 없겠지. 여긴 귀족들 전용 응접실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나랑 같은 생각이었는지 프랑은 좀 움츠러들었다.

“헤헤. 왠지 차를 내줘도 예법대로 마셔야 할 것 같네.”

“뭐 어때. 여기 사람들도 그런 거 신경 안 쓰면 서커스 못 할걸?”

─간질간질. 다나는 안심하라는 듯 프랑을 간지럽혔다. 아내들끼리 잘 다독여주고 있으니까 내가 따로 할 말이 없군.

“……흠. 홍차 전용 과자인가? 세상에는 별 게 다 있군.”

“정신 차려 요것아. 담번에 우리 집에도 채워넣든가 하면 되잖아.”

베로니카만 찬장에 놓인 과자에 정신이 팔려 있길래 가만 있으라고 옆구리를 찔러뒀다. 우리 시종님이 음식에 호기심을 안 갖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이해는 한다.

그렇게 몇 분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깔끔한 옷을 입은 금색 머리카락의 중년 여성이다. 서커스단의 대표 사고뭉치가 자리를 비워서인지, 몇 달 만에 신수가 훤해진 그녀였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의 단장인 알렉산드라 레프스입니다.〉

그녀는 저번에 헤어졌을 때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서 친절하게 웃었다.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서 기쁘군요.〉

우리에게 인사한 알렉산드라 씨는 슬쩍 방안을 살폈다.

나는 그 눈짓의 의미를 알고 문 밖을 가리켰다.

“라리루라라면 밑층에서 단원 여러분들이랑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 역시 그랬나요? 어쩐지 밑이 많이 시끄럽더니.”

붙임성 좋게 웃은 알렉산드라 씨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브리타니아 말에 맞춰주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아직 테이블이 휑하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이런. 안내해 준 단원이 차도 안 내드렸나 보네요.”

“아뇨, 뭘요. 갑자기 찾아온 건 저희인데요.”

“후후. 그래도 단원들이 어디 가서 손님 맞이가 형편 없는 서커스단이라고 소문을 내면 곤란한걸요. 실례지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죠. 편하게 하세요, 편하게.”

재삼(再三) 권했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이다. 알렉산드라 씨는 응접실에 있던 매직 아이템으로 주전자를 덥히면서, 내 말대로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일부러 루리…… 라리루라를 두고 올라오셨다는 건, 혹시 제가 보호자 역할을 방기한 걸 혼내주러 오신 걸까요?”

“에이, 설마요.”

내가 어디 그럴 자격이 있겠는가. 라리루라가 진짜 한참 더 어린 10살배기 꼬맹이였거나 하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본인도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고.’

라리루라도 아쉽다든가 서운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내가 혼자 씩씩대는 것도 우스울 것이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옆에 있는 프랑이랑은 구면이시겠지만, 다른 두 사람은 아마 처음 보실 겁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예의 상 가족들부터 소개했다.

“제 아내인 다나 베르베이아와 베로니카 에클립시스입니다. 분에 넘치게도 이렇게 세 명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죠.”

아내만 셋이라는 고백은 구면인 사람한테 당당하게 말하기엔 좀 겸연쩍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뭇거리거나 하면 우리 눈치 빠른 아내님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그녀들이 나 때문에 못난 남편놈이 얘기하기 힘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미혹 때문에 아내들에게 배려를 하게 만드는 건 마초가 할 짓이 아니잖은가.

“어머. 사모님이 세 분이나?”

다행히 알렉산드라 씨는 놀란 건지 아닌지, 유연한 미소로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는 얘기를 받아넘겼다.

“후후. 부럽네요.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미혼이라서.”

다나와 베로니카의 목례에 답하며 그녀는 뛰어난 처세술을 보였다. 흠을 드러낸 상대에게 자신도 비슷한 얘깃거리를 꺼내서, 분위기를 무마한 것이다.

나도 이런 건 배워둬야겠군.

“그만큼 일에 진력을 다하셨으니 지금의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이 있는 거겠죠. 저는 솔직히 존경스럽네요.”

“물론 그건 제 자랑이랍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일까요? 옛날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생각이 들고는 한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사람 수만큼 척척 찻잎을 세팅하는 알렉산드라 씨.

찻잎 칼이 고형 카레처럼 뭉쳐있는 찻잎을 긁어냈다.

“어쩌면 고아원에서도 겉돌던 5살배기 사고뭉치를 10년도 더 키워오면서, 내 자식을 키우는 기분을 느껴서였을지도 모르고요.”

그 말이 하고 싶었다는 것처럼, 매끄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그래서 라리루라는 색다른 경험도 겪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길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계속 달리거나 멈추는 것 말고는 선택의 기로가 없거든요.”

잘 나가는 서커스단답게 비싼 매직 아이템은 금방 찻물을 끓게 만들었다. 좋은 향이 퍼지자 알렉산드라 씨는 막힘없이 차를 우려냈다.

“저는 이제 와서 다른 길을 찾아볼 수도 없잖아요? 등에 짊어진 인생만도 수십인 걸요. 라리루라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어…… 본의 아니게 짐을 더 짊어지시게 만든 저는 따로 드릴 말이 궁해지는군요.”

“아, 노르드 씨가 구해주셨던 친구들 말인가요? 후후. 시간 되시면 얼굴 한 번 비춰주세요. 그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프릭쇼의 출연자, 혹은 피해자였던 그들을 떠올리던 나는 이번에도 배려를 받고 약간 어색해졌다.

뭘까. 이 웃어른이랑 말씀을 나누는 기분은. 아니 그야 웃어른이 맞기는 한데, 라리루라 건도 있어서 그런가. 왠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다.

가감없이 본심대로 말하면, 남의 집의 귀한 딸내미를 데려가는 나쁜 놈이 된 듯한 기분.

“사실 예전부터 그런 권유는 자주 했었어요. 하지만 그 애, 꽤 집착이라고 해야 하나…… 애착이 강하잖아요? 서커스단 밖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도 어려워 했어요.”

“그랬군요.”

꼭두각시를 새로 만들지 않고 조금씩 개조해가며 3호, 4호 하며 부르는 것.

옛날에 샀다는 낡은 랜턴을 애지중지 들고 다니는 것.

자기 혼자서만 여관에 묵는 게 싫어서 꾀를 부려가며 우리 집에 찾아오곤 했던 것.

그밖의 이모저모에서, 나도 라리루라의 정이 깊고 애착도 많은 면모를 봐 왔다.

그런 녀석이 서커스단 단원들이랑 잘 지내는 중에 단장님께 다른 일을 해 보는 건 어떻냐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아마 ‘내가 혹시 뭘 잘못해서 쫓겨나게 생겼나?’ 하는 생각부터 들지 않았을까?

“사람들이랑 맺고 끊는 걸 어려워 해서인지, 철 없을 때는 도시에 들릴 때마다 재능 있는 고아들을 서커스단에 가입시키자고 졸라대기도 했죠.”

“정이 많은 거죠. 따님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어머, 딸이요? 듣기 좋은 말씀을 해 주시네요.”

차를 트레이에 담아서 가져온 알렉산드라 씨는 우리 앞에 잔을 뒀다.

나는 감사인사를 하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자 소파에 앉은 그녀도 찻잔을 들며 가볍게 윙크했다.

“그래서 이렇게 빙 돌아가며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느냐면, 그 애가 ‘바깥’에 관심을 가진 게 기뻤다는 얘기에요.”

“이거 송구하네요. 제가 뭘 특출나게 잘해준 것도 아닌데.”

“언제나 계기는 사소한 법이죠. 말씀해 주신대로 제가 그 아이의 어미라면, 딸이 변해가는 걸 눈치채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요?”

차를 마셔서 목을 축인 알렉산드라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들으셨지 모르지만, 사실 저는 그 애를 많이 엄하게 키웠답니다. 그러고도 깨방정 떠는 천성은 바꿔놓질 못했지만요.”

“이해합니다. 서커스는 다칠 일도 많으니까요.”

“어머나. 누누이 고마운 말씀만 해 주시네요. 라리루라가 그렇게 칭찬할 만 해요.”

“……칭찬요?”

예전에 헤이스벤트에 있을 때 얘기인가? 내가 고개를 모로 꼬자 알렉산드라 씨도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애가 말 안 하던가요? 저희랑 헤어진 뒤에도 모험가 길드니 마법사 길드니 하는 곳에서 편지를 종종 보내왔어요.”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좀 예전 일이긴 한데, 내가 모험가 길드에 라리루라를 데려갔을 때였던가.

사소한 용무로 마법사 길드에 방문하기 좀 그래서, 길드 창구를 통해 티르시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당연히 라리루라도 그때 내가 하는 걸 봤었고 말이다.

후일에 마법사 길드에 가입까지 했던 라리루라다.

티르시랑 만나기도 했다고 하니까, 편지를 보낼 곳은 많았겠지.

하지만 그런 기특한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라리루라도 늘 내 옆에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남는 시간에 소식을 전하고는 했던 모양이다.

‘……라리루라가 나보다 낫네.’

짝사랑하던 남자가 휙 사라져서 쓸쓸해 하던 박사님께 연락 한 통 안 했던 노 모씨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그 애도 참 솔직하지 못하죠? 아무리 저희가 자기를 내버려두고 떠났다지만, 저는 평소에 엄격하게 혼내도 라리루라가 울면서 사과하면 다 받아줬어요.”

알렉산드라 씨는 작게 쿡쿡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만큼은 쫓아오려는 생각도 없더군요. 사실 따라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저희가 얼마나 눈에 띄겠어요? 그 애가 저희의 공연 예정지를 몰랐던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크, 크흠. 어린애는 조금 솔직하지 못한 게 더 귀여운 법 아닙니까.”

와! 왜 그랬는지 짚이는 바가 있네? 내가 헛기침을 하자 프랑도 약간 어색했는지 동공에 지진이 났다.

미안합니다. 새 나라의 못난 어른들이 철부지 아가씨를 홀려버렸는가 봅니다.

‘유랑 중인 서커스단에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동선을 꿰찬 녀석이, 정작 쫓아가지는 않았다?’

음. 이건 빼박이군.

저게 버려두고 간 거면 우리가 앞마당에 집냥이 테레사를 풀어놓는 것도 애완동물 유기겠다.

코끼리까지 있는 대형 서커스단을 뒤쫓아 가는 게 뭐가 어렵겠냐.

게다가 사실 두고 갔대도 거리 차이는 하루밖에 안 났다.

인원이 많을 수록 장거리 이동에는 시간이 걸린다.

홀몸인 라리루라가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을 쫓아가지 못할 이유?

나그가 생각하기엔 읍는 것 같은디?

‘심지어 라리루라 걔, 우리가 묵던 여관 방문 앞에서 쿨쿨 자고 있지 않았나?’

엄마는 갈 거야. 라리루라는 여기 살아! 랬더니 진짜 야호 자유다! 하고 토껴버리는 패기.

그걸 실행하게 만드는 행동력과 결단력.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나더라도 돌아갈 곳과 퇴로를 확보해두는 철저함.

흠. 어딘지 모르게 매우 익숙하군요. 핑크색 맛 났어.

‘이 쓰벌. 이따가 딱밤 한 대 쥐어박든가 해야 하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알렉산드라 씨가 라리루라를 두고 간 이유는 80% 가량 우리 쪽에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독립을 꿈꾼 딸과 딸의 장래를 염려한 어머니의 뜻이 우연히 일치한 것이다.

그리고 일치해버린 원인은 존나 나랑 프랑이었고 말이다.

그래, 시팔. 어째 죄 지은 기분이더라. 내가 죄인 맞았네.

“후후. 어색해 하지 마세요. 아니면 얘기를 좀 바꿀까요?”

알렉산드라 씨는 과자를 권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는 과연 베로니카라도 바구니에 손을 뻗진 못했다.

“저, 똘똘한 앵무새를 한 마리 키운답니다. 저를 따라서 세상 곳곳을 전전하면서 여러 나라의 말을 배우고, 머리도 좋은 녀석이죠.”

조곤거리는 알렉산드라 씨는 옛날 일을 추억하듯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휴. 잡담으로 릴렉스하는 시간인가.

그래. 사람이 숨은 쉬고 살아야지. 국가대표 축구선수도 풀타임으로 뛰면 숨 차서 뒤진다.

나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자 뜨거운 차를 꿀꺽거리며 마셨다.

“그런데 어지간한 선원보다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던 그 앵무새가 있죠? 정작 제대로 날지는 못하는 듯 하더라구요.”

“……예?”

“왜냐면 그 녀석은 매일 새장 안에서만 지냈거든요. 철창을 열어줘도 계속 말이에요. 바깥이 무서웠던 건지, 새장 안에서 만족했었던 건지, 솔직히 저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한 알렉산드라 씨는 너스레를 떨면서 웃었다.

“눈보라가 쳐도, 해가 쨍쨍해도…… 어느 도시, 어느 나라에 있든 새장 안에서 서커스단의 공연장이랑 숙소만 오갔었죠. 그러니 어디 하늘을 마음껏 날아볼 기회가 있었겠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다 제 부덕이었다고 생각해요.”

저기요, 싸장님? 이거 잡담 아닌 것 같은디요?

화제가 360도 회전해서 원위치가 됐는데요? 혹시 그 앵무새, 얼굴에 하트랑 별 그려놓고 아핫♡! 거리지는 않나요?

“서커스단을 번창시키겠다는 제 욕심 때문에 여태 짝을 못 구해준 것도 왠지 좀 미안하구요. 예전에는 단원들끼리 눈이 맞아서 저희 은퇴합니다~ 하면 화가 나던 때도 있었는데…… 사람은 바뀌는 법이네요.”

내가 삐질거리며 등허리에 식은땀을 흘리자, 단장님은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42살이랍니다. 내일 모레면 성인이 되는 라리루라가, 지금의 저만큼 나이를 먹고 돌아와도 65살이겠네요.”

비싼 유리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어쩐지 묵직했다.

“65살. 은퇴를 생각할 나이일지는 몰라도, 어디 가서 객사하는 게 아니라면 천수를 다 누리고 죽기는 좀 모자라겠죠? 다행히 시간은 많겠어요.”

다나가 ‘나랑 베로니카는 왜 델꼬 왔니 시팔아’ 하는 눈빛을 보내는 걸 무시하면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러든가 말든가, 단장님의 미소는 변함이 없다.

‘……아, 글쿠만.’

아까부터 왜 이렇게 쫄리나 했는데.

이 아지매, 아까부터 눈이 안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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