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주인이랑 잘 지내더라도, 종종 얼굴이나 비추러 와주면 좋겠네요.”
넵.
알렉산드라 씨와의 담화는 그걸로 끝났다.
할 얘기도 없고 볼 장 다 봤으니까 꺼지라면서 쫓겨난 건 아니고, 급한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들어보자 루크레겐스의 상인들 중에서 특히 큰 손인 모양이다.
이 건물에 격이 높은 손님을 받을만한 방은 우리가 얘기를 나누던 이곳 뿐이다. 애초에 이런 응접실을 여러 개 만들어둘 이유도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부로 자리를 파(破)하기로 했다.
“손님이오셨나보군요그럼저희가계속응접실에남아있는것도예의가아니겠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내들과 자리를 벗어났다.
절대로 알렉산드라 씨가 미소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쫄아서 도망친 게 아니다. 만약 이게 도망이라고 하더라도 전략적인 철퇴인가 뭔가 하는 그거다.
이세계인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고향집에선 36계라고 있단 말이지. 예로부터 등의 상처는 꼴마초의 수치인데 내가 도망칠 리가 없잖은가.
“레훼에엥.”
그리하여 응접실을 나온 나.
그 뭐냐, 크림소스 서커스단이었나 하던 씹놈들에게 착취당하던 프릭쇼 출연자들을 만나보러 가는 건 나중으로 미뤘다.
잊으면 안 되는 게, 그들을 구해낸 건 내 거짓 신분 ‘아서 웨인’이다.
알렉산드라 씨는 구출작전 중에 라리루라랑 같이 움직이던 프랑을 만났다. 노르드=아서 웨인이라는 걸 아신다는 뜻이다.
다른 서커스 단원들은 라리루라가 따라간 사람이 모험가인 노르드라는 걸 들었기에─지금 생각해 보면 라리루라가 보낸 편지도 봤을 것이다─, 나를 보며 반가워한 거겠고 말이다.
즉, 내가 프릭쇼의 피해자들을 만나보려면 우선 아서 웨인으로 변장해야 했다.
변장 자체는 룬 마법을 사용하면 별로 어려울 게 아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라리루라랑 같이 어울리는 노르드가 찾아온 당일에 아서 웨인도 찾아온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두 놈을 엮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 씨가 ‘시간이 되면’ 얼굴을 비추라고 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겠지.
아마 오늘 말고 다음에도 또 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선이셨네. 소름 돋게.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종이랑 펜을 빌려서 쓴 편지만 대충 건네주고 오는 중이었다.
답장할 필요는 없고, 잘 지내는지 궁금해져서 라리루라를 통해서 연락 한 번 해 봤다는 투의 내용이다.
원래부터 나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서 츤데레가 패시브인 K-마초로 자라났기에 안부 연락 같은 겸연쩍은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는데, 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하겠지.
“뽀오오오! (눈나아아!)”
그렇게 길을 헤매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문득 새끼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듣기에는 귀여운데 해석이 돼 버리는 게 옥에 티다.
‘쓰벌. 나도 동물 울음소리 좀 아무 생각없이 듣고 싶네.’
오랜만에 자동 번역능력을 속으로 씹으면서 소리가 난 곳으로 따라갔다.
언젠가 봤던 새끼 코끼리가 덩치가 산만해져서는 라리루라에게 얼굴을 부비적대고 있더라.
〈아하하핫♡! 너 왜 이렇게 커졌어!〉
“뿌오오오~. (헤헹~.)”
라리루라는 서커스단의 동물들이랑도 재회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근처에서 흐뭇하게 쳐다보는 서커스 단원들은 뭐 친척 여자애의 재롱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눈치다.
〈앗. 얘긴 다 끝나셨어요?〉
우리를 안내해줬던 모코나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루라가 뭐하고 있나 보러 왔습니다.〉
〈아하, 그러셨구나. 보다시피 동물 애들이랑 놀고 있죠.〉
〈네. 뭐, 저희도 어차피 며칠은 더 이 도시에 묵을 예정이라서, 오늘은……〉
말하다가 말고 말을 목구멍으로 도로 집어넣는 나였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와도 상관 없다고 전해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려던 거였는데, 왠지 뭔가 좀 그렇잖은가.
그래서야 마치 ‘당연히 우리한테 돌아오겠지만, 오늘밤 정도라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아요~’ 하는 느낌 아닌가.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겠지만 알렉산드라 씨랑 얘기하고 난 다음이어서일까? 저런 말투로 말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모코나가 말하다 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나는 뭔가 변명이나 다른 말을 꺼내고자 머리를 쥐어짜려고 했지만,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모두 주목.〉
2층의 난간에서 알렉산드라 씨가 박수를 쳐가며 단원들의 주목을 끌어모았다.
초등학교 쌤처럼 박수 세 번 시작을 치자, 단원들이 전부 진지하게 경청했다. 코끼리랑 놀던 라리루라도 버릇처럼 표정을 가다듬다가 나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쉬는데 미안하다.〉
사과의 말부터 입에 담은 알렉산드라 씨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도 말했지만, 루크레겐스는 많은 사건이 벌어지다가 최근에야 간신히 진정해 가고 있는 상황이야. 그에 따라 도시의 분위기도 무척 침전된 사태라, 방금 후원자 님들분께서 오늘부터 공연이 가능하겠냐는 질문을 하러 오셨고.〉
아마도 내가 아서 웨인의 명의로 쓴 편지를 전해주는 동안, 응접실에서는 그런 얘기가 오갔던 모양이다.
단원들도 도시의 사정은 알았는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는 듯 했다.
〈이번 여정에는 큰 사건도 없었으니 다들 기운은 넘치지? 오늘 저녁을 기해서 공연을 한 다음, 텀을 두고 3일 간격으로 공연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혹시 문제 있는 사람?〉
〈없습니다!〉
입을 모아서 대답하는 단원들.
서커스단의 동물들까지 일이 돌아가는 걸 파악하고 대충 알겠다는 시늉을 보여주었는데, 라리루라만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씨는 픽 웃고서 말했다.
〈라리루라. 어쩌고 싶니?〉
〈……어… 그게….〉
고민하는 라리루라가 나한테 눈짓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맘대로 해도 돼.”
은밀한 의견 교환에 편리한 텔레파시, 발사.
라리루라는 내 말을 듣고도 조금 더 생각하려는 듯 낑낑대다가, 헤헤 웃으며 검지를 세웠다.
〈오늘 딱 하루이라면요♡〉
〈그래, 잘 생각했어. 곧바로 합을 맞출 거니까 리허설 준비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알렉산드라 씨의 대답에 다른 단원들도 아쉬움과 납득이 섞인 한숨을 흘렸다. 그들도 라리루라가 당장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서커스도, 헤어짐 없는 만남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커스 단원들은 유랑생활이 긴 만큼 이별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크게 소란이 일어나는 일도 없이 라리루라는 나한테 달려왔다.
“선배! 죄송해요. 그렇게 됐어요!”
“니가 뭐 죄송할 게 있냐.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툭. 내가 마빡에 약한 지건을 날려주자 라리루라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자기 이마를 붙잡고 웃었다.
“아핫♡ 걱정 마시길! 일당은 제대로 챙겨올 거니까요!”
“그러든가. 아, 끝나고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묵어. 잠깐 얘기하고 공연 연습만 하다가 헤어지면 아쉽잖아.”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단박에 들켜버린 듯 했다. 고개를 모로 꼬던 라리루라는 눈매를 좁히면서 우쭐거리는 미소를 띄웠다.
“……흐으으음? 헤헤엥~?”
“흐으으음이고 헤헤엥이고 간에 할 말이 있으면 하려무나. 혹시 꼬우신가요?”
“아뇨아뇨~♡? 그런 건 아닌데~. 후후후♡ 에헤헤헤헤♡”
입이 귀에 걸린 라리루라는 쥐어박아주고 싶은 웃음을 띄우면서 새끼 다람쥐처럼 깝죽댔다.
“선배~♡? 솔직히 말해보세요. 오늘부로 저랑 작별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셨던 거죠? 괜찮아요! 저는 선배의 그런 애틋한 마음, 백분 이해한답니다~?”
“아니, 따로 걱정까진 안 했는데.”
내가 쌉정색을 하고 말하자 라리루라는 애견인이 새끼 강아지의 애교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풀어졌다.
“정말♡! 표정에서 다 티가 나는데,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알았어요. 착한 제가 넘어가 드릴게요. 감사해 주세요?”
“않이 시팔, 진짜 걱정 안 했다는데 왜 안 믿냐.”
니 쪽에서 먼저 우리를 따라왔다는 걸 아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하겠냐고.
그야 혹시라도 옛날 직장 동료들이나 단장님이 그리워져서 여기 남겠다고 하는 건 아닐지 조금…… 아주 쪼오오금 걱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걸 까놓고 말해버리면 또 좋다고 까불어댈 것 같아서 숨기려고 했는데, 라리루라가 좋아죽는 꼴을 보면 잘 숨기지 못한 것 같았다. 포커페이스의 길은 멀고도 험하군.
그보다 얘는 왜 자꾸 남의 팔을 툭툭 쳐대는 것이지? 도발 커맨드인가?
“그런 바보 같은 걱정 하지 않으셔도, 저는 선배랑 언니들이랑 있는 것도 충분히 즐겁고 보람차다구요?”
“거 고마워서 환장하시겠네. 눈물이나 닦으셔.”
나는 혀를 차며 손수건을 건네줬다. 라리루라는 혀를 살짝 빼물고는 웃다 못해서 흘러넘친 눈물을 슥 닦아냈다.
“오늘 공연, VIP석으로 예약해두고 가시기에요? 일반석에서 제 매력에 푹 빠져 계시다가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곤란하시잖아요♡?”
“너, 만약 여기에 보는 눈 없었으면 바로 참교육 들어갔다. 돌아오면 각오해라?”
어이가 없어서 텔레파시로만 그렇게 말했는데, 라리루라는 눈을 반개하고서 손으로 확성기 모양을 만들고는 내 귀에다 작게 속삭였다.
“선배야말로, 내일 점심의 데이트 약속 잊으신 거 아니죠?”
텔레파시로 전해진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키득거렸다.
내가 헛웃음을 짓자 라리루라는 자기도 차마 감추지 못한 부끄러움을 빨간 얼굴에 어렴풋이 띄우고,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피웠다.
“각오하세요? 저, 내일이 태어나서 처음 하는 데이트니까, 하루 종일 시달리셔야 할 거에요.”
그 말 역시, 누구도 듣지 못하게 나지막하게 속삭인 우리 둘만의 텔레파시였다.
작가놈 말입니다만, 333화를 기점으로 3인칭 시점.. 아니, 전지적 작가놈 시점을 써 볼까 고민 중임미다.
물론 새로운 시도에 앞서, 독자님들께서 시점 전환에 어색함이나 거부감을 느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임미다.
시점 전환 등이 웹소설에서는 평범한 일이라지만, 본 글뭉치는 계속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엇으니까 말임미다.
그래서 암묵의 룰을 깨기 전에 의견을 들러주십사 합니다.
독자님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연재하는 글에 제멋대로인 시도를 저지르는 것도 문제지만, 작가놈이 혼자서 고민하고 망설이느라고 소설의 재미를 제약하고 잇다믄 그것도 문제 아니겟음미까.
시점 전환 등으로만 표현할 수 잇는 재미도 잇기 때문에, 333화 전에 3인칭 및 전지적 작가놈 시점에 대한 의견을 타진해 주시면 감사하겟읍니다.
아, 그리고 이번 화는 끝맺음이나 분량이 애매했기에 오늘 중으로 1편 더 올라옴미다!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의 공연은 저녁에 열린다.
그건 그들 서커스단의 공연이 어두울수록 화려해지기 때문이며, 더 많은 손님을 유치(誘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야외 공연장을 애용하는 그들에게 별이 적은 밤은 숙련된 기예가 한층 빛을 발하는 시간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며 집에 돌아간 손님들이 서커스단을 찾아도 아쉽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리하여, 거의 1년만에 돌아온 루크레겐스 대표 서커스단의 공연에 많은 시민들이 공연장에 모였다.
“거 손님들 조따 많쿠만요.”
나는 관객석이 빼곡하게 차 있는 걸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인맥 찬스로 VIP 석을 꿰차버린 게 미안할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를 얻고자 금화까지 뿌려댄 갑부도 있을 듯 했다.
근데 그렇다고 아내들을 데리고 저 콩나물 시루에서 좌우로 탈수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프랑만 해도 이 VIP석에서마저 수백 수천 명의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아픈 모양이니까 말이다.
“프랑, 가만 있어. 치료해 줄게.”
“으으, 미안해……. 잠깐 주변 소리가 궁금해서 청각을 키웠다가…….”
다나는 앓는 소리를 내는 프랑을 끌어안고 귀에다가 힐을 걸어주었다.
우리 아내님은 귀를 누르며 인상을 쓰는 모습마저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이긴 했는데, 나라도 아파하는 프랑한테 장난을 칠 만큼 철이 없지는 않다.
룬 마법으로 야수회귀 귀마개라도 만들어줄까 하는 생각에 마나를 짜냈지만, 아무래도 그러지 않아도 됐던 모양이다.
느닷없이 폭죽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겨울철의 태양이 가라앉기 시작하고, 공연의 막이 올랐던 것이다.
“나의 그대여, 어서 오거라! 이제 시작하나 보구나!”
인간의 문화에 흥미진진한 베로니카는 특별석에서 굴러떨어지는 건 아닐지 무서울 만큼 난간에서 몸을 쭉 빼고 있었다.
서비스로 나온 과자를 뺨이 미어져라 우물거리는 베로니카. 귀여워서 엉덩이를 주물러주자 뿔에 어깨를 찔렸다. 니가 뭔 코뿔소여?
“손장난일랑 말고, 집중해서 보도록.”
정색하고 째려보길래 얼른 손을 떼는 나였다.
그렇게 귀가 다 나은 프랑과 치료를 끝낸 다나까지, 우리 모두 모여서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의 내역은 한때 보았던 것과 대동소이했다.
조금씩 순서가 바뀌거나 뒤섞이는 정도의 변화는 있어도 기본 골자는 비슷했던 것이다.
그럴 만도 하겠지. 저만한 수준의 기예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 어쭙잖게 새 곡예를 짜내고 뇌절하다가 폭망하는 건 삼류나 하는 짓이었다.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기본에 충실한 대신에, 절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이별의 아쉬움과 재회에 대한 기대를 남기는 것.
그게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이 똑같은 공연을 반복하면서도 인기를 잃지 않는 비결일 것이다.
‘프릭쇼 참가자들은 없군.’
나는 이걸로 3번째로 보는 공연에 시각적으로 만족하면서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부랴부랴 나한테 달려온 그들이 ‘가능하다면 아서 웨인 씨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며 건네준 편지를 읽어봤는데, 아직 그들에겐 공연 허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들처럼 흠이 많은 이들은 실력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비웃음만 사기 쉽상이라며, 알렉산드라 씨에게 훈련을 받고 있다던가.
아마 고작 몇 달만에 저 라인업에 낄 만한 실력을 얻지는 못한 거겠지.
“으왓!”
모코나가 무희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며 코끼리들과 불쑈를 일으키자 다나가 깜짝 놀라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래놓고 부끄러운 듯 빨간 얼굴로 주변을 힐끔거리다가, 남편놈이 쪼개는 걸 발견하고 발을 밟아댔다.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대충 유사 풋잡인 걸로 쳐 줬다.
프랑이 몇 번을 봐도 즐겁다는 듯 밝게 웃었다. 베로니카는 까치발을 꼼지락대면서 눈을 빛냈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공연이 무르익을 무렵이 되면, 당연히 대미를 장식할 서커스단의 에이스가 등장할 차례다.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우리 옆에서는 되도록 자제하던 간드러진 목소리. 민첩하게 기다란 봉 위에 올라선 라리루라는 저 불안전한 발판에서 한 차례 돌다가 우리 쪽에 윙크를 날렸다.
〈라리루라님이 여길 보셨어!!〉
〈아니야!! 나를 보신 거야!!〉
“이크.”
관객들의 새된 환호성을 예측한 나는 잽싸게 프랑의 귀를 감싸서 지켜주었다. 프랑과 라리루라가 손을 저으면서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요~♡? 제가 늘 고생하시는 관객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답니다! 즐겁게 구경들 해 주세요!〉
운을 띄운 라리루라는 골무를 낀 손가락을 펼쳤다.
나는 무심코 오딘의 눈을 켰다가 웃음을 참아야 했다.
원래부터 흑마법사의 드랍템 치고는 평범한 매직 아이템이었지만, 서커스단의 마법사에게 성능을 조정받고 교단에서 축복까지 받았는지 상당히 기품이 넘치는 물건이 돼 있었다.
세팅된 공연용 꼭두각시 인형들에게 마나의 실이 이어졌다.
거기까지는 ‘공연 순서가 좀 바뀌었는갑다’ 하고 넘어갔던 나와 프랑은 다음 순간에 약간 놀랐다.
서커스단의 마법사들이 뻥 뚫린 천장을 어둠으로 덮었다.
피유우우우웅─ 펑!
꼭두각시들의 몸체에 새겨진 〈마법의 화살〉이 폭죽처럼 하늘을 수놓자, 나는 이번에야말로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미처 끄지 않았던 오딘의 눈이 마법의 구조를 해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