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술식 결합에 관심을 보이더니, 뭘 하려나 했다.’
높은 곳까지 쏘아진 〈화살〉은 빛무리로 변했다.
〈수사의 랜턴〉. 술자의 뜻에 맞춰서 색과 형태를 바꾸는 마법이 별이 사라진 하늘을 수놓았다.
언젠가 어떤 순정마초가 첫 프로포즈에 사용한, 푸른 빛이 말이다.
빛은 춤을 추면서 모양을 바꾸었다.
익살맞은 별이니 하트 따위의 모양으로 변했다가, 동물이나 숲, 바다나 배와 같이 라리루라가 여행 중에 보았던 것들의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아…….〉
시끄럽게 소란을 피워대던 관객들마저 숨을 삼키고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었다.
물론, 남일처럼 말했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 지구인이었던 나에게, 이세계의 공연이란 라리루라처럼 인체의 한계를 초월한 곡예가 아니면 어느 정도 이상의 감탄을 주진 못했다.
솔직히 그들의 공연이 현대의 CG니 콘서트니 하는 것보다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라리루라가 펼치는 공연은 좀 달랐다.
예전에 내가 지구에 살 때, 올림픽 개최식 방송에서 드론 수백 개로 그림을 그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우리 후배님이 술식 결합으로 재현한 빛의 공연은, 조금 어설프기는 해도 어떤 의미론 그 드론쇼보다 화려했다. 자유로이 움직이는 빛에는 움직임의 한계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수사의 랜턴〉은 그림이나 문자를 만들다가 커다란 별자리가 돼서 하늘에 멈추었다.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수십 배로 키운 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이세계 최초일지도 모르는 천체투영관(planetarium)을 펼쳐놓고서, 무리한 마나 사용으로 땀에 흠뻑 젖은 라리루라는 말했다.
〈소식이 빠른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최근 들어서 공연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답니다. 10년 넘도록 몸을 담아온 서커스단을 벗어나서, 잠시 여행을 하고 있거든요.〉
낭랑하게 귀에 스며드는 목소리에 관객들의 절반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나머지 절반은 평소엔 관심도 없었을 별자리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스스로의 발로 세상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저는 이번 공연처럼 일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것들을 생각해 낼 수가 있었어요.〉
─팡! 빛무리의 일부가 라리루라의 손을 맴돌다가 폭죽처럼 터졌다.
〈기쁜 일도 많았지만, 슬픈 일도 많은 나날이었죠.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에요. 아마 관객 여러분들도 종종 힘들고 고된 시간을 겪어보셨을 거에요.〉
나는 그 얘길 듣다가 못 말리겠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저어버렸다.
이런 장관(壯觀)을 보여주면서 ‘이게 여행의 성과에요’ 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서커스단이 더 이상 여행을 가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리루라는 나한테 술식 결합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부터, 가족들을 설득할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는 믿는답니다. 괴로운 시간이어도 꺾이지 않고 견뎌내서, 추억으로 빚어낼 수 있다면, 그 경험은 이 풍경보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여러분의 가슴에 남을 거라고 말이에요.〉
마피아 새끼들의 깽판에 고생하던 루크레겐스 시민들에게, 그 말이 어떤 식으로 들렸을까.
수련회 캠프파이어 메타에 눈물콧물 짜내는 사람들만 봐도 대충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는 알겠다.
다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남편놈아. 감동스러운 장면 중에 산통 좀 깨도 되냐?”
“해 봐.”
“이거, ‘저 내일부터 출근 안 할 건데 이해해 주실 거죠?’를 애둘러서 말하는 거 맞지?”
골-든 정답.
‘하여튼, 저런 잔꾀는 누구한테 배운 건지.’
나는 도저히 출처를 알 수가 없는 라리루라의 잔머리에 탄식하고 말았다.
이 끝내주는 쑈의 계보를 이어나가야 할 서커스단 마법사들이랑, 왜 라리루라는 안 나오냐고 빼액댈 관객들을 달래야 할 알렉산드라 씨를 생각하면 동정심이 절로 치솟지만…….
음……. 그건 저 재능만 넘치는 사고뭉치를 잘못 키운 여러분들의 책임이 아닐까요?
일단 제 잘못은 아닌 듯.
“흐음. 이거 큰일이군.”
저 천체투영관을 얼스터 마을에서 받아온 매지컬 카메라로 촬영하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베로니카는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만 눈을 끔뻑거렸다.
“큰일? 뭐가?”
“아니, 대단한 고민은 아니다만…… 이만한 일을 벌여놓았으니, 라리루라의 얼굴도 꽤 팔리지 않았겠느냐?”
베로니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래서는 내일 저 아이랑 놀러 나간다는 우리 주인님도, 고생 깨나 하겠다 싶어서 말이지.”
나는 그 말을 곱씹다가 라리루라랑 눈이 마주쳤다.
이세계의 유흥 문화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놓은 애가, 당분간 공연 안 한다며 일시적 은퇴 선언을 던져놓고 웬 남자랑 놀러 다닌다?
“……허미 쓰펄.”
라리루라가 사고 쳤다는 듯이 혀를 빼물고 웃는 걸 보며,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구에 있을 무렵, 나는 아이돌의 팬이 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군바리 때는 아이돌 뮤비나 다시보기 방송에서 여자 아이돌 그룹이 나오는 파트를 달달 외우고 다녔지만, 그것도 예전 얘기다.
유부남이 된 나는 여타 공처가들이 말하는 ‘우리 아내가 아이돌보다 예쁨’ 소리를 한치의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거짓말 같다고? 우리 아내님들 미모 좀 봐라. 남은 평생을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굶주릴 일은 없을걸.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까놓고 말해서 이세계의 소문 파급력이란 걸 좀 얕보고 있었다.
〈신문 사세요!! 호외요!! 호외에에!!〉
〈호외에에에에에엑!! 호외에에에에에에엑──!!〉
〈호에에에에엥─ 켈록, 켈록!! 크흡, 호에에에에에에엑!!〉
목이 찢어져라 외치면서 맹대쉬를 하는 꼬마들.
서커스단의 공연이 있던 다음날, 나는 루크레겐스를 강타한 천체투영관의 여파를 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왜, 군대도 핸드폰 풀리기 전에는 명색이 사내 놈들이 흡연장에 옹기종기 모여갖고는 주워들은 소문 하나 갖고 아줌마들 뒷담 까듯 하하호호 떠들지 않던가.
그건 이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집-직장-집을 반복하는 이세계인들에게 어젯밤 있던 쇼의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버렸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건 인간의 종특인갑다.
아니면 혹시 거리에서 신문을 팔아제끼는 신문팔이 녀석들 때문일 수도 있고.
〈……신문 남은 거 있지? 나도 하나 주라.〉
〈옙! 정기구독자가 아니면 1쿠퍼인데 괜찮으십니까!〉
〈그래.〉
〈구매 감사함다!!〉
유래 없는 호황에 신이 나서 헤벌쭉 웃는 꼬꼬마 친구에게 동전을 건네주고, 나는 따끈따끈한 오늘자 신문을 펼쳤다.
─이 시대 최고의 서커스단, 루크레겐스에 우뚝 서다!
─영주님을 매료하고 바레타 상회장이 반했던 플랑궁쿨라의 “서커스!”
─알렉산드라 단장, “당분간 공연 계획 없다” 파문!
“돌겠네.”
나는 큼지막하게 적힌 글자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듯, 로마니아는 브리타니아가 정책을 파쿠리할 만큼 선진적인 정책이 많은 나라다.
그게 이 나라가 인권 대국이라는 뜻은 아닌데, 아무튼 뭐 신문이라는 게 있단 점에서 브리타니아 깡촌보다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 셈 아닌가.
일단 대도시라면 문맹률 문제가 거의 없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나한테는 그게 문제였다.
당장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의 거처가 돈 냄새를 맡은 인간들에게 포위당해 버렸거든.
〈문 열어!!!〉
〈너 장사 안 해?! 왜 장사 안 해!!〉
〈닥치고 내 돈을 가져가아아아악!!!〉
─쾅쾅쾅쾅!
빗장을 잠근 문을 두드리는 광인들.
신문쟁이는 세상이 바뀌어도 그대로였다. 자극적인 기사에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들은 입구를 점령하고 맨바닥에 비보잉 댄스를 추기 시작했고, 나는 감히 저길 뚫고 들어가서 이 사태의 원흉인 핑크 머리 민짜를 데리고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내가 오늘 약속을 파토내도 반박할 거리가 없으리라는 계산이 서는군.”
“무슨 헛소리세요, 그게?”
진지하게 튈 계획을 짜고 있자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노란 피부가 인상적인 동양인이다. 하지만 얼굴이 어딘가 익숙한 게, 마치 어디 사는 서커스 걸이랑 내 사이에서 딸이 태어나면 이렇게 생길 것 같기도 하군.
“……뉘신지?”
“에이, 눈치 채셨으면서♡!”
“않이 쫌. 목소리는 그대로잖어. 그것도 바꿔 얼른.”
그래. 변신 마법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목걸이의 힘으로 변신한 라리루라를 보며 안심했다. 사람들이 아는 건 핑크 머리의 서커스 걸이라는 점 뿐이다. 아예 딴 사람으로 변장해버리면 절대로 눈치챌 리가…….
“네? 아뇨, 데이트 중에는 아예 변신 풀 건데요?”
“시발 왜죠.”
“변장하고 왔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마법을 푼 라리루라는 사복 차림이었다.
최근에는 드물지도 않은 일이긴 한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에 안경까지 썼다. 문제가 되는 머리카락도 묶어서 어떻게 숨기기는 했다.
“……확실히 겨울이니까 그렇게 꽁꽁 싸매도 어색하지는 않겠고, 남들이 못 알아보긴 하겠지. 근데 머리색만이라도 어케 안 되냐?”
“에헤~♡ 조금은 들킬 여지가 있어야 더 스릴이 넘치지 않을까요?”
그래, 말을 말자 내가.
하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변신 마법을 유지하면서 돌아다녔다간 금방 지칠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코트를 벗고 라리루라한테 입혔다.
“날도 추운데 왜 이렇게 가볍게 입고 나왔어?”
“갈아입을 옷이 여관에만 있다는 걸 그만 깜빡했답니다! 그런데 이러면 선배가 춥지 않아요?”
“난 자켓 하나면 충분해.”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라리루라는 코드에 얼굴을 묻으며 시시덕거렸다.
“과연, 과연. 든든한 보디가드시네요♡ 고마워요.”
“튼튼한 보디실드겠지. 일 돌아가는 꼴 보니까 오늘 하루는 어디 가서 니 이름 부르기도 무섭겠더라.”
“그러면 오늘은, 프리실라라고 불러주신다는 거네요?”
라리루라는 그런 투정조차 기분 좋은지 마스크를 내리며 건수를 잡았다는 듯 우쭐거렸다.
“……그래 뭐, 까짓 거 어렵지 않지.”
나는 라리루라의 킹받는 태도에 이마에 혈관을 돋궜다가, 그녀의 허리를 얼싸안았다.
“그럼 갈까, 프리실라?”
“……어? 어?”
허리를 감싸는 손에 라리루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 눈이 어버버 거리면서 헤엄을 쳤다.
“저, 저기요, 선배? 이거 충분히 성희롱인데요? 뭔가요? 저 오늘 하루 선배의 옆구리 난로가 돼 버리는 건가요? 코트를 벗어준 것도 이 성희롱을 위한 밑밥이었던 거군요?”
“그으래? 서로 동의가 있으면 성희롱 아닌데?”
내가 시치미를 떼자 라리루라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우리 후배님은 그렇게 나한테서 얼굴을 가리고는,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뭐, 성희롱까지는 아닌 걸로 해 드릴게요.”
피하지 못할 거라면 즐기라고 하던가.
딱히 피할 이유도 없는 하루이긴 했다.
“자, 그럼 이제 어디 가서 놀지 설명 좀 해 봐.”
“그걸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패기는 훌륭하시지만, 보통 이럴 때는 남자 쪽이 에스코트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내가 널 키타이에 유목마을에 데려가서 나를 즐겁게 해 보라고 지껄이면 니 기분이 어떻겠니? 여기 너네 홈 타운이라매. 기껏 데이트 코스 짜왔는데 ‘거기 재미없고 비싸기만 해요☆’ 소리 듣긴 싫음.”
“으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좋아요~? 안내할게요!”
짧고 굵은 의견교류 끝에 오늘 하루의 가이드 역할은 라리루라가 맡게 되었다. 아마 방금 한 말도 대충 아무 말이나 무줘섬겼던 건지, 지가 먼저 좋다고 앞장서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선배, 배고프시진 않죠? 벌써 점심인데.”
“그렇게까진? 뭐 적당히 간식 사 먹고 저녁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으면 되겠지.”
“저녁 식당도 제가 골라드려요?”
“그건 내가 알아봤어. 예약하는 곳으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신의 한 수였다. 일반 식당에서 마스크 벗고 욤뇸뇸 먹고 있으면 라리루라가 라리루라인 걸 들키는데 10초도 안 걸릴 것이니까.
“어… 그러면 일단 이쪽으로? 아니면 그, 이, 이쪽?”
데이트를 처음 해 본다는 말마따나 라리루라는 가끔 걷다가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곤 했다.
정보가 빈곤한 이세계에서 연애니 데이트니, 하물며 그 다음 가는 어른의 교류니 하는 건 주변 어른들에게 알음알음 듣는 게 전부다. 우리 아내들만 해도 그렇잖은가?
라리루라만 해도 지금…… 그 왜 80년대나 90년대의 우리 아버지 세대가 연애하는 영상물의 주인공처럼 어딘가 어색하고 모자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모자라 보인다고는 해도 라리루라가 어디 가서 얼굴로 꿀리는 애는 아니다.
평소에 얼마나 똘똘한지도 알기 때문에 이런 면모도 귀여워 보일 따름이다. 뭔가 조카랑 놀이동산에 온 것 같다.
그래, 이게 라리루라지.
“으윽…… 선배 실실대는 거 왠지 맘에 안 들어요…….”
그게 약간 웃겨서 피식거리고 있자 라리루라는 분한 것처럼 투덜거렸다. 승부욕 강하기로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는 녀석이니까.
“너무 그럴싸하게 굴려고 하지 않아도 돼. 편하게 놀다가 가면 되지.”
한 번 만날 때마다 그럴싸하게 기승전결에 마무리 이벤트와 선물까지 챙기려는 21세기식 데이트도 아닌데, 그냥 평소처럼 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그런 생각으로 묻자 라리루라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흥~ 이다. 안 되거든요? 선배가 울면서 무릎 꿇고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할 만큼 기깔난 하루로 만들어버릴 거거든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미리 준비했어야 하지 않을까?”
“후후~. 글쎄, 어떨까요? 어디 두고 보시라구요. 저는 애드리브에 강한 여자니까요♡!”
니가? 라고 되물으려다가 양심껏 참았다.
뭐, 즉흥적인 상황의 대처능력이 예능인의 중요한 요소긴 하지. 라리루라도 싸울 때라면 꽤 임기응변을 잘 하는 편이고 말이다.
“일단 여기! 하루의 시작은 달달한 과자가 진리죠♡!”
팔짱을 낀다기보단 거의 소 코뚜레 끌듯 끌려간 곳은 유흥가의 입구 쪽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아서일까? 포장마차처럼 노점을 펴 놓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세계 푸드트럭은 어디에나 있군.
“여기 꿀타래, 무지 맛있다구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보통 이런 패턴은 1년만에 가게가 망해 있다든가 하던데.”
말해놓고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도착했던 가게는 거의 후줄근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