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구요?”
“왜 몰라? 한 번 맞춰볼까?”
─챙! 나는 유리로 된 잔을 포크로 치면서 말했다.
“뻔하지 뭐. ‘선배~. 이제 몇 시간 뒤면 저도 성인인데, 술 시켜봐도 되요~♡?’ 같은 소리나 하려고 했겠지.”
“으와… 어떻게 아는 거에요? 소름 돋는데요. 그리고 방금 그거 제 성대모사는 아니죠? 너무 못하셔서 솔직히 쪼금 정색할 뻔 했어요.”
“꼬맹이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리고 니가 평소 하는 말투랑 완전 똑같았거든?”
“아니거든요~. 전혀 달랐거든요~. 어쨌든 그러면 전 언제쯤 돼야 술 마셔도 되는데요?”
“오늘밤에 오전 0시 땡 치면.”
로마니아의 법률이 그렇다. 우리 후배님이 법적으로 미성년자를 졸업하는 것도 앞으로 몇 시간 안 남은 것이다.
라리루라는 그 말에 화색이 돼서는 메뉴판을 가리켰다.
“그럼 있죠~? 저 이거 포장해 가서 선배랑, 언니들이랑 같이 마셔보고 싶은데요. 그것도 안 돼요?”
“그래, 그 정도라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기대감에 찬 눈으로 애원하니까 계속 기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나저나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눈을 빛내는 게, 역시 아직 한참 쥐방울 만한 꼬맹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들 몰래 마셔보거나 하지도 않았던 걸까.
말로는 안 했지만 내 눈빛에서 대충 생각을 읽어냈던 걸까. 라리루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뭔가요, 그 눈초리는. 선배도 10살 때부터 회식 때마다 매일매일 오렌지 쥬스와 포도 쥬스의 무한 루틴을 겪어보시면 제 기분을 이해하실 걸요?”
“알았다, 알았어. 혼자 주량 조절도 못하고 마셨다가 훼까닥 하는 것보단 어른들 앞에서 마시는 게 낫지.”
“만세♡!”
거 봐. 내가 흉내냈던 거랑 말투 똑같네 뭐.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몇 병의 술을 사 갖고 나왔다.
“고작 1병으로는 부족하잖아요! 팍팍 사 가죠☆!”
라리루라의 그런 강변이 주된 이유였다.
좀 걱정되긴 한다. 이세계의 유리병 술이 다 그렇지만, 이것도 도수가 무지 높기로 유명한 놈이라니까. 포장해서 들고 다니기는 편했지만.
“선배, 다음은 이리로 가요!”
술 마실 생각에 싱글벙글해진 라리루라는 스스럼없이 남의 팔을 끼고 질질 끌고가는 경지에 도달했다. 누가 보면 벌써 한 잔 삥땅쳐서 마신 줄 알겠어.
그렇게 다음으로 끌려간 곳은 어느 높은 언덕이었다.
대도시답게 미관에도 신경을 썼는지, 말하자면 자연 공원 비슷한 곳이었다. 언덕 위에 잘 가꾼 나무도 있어서 도시 아래의 정경이 훤히 보였다.
이세계에 카메라가 생긴다면 머지 않아서 사진 스팟으로도 유명해질 것 같군 그래.
“어때요? 야경이 괜찮죠?”
라리루라는 날렵하게 나무에 올라타서 물었다. 나도 술병을 안고 나무에 기대며 픽 웃었다.
“그래, 멋지네.”
이 세상에서 야경이 밝은 도시는 드물다.
내가 이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영지는 카르미네 대학이 있는 아인히르였지만, 거긴 교역도시 치고는 밤에 조용했다.
왜냐고? 이세계의 선원들은 밤 12시 넘어서까지 술을 쳐먹지는 않거든. 다음날 배에서 굴러 떨어져서 물고기 밥 될 일 있어? 촌구석 사르가디스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의미에서, 루크레겐스는 하루 왠종일 떠들썩함이 가시질 않는 도시였다.
낮에는 건실하게 일하고 신을 믿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이렇게 늦은 시간이 되면 밤에 눈을 뜨는 사람들과 잠들기 전에 놀러 나온 사람들이 뒤섞인다.
붉은 랜턴이 요염하게 반짝거리는 유흥가와, 밤 늦게까지 경건한 황금색 불이 켜져 있는 종교 교단.
두 개의 거리와, 그 거리에 사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려내는 콘트라스트다.
이만하면 이 추운 겨울에 밤바람을 쐬면서 구경할 가치가 있군. 내가 그리 생각하면서 무심코 라리루라를 올려다보자, 우리 후배님은 혀를 빼물고는 치마를 눌렀다.
“앗! 몹쓸 생각 금지에요. 그렇게 밑에서 뚫어져라 쳐다보셔도 서비스 타임은 없다구요♡?”
“시간대를 고려하면 서비스 타임이 아니라 야근이지. 지금 느그 선배님 애 돌보는 유치원에 취직한 느낌인 거 아냐?”
“유치원? 고아원 같은 건가요?”
“전혀 다르지만, 부모를 대신해서 애를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도 있긴 하군.”
나뭇가지에 앉은 라리루라는 고개를 모로 꼬다가, 내가 준 코트를 여미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괜찮네요. 예전에는 말이죠? 저도 은퇴하고 나면 그런 곳에 취직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답니다.”
살짝 움직인 시선의 방향은 교단 쪽이다.
아마 저기에 종교시설을 겸한 고아원이 있는 걸까.
라리루라가 저기 출신인 건 아니겠지만, 이 도시의 고아원 위치를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은퇴라. 니 나이에 생각하는 건 너무 이르지.”
“그치만 평생 서커스단에서 일할 수는 없잖아요. 그 왜, 선배가 혼쭐을 내줬던 나쁜 광대 아줌마처럼 다치거나 할 수도 있고, 서커스단이 폭삭 망할 수도 있죠. 저도 자주 봤는걸요.”
손을 든 라리루라는 뭐가 주저앉는 시늉을 했다.
하긴, 이렇게 험한 세상이다. 서커스단이 망할 이유야 한두 개가 아니겠지. 전세계를 유랑하다 보면 몬스터나 도적떼의 문제도 있다.
“단장님께 평생 신세를 질 수도 없고…… 뭐, 친딸인 것도 아니잖아요?”
“어. 그 얘긴 살짝 들었어.”
“그럴 것 같았어요. 아니, 솔직히 최근까지 눈치 못 채기는 했지만요. 선배는 그런 거 티 안 내시니까.”
즐겁게 말한 라리루라는 머리를 까딱거리면서 음율을 자아냈다.
“란, 란 라리루~. 루, 루 라리라♬ 라, 라 루리라~♪ 라리루리루♬”
노래를 부르는 라리루라는, 알렉산드라 씨 말마따나 어린 새 같았다. 자기 내키는대로 지저귀다가 말다가 하는 것까지 말이다.
머리와 다리를 박자에 맞춰서 흔들던 라리루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프리실라, 프리실라……. 응. 역시 별로 맘에 안 드는 이름이에요.”
“그것도 들은 얘기네.”
“네. 여전히 제 귀에는 잘난 척 하는 이름 같아요. 쓸데없이 품위 있고, 저처럼 방정맞은 애랑은 안 어울리고── 그치만 좋은 뜻의 이름이죠.”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변장도구를 벗고 기지개를 펴는 라리루라. 우리 후배님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선 나를 두고 야경에 다가갔다.
“단장님은 고아원에 있던 저를 데려가실 때, 직원 고용의 절차를 따르셨어요. 양녀 입양 조건을 못 채우셨거든요.”
“그래서 성이 없었던 거야?”
“네. 저야 어차피 친부모 얼굴도 모르는데, 자기 이름이라도 아는 게 어디에요? 그래도 지금보다 더 꼬꼬마일 적엔 단장님 성에 제 이름을 붙이고 괜히 시시덕대고 그랬지만요.”
“프리실라 레프스, 하고?”
“맞아요. 영 어색한 조합이죠? 그 이름을 글자로 써 보고 싶어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개인 소유 주택이 없으면 양녀는 못 들인다더라구요. 아마 주택이 있으셨어도 양녀로는 안 삼아주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랬겠지. 성까지 줘 버리면 너는 절대 알렉산드라 씨의 곁을 못 떠났을 테니까.”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하자, 라리루라는 날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그렇게는 생각 못 해 봤어요. 똑같이 성 없는 사람끼리의 직감인가요?”
“나는 성씨 있거든? 본명 말해줬잖아.”
“부코 강!”
“거 이름 한 번 개구리네 시팔.”
“푸흐흐, 아하하하하!”
라리루라는 내 투정이 웃겼는지 배를 잡고 웃었다. 오늘 참 많이도 웃는군.
이름 갖고 놀림 받은 기분이라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라리루라가 선뜻 다가왔다. 그러고서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며 웃었다.
“음, 하여튼 그랬다구요. 선배를 따라다니는 게 더 장래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 나야말로 잘 부탁한다.”
나는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내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나 자신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이 녀석은 아직 우리를 쫓아와 줄 듯 했으니까.
프리실라
새삼스럽게 악수를 나눈 뒤에, 라리루라는 부끄러운 것처럼 휙 뒤로 물러났다.
“네♡! 그러면 돌아갈까요? 언니들 기다리겠어요.”
“……벌써?”
조금 놀라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라리루라는 모자를 쓰려다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벌써라뇨? 이제 11시에요?”
“음, 아니, 그야 그렇긴 한데.”
“……흐으음~? 아니면 뭐 이상한 기대라도 하셨나♡?”
내가 중언부언하자 라리루라는 흑심을 간파한 것처럼 쿡쿡거렸다. 나는 뒷머리를 만지면서 대충 대답했다.
“아니 뭐, 굳이 여기까지 데려온 가니까. 저번에 내기에서 무승부로 했던 소원이라도 말할 줄 알았지.”
“앗, 맞다. 그것도 있었죠? 오늘 하루가 너무 즐거워서 그만 깜빡했어요.”
그제야 떠오른 듯 입가에 손가락을 대는 라리루라.
지저의 탑에서 내기를 한 결과, 우리는 서로 소원을 1개씩 들어주기로 했었다.
나는 내 프로모즈 문구를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는 거였고, 라리루라는 나중으로 보류한 채로 몇 달이 지난 상태였다.
“흐음. 그치만 그런 뻔한 전개, 저처럼 톡톡 튀는 후배랑은 안 어울리잖아요?”
라리루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별로 떠오르는 소원도 없고. 무승부였으니까 그냥 선배 소원도 제 소원도 없던 걸로 끝내죠.”
“……진짜 그거면 돼?”
“네, 그럼요!”
모자를 쓴 라리루라는 샐쭉 웃고서 내 손을 잡았다.
“어서 가요, 감기 들기 전에. 오늘밤에는 야누스 교단에서 새해 종을 울릴 거에요. 언니들이랑도 같이 들어야죠!”
“……으음, 그래.”
뭔가 헛방을 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따로 잘못된 것도 없는데 여기서 강변(强辯)하는 것도 내 꼴만 우습겠지. 나는 그렇게 술을 사들고 우리가 묵던 여관으로 돌아갔다.
라리루라가 카운터에 안주 룸 서비스를 주문한대서, 나만 먼저 올라가기로 했다.
“다녀왔다.”
그러자 어쩐지 외출복을 입고 있던 다나가 내 귀가에 입을 멍하니 벌렸다.
“뭐야 너? 왜 벌써 와?”
“어? 노르 온 거야?”
머리를 내리고 외출 준비를 다 한 프랑도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이 마눌님들은 나랑 라리루라만 쏙 빼놓고 어딜 가려던 거람?
“흐음. 이만큼 늦었겠다, 오늘이겠거니 했다만…… 이건 또 의외로군.”
마찬가지로 뿔을 숨기고 외출 준비를 끝낸 베로니카가 그리 말했다. 다나가 미심쩍다는 듯 말을 이어받았다.
“밑에 안주 주문하러. 너희랑 술 같이 마시자고 새해 밝기 전에 왔어.”
“……진짜? 우리만 나쁜 년 된 것 같네. 셋이서 술자리나 가지려고 했는데.”
“너희끼리?”
내 물음에 프랑은 퇴근한 남편의 짐을 들어주듯 내가 가져온 술을 받아 챙기면서─숨 쉬듯 나오는 행동거지에 나도 모르게 뺏겨버렸다─,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응. 여관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얘기가 나와서. 그, 라리루라도 많이 기다렸으니까 작은 기념일 정도는 양보해 주자는 얘기가 됐었거든.”
“응, 그랬지. 그치만 남편놈이 일찍 돌아온 걸 보니까 쓸데없는 배려였는갑다.”
그렇게 말한 다나는 겉옷을 벗고는 술병을 슥 꺼냈다. 씩 웃는 걸 보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이야, 이거 딱 봐도 독하겠다? 우리 막내가 용감하네.”
“말리려다가 적당히 물이나 타 주려고 그걸로 샀어. 사실 도수 낮은 술은 맥주밖에 없더만.”
“음. 잘 했구나. 뭣하면 여관의 술을 사 와도 될 일이니.”
나 못지 않게 당황한 아내들이었지만, 대충 이럴 가능성도 생각했던 건지 큰 소란 없이 테이블에 술잔을 깔았다.
다들 외출복을 입고 있었기에 그럴싸한 파티 분위기가 된 건 불행 중 다행일까. 타이밍이 좀만 늦었어도 엇갈릴 뻔 했었다.
“다녀왔습니다~♡! 언니들 많이 기다리셨죠?”
준비를 끝내자 라리루라도 안주를 들고 올라왔다. 식사한 뒤였기에 간편하게 집어먹기 좋은 과자나, 국물 요리다.
시간은 어느새 11시 59분. 새해가 끝날 카운트다운이 곧 시작된다.
옹기종기 앉은 우리는 라리루라한테도 술을 따라줬고, 다나는 낄낄대면서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남편놈아. 주례사라도 읊어 봐.”
“내가? ……크흠, 그래.”
이것도 일종의 망년회인가.
할 일이 여전히 가득 쌓여 있긴 했지만, 당장에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기에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바쁜 나날 중에도 하루 쯤은 이런 날이 있어도 괜찮겠지.
“그러면 우리 라리루라의 성년을 축하하고, 또 내년에도 별 일 없이 행복한 새해가 되길 기도하며…….”
““““건배!!””””
술잔을 부딪히는 여관 방에, 교단에서 울려퍼지는 청량한 종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거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끄으으……?”
나는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골이 빠개지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익숙한 고통이 숙취인 걸 깨닫고 머리를 감싸안았다. 레스토랑 직원이 도수를 경고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달짝찌근한 맛에 감춰진 알코올의 펀치가 상상 이상이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간 취하질 않으니까 적당히 몸의 긴장을 풀었었는데, 그게 독이 됐었나 보다.
“선배. 괜찮으세요?”
“윽…… 어,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왜…?”
“저도 방금 일어났는데, 안색이 많이 안 좋으셔서요. 우리 잠깐 카운터에 내려가서 약 좀 마시고 와요.”
라리루라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물에 젖은 안경을 쓴 듯 뿌얘진 눈을 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어지간히 독했나, 다나마저 곤히 잠들어서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마나를 끌어올려서 간을 강화하려다가 몸에 남은 마나가 거의 없었다는 걸 눈치깠다.
술 마시면서 뭔가 했던가? 아니, 그래. 취하려고 남은 마나를 옥새에다가 저장해 뒀었지? 하지만 옷 안을 더듬거려도 손에 잡히는 물건은 없다.
“으그극…….”
“조심하세요, 계단 내려가니까.”
술 1잔에 넉다운됐던 라리루라는 숙취가 덜 한 건지 나를 부축해서 카운터로 내려갔다.
여관 직원은 익숙한 건지, 비싼 값을 하는 여관답게 간단한 치료를 해 주고 돌아갔다. 이럴 땐 이세계의 마법이 진짜 편리하다.
“선배, 좀 괜찮아요? 올라갈 수 있으세요?”
“응…… 미안하다. 너도 머리 아플 텐데.”
“……아니에요. 저도 먼저 치료 받고 왔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