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9화 (349/1,009)

프리모르는 약지가 없는 왼손을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저, 프리모르 아르마알스. 낭군님께 받은 이 성에 걸고, 당신의 청(請)을 받아들이겠어요.〉

〈고맙소, 동무! 고맙소!〉

대충 그런 인삿말을 남긴 나는 프리모르와 굿바이를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퍼-펙트. 계획 대성공이다 이거에요. 남편놈 일하는 모습 어땠냐?”

“우리 주인님의 입에는 악마가 깃든 것 같더구나.”

“않이 왜죠.”

분명 거짓말이긴 했지만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

아파트 옥상에서 공연하는 파워레인저가 가짜인 걸 알아도 부모가 애들한테 사실을 얘기해주진 않잖은가. 그거랑 대충 비슷한 거다. 우리나 프리모르나 윈윈이었단 말이지.

〈흠. 인간의 귀족들이 많이 모여있다고 했던가. 티르시는 걱정되지만, 이목이 많으니 쓸데없는 손찌검은 하지 않겠지.〉

〈그래. 지금은 말이야.〉

〈……무슨 뜻이더냐?〉

나는 뱀대가리를 움직여서 도시를 관찰하며 말했다.

〈귀족이 많다는 건 초청하기도 쉽단 뜻 아니겠어? 멀리서 오라고 하면 귀찮지만, 온 김에 들렀다가 가라고 하면 싫어할 사람은 없잖아.〉

대형 마트에서 파는 미끼 상품 같은 것이다.

3천원짜리 과자를 천원에 팔면 사람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어디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이 과자만 딱 사서 돌아가던가?

마트에 온 김에 집에 모자란 것들을 장바구니에 넣게 되는 법이다.

〈디아볼로한테 이 경매는 미끼 상품이기도 할 거야.〉

엘릭서를 살 수 있다면 개꿀.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해도 손해는 아니다.

〈귀족들이 경매장에 찾아올 테니, 그때를 노려서 약혼을 발표하겠지.〉

평민 출신인 제가 진퉁 귀족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평민이랑 결혼할 수는 없죠. 그래서 몰락귀족 아가씨랑 약혼합니다~ 하는 식이 될 것이었다.

일부러 레나폴리스를 경매 장소로 정한 이유는 그거겠지.

그냥 엘릭서가 필요한 거라면 뭣하러 자기 영지에 경매장을 열겠는가? 올림픽 효과처럼 관광 산업을 노린 놈들이랑 로비 경쟁도 해야 했을 텐데.

나였으면 걍 경매장까지 가고 만다.

〈어쩌면 디아볼로 새끼가 멍청해서 그런 발상을 못 했을 수도 있지만, 걱정해 둬서 손해는 아니지.〉

〈계획대로 움직일 생각이더냐?〉

〈그래. 엘릭서는 디아볼로 놈이 낙찰받아야 해.〉

그렇게 되야만 내가 짠 혼파망 계획의 실현 가능성이 올라간다.

‘따로 걱정할 건 없겠지.’

프리모르는 엘릭서를 살 생각이 없어 뵈고, 그러면 루크레겐스의 영주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진 않을 것이다.

결국 가장 고품질 엘릭서에 집착하는 디아볼로가 엘릭서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그때를 노려서 움직이면 그만이다.

‘협곡과 자기장 안쪽에서 단련한 21세기인의 불지옥 맛을 보여주마.’

엘릭서를 원한다면 사 가도록

그게 내가 푼 독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을 테니까 말이다.

─살랑.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뱀 비늘에 떨어진 차가움에 고개를 들었다. 베로니카가 날갯짓을 하며 가로지르는 찬 공기의 틈으로 새하얀 알갱이가 쏟아졌다.

밤하늘에 1월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드르륵─. 탁!

프리모르 아르마알스는 은인의 사역마가 떠난 창문을 직접 닫았다.

귀족인 그녀가 스스로 움직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의 호위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혼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은인의 청을 받아들인 뒤, 프리모르는 본제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엘릭서를 구매하는 건 힘들어요.〉

프리모르는 피곤한 것처럼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제 개인적인 의사 때문만은 아니에요. 금전적인 문제도 있어요. 이유는 아시겠죠?〉

〈……예. 루크레겐스의 영주도 엘릭서를 탐내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호위들은 신음을 눌러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레겐스의 영주에게 있어서, 프리모르 아르마알스는 원수의 며느리다.

만약 루크레겐스의 영주가 엘릭서를 낙찰받는다면, ‘그녀’는 증오스러운 가문의 여인으로부터 상처를 치료할 물건을 앗아갈 수 있겠지.

그리고 과거의 내전에서 얻은 흉터도 고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엘릭서 입찰에 참가할 이유는 충분하다.

게다가 그녀만이 아니다.

동료가 알아온 정보에 따르면, 겨울에 들어서부터 국내의 고품질 엘릭서가 씨가 마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정보를 모아온 당사자는 누군가가 사재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며 의심하고 있었다. 여름이었다면 진즉에 그녀가 조종하는 벌레 무리가 도시를 쏘다녔겠지.

루크레겐스의 영주만와 더불어 그 사재기꾼도 경매에 참가했다간, 기사 몇 명의 쌈짓돈으로는 도저히 엘릭서를 낙찰받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비자금이 나갈 예정이 가득하니까요. ……그 사람도 양반은 못 되는군요.〉

프리모르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택의 정문에서 그녀가 부른 인물이 검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박, 사박.

눈발이 내리는 정원에 새하얀 성직자가 걸어들어왔다.

젊은 얼굴의 성직자는 메이드에게 안내바아 손님방에 있는 프리모르의 곁까지 찾아와서는, 기품있게 목례했다.

〈또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예상 밖의 인연이 이어진 것에 감사드려야 할까요.〉

〈감사라……. 저희에게 말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신께?〉

〈둘 다입니다. 여러분께도 야누스 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게 저의 소임이죠.〉

그렇게 대답하는 사제는 능청스러운 대꾸에 비해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띄우지 않았다.

〈징벌집행관 시냐티오, 아르마알스의 마담을 뵙습니다.〉

〈환영해요, 시냐티오 님. 편히 앉으시길.〉

〈영광입니다.〉

자주 있는 일인 것처럼 대답한 시냐티오가 소파에 앉았다.

실내이니 그 무식하게 큰 십자가를 들고 오지는 않았지만, 메마른 사지(四肢)에 품은 용력은 이 방의 누구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는 냉엄한 얼굴만큼이나 무정하게, 잡담을 생략하고 이야기의 핵심만을 짚어들었다.

〈저주가 걸린 물건의 해주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야누스 교단은 해주로도 유명하니까요. 허나 설마하니 그 유명한 징법집행관께서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진 않겠습니다. 물건을 보기도 전에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리아스.〉

가장 신임하는 여기사는 묵언으로 작은 궤를 가져왔다.

궤짝이 열리자 요사스럽게 빛나는 반지가 드러났다.

아니, 요사스럽다는 평가는 프리모르가 그 반지에 걸린 악독한 저주를 알기 때문에 내린 평가일 것이다. 실제로는 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질 때까지도 그저 행복하기만 했으니까.

이젠 없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던 남자가, 사실은 낭군님의 죽이고 그 가죽을 쓴 원수라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마 남은 생을 전부 들여도 그때의 절망감은 잊지 못할 듯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시냐티오는 성궤(聖櫃)에 봉인돼 있던 저주 받은 반지를, 시장의 장난감이라도 집어보듯 손에 쥐었다.

그 동작에는 귀족의 물건을 만지는 예의는 배어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저주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는 증거다.

반지를 든 시냐티오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지독한 저주군요. 생자(生者)를 내장부터 썩게 만들어서 산 채로 언데드로 변모시키는 저주입니까……. 추악하기 이루 말할 데 없습니다.〉

프리모르는 차를 마시며 한 귀로 그 중얼거림을 흘렸다.

반지에 걸린 저주가 어떤 효과인지는 프리모르도 안다. 충성스럽던 성기사가 생전에 진언해 주었기 때문이다.

─저주가 억제되도록 성수를 마시고 가사상태에서 긴 잠에 빠지는 게 가장 좋습니다.

신실하던 그는 그렇게 말하며 프리모르를 다독였지만, 프리모르는 저 반지를 끼워진 손가락을 스스로 잘라냈다.

흑마법사가 죽는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흑마법사 크뤤투스는 사랑하는 남편의 원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끄럼 많던 남편이 고심해서 선물하려던 반지까지 더럽힌 비열한(卑劣漢)이었다.

〈해주는 가능한가요?〉

〈악의를 가진 저주는 거는 것보다 푸는 게 더 어렵죠. 이 반지에 저주를 건 이단자는 상당한 실력자였던 듯 하군요.〉

불쾌하긴 하지만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프리모르는 지금도 눈앞에서 펼쳐졌던 두 마법사의 격전을 눈꺼풀 아래에서 반추(反芻)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호위들도 하나같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흑마법사가 야누스 교단의 징벌집행관(Xystárcha)에게 상당한 실력자로 평가받는다면, 그를 해치운 동방의 전사는 과연 어떨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순식간에 치러졌던 싸움은 화려한 마법으로 자신의 값어치를 올리는데 열중한 3류들의 마법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아름다움 따윈 추구하지 않았다.

가혹한 실전과 훈련을 통해 응축된 기술의 교환. 양측 모두 전사이자 마법사였고, 술자이자 투사였다.

그 흑마법사도, 그를 시종 밀어붙이며 척살한 프리모르의 은인도 말이다.

〈새 반지를 사는 게 더 저렴하리라고 사료됩니다만, 그런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건 아니실 듯 하군요.〉

시냐티오는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성궤에 넣었다.

죽은 남편의 유품이자, 결혼반지인 것이다. 돈의 문제가 아니겠지.

반지보다 몇 배는 비싼 성수를 써 가며 저주를 푸는 것은 확실히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단자를 심판하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장기간 봐온 시냐티오가 말하자면, 그 정도의 어리석음은 오히려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래서 야누스 교단의 징벌집행관은 신분에 맞지 않게 이 의뢰를 받았던 것이다.

시냐티오는 그걸 따로 입에 담을 만큼 사회성이 좋지는 못했기에, 그 진의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예정은 어느 정도로 생각 중이십니까?〉

〈일주일입니다.〉

〈과연. 경매에 참석하시는가 보군요.〉

납득한 시냐티오는 성궤를 닫고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야누스 님께서는 문과 수호의 신이십니다. 교단 바깥의 이단을 몰아내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만, 해주의 반동(反動)을 생각하면 저밖에 하지 못할 일이군요. 일주일 안에 해주해 보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순교하신 형제님은 예정대로 저희 교단에서 안치해 놓겠습니다. 반지의 해주가 끝나는 날에는 고향 땅에 있는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주시길.〉

무뚝뚝한 집행관은 용건만 마치고 잡담도 없이 떠나갔다.

떠나가는 시냐티오를 호위를 시켜서 배웅하며 프리모르는 눈을 감았다.

뱃속에 뱀을 수십 마리 씩 기르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에 비하면, 신앙에 투철한 징벌관은 차라리 대하기 편하다.

그러니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쓴맛은 감미가 부족한 찻잎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장절한 사연은 미담이 되죠.’

지아비의 복수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미망인(未亡人).

잘라낸 손가락이 지조와 결혼생활 등을 상징하는 왼손 약지인 걸 생각하면, 이 상처는 치료하지 않는 게 가장 유리했다.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왼손 약지를 방치한다.

그렇게 하면 죽은 남편을 향한 사랑을 지키고자 다른 남자로부터 다시는 결혼반지를── 사랑을 받지 않겠다는 은유로 해석된다.

사교계에서 프리모르의 상처를 트집잡는 자는 품성을 의심받겠지. 그녀에게 있어서도 손해는 아니다.

결혼하기만 했던 결혼생활이 피와 저주로 더럽혀졌어도, 프리모르에게는 가문과 가문 사이의 다리 역할이 기대된다. 그 역할을 수행할 정도의 의무감은 프리모르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정말로 친가에 돌아가버리면, 남는 것은 신부로서 값어치가 떨어진 미망인과 슬픈 추억 뿐이다.

아르마알스의 본가가── 낭군님의 빈 자리가 느껴지는 공간이 프리모르에게 슬픔만을 낳는다 해도, 그녀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가문끼리의 연결은 유지된다.

잃었던 것들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다.

아이라도 알 법한 자명한 이치다.

‘귀족이라는 생물은…… 계산적이어야 해요.’

프리모르는 차로 입안의 씁쓸함을 헹궜다.

혈통의 장점을 배면 어리석기만 한 작자는 귀족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었다. 유서 깊은 귀족가에서 자라나는 아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교육받을 것이다.

깨문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남편의 죽음마저 권세를 유지할 비료로 써 버리는 슬픔과 처연함마저, 뛰어난 귀족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걸 막고자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님. 저희는 내일 아침부터 경매에 참여할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여기사 리아스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경매의 초대장을 받진 않았지만 아르마알스의 이름은 상대에게 초대를 요구한다는 무례를 용납시킨다. 참석은 어려울 것 없었다.

〈……그렇군요.〉

프리모르는 그 말에 오랫 동안 대답이 없었다.

눈을 감고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 했던 그녀는 시인처럼 운율을 섞어서 대답했다.

〈그러면 은행에도 방문하세요. 경매장에 금액을 지불하는대로 이동시킬 준비가 필요하겠어요.〉

리아스는 그녀가 건넨 가문의 표식을 받아들였다가 헛숨을 삼켰다.

쇠똥구리 브로치 정도의 매직 아이템이라면 지금 들고 있는 자산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은행과의 연계를 지시하다니?

그 말인즉, 프리모르는 경매장에서 쓸 돈이 포켓 머니로는 충당할 수 없을 거금이 되리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은행에서 자산을 퍼다 쓸 정도로 말이다.

〈마님, 이건.〉

〈제 개인 재산입니다. 개의치 마세요.〉

프리모르는 쿡쿡 거리며 웃다가, 자신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리아스에게 왼손을 보여주었다.

〈해주가 끝난다면, 반지를 끼울 손가락을 치료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요.〉

〈……정말이십니까!〉

〈네. 이번 경매에 올라온 엘릭서. 꼭 낙찰받아 봐요.〉

리아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프리모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호위들도 기뻐했다. 주군이 사랑했던 여인이 평생 심한 흉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건 그들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들을 보며, 프리모르는 내심으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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