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마이온 길드가 보장하는 고품질의 엘릭서다.
손가락을 치료하는데는 반 병이면 충분하겠지.
〈……아, 참고로 치료하고 남은 엘릭서는 예수게이 님께 드릴 거에요.〉
〈네?〉
〈엘릭서가 필요한 상처라면 그분께도 있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프리모르의 눈꺼풀 속에는, 남편의 원수를 갚아주었던 은인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가면을 벗어보였을 때 드러났던, 그 심한 화상 흉터.
그만큼이나 오래된 화상이라도 엘릭서라면 치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은인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투자는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호위들은 뒤늦게 프리모르가 엘릭서 입찰에 열의를 불태우는 진의(眞義)를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고, 어쩐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 했습니다.〉
〈은원은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한다. 그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프리모르는 못 말리겠다는 것처럼 한숨을 쉬는 호위들에게 웃어보이고서, 창밖을 내다봤다.
──귀족은 계산적이야 한다.
하지만 프리모르는 귀족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염치를 알고 고마움을 느끼는, 그런 인간.
사람이라면 만사를 이해득실로만 계산할 순 없지 않겠는가. 때로는 가슴이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프리모르는 어릴 적 보았던 백발의 소녀를 떠올렸다.
그녀의 은인이 구하고자 하는, 몰락 귀족의 영애를 말이다.
〈……당신은 어떤가요? 티르시 아르마슈나스.〉
불현듯 내다본 창밖의 별관은 눈꽃에 덮여가고 있었다.
그녀는 모닥불과 호위들의 웃음소리에 따듯하게 감싸여서 도시의 야경을 굽어보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경매에 꾀여 모여든 레나폴리스의 야경은, 어딘가 어둠이 휘몰아치는 듯 보였다.
캐서린의 정기 보고는 이튿날에 치러졌다.
〈여기 말씀하신 보고서요. 기밀 같은 건 아니라서 그냥 써 왔어요.〉
〈땡큐.〉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민 보고서를 받아서 읽는 나.
몇 개 정도는 노트에 옮겨적으며 앞뒤로 2장밖에 안 되는 정보량을 머리에 새겼다.
애1미 시팔. 싸구려 종이 때문인지 약간 노예 시절이 생각나서 좆 같네. 나는 나를 번역기로 쓰던 교수들이 떠올라서 일부러라도 보고서의 내용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을 때, 내 눈썹은 조금 삐뚫어졌다.
〈그 마님의 친가는 못 알아냈나?〉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레나폴리스의 인맥 중에 누구 알 법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황해서 변명하는 캐서린. 왜 쫄아 씨발. 팍 씨, 내가 니 잡아먹냐?
그래도, 아무튼 무슨 말을 하려는 진 알겠다.
검색만 하면 인적사항을 찾는 게 간단하던 21세기에서도 경찰청장 김씨의 친가가 어디 김씨냐고 물어보면 대답 못할 사람이 수두룩했다. 당장 나부터가 몰라레후인걸?
하물며 이세계에서 어느 귀족 가문 며느리의 친가 같은 걸 아는 평민을 찾는다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존나 뭐 하는 새끼세요?
〈레나폴리스의 인맥을 통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게 뻔해서, 경매를 하러 온 귀족들을 건드려보고 있어요.〉
〈알았어. 수고가 많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하는 캐서린이었다.
프리모르의 친가가 따로 감춰진 건 아니겠지만, 그곳에서 삼천리 떨어진 지방 도시의 만물박사보다는 현지인이나 같은 귀족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귀족이랑 접촉하는 게 위험하진 않고?〉
〈저쪽이 먼저 접촉해 올 때가 많거든요. 노르드 님이 슬쩍 주셨던 경매품 카탈로그가 효과 만점이던데요?〉
〈크흐흐. 그러라고 베껴가라 했던 거야.〉
캐서린과 나는 음흉한 미소를 띄웠다.
경매 물품의 리스트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경매장 측에서는 손님들이 원하는 물건이 출품되는 날에만 경매장에 찾아오면 손해다.
원하는 물건이 언제 나올지 몰라서 매일 찾아오다가, 다른 손님들이 입찰하는 걸 보고 혹해서 원하지 않던 물건에까지 돈을 지불하고 사 간다.
이게 수수료로 먹고 사는 경매장 중개인들에게 가장 좋은 경우였다.
그래서 경매품 리스트는 애초에 뿌릴 게 못 된다.
헤르마이온 길드나 아르마알스 가문 정도가 아니면 카탈로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었다.
〈‘관련자들을 조사해서 판매품의 목록을 대충 알아냈다’는 핑계를 미끼로 정보를 캐내고 있어요. 아내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구요.〉
〈그래. 셋이나 있으면 호위로는 충분하지.〉
캐서린의 호위를 맡은 건 다나, 베로니카, 라리루라의 3인파티다.
탱커가 다나 뿐인 게 좀 걱정되지만, 호위라도 진짜 싸우게 될 일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보통 귀족이 직접 행차하는 건 꼴불견이라는 이유로 따까리들만 보내니까.
우리 아내님들은 후드를 쓰고 뒤에서 적당히 프레셔만 뿜어내고 있으면 OK다. 따까리들이 ‘깝치다가 진짜루 싸우면 좆 되겠다’는 느낌만 주면 되걸랑.
〈하아암……. 큼.〉
그때 캐서린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하품했다.
밤낮 없이 조사에 몰두해서 피곤한 모양이었다. 근데 얘 입 존나 크네.
〈자기 주인님 신분만 믿고 으스대는 놈들을 허세를 부려가면서 상대하고 있어요. 그래도 아마추어 상대로 정보를 대가로 받는 건 어렵지 않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거에요.〉
〈글쿠만.〉
그 말에 떠오르는 건 싸구려 펄프 픽션 소설에서 나오는 정보상들이다.
미간에 총이 겨눠져도 유유자적하게 깍지를 끼고 손님을 상대하는, 그런 프로들 말이다.
그렇게 태연한 표정을 지은 캐서린이 등 뒤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웃겼다.
〈고생한다. 좀만 더 힘내.〉
〈무책임한 위로인데 가슴에 스며드네요.〉
〈피곤해서 그렇겠지. 그렇다고 나한테 반하진 마라?〉
〈조심할게요.〉
우리는 개소리를 나누며 픽 웃었다.
그러고 있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야매 삼매진화로 보고서를 태워버렸다.
〈무슨 일입니까?〉
〈노르드 님.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금방 가죠.〉
메이드에게 대답해 주고, 종이의 탄내를 수증기로 감싸서 몰아냈다.
그러고 난 뒤, 아까까지 밟아온 절차를 의식해서 되새김질했다.
‘엘릭서의 반입은 헤르마이온 길드의 도움으로 해냈어.’
석판에 넣고 밀수입처럼 가져온 엘릭서를, 정식으로 도시에 반입한 것이다.
관세를 안 내고 경매에 내놨다간 트집을 잡힐 수 있다.
그래서 좀 전에 헤르마이온 길드에 부탁해서 도시의 검문을 거치고 왔다.
엘릭서를 들고 나가서 성문에 있는 경비에게 세금을 내고, 아무도 꼽 주지 못하게 반입 기록을 남겼다.
경비는 윗선에서 뭔가 들은 말이 있는지 당황하며 시간을 끌려고 들었지만, 무려 직접 행차하신 셀레나가 국법을 운운하면서 밀어붙이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통과시켰다.
그러고 저택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준비를 기다리며 짬짬이 캐서린에게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여기까지 약 1시간 정도 걸렸을까. 나는 엘릭서를 챙기며 눈을 반개했다.
‘자, 이제 슬슬 소문이 퍼졌을 텐데.’
낭설이었던 ‘고품질 엘릭서’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공언됐다.
헤르마이온 길드는 한시바삐 경매측에 물건을 등록하고자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절차를 거쳤지만, 도시에 ‘귀’를 뿌려두었을 관음마 새끼들도 1시간이면 소식을 들었겠지.
‘어떻게 나올까?’
엘릭서의 수급이 급하거나, 돈을 아낄 생각이라면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내가 경매측에 물품을 등록하기 전에 강탈, 강매하면 싸고 빠르게 엘릭서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야말로 보물 고블린 노르드다.
뒷감당?
핑계는 많고, 문제는 없다. 레나폴리스의 경찰인 경비대는 영주의 부하이니 말이다.
‘이 타이밍에 어떻게 나오느냐로, 적의 전력이나 생각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겠는데…….’
엘리트 대갈통을 풀가동하며 옷을 걸치려고 했는데, 작은 손이 나보다 먼저 내 겉옷을 집어들었다.
프랑은 헤르마이온 길드에서 준 고급 의류를 들고 헤프게 웃었다. 나는 픽 웃고서 프랑이 입혀주는대로 옷을 걸쳤다.
“아주 우리 엄마야, 엄마.”
“마마도 나쁘지 않지만, 기왕이면 신부 노릇이라구 해 줘.”
“그러지 뭐, 여보.”
어깨를 으쓱한 나는 에스코트를 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갈까?”
경매장의 품격에 맞게 드레스코드를 맞춘 우리는 셀레나가 주선해준 마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떠나자 캐서린은 먼저 자고 있는 아내들이랑 같이 꿀잠을 자러 갔다. 쓰벌 부럽네.
아무튼, 우리는 우리대로 경매장에서 엘릭서를 감정받고 제출하면 그대로 첫날의 경매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프리모르의 호위가 쇠똥구리 브로치라는 걸 구매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있고, 할 일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차에 올라타자 늠름한 집사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셀레나 옆에 자주 붙어 있는 그 사람이다. 이계에서도 같이 싸웠었는데, 아마 마법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예. 어서 왔습니다. 디스뮤크 씨라고 하셨던가요?〉
〈허허. 예. 외람되게도 직접 소개드리지 못한 채로 이름을 알려드리고 말았군요.〉
〈어휴, 신경 쓰지 마십셔. 저도 그런 걸 신경쓸 만큼 예의범절이 뛰어나진 못한걸요. 그런데 셀레나 양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위험할 수도 있는데, 여기 있으셔도 괜찮으십니까?〉
〈그 점은 염렴 마십시오. 아직 죽으면 안 된다면서, 아가씨께서 매직 아이템을 몇 개 빌려주셨습니다.〉
집사는 옷에 붙은 물건을 톡톡 치면서 대답했다.
누가 쫄리냐고 물으면 허세를 부리는 건 남자의 종특이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서는 마초이즘의 오러가 엿보였다.
〈큰 보탬은 못 되더라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안전하다면야 괜찮겠죠. 그래도 안 다치게 조심하십셔.〉
님 죽으면 나 책임 못 져요. 일류 마초는 레이디의 눈물에 약하단 말이지. 나 같은 불꽃쾌남은 물 타입 기술에 2배의 데미지를 받아버리는 것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계속 언제 있을지 모를 습격을 경계했다.
마차는 눈밭을 미끄러지며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봐도── 경매장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도, 습격해 오는 사람은 있지도 않았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져서 프랑에게 눈으로 질문했는데, 룬 반지로 기척을 감지하던 프랑도 곤란한 눈치로 고개를 저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 찬스를 그냥 넘긴다고? 호위도 없는 마차인데?’
이해 못할 짓은 아닐지도 모른다.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면 긁어부스럼을 만들 것 없이 그냥 사버리면 된다. 정보상인 캐서린과는 달리 헤르마이온 길드의 마차에 탄 우리는 습격하기 까다로운 상대다.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기분은 든다.
정체를 들키지 않고 쌔벼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이 도시에 모인 귀족도 많으니까, 그들 중 누군가가 한 짓일 거라면서 잡아떼도 헤르마이온 길드는 강하게 추궁할 수 없을 건데.
〈최고급품 엘릭서, 확인 완료됐습니다.〉
그런 의심의 눈초리는 경매 담장자에게까지 향했다.
엘릭서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경매장 총괄담당자를, 나는 오딘의 눈으로 존나게 꼬라봤다. 이 새끼가 중간에서 엘릭서를 빼돌리거나 하는 거 아냐, 시발?
〈고맙습니다. 품질에 이상은 없었죠?〉
프랑은 오딘의 눈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된 나 대신에 관리인에게 물었다. 그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하하. 기탄없이 말씀드리자면, 헤르마이온 길드장님의 부탁이라고는 해도 실물을 받기 전에 상품을 일정에 끼워넣는 건 불안했거든요. 이제 안심이군요.〉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원만한 대화 끝에 엘릭서는 그들의 관리로 넘어갔다.
그런 과정에 수상해 보이는 몸짓은 없었다.
이제는 만약에 운송 전후로 엘릭서가 증발하더라도, 나는 손해 청구가 가능할 것이었다.
‘아무 일 없이 끝나버렸군.’
허무해진 나는 프랑을 데리고 경매장으로 갔다.
디스뮤크는 집사 1명 정도는 있어야 가오가 산다면서 따라오려고 하길래 그냥 그러라고 했다.
들어가면서 번호표를 받았다. 우리는 51번이었다.
〈노르드 님. 경매 방식을 다시 설명드릴까요?〉
〈아, 메모해 놨으니까 그걸 보겠습니다.〉
디스뮤크의 배려에 대충 대답하면서 좌석에 앉았다.
극장 같은 느낌의 좌석이다. 손님들 간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경매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손님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뒷쪽에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약간 옛날 생각 난다.”
프랑은 내 의문을 달래려는 듯 내 손을 잡고 웃었다. 나는 그 말에 생각할 것도 없이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 같이 크림 뭐시기 서커스단에 갔을 때?”
“응. 별로 좋은 추억은 아니지만.”
“그때도 결국 잘 끝났잖아. 이번에도 그럴 거야.”
나는 디스뮤크가 보건 말건 프랑의 뺨에 키스했다.
원래 집사나 메이드나 편의점 알바는 말하는 자판기 같은 겁니다. 있어도 안 보이는 척 하면 되는 것이지. 나만 일할 때 그딴 좆 같은 짓을 당해보는 건 불공평하잖아? 크헤헤헤.
〈시작에 앞서, 저희 경매장을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진행자인 일로스입니다.〉
그렇게 딴짓을 하다 보니까 경매의 막이 올랐다.
진행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사방에 눈깔을 마구잡이로 굴려댔다.
‘쟤는 아니고, 저 놈도 아니고, 저 새낀 절대 아니고──’
내가 찾는 건 한 사람이다.
타겟의 인상착의는 캐서린한테 들었다. 중간에 프리모르 일행도 보였지만, 눈이 마주치지 않게 가볍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