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2화 (352/1,009)

《착하지, 착해~.》

그녀의 귀로는 알아듣지 못할 고향말을 중얼거리면서, 여도적은 저택에서 오늘내일 하던 벌레들과 링크를 연결했다.

쇠똥구리 브로치의 태양 같은 빛이 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자, 지능이 거의 없는 벌레들은 여도적의 지시를 따르는 생물형 골렘처럼 움직였다.

여도적은 흐뭇하게 자신의 손에 들린 브로치에 입김을 불고 옷에 비볐다. 순금의 광택이 보기 좋았다.

〈마님. 준비 됐어요.〉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세요.〉

나중으로 미룰 일도 아닐 뿐더러, 벌레들을 보고 있는 것도 솔직히 고역이었다. 프리모르는 즉시 조사를 개시하도록 명령했다. 사심도 약간 섞여 있는 지시였다.

‘날파리까지는 이해했지만, 바퀴벌레는 좀…….’

─욱.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할 뻔 했어도, 프리모르는 평생을 연습한 표정 관리 능력과 마나까지 사용해서 추태를 면할 수 있었다. 무모한 여행길 때문인지 최근 컨디션이 나빴다.

‘헨리가 살아있었다면 진찰이라도 받아봤을 걸.’

아니, 시냐티오에게라도 받을 걸 그랬을지도 모른다. 잠깐 후회한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여도적의 성과를 기다렸다.

─꿈틀.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던 것도 몇십 분이었을까. 독특한 자세로 정좌하고 앉은 여도적의 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찾았다. 하지만 이건……?〉

〈무슨 일이야?〉

프리모르의 호위인 마법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지금껏 그녀의 탐사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기에, 이런 반응은 처음 봤던 것이다.

〈아니, 확신은 없는데…… 결계인가? 별관 안에 들어오자마자 벌레들과의 링크가 점점 약해져 가.〉

〈결계? 설마. 그런 거라면 외부에서도 보일 거라고.〉

마법사는 즉시 부정했다. 철폐한 뒤라면 몰라도 발동 중인 결계를 못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씨, 누가 뭐래? 그냥 그런 것 같다 이거지.〉

여도적은 한쪽 눈만 뜨고는 투덜거렸다. 마법사는 어깨를 두드리며 자기 생각을 읊었다.

〈또 추위 때문에 링크에 문제가 생긴 거 아냐?〉

〈뭐라는 거야. 별관 안이 바깥보다 추울 리도 없고, 쇠똥구리 브로치의 가호를 뚫는 냉기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게 사실이면 여기가 무슨 키타이 북방의 설원지대게?〉

〈……탐사하기가 어렵나요?〉

걱정스레 묻자 여도적은 혼자 생각하다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뇨. 별관 안쪽엔 경비가 없어서 해 볼만 합니다. 실패해봤자 다시 도전하면 될 일이고요. 안 그래도 이제 그럴싸한 방 하나를 찾아낸 느낌이어서…… 어?〉

그렇게 말하며 벌레를 조작하던 도적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벌레의 감각을 경유해서 보이던 시야에 말을 잃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것이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벌레의 시야라는 건 인간처럼 확실하지 못하다. 마법이라는 보정 필터를 걸쳐서도 그녀가 파악하는 광경은 감각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감각에 비춰진 별관의 중심부는, 하늘까지 치솟은 순백의 나무로 보였다.

〈이게 대체 뭔──〉

〈마, 마님! 큰일입니다!〉

그때였다. 기사 교육을 받으며 배운 예의도 잊은 듯, 한스는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리아스는 그의 행태에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 시끄러운 난입에 여도적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갈색 피부의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야, 이 개자식아! 너 때문에 링크 끊겼잖아! 별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3시간이나 걸렸는데 진짜 죽고 싶냐!〉

〈어, 아, 아니 그건 미안하다. 근데 진짜 큰일났다고!〉

〈큰일은 지랄이!! 아악!! 짜증나, 진짜!! 뭐 하나 건질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둘 다 그만. 무슨 일이죠?〉

사태를 정리하고자 프리모르가 대표로 묻자, 한스는 허둥지둥거리며 대답했다.

〈괴도입니다! 루크레겐스에서도 유명하다던 그 괴도들이 경매장을 습격하고 있어요!〉

그의 말에 한 발 보태듯 폭음이 저택의 창문을 흔들었다. 대경(大驚)하며 창밖에 눈을 돌린 프리모르는 경매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

하늘까지 치솟은 화마(火魔)가 경매장을 불태우고 있었다.

로빈 킴블리는 도둑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둑이란 돈이나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예를 들자면 ‘괴도’ 같은 좀도둑 따위가 아니다.

그가 훔치는 것은 금화보다 가치 있고 보물보다 찬란한 것들이다.

혹자는 그를 ‘암살자’나 ‘무차별 살인마’ 같은 촌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로빈은 스스로의 직업에 확고한 미학을 가지고 있었다.

소매치기보다 섬세하고, 도둑질보다 철저해야 하는 찰나의 예술!

그것이 로빈이 추구하는 ‘생명의 도둑질’이었다.

─그 괴도들이 아니었군. 하지만 쓸모는 있겠어.

그렇기에 로빈은 저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잡혀와서 좀도둑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문득 울화통이 치밀었다.

작업장을 물색하는 중에 뜬금없이 사로잡혀서 노예처럼 부려먹히는 것이든, 자기 처지도 모르고 돈이나 밝히면서 떽떽대던 멍청한 하프엘프 마법사든, 도통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나마 그 하프엘프는 일하다 뒤졌는지 며칠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덕분에 짜증은 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래도 찰나의 예술가인 자신을 좀도둑질에 써먹겠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가!

아니, 경매장을 터는 것 뿐이라면 참고 또 참아서 넘어가 줘도 좋았다. 창고까지 가는 중간에 자신의 예술관을 선보일 기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엔?’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고 솥에 들어가는 것까지가 소임이다.

그것도 자기 소유의 사냥개가 아니라, 목줄을 채워서 잠깐 부려먹은 들개라면 절대로 살려둘 리가 없었다.

경매장의 상품들은 귀족들이 사고, 팔고자 했던 물건들이다.

그런 걸 훔쳐갔다는 증거라니? 로빈이 생각해도 그런 후환을 남길 뿐인 증거는 철저하게 말소하는 게 당연했다.

그 ‘증거’에 자신이 포함될 거라는 사실은 로빈도 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 망할 빨간 머리 얼시(Ulsy) 놈의 사냥개로 인생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디아볼로이고 부백작님이고 간에 엿이나 쳐먹으라지.’

기회를 노려서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

멀리 떨어지면 설령 그의 도주를 눈치채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로마니아를 벗어나야 한다는 건 아쉽지만 주무대가 바뀐다고 배우의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잖은가?

그에게는 인류사에 로빈 킴블리라는 대도(大盜)의 위명을 새겨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가 있었다.

〈해치워!! 이 빌어먹을 좀도둑 새끼들!!〉

─화르르륵!

로빈은 경매장을 어지럽히는 불꽃과 조무래기들을 피해서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앞에서 싸우는 멍청이들은 미끼였다. 그는 손목에 판 매직 아이템으로 창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높은 건물을 피해 안으로, 또 안으로 달려갔다.

〈끄르르륵……!〉

지나치면서 방해되는 경비는 입을 막고 목구멍에 구멍을 하나씩 더 만들어 주었다.

기분 같아서는 이들의 시체로 자신의 예술미를 뽐내고 싶었지만, 살아만 있으면 또 기회가 올 것이다. 지금은 살기 위해 훔쳐야 할 때였다.

‘……여기로군!’

매직 아이템이 가리키는 곳을 발견한 로빈은 풀밭을 발로 헤집었다. 흙으로 감춰진 창고의 입구가 드러났다. 철판을 바닥에 깔아놓은 형태였다.

로빈은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고자 그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쳤다.

─퓨부부부부붓!!

하지만 그 순간, 로빈은 뒤통수에 예리하게 쏟아지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몸을 비틀었다. 화살비처럼 쏟아지는 얼음 조각이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꽂혔다.

혀를 찬 로빈은 시계탑처럼 우뚝 선 경매장의 건물을 노려보았다

〈고담(古談)의 비행 챔피언, 등장.〉

낯선 남자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그 첨탑에 착지했다.

어떠한 마법의 힘인지, 로빈의 눈으로는 아이 마스크를 쓴 남자의 정확한 인상을 간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뒤따라서 시계탑에 착지하는 두 여자를 보고 나서, 그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흐. 너희가 그 좀도둑들이냐?〉

눈가만 감춘 마스크와 날개처럼 변하는 망토! 그가 사전에 들었던 괴도라는 년들의 인상착의와 동일했다.

하지만 로빈이 친히 말을 걸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장 선 남자는 대답도 없이 다른 괴도들에게 손을 저어댔다.

〈안쪽이다. 먼저 가라.〉

〈예이, 예이.〉

〈조심하세요. 죽으면 저희도 곤란하니까.〉

〈쓰잘데기 없는 걱정 말고 일이나 완벽하게 해.〉

로빈은 이를 악물고 눈에서 불똥을 튀겼다.

자신의 앞에서 태평하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다니, 건방진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그가 얼굴에 띄우고 있던 비웃음은 금방 분노로 바뀌었다. 저딴 멍청한 년들 때문에 자신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떠올린 것이었다.

〈기나긴 밤을 너희의 얼굴을 보기만을 기다리며 보냈다, 루크레겐스의 괴도들이여!〉

극적인 말투를 자아내며 로빈은 팔을 벌렸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미리 듣지 못한 상대이긴 했지만, 그딴 사실은 그가 경계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았다.

해 봤자 좀도둑과 어울리기나 하는 3류였다.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로빈 킴블리’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초석이 되도록 해라!〉

─투웅!!

길쭉한 쇠꼬챙이를 꺼낸 로빈이 도약했다.

그는 날다람쥐처럼 경매장 벽의 돌출부를 디디고, 타고 오르며 괴도들에게로 접근했다.

그때, 시꺼먼 복장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로빈을 겨냥했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마치 흰 매가 어둠을 가르며 밤하늘을 날아가는 듯 했다.

길게 뻗은 검지 끝에 극한의 냉기가 압축되어 모인 순간, 사내는 위엄 넘치는 성량으로 일갈했다.

〈배트배트-개틀링건!〉

굵은 손가락에서 차가운 머즐 플래시(Muzzle Flash)가 작렬하며, 수십 다발의 얼음 조각이 쏟아졌다.

─투두두두두두!!

〈꺼허어어어어어어어억?!〉

손가락에서 쏟아진 얼음조각은 로빈의 가슴을 두들겼다.

이미 로빈이 쥔 꼬챙이에서 피와 살점을 발견한 그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명치를 중심으로 관통상을 입으며 로빈은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아아, 이 익숙한 감촉. 4년 만이구만.〉

후우─.

검은 옷의 사나이는 망토를 펄럭이면서 L자 모양으로 세운 집게 손가락을 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겨울철의 공기보다 몇 곱절은 차가운 냉증기가 흘러나왔다.

마나로 총열을 만들고 얼음 조각을 탄환 모양으로 뭉쳐서 뿜어내는 기술이었는데, 사실 굳이 애용할 만큼의 성능은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특급사수가 된 기분에 즐거워졌을 뿐.

‘가스총에 얼음 탄환이면 살상력이 낮을 만 하지.’

사실상 마나빨로 위력이 높아진 거지, 조금 쎄고 큰 BB탄 수준이었다.

그가 혀를 차고 바닥에 착지했을 때, 로빈은 넝마가 된 가슴팍을 붙잡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크, 학……!! 괴, 괴도는 공격하지 아, 않는다고……!!〉

〈누가 그래? 너희 쮸인님이 그러든?〉

높은 탑에서 손쉽게 내려온 사내는 건들거리며 로빈에게로 다가왔다.

능청맞은 동작에 비해서 단단히 디딘 발걸음에는 일절 흐트러짐이 없다. 그제야 로빈은 상대가 말도 안 되는 고수라는 걸 눈치챘다. 최소한 그가 당해낼 적은 아니었다.

입술이 보라빛이 된 로빈은 자존심을 버리고 엎드렸다.

〈기, 기다려 봐!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살려줘! 살려만 준다면 내 목숨값을 할 만한 물건도 있다!!〉

〈니 목숨값이면 별 가치는 없을 것 같은데. 뭐, 말해 봐.〉

로빈은 더듬거리는 손동작으로 품에서 원통을 꺼냈다. 대나무통처럼 안이 비어 있는 통이었다.

〈이, 이건 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 아이템이다. 이거라면 저 경매장의 물건을 전부 담을 수도 있을 거다.〉

〈……공간마법?〉

마스크에 감춰진 남자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게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물건은 아닐 텐데. 너 같은 병신한테 쥐어주는 것도, 그걸 니가 니 좆대로 남한테 넘겨주는 것도 너무 개씹구라 같지 않냐?〉

〈저, 정말이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빈 자신도 반신반의이긴 했다. 공간 마법은 마법사 길드에서도 특정한 아이템이라는 조건을 걸고 간신히 성사시키는 마법이다.

이 조그만 통에 종류를 불문하고 수십 종류의 패물을 훔쳐담을 수 있다니?

로빈 스스로도 못 믿을 얘기였다. 하지만 그걸 말했다간 이번에야말로 저 남자에게 살해당할 것이었다.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확, 확인, 화화화화화, 화으가아게게그그극…!!〉

목숨을 걸고 제안한 로빈은 느닷없이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통증에 말을 더듬었다.

〈어가각! 그아가가각가! 가가가가가!!〉

넝마가 된 가슴이 울긋불긋 거리며 피를 뿜었다. 목부터 턱까지 치솟은 혈관이 검게 물들자 로빈은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서 검은 핏줄기를 흘려댔다.

그의 이야기를 의심쩍게 듣던 노르드는 인상을 썼다.

〈아니 씨발, 혐주의 좀.〉

〈가기가 고가기고──!!〉

물이 찬 가죽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로빈은 검은 피를 뿜으면서 절명했다. 그가 들고 있던 매직 아이템도 그에 맞춰서 스스로 고장났다.

─철퍽. 가슴에 갈비뼈로 꽃을 피운 로빈의 시체가 검은 피웅덩이에 쓰러졌다.

〈……허 참. 거 존나게 철저하시구만.〉

절명한 그를 보면서 노르드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나는 로빈인지 로빈슨인지 하는 놈의 시체에서 영혼을 찾지 못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창고의 장점은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독 안에 든 쥐가 된다는 점이었다.

경매장 사람들이 우리가 안쪽에 잠입했다는 걸 눈치깠다간 출구에 경비들이 쫙 깔릴 것이었다.

그들 중에 골드 클래스 정도의 전사들도 널려 있을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딴짓을 할 유예는 없었다. 언제라고 중간에 딴 짓 하면서 느긋하게 일 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은 없지만.

〈언니, 아직이야?〉

〈끄으으…! 이거 좀 빡세, 스테이시!〉

안쪽으로 들어가자 괴도 자매가 자물쇠와 결계를 상대로 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캐서린이 말했다.

〈결계를 해제하는 중이에요. 여기 결계, 이중삼중으로 돼 있어서 언니라도 시간이 좀 걸릴 거에요.〉

〈그래?〉

대충 대답한 나는 오딘의 눈으로 구조를 분석하고, 팔찌를 창으로 바꿨다.

〈야, 스테이시 아닌 애. 비켜 봐.〉

〈그웬이야, 그웬! 내가 비키면 뭐 하게── 어? 잠깐만?!〉

내가 무기를 든 걸 보고 그웬, 그러니까 오드리는 경악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한 발 먼저 기술을 펼쳤다. 오랜만에 쓰는 【게르튀르】의 공격기 제 2품새다.

까앙─!!

미스릴 창날은 짧고 강렬한 파쇄음을 터트리면서 결계의 한축을 박살냈다. 3겹의 결계를 뚫고 벽면을 관통한 것이다.

〈끼아아아악!!〉

오드리는 목 졸린 새처럼 비명을 질러대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게 그렇게 무식하게 부순다고 팍 풀리는 결계가 아니라고!!〉

〈되는데요.〉

〈되기는 개뿔이 되── 됐네?〉

휘우우우…….

전원이 나간 프로젝터처럼 결계가 해제됐다. 오드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잡아뽑다가 말고 입을 벌렸다.

결계는 마법을 해제하는 자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환상과, 방어벽, 그리고 경보의 3중 보안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잘난 마법이든 마나 공급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모든 마법에는 마나가 필요하다.

그게 이세계 마법의 절대원칙이며, 나는 그 핵심을 댓번에 쳐부순 것이었다. 아직 이세계인들은 예비 배터리라는 개념을 마법에 적용하지 못했거든.

입을 벙긋거리던 오드리는 갑자기 얼굴을 발그레 붉히더니 내 팔에 앵겨들었다.

〈저기, 오빠? 혹시 나랑 사업 하나 안 할래?〉

〈회유하는 것 치고는 속물 티를 너무 내는군. 헛소리 말고 빨리 움직여. 결계가 뚫린 걸 눈치채는 것도 시간 문제다.〉

〈히잉, 냉정해.〉

지랄 말고 좀.

확실히 냉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평소 처음 보는 여자를 상대로는 마초이즘에 따른 낯가림이 있는 편이었다. 유부남 노르드의 종특이다.

당장 라리루라나 베로니카한테도 그랬는데 뭐. 예외는 솔로일 때 만난 프랑, 다나, 티르시 정도이고 말이다.

우우웅…!

나는 석판에다가 경매품들을 철저하게 챙겨넣었다. 예외는 GPS 대검 뿐이다.

위치 추적기란 게 내가 쓸 때는 좋아도 남이 쓰면 참으로 좆 같은 법이라서, 부숴도 문제고 모르는 척 해도 문제였다. 적당히 들고 다니다가 추격에 잃어버린 것처럼 버려버리자.

〈이제 탈출한다. 움직여.〉

〈네. 근데 누가 보면 당신이 저희 리더인 줄 알겠어요.〉

〈그러게. 오빠 우리 대장님 안 할래?〉

〈나는 착하게 살아도 돈 궁할 일 없다.〉

좀 잘 대해줬다고 고새 빠진 것 봐라.

몇 대 줘 패버릴까 하다가, 도망치는 발이 늦어지는 것도 곤란하다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리고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지하창고의 뚜껑을 열고 땅 위로 빠져나온 바로 그때, 소름 돋도록 날카로운 검격(劍擊)이 내 미간 위를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아니, 스쳐지나갔다고 하기엔 조금 우습다.

만약 못 피했다면 내 머리통은 두쪽이 났을 테니까 말이다.

─살랑. 프랑이 멋지게 잘라준 앞머리가 몇 가닥 베어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쓰벌. 또 머고?〉

〈……흐음. 괴도로 썩을 인재는 아닌데.〉

서로 지 할 말만 하는 대화였다. 자존심과 신념이 확고한 달인들 사이에서는 자주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짜고짜 킬각을 노린 상대가 좀 많이 쎄 보이는 상대여서였다.

〈이름을 밝혀라, 실력 좋은 좀도둑. 그리 한다면 즉결처형만은 봐 주겠다.〉

휘리릭─ 척.

검을 손에서 몇 바퀴 돌린 여성은 그것을 자신의 팔에 기대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몸에 상처가 많은 여성이었다. 상처의 갯수가 많은 건 아니었는데, 몇 개 있는 상처의 임팩트가 많이 컸다.

얼굴의 절반을 안대로 가렸으며, 왼팔과 왼다리는 애새끼일 적에 엿 바꿔먹었는지 의족을 찼다. 활동성 좋게 자른 단발은 엄혹한 표정과 합쳐져서 존나 대장군의 포부가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긴 한데, 경매장의 경비인 것 같진 않았다.

저번에 만난 경매 총괄자보다 옷이 고급스럽다. 오히려 내 기억 속에서는 예전에 본 사르가디스 영주에 비교하는 편이 더 격에 맞다는 느낌이었다.

〈실례지만, 뉘십니까?〉

〈미네르바 쿨라피우스. 폐하로부터 루크레겐스의 통치를 일임받은 영주다.〉

앗,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아줌마가 저희 아내 서커스를 박수치면서 보셨다믄서요?

‘……근데 존나 님이 왜 여깄어요?’

아니지. 애1미 씨팔, 여기 있는 이유는 둘째치고 왤케 쎄 보이게 생겨먹으셨나 몰라.

설마 장군 출신인가? 어째 영지 돌아가는 꼴이 좆창난 듯 싶더니만, 정치질을 못하는 이유가 있었구만.

뛰어난 병사가 곧 뛰어난 장군은 아니듯, 뛰어난 장군도 칼 못 쓰는 통치에는 재주가 없는 것이다. 예외도 있겠지만 일단 이 아줌마는 그래 보였다.

〈귀족에게 이름을 질문한 것이다. 너도 이름을 밝혀라.〉

〈괴도 블루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나는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면서 퇴로를 점검했다.

왔던대로 튀면 된다. 다른 두 사람을 흉내내서 나도 야수회귀의 마나로 글라이더를 만들고, 증기 분사로 비행하면 튀는 것 자체는 쉬웠다.

쫓아오는 사람은 많겠지만 감당 가능한 범위다.

〈그래서 뭐, 저희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농담 솜씨는 최악이군. 광대는 못 하겠어.〉

뜬금없이 남의 개그센스를 비방한 서커스 마니아 영주는 날 예리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훔친 물건을 내려놓고 따라와라. 그렇게 하면 로마니아의 법치에 준한 형벌만을 내려주겠다고 약조하지.〉

〈그럼 노예 직행이겠네요?〉

〈격분한 귀족들에게 죽는 것보단 낫겠지. 내 밑에서 몇 년 구른다면 너희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이 사람이 또 트라우마 스위치를 누르는 재주가 있으시네.

웃긴 건 심하게 FM이긴 해도 미네르바 쪽이 몇 배는 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나도 도둑질 중이니까.

근데 빨리 훔쳐서 삐라 뿌리고 튀어야 옆에서 싸우고 있는 경매장 측 사람들도 더 다치지 않고 끝날 건데.

‘내가 물건을 훔쳐가서 돈으로 바꿔먹을 것도 아니긴 해도, 그걸 말한다고 믿을 것 같지도 않군.’

튀어야 하나? 빈손이라고 구라를 까봤자 체포당해서 몸수색부터 거칠 것 같다.

잡혀서 맨얼굴을 들키면 인생 개쫑난다.

‘역시 튀자.’

나는 온힘을 다해서 헤스왈드 자매에게 수신호를 보내며, 미리 건네받은 후추 폭탄을 바닥에 터트렸다. 그 틈에 날아온 칼침은 거인 가죽 갑옷과 야수회귀 이너 아머로 막았다.

〈아악!! 염병, 막아도 존나 아픈데요!!〉

〈팔다리가 좀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

짝팔짝다리 아줌마가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리네 씨발. 난 식은땀을 흘리면서 쌍둥이의 후퇴 시간을 벌고, 숄더 태클로 미네르바를 밀쳐냈다.

〈큭!〉

예상대로 의족은 맨발만큼의 성능을 못 내는 건지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접전을 벌인다면 달인의 검술로 그 페널티를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도망치는 우리를 쫓기엔 매직 아이템으로 보이는 의족으로도 많이 후달렸다.

〈루루팡! 루루피! 루루얍!〉

〈카흑, 큭, 콜록, 콜록!!〉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후추 폭탄을 던지고, 거기에 색깔을 깔맞춤한 연기로 미네르바를 감쌌다. 마나로 급하게 몸을 감싸려는 듯 했지만 그걸로 막히면 괴도는 뭐 먹고 살겠는가.

‘닷지각 떴다!’

뜬금없는 등장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제 튈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헤스왈드 자매를 쫓아서 튀다가, 달을 배경으로 허수아비처럼 멈춰선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멍을 때려버리고 말았다.

빨랑 안 튀고 뭐하냐고 물을 건 없었다.

아까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시계탑에 올라서서 우리를 쳐다보는 백발의 가면-마님이, 호위들을 데리고 우리한테 은화살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겨울이 군궁해지기 쉬운 계절이라기로서니, 도둑질을 넘어가 드릴 수는 없겠군요.〉

그녀는 우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저도 이번 경매에서 꼭 사야 할 물건이 있어서.〉

이야, 시발.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네.

이 동네 마님들은 현장에서 직접 뛰는 게 미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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