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 뚝.
피가 방울지며 떨어지는 작은 방에서, 이반 리터 폰 디아볼로는 고문서(古文書)를 읽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기사는 고대문명 시대에 쓰여진 활자를 영웅담을 읽는 소년처럼 가슴 뛰는 얼굴로 탐독하다가, 바깥의 소란을 눈치챈 듯 인상을 썼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직 움직이고 있군요.〉
디아볼로는 이미 그를 궁지로 몰아넣고자 하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상대가 어떤 자인지 알지 못한다는 건 딱히 문제될 일이 아니다.
암투(暗鬪)라는 것은 상대의 후보를 좁히는 것부터가 시작이었고, 디아볼로는 그 일에 몹시 익숙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이 일을 시행하기 앞서서 철저하게 플랜의 방해물이 될 상대를 조사해 두었다.
그리고 디아볼로가 떠올릴 수 있는 후보자들 중에 이토록 빠르고 대담하게─어떨 때는 위법의 경계마저 작두 타듯 오가면서─ 일을 진행시킬 능력자는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의 뒤쪽에 어른거리는 철인(鐵人)의 그림자는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작자라는 것이었다.
〈완벽주의자를 비웃으며 성공가도를 달려온 저입니다만, 기초적인 계획부터가 무너지는 게 대체 얼마만일까요.〉
수십 번도 더 읽었던 책에 조심스럽게 책갈피를 끼우고서 디아볼로는 일어섰다.
그가 있는 좁은 방에는 인간과 시체의 사이에서 생사를 헤매는 인물이 있었다.
〈……죽… 여줘….〉
〈안 됩니다, 영주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주군으로 섬겼던 이가 죽음을 바라며 애처로운 목소리를 흘려도, 디아볼로의 표정은 책을 읽을 때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미미한 감정이 있을 뿐이었다.
〈차별은 뿌리 깊죠. 하지만 왜 여러분은 누군가를 차별할 때, 그 자에게 보복당하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요?〉
─콱! 그는 따분한 것처럼 영주의 흰 머리를 움켜쥐었다.
〈로마니아가 룬 마법으로 새로운 마법체계를 정돈하고, 그 지식을 마법사 길드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하면서…… 저 같은 얼스터 인은 로마니아의 뿌리 깊은 혐오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건 그 복수에요.〉
말의 내용에 담긴 무거움이 거짓말처럼 디아볼로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레나폴리스의 영주 역시, 이미 몇 번 들은 이야기에 별달리 반응하지는 않았다.
〈──라는 게, 제가 실패했을 때의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뭐, 농담 삼아서 들려드릴 때랑은 달리 이젠 실패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와 버렸군요.〉
디아볼로는 절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플랜의 최소 조건은 달성했지만, 이래서는 실패다. 이반 리터 폰 디아볼로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남을 수 없게 됐다.
그건 다시 말해서 앞으로는 디아볼로도 자금을 융통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
반쯤 붕괴된 플랜을 억지로라도 진행시키는 건 가능해도, 주모자로 여겨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밀어붙이는 누군가는 틀림없이 디아볼로만큼 결단력과 지혜가 있는 자였다.
그가 이만큼 자세를 무너트린 디아볼로에게 다시 수를 쓴 거라면, 마무리를 지을 만큼 무자비한 일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었다.
완전한 실패와 절반의 성공, 저울에 올린다면 어느 쪽을 골라야 하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하는 수 없군요.’
디아볼로는 영주와, 그가 매달린 곳에 새겨진 마법진을 피해가며 책을 공중에 던졌다.
공중에 생겨난 그림자와 같은 왜곡이 고문서를 집어삼키자, 로마니아의 역대 황제들이 수백 년 이상 찾아헤매던 책은 그렇게 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나폴리스의 영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천장에 매달린 몸을 비틀었다.
〈아, 으…….〉
〈그렇게 재촉하지 않으셔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원로원 창시자의 혈족이 네 명이나 모였으니, 영주님께서도 좌석의 한 곳을 맡아주십시오.〉
흰 머리의 영주에게 무심하게 말하고서 디아볼로는 포션 병으로 와인 잔을 채웠다.
계획의 철저함은 무너졌지만, ‘그녀들’이라면 플랜이 기동되기만 해도 알아서 중심부로 모여들 것이다. 책임이라는 것에 속박되는 자들은 흔히 그렇게 구는 법이니까.
─촤악.
디아볼로는 잔에 채운 엘릭서를 바닥에 뿌렸다.
일이 가경으로 치닫으면서 실패의 색이 짙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 벌어질 혼란을 상상하며 삐뚜름한 미소를 띄웠다.
고품질의 엘릭서를 들이키는 디아볼로의 목덜미는, 벌레에 뜯어먹힌 듯한 흉터로 가득했다.
***
저택에 돌아온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테이블에 올려둔 엘릭서를 쳐다봤다.
경매장에서 훔친 물건은 거의 다 영주 저택에 던져놨지만, 몇 가지 예외는 있었다.
‘내 엘릭서를 그 새끼한테 넘겨줄 수는 없으니까.’
저택에 돌려놓을 물건은 당연히 엄선해야 했다. 엘릭서나 대검을 돌려놨다간 GPS 신호를 눈치챈 디아볼로가 공짜 엘릭서에 희희낙락 할 것 아닌가.
만약에 누가 빼돌리기라도 하면 내 꽁돈이 날아간다는 거? 그건 부속적인 이유고.
물론 이걸 빌미로 엘릭서의 원래 주인인 나한테 ‘마! 니 괴도 아이가?’ 하며 의심의 화살이 돌아오면 좆된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디아볼로가 엘릭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훔쳐가자마자 썼겠군’ 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한테 더 유리하게 굴러갔을 텐데.’
가면을 쓰면서 혀를 차는 나.
상품을 도둑맞은 귀족들 입장에선 ‘대체 저택에 뭐가 있길래 수십 억 상당의 손해를 감수하고 병력을 놀리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거기서 딱! 하고 도난당한 물품의 일부가 디아볼로의 저택에 있는 게 발각된다?
─이 씹새끼가 자작극을 벌였구나!
─그 괴도 년들도 니 끄나풀이지?!
─어쩐지 레나폴리스에 경매를 유치시키려고 돈을 물처럼 쓰더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 새끼가 엘릭서를 구매하려는 열의는 4일째 되는 날에 모든 손님이 자기 눈으로 보게 될 거야. 저택의 경비가 삼엄하다는 건 영주를 추궁하러 간 사람들은 다 눈치챌 거고.’
엘릭서에 대한 구매욕.
이상하게 높은 저택 내부의 경계심.
그리고 저택에서 발견되는 도난당한 물품까지!
3개의 심증과 물증은 확실하게 귀족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일이 어떻게 굴러가든 저택의 경비는 필연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베로니카가 티르시에게 접촉할 수만 있으면 탈출은 누워서 떡 먹기다. You 로마니아 촌놈. 공간이동이라고 알아요?
우리가 세운 작전은 대충 그런 것이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나.’
상대의 책략을 읽어냈으니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내가 오딘의 눈이라는 치트 눈깔로 대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좆되는 건 오히려 우리였을 것이다.
그걸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디아볼로, 그 씹쌔의 책략과 수완은 뛰어났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예수게이로 변장할 준비를 마친 나는 저택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빠져나와서, 이른 아침부터 프리모르의 호위를 만나러 나왔다.
〈안녕. 언제 봐도 덩치 한 번 크네.〉
미리 예정된 장소로 가자 약속시간 10분 전인데도 그녀는 진작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래 기다린 듯한 흔적이 여도적이 앉아 있는 자리의 흙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 덩치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숨어다니는지 비결을 듣고 싶을 정도야.〉
〈호랑이가 산을 타며 쫓아와도 필부는 눈치채기 어려운 법 아니겠소? 아무튼, 늦어서 미안하오.〉
여도적은 겸양 떨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됐어. 우리도 오늘 아침 영주 저택을 나왔거든. 나온 김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나왔다고? 영주가 허락해 줬소?〉
〈우리가 나온다는데 지가 어떻게 막을 거야? 당신 말대로라면 디아볼로도 상당히 미친놈인데, 그런 놈 옆에서 탱자탱자 보낼 수는 없잖아.〉
여도적은 어깨를 으쓱였다가 내 우려를 눈치챈 듯 말했다.
〈아, 완전히 저택을 나온 건 아니니까 안심하고. 그 티르시라는 사람 건도 있고, 외출이라는 핑계로 나와 있는 거야.〉
그녀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모르의 행동을 방치하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캐서린이 조사해 온 정보에 따르면 프리모르는 아르마 뭐시기라는 혈통과는 무관한 사람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 프리모르 아르마알스라는 사람의 친가요? 유력한 신흥귀족이에요.
신흥 귀족이라면 초대 원로원 가문과 접점이 있을 가능성은 0%였다.
‘당장 가문의 역사만 수백 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초대 원로원 가문이 원로원을 창설했을 때, 프리모르의 선조님은 어딘가에서 밭이나 갈고 있었지도 모른다.
정보의 확실성은 의심할 것 없었다. 경매품 도난 사건으로 몸이 달아오른 귀족들의 입이 가벼워졌다는 듯 했으니까.
‘물론 어쩌면 그녀의 조상 중에 아르마 뭐시기 가문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긴 하지.’
근데 DNA 검사도 아니고, 그렇게 손자의 손자 같은 걸로 조건을 채울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존나 무슨 격세유전도 아니고. 멘델이 지옥에서 오열하겠네.
〈원래 저 녀석들은 우리가 자길 의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마님이 속이 안 좋아 보이기만 해도 극진하게 포션까지 대령하던데?〉
〈포션? 설마 마셨소?〉
〈미쳤어? 당연히 따로 산 걸로 갖다 드렸지. 뭘 탔을 줄 알고.〉
그렇구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뒀다.
디아볼로도 자기 목적에 앞서서 프리모르의 죽음 같은 쓸데없는 혼란을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잖은가.
‘그나저나 프리모르도 건강에 문제가 생겼나.’
규중의 여식이 손가락을 자르고 일대 모험을 겪은 것이다. 컨디션이 안 좋아질 이유로는 충분하겠지.
〈……건강이 안 좋은 듯 보인다면 사제에게 보이는 게 어떻소?〉
〈나중에 가문으로 돌아가면 치료 받으시겠대. 헨리가 있었다면 얼굴색만 보고도 대충 알아봤을 텐데. ……야누스 교단 놈들은 치료에는 영 잼병이고.〉
중얼거리며 뭐라고 말하는 여도적.
내 귀에는 잘 들렸지만 혼잣말 같은 느낌이었고, 문제시할 내용도 아니라서 넘어갔다.
돈만 있으면 상처를 치료하기 쉬운 이세계지만 포션의 오남용도 있고, 모든 상처를 만능으로 치료하는 건 어려웠다. 고대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또 모를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내 얼굴을─가면 밑을─ 빤히 쳐다보는 여도적을 눈치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소?〉
〈……아니. 그렇게 가면을 쓰고 있으면 화상은 안 아픈가 해서.〉
화상? 이건 또 뜬금없이 뭔 소리래?
‘앗.’
고개를 모로 꼬려던 나는 예전에 얼굴을 감추려고 변신 마법으로 화상 흉터를 만들었다는 걸 떠올렸다.
변신 마법으로 타인의 얼굴을 복붙하는 것은 나로서는 어려웠기에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했었지 참.
별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내와 극기(克己)도 무림인의 소양이오. 개의치 마시오. 그보다……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되었소?〉
티르시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성공한 걸까?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약간 몸을 굳힌 게 티가 났는지, 여도적은 표정을 굳히면서 말했다.
〈우선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미안해. 니가 찾는다는 사람이랑 직접 접촉하진 못했어.〉
〈……그렇군.〉
실망하지 않으려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여도적은 빠르게 부연설명을 붙였다.
〈그렇게나 호언장담해 놓고 면목이 없지만, 이유가 있어.〉
〈이유?〉
〈그래. 처음에는 나도 믿기지도, 이해가 가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그 별관의 안은 말도 안 되게 추워.〉
춥다고?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분위기로 내가 얼굴을 찌푸리는 게 느껴졌던 걸까. 여도적은 목소리를 낮췄다.
〈당초엔 결계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도 서너 번 가까이 벌레들을 보내 보고서야 알았어. 쇠똥구리 브로치로 태양의 양기를 불어넣어도 벌레들이 별관 안에서 기운을 잃어.〉
〈죽는다는 거요?〉
〈동면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야. 하지만 쇠똥구리 브로치라는 마나의 열을 뚫을 만큼 춥다면 바깥의 우리가 모를 리 없지. 너도 아는 우리 마법사 놈이 말하길, 마법적인 추위일 거래.〉
그 말에 생각나는 건 당연히 티르시다.
하지만 티르시가 아무리 얼법이라도 얼음 궁전에 사는 듯한 사람은 아니잖은가. 별관에 냉기가 가득 차 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지?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그렇게 입을 딱 벌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것만이 아니야. 벌레의 시야라는 건 복잡한데, 내가 그 애들의 시야를 빌려서 들여다 본 별관의 안은 꼭 무슨 빛의 나무가 자라 있는 것 같았어.〉
〈……저렇게 말이오?〉
〈뭐?〉
여도적은 내가 가리킨 곳을 눈으로 따라갔다가 나랑 거울에 비춘 것처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레나폴리스의 하늘에 백광(白光)의 거목이 뻗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