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를 성벽으로 둘러싸야 하는만큼, 이세계의 도시는 작다.
그래서 영주 저택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오가면서 인원을 배분했기에 당초처럼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우리와 미네르바는 끝까지 남았다.
내 혓바닥 테크닉에 징병 당해버린 귀족들의 일부는 동쪽에 갔다.
지금 쯤이면 거기서 동종업자가 싸찔러 놓은 푸짐한 똥들을 치우고 있겠지.
물론 누가 그 위험한 곳으로 향할건지에 대해서도 언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투닥거림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좆도 신경쓰지 않는 상여자 미네르바 덕분에 금방 끝났다.
〈여러분의 호위가 가장 뛰어나니 이쪽을 맡아주십시오.〉
그 ‘여러분’께서는 사이 좋게 표정이 좆창났지만 미네르바는 눈도 꿈쩍 않았다.
전시에는 고지식하고 FM인 군인이 필요하지만 그런 이들은 평시에 출세를 못하거나 입지를 잃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있군.〉
그렇게 도착한 영주 저택 앞에서 미네르바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흰색 십자가를 어깨에 맨 성직자 쪽일까, 아니면 그와 파티를 맺고 레이드를 뛰러 온 듯한 프리모르와 호위들일까.
‘아니 뭐, 이번엔 나도 아줌마 올 줄 알았어요.’
나는 프리모르의 등장에 머리를 긁었다.
왕성한 활동력도 한두 번이어야 놀라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극에 달하면 행동이 읽혀버리는군 그래.
프리모르는 미네르바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쿨라피우스 님.〉
그녀는 호위들이 나서려는 걸 막고서 말했다.
〈여러분께서 이 저택에 찾아오신 것은──〉
〈그만. 확실히 우리 사이에 치러야 할 시시비비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그걸 논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군. 싸우러 온 게 맞다면 협력하겠다는 대답으로 충분하다.〉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하는 미네르바였다. 생각보다 쿨한 태도여서 놀라웠는데, 프리모르도 그건 똑같았는지 그만 당황스러워 하던 그녀는 한 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이 늘어난다면 그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동감이군. 지금은 결계라도 해주 중인가?〉
〈아니오. 결계는 고사하고 경계태세도 보이지 않습니다.〉
관짝보다 큰 십자가를 맨 시냐티오가 대답을 대신했다.
〈사태가 중하니 인사는 이후 다시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멈춰있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이 무방비함이 함정일 게 뻔하리라는 판단 때문이죠.〉
〈함정은 몰라서 당할 때보다 알고서도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할 때가 더 많은 법. 무르기엔 이미 늦었다.〉
아니 육망성 살인사건처럼 팔다리가 골고루 부위파괴 당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따라온 저희가 뭐가 돼요, 씨발. 우리도 좀 이따가 마법사 길드에 의수 사러 가야 됨?
하지만 저택에서 뻗은 백광의 나무를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할 사람은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하게 알겠다. 저건 좀 많이 위험하다.
나중을 기약하는 건 자충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야누스 교단의 징벌집행관이라고 들었다. 이 균열, 닫을 수 있겠나?〉
〈의식의 중심지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요.〉
〈믿겠다.〉
그렇게 돌입 전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찰병이 저택에서 옵저버 노릇을 하다가 돌아왔다. 내 생각대로 미네르바는 사람을 병사로 굴려먹는 것에 익숙한 듯 했다.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창대를 들고 대기타는 나에게 여기사 리아스가 말을 걸어왔다.
〈예, 기사 나리. 이렇게 다시 뵙는군요.〉
〈그렇습니다. 그게, 저희 마님께서 노르드 님께 여쭙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셔서…….〉
〈하문(下問)하십시오.〉
직접 안 묻고 사람을 보내는 건 귀족의 매너인가? 고개를 모로 꼬는 내게 여기사가 물었다.
〈혹여 예수게이라는 몽골리아 인과 접점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들어본 적 없군요.〉
씨발, 쫄려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나는 의문을 가장하고 되물었다.
〈헌데 왜 저에게? 동향 사람이라서입니까? 저번에는 물어보시지 않으셨잖습니까.〉
〈저희 마님께서 노르드 님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시더군요.〉
나는 머리를 스친 핑계를 그대로 입에 담았다.
〈예전에 입국 중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노예역을 치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손님으로 오신 걸 뵀었죠.〉
〈……앗, 윽, 에, 우. 그,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여기사는 얼굴 표정을 간수하지 못하고 사과하고서는 프리모르한테로 돌아갔다.
나는 왜 프리모르가 저런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예수게이가 이 상황에 안 나타나니까 의문스러웠던 건가.’
여기사한테서 내 대답을 들은 프리모르는 입을 뻐끔거리다 내 눈치를 봤다. 사과하자니 신분 차이가 크고, 시선도 많고, 뭐 문제가 아닌 걸 세는 게 더 빠르겠지.
그래도 눈치를 보니까 기억은 못 하는 것 같다.
하긴 저 사람한텐 명동 길거리 옷가게에서 본 옷을 기억해내라고 하는 수준일 텐데, 떠올리라고 하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 그때 둘러본 세미 누드 노예만 한둘이겠어?
그래도 나한테는 좋은 일이다.
‘노가다충 모험가쉑 트루 노예출신이쥬?’와 ‘나는 니 얼굴 기억 안나는데?’을 동시에 시전해버린 것이다. 탈룰라는 어느 세상에서든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니까.
〈저택 안은 안전합니다.〉
정찰병이 다 살아서 돌아오자 미네르바는 수색을 시작했다. 그들에게 사악한 마법이 걸려 있지 않다는 걸 오딘의 눈으로 확인한 나도 뒤를 따라서 들어갔다.
귀족의 호위라는 근육질 남자─아마 전직 모험가─가 내게 말했다.
〈탐색 시에 주의하시오. 뭔가 함정을 꾸려놨을 가능성이 몹시 클 거요.〉
〈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자기 목적에 필요한 아르마 뭐시기 가문 사람들을 벌써 다 납치해온 건 아닐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죽일 함정 같은 건 깔아놓지 않았겠지. 이 지랄을 벌여놓고 1명이라도 초대 원로원 가문의 사람이 죽어버리면 엄청난 실태(失態)니까.
그걸 생각하면 자기 힘으로 기사 작위까지 땄다는 새끼가 벌일 짓이 뭔지는 알기 쉬웠다.
나여도 그렇게 하겠지~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정답이었으니까.
─투확!
나는 얼음빔을 쏴대며 저택의 정원을 장식하는 석상의 대갈빡을 박살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갈기자 습격인 줄 알고 놀란 사람들은 내가 하는 짓을 보고서, 그리고 자기들의 눈빛을 보고도 계속 얼음빔을 쏴대는 나를 보고서 당황했다.
〈무, 무슨 짓이오!〉
어, 나도 설명해 주고 싶어요. 근데 제가 벡안을 켜면 언어장애인이 되거든요. 뇌가… 뇌가 떨린다…. 으베베벱.
〈아니, 무슨 짓이냐니까!〉
〈무슨 짓이긴. 내 눈을 봉쇄하는 짓이지.〉
─푸확!!
열심히 저택에 깔린 드론인지 CCTV인지를 부숴버린 나였지만, 선빵은 허용하고 말았다.
내가 주변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눈치깠던 걸까. 그 씹새는 나한테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튀어나와서는 고용주를 호위하던 어느 귀족의 병사를 세로로 반토막냈다.
〈히이이익!!〉
가만 보니까 나한테 아까 시비를 털었던 귀족이 주저앉아 바닥을 기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거 아재, 오늘 일진이 안 좋으시군. 흥건한 피 냄새에 인상을 쓰는 나와 다르게 디아볼로는 검에 묻은 피를 매만지면서 상큼하게 미소지었다.
좆 같이 쪼개는 씨팔럼 뒤로 별관이 보였다.
하늘로 뻗은 나무는 당연하다는 듯 그곳에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머리인가, 감인가. 어느 쪽이든 타고 났군. 경매장에서도 나를 방해하더니 하는 짓이 예사롭지 않아.〉
〈누가 봐도 수상하지. 석상이란 석상마다 눈깔에 보석을 박아 넣어놨는데.〉
〈그런가? 좋아, 그런 걸로 하자고.〉
디아볼로는 장갑에 피를 흠뻑 묻히곤 그렇게 말했다. 말하는 꼬라지만 보면 멀쩡한 사람을 뒈지게 만든지 10초도 안 된 쓰레기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을 쾌남이었다.
〈부족한 솜씨라서 미안한걸. 손님의 반응을 관찰해 둬야 정원의 퀄리티 업을 도모할 수 있거든.〉
〈여기 니가 만든 거냐? 센스가 심각하게 좆 같은데?〉
〈풍류를 모르면 이 정원의 미학도 알기 힘들지.〉
〈글쎄요. 천박하다는 의견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시냐티오가 십자가를 어깨에서 풀면서 말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혼자서 나타난 디아볼로를 포위해가고 있었다.
〈최근 일이 있어서 방문했습니다만, 눈이 내리면 정원의 아름다움이 강조되야 할 텐데 심히 졸부 취향이더군요. 죽고 나서 지저(地底)에서 조금 더 절차탁마하시지요.〉
〈지저? 니플헤임이라면 진작에 연결해 놓았지. 땅 아래가 아니라 하늘에 말이야.〉
웃음을 지은 디아볼로는 하늘의 가지를 가리켰다.
시냐티오는 내뱉듯 뇌까렸다.
〈니플헤임이라. 저에게는 이국의 신앙입니다만, 그렇다고 당신이 게르마니아 신앙을 믿는 듯 하지도 않군요.〉
〈……크후흐흐흐.〉
그러자 디아볼로는 유치원생의 창의적인 답안이라도 본 것처럼 재밌어하며 웃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너희 로마니아 교단의 경전은 ‘엘리시온’처럼 확고하고 선명한 천국을 묘사하면서, ‘죄인의 사후세계’는 저승(Mundus), 지저(Mantus)와 같은 적당한 표현으로 퉁치지.〉
〈그만. 잡담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
미네르바도 검을 뽑고 마법사들로 포위를 시키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신앙 교담은 죄인의 권리이나, 폐하의 뜻에 반하고 즉결처형급 범죄를 거듭한 네놈에게 권리를 누릴 자격은 없다.〉
그녀의 말에 디아볼로는 시시한 듯 대답했다.
〈신앙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아나? 그건 현실만은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거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학문의 시작은 의문이다. 왜지? 왜 신대가 황혼을 맞이한 뒤에도 로마니아의 신들은 왜 멸망하지 않았지? 어째서 그들은 고대 문명부터 활동하기 시작했지? 왜 야누스는, 포모나는 신대 무렵의 기록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지?〉
〈쏴라.〉
다시 꺼내는 말이지만, 미네르바는 남의 말이니 의견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녀가 존중하는 건 법치였고 디아볼로는 헌법 1조에 족쳐버려도 된다고 적혀 있는 애미나이(Motherless) 새끼였다.
─쿵! 콰과광!!
그래서 마법과 화살은 지체없이 그 모친실종자 새끼에게 작렬했다. 하지만 디아볼로의 몸에는 생채기도 없었다.
마법 내성이 아니다. 그냥 방어력으로 씹고 버틴 거였다.
〈의문이 꼬리를 물더군. 너희는 로키의 사제를 만나본 적이 있나? 아누비스의 사제는? 없겠지. 신앙에 대답해주지 못한 신들은 세월에 잊혀졌다. 작금에 숭배되는 건 가장 확실하게 믿음에 대가로 피드백을 주는 로마니아의 신들 뿐이야.〉
디아볼로는 코트에 붙은 불을 털어내고 굳어버린 좌중에게 한숨을 쉬어보였다.
〈왜지? 왜 과거에는 우라누스밖에 전해지는 이름이 없던 신들이 갑자기 신앙받기 시작한 걸까? 신들의 파멸에서 살아남아서? 아니야. 답은 간단했다. 황제가 원로원의 발족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같았지.〉
그의 발치에 허접하기 짝이 없는 흙 골렘이 만들어졌다.
〈로마니아의 신들은 만들어진 신(Inventionis Dei)이었던 거다.〉
─콰득.
디아볼로는 자기가 만든 골렘을 밟아서 파괴했다.
〈정확하게는, 스스로 신역(神域)에 도달한 고대의 영웅들을 숭배하기 시작한── 신대의 재림을 꿈꾸던 망상병. 그것이 너희들의 신앙의 시작이다.〉
〈헛소리를!!〉
얼굴을 일그러트린 시냐티오는 십자가를 휘둘렀다. 존나 내 눈에도 뿌연 안개처럼 흐릿해질 만한 속도였는데, 디아볼로는 어둠을 응축한 검으로 그 미친 무게를 받아냈다.
콰아앙─!!
〈예외는 우라누스 뿐이다! 그밖의 신은 적당하게 짜맞춘 클래식한 타이틀일 뿐이야! 그렇지 않나? 문과 수호의 신? 풍요와 치료의 신? 그렇게 인간에게 편리하기만 한 신이 달리 있겠나!
그들은 인류에게 저주조차 내린 적이 없다! 지옥의 내용이 어설플 만 하지! 신을 잃은 시대의 인간들에게는 듣기 좋은 얘기만 들려줘도 모자랐을 테니까!〉
시냐티오는 말보다 행동으로 신앙을 증명하려고 들었지만, 받아치는 디아볼로도 만만치 않았다.
〈이 신성제국에서는 신이 인간을 고른 게 아니다! 인간이 신을 골랐던 거야! 그렇기에 만 년의 세월에서도 로마니아는 불멸의 국가로 존속되어 왔다! 인간이 죽은 인간을 신으로 추앙하면서 말이야!〉
두 전사가 살의를 뿜어내면서 부딪혔다. 조금씩 눈이 적응해가는 나도 전투의 추이를 쫓아가기가 힘들었다.
수준 차이가 상상 이상이었다. 붉고 흰 뭔가가 뒤지게 흔들리는 진동모드 핸드폰처럼 비비적대는 걸로밖엔 안 보인다!
─쿵!
서로 튕겨나간 두 전사는 우리가 끼어들 틈도 없던 싸움을 잠깐 멈췄다.
〈──수천 년 전, 황제는 마법사 ‘아르마 슈나스’가 보여준 힘을 두려워하고 탐냈다지.〉
디아볼로는 날이 나간 검에 어둠의 오러를 씌우며 즐겁게 읊조렸다.
〈하지만 후대의 황제들은 지혜가 아닌 유적에 집착했지. 어리석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야. 그만한 힘, 유물 하나로 얻을 수 있을 리 없는데도.〉
〈……………….〉
〈아니, 납득할 수는 있다. 당장 우리 영주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으니! 강력한 힘은 통제되는 게 옳다지만, 그 놈은 자기가 무슨 혈통을 이었는지조차 모르더군!〉
그게 기쁘다는 것처럼 지껄인 디아볼로는 검은 오러 소드로 시냐티오를 겨누었다.
〈네년 역시 그렇겠지? 시냐티오 아르마룩스!!〉
〈……입교(入敎) 전의 이름까지 꺼내서 어쩔 셈이죠?〉
티르시처럼 하얀 머리카락의 성직자는 중성적인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디아볼로는 실컷 웃고 나서 제정신을 되찾은 사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귀족 계집에게 입교는 흔한 일이지만 징벌집행관까지 도달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어미의 피를 짙게 이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군. 계집년들이 셋이나 모여서 나를 도와준 덕분에,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오러의 검으로 시냐티오의 접근을 견제하면서, 그는 손에 시꺼먼 어둠을 피워냈다.
쿠구구구구…!
그에 맞춰서 진동하는 지반!
씨발, 역시 시간을 끌던 거였나! 대충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아까까지의 싸움에선 내가 개입할 틈이 나질 않았다!
나는 빡돈 나머지 배에서 꾸물대는 짜증을 그대로 입밖에 냈다.
〈야 이 개새끼야! 뭐하려는지 끝까지 설명하고 해!!〉
〈크흐하하하하!! 위세만은 훌륭하군! 좋다, 그렇다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도록 해라!!〉
마법으로 공중에 날아오른 그는 검을 내걸며 외쳤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병기가 재림하는 모습을!!〉
츠즈즈즈즈즈즈즈─!!
하늘까지 뻗은 빛의 나무가 혈관이 맥동치는 것처럼 막대한 마나를 별관으로 보냈다.
그렇게 나무가 사라지고, 별관에 한 송이 얼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꽃 치고는 조금 많이 컸다. 별관을 통쨰로 뒤엎을 정도였으니까.
쩌저적….
금이 가면서 무너지는 건물에서 크리스탈처럼 깎인 얼음이 하늘로 치솟았다.
얼음 수정은 공중에서 구속을 풀듯 가루가 되서 흩어졌다. 안에 있던 사람만을 남기고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고 동체시력으로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상황도 잊고 멍해졌다.
“……하, 씨발.”
냉기를 뿜어대는 거인들.
그 새끼들이 산다는 니플헤임.
거기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의식.
내가 처음으로 파티를 맺었던 마법사.
그리고 그녀가 주특기로 삼던 얼음 마법.
그러한 과거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뉴런의 바다를 헤집은 끝에, 내 입에서 한숨을 자아냈다.
“운명이란 게 좆 같긴 하군.”
짝눈신의 마음에 100% 공감하면서, 나는 얼음장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내려서는 낯익은 여인을 보았다.
막대한 마나를 품은 티르시는 인형처럼 텅 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